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3
63회. 부족해서 그럴 겁니다
유명교는 정사를 불문하고 무림의 공적이다.
잠시 망설였지만 이원호는 그 사실을 굳이 감추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문주님들은 유명교를 찾아 여주로 가셨소.”
“유명교?”
연적하는 그게 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봉산의 도적들은 먹고사는 데 정신이 팔려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
상방이 새로 진출했다거나, 관군의 동태가 수상하다면 모를까?
그들에게 유명교는 관심 밖이었다.
결국 이원호는 상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유명교에 대해 가르쳐 줘야 했다.
이원호의 긴 설명이 끝나자 연적하가 시큰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사교라는 말이네.”
“그냥 사교가 아니라 살육을 밥 먹듯 하는 끔찍하고 무서운 사교라네.”
조금 익숙해졌다고 이원호는 은근슬쩍 말을 낮췄다.
“뭐 그렇다 치고. 왜 아직도 안 가고 있어요? 가기 싫어요?”
“헐! 그럴 리가 있나. 가야지. 암.”
이원호는 급히 독심낭인 황요명의 손에서 밧줄을 낚아챘다.
잠시 후 이원호 일행과 낙양오협은 빠른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렀다.
연적하가 멀어져 가는 연승백과 연설주를 씁쓸한 눈으로 바라볼 때다.
하소백이 슬쩍 다가가 말을 걸었다.
“왜요? 오라버니. 그냥 보내려니 억울해요? 다시 잡아 올까요?”
“아니.”
“그런데 왜 그런 얼굴로 보세요?”
“내 얼굴이 어때서?”
“화가 덜 풀린 얼굴인데요?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말이에요.”
“내 나이가 몇인데 장난감이래.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무공이나 열심히 익혀. 언제 산채를 떠나야 할지 모르니까.”
“그냥 오라버니가 지켜 주면 안 돼요?”
“괜히 의천문의 태상이라는 노인까지 오면 골치 아파져. 차라리 피하는 게 나아. 나는 어떻게든 달아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의 손에서 피하지 못할 거야.”
“에? 의천검존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강한가요? 오라버니보다 더?”
강호초출인 하소백의 눈에는 연적하가 최고의 고수였다. 그녀는 천하 십대고수의 무위가 어느 정도 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녹림대회 때 총채주 파천마군을 만난 적이 있는데 진짜 무서웠거든. 왠지 싸우면 질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 그런데 의천검존이라는 노인이 파천마군과 같은 천하십대고수래. 그 정도면 알겠지? 내가 왜 산채를 비우자고 하는지.”
“아! 천하십대고수가 무서운 사람들이구나.”
그제야 하소백은 어느 정도 감이 오는지 입을 쩍 벌렸다.
그녀가 보기에 연적하만 해도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사람이다.
그런데 그보다 강한 사람이 최소한 열 명이나 있다니?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 같다.
“그래도 언젠가는 오라버니가 그들을 이길 거예요. 그렇죠?”
마치 다짐이라도 받으려는 듯한 말투다.
연적하는 피식 웃었다.
그때 풍연초가 다가왔다.
“오늘부터 하가촌의 건달들을 좀 부려야겠다. 언제 낙양의 무관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말이야.”
“채주 오라버니, 낙양의 무림인들이 하가촌에 도착하는 걸 가장 먼저 알려 주는 사람에게 백 냥쯤 준다고 하세요. 그럼 바로 달려올 거예요.”
“오! 좋은 생각인데? 백 냥이면 잠도 안 자고 지켜보겠지?”
“당연하죠. 십 년은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인데.”
잠시 하소백과 잡담을 나누던 풍연초가 연적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연 아우. 이천이백 냥이라는 거금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풍연초는 연적하가 번 돈이라 그의 뜻대로 쓸 작정이었다.
하지만 연적하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그냥 돌아서 가 버렸다.
“응? 왜 그러지?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
“기분이 좀 그런가 봐요. 조금 전부터 계속 저런 얼굴이시더라고요.”
“와룡장을 시원하게 등쳐먹었는데 왜 얼굴이 저래? 네가 뭐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니고?”
“풍 오라버니도 방금 보셨잖아요. 연 오라버니가 말없이 그냥 가는 거.”
“그러니까 왜?”
“저도 몰라요. 와룡장 사람들이 간 뒤로 기분이 별로셨어요. 그러다가 좀 괜찮았는데 풍 오라버니가 와서 돈 얘기 하니까 또 저러시는 거라고요.”
“하여간 와룡장 그놈들이 문제야. 이것들을 아주 쫄딱 망하게 만들어야지. 안 되겠구먼.”
“곧 망하겠죠? 백세상방이 와룡장하고 거래를 끊자고 할 테니까.”
두 사람은 연적하가 기분이 나쁜 걸 와룡장 탓으로 돌리고 복수할 방법에 골몰했다.
오봉산 제일봉으로 오른 연적하는 평소 좌공을 하던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멍하니 맞은편 산에 흐르는 운무를 바라보았다.
동생을 구하겠다고 달려온 연승백과 그를 만나 기뻐하는 연설주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소백의 말처럼 화가 덜 풀렸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리움과 분노와 질투와 온갖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였다고나 할까?
연설주가 괴로워하는 걸 볼 때면 통쾌하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했다.
그런 기분은 연승백과 연설주가 사라진 뒤에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와룡장.
생각할수록 답답하고 짜증 나는 곳이다.
‘하아! 어떻게 해야 하나?’
연적하가 구질구질한 기분에 탄식하고 있을 때,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오봉산 제일봉에 올라올 만한 사람은 몇 명 안 된다.
만사가 귀찮아진 연적하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공자님, 다들 걱정하고 있습니다.”
구밀복검 심양각이었다.
얼마 전까지 연적하를 ‘연 형님’이라 호칭하던 심양각은 최근 ‘공자’로 바꿨다. 그건 은근 심 노인이라는 호칭과 어울려 연적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의천문의 대상이 달려올까 봐?”
“그보다는 공자님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들…….”
“나? 기분 나쁠 일이 없는데?”
“흐흐, 그런데 왜 혼자 이런 곳에 나와 계십니까? 오늘 같은 날에는 좀 쉬셔도 될 것 같은데요.”
“돈 들어왔다고 쉬고, 비가 와서 쉬고, 눈이 와서 쉬고, 날씨가 좋아서 쉬고, 우중충하다고 쉬고, 피곤하다고 쉬고, 그럼 연공은 언제 하려고?”
배배 꼬인 연적하의 말에 심양각은 능청스럽게 웃었다.
“왜 웃어?”
“공자님도 사람이구나 싶어서요.”
“내가 사람이지 그럼 요괴겠어?”
“무공의 경지를 놓고 보면 요괴보다 더한 분이시지요.”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요즘 숨 쉬는 건 어때?”
“아직 기(氣)와 식(息)의 단계를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운기토납이 가능해질 것도 같습니다.”
식은 ‘숨을 쉬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단계’이니 곧 선정에 들 수 있다는 소리다.
선정에 들 수만 있다면 구천여일진경으로 내공을 쌓는 건 일도 아니다.
“내공을 쌓겠다고 너무 욕심내면 안 돼. 구천여일진경은 허심으로 쌓는 공부라서.”
“예, 명심하고 있습니다.”
연적하가 늙수그레한 심양각을 물끄러미 보다 말했다.
“심 노인, 내가 말이야, 아냐…….”
연적하가 고개를 흔들자 심양각이 다시 능글맞게 웃었다.
“그렇게 웃지 말라니까. 그거 보는 사람 기분 상당히 나쁘거든?”
“그냥 하시려던 말씀을 마저 하시지요.”
“별거 아니야. 내가 와룡장 사람들을 괴롭혔는데 개운하지가 않아서. 왜 이런 걸까 생각하던 중이었어.”
“그건 아직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희대의 마두답게 심양각은 꽤나 폭력적으로 생각했다.
“부족해서 그렇다고?”
“예, 상대가 살려 달라고 싹싹 빌 때까지 꽉꽉 밟으면 개운해질 겁니다.”
“확실해?”
“저는 경험상 그랬습니다.”
경험한 사람이 그렇다고 하니 연적하는 귀가 솔깃했다.
“와룡장이 망하는 거로도 부족하다?”
“당연하지요. 공자님을 죽이려고 가둬 뒀던 사람들 아닙니까? 숨통이 끊기기 직전까지 밟아 줘야지요. 그럼 마음이 개운해지실 겁니다.”
“그런가…….”
“확실합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가세가 조금 기울어진 정도로는 많이 부족하지요. 차라리 죽여 달라고 울면서 매달리는 걸 보면 속이 뻥 뚫리실 겁니다.”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게 맞는 것 같다.
아니 그보다도 이렇게까지 원인과 해결책을 콕 찍어서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 심리에 대해서 눈곱만큼도 모르는 심양각의 조언이 연적하의 마음을 강타했다.
이른 아침.
평상에 앉아 있던 연적하가 때마침 마당을 가로지르는 독심낭인 황요명을 불렀다.
“예, 형님.”
“심부름 좀 해야겠다. 주변 산채에 전해라.”
말과 함께 연적하가 편지 뭉치를 내밀었다.
“주변 어디 말씀이십니까?”
“낙양 주변에 산채가 어디 어디 있지?”
“북으로는 황하 유역에 수룡채가 있습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영산채가 있고, 동쪽으로는 구룡채가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삼악산채와 적풍채, 그리고 우리 오봉산채가 있고요.”
황요명은 녹림에서 오래 굴러먹어서인지 하남성 산채를 꿰고 있었다.
“수룡채, 영산채, 구룡채, 삼악산채, 적풍채에 이 편지를 가져다줘.”
“채주들에게 전해 주고 오면 되는 겁니까?”
“어. 그럼 알아서들 할 거야.”
“형님, 삼악산채의 채주는 성질이 지랄맞다던데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황요명은 괜히 편지를 들고 갔다가 된통 당할까 봐 염려하는 눈치였다. 와룡장에 관한 걸 적은 것 같은데 그런 부탁을 들어줄 채주가 있을지 모르겠다.
“걱정 마. 누구도 너를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
“정말입니까?”
“그래, 그거 다 읽고 너에게 지랄을 하는 놈은 없을 거야. 죽으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그래도 총순찰인데 그 정도 힘은 있는 거겠지.
“알겠습니다!”
황요명은 무조건 연적하의 말을 믿었다.
그와 같은 천외천의 고수가 허튼소리를 할 리 없다고 생각해서다.
***
낙양 무림이 발칵 뒤집어졌다.
여주로 갔던 정의맹 의기대와 다섯 개 무관의 사람들 중에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단 두 명. 의천문 문주 군자검 이연익과 와룡검객 연무백이었다.
원로들은 낙양오협을 가리켜 낙양오엽(洛陽五葉, 낙양의 낙엽 다섯 개)이라 조롱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여주에서 벌어진 참사로 낙양오협의 일은 조용히 묻혔다. 제자들의 목숨과 문주의 팔까지 잃게 만든 그 일로 의천문은 초상집 같았다.
의기대에 있던 열 명과 의천문에서 추가로 지원한 열 명, 그렇게 모두 이십 명의 제자가 목숨을 잃었다. 의천문에 있던 제자의 이 할가량이 숨진 것이다.
숨진 사람들 모두가 정예 중의 정예라 의천문이 느끼는 상실감은 더 컸다.
살아 돌아온 이연익은 사흘이 지난 뒤에야 겨우 문주의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집무실에 앉아서 뭔가 생각하던 이연익은 이소민을 찾아갔다.
이소민은 한쪽 팔이 사라진 부친 이연익을 보다가 고개를 푹 떨궜다.
“죄송해요. 아버지.”
“아니다. 그보다는 네게 물어볼 일이 있어서 왔다. 너도 여주에서의 일은 들었을 게다.”
“네.”
“은하장의 장주는 녹림삼존의 하나로 혼세검마라 불리던 자였다. 내가 그보다는 언제나 한 수 위였지. 그런데 은하장에서 그자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거의 네 할아버지만큼이나 강해져 있었다.”
이소민은 부친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 잠잠히 듣기만 했다.
“그자의 무공이 더 뛰어나서가 아니라, 내공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천외천의 경지라고밖에는……. 그건 바로 유명교의 초능 때문이었다.”
“초능요?”
“그래, 유명교는 마치 금단의 마공들처럼 수도사의 육체를 제물로 바치고 초능을 얻는다.”
“그게 내공과 같은 건가요?”
“그래. 내가 경험한 바로는 초월적인 내공이었다. 할아버지와 같은 경지에 들어서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선택받은 사람들이나 가능한 경지지. 그런데 나보다 한 수 아래였던 그자가 초능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
“아!”
“오늘 문득 오봉산채의 젊은 도적을 생각하다가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혹시나 그자도 혼세검마처럼 초능을 얻은 건 아닐까 하는. 그들 모두가 녹림이라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