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96
696회. 서윤과 메누아
영천주.
사비성 반월현.
미시 정(오후 2시) 무렵.
반월현 외곽의 언덕에 하얀 구름 한 덩어리가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운종술로 날아온 연적하와 황우연이다.
지면에 내려선 황우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채 반 시진(1시간)도 지나지 않아 걸어서 꼬박 하룻길을 돌아왔다.
변명을 짜낼 틈도 없었다.
어? 어? 하다 보니 어느새 반월현이다.
언덕 아래에 가족들과 머무르던 반쯤 부서진 나무 창고가 보였다.
창고는 그사이 새 피난민 가족이 들어와 생활하고 있었다.
썩고 부서진 창고 벽을 보니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갔다.
서윤은 저 벽에 웅크린 채 죽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게 웅크린 상태로 땅에 묻은 것 같다.
‘젠장.’
연적하와 다시 만날 줄 알았다면 단약 하나를 서윤에게 주었을 것이다.
쌀 한 가마가 아니라 집 한 채 값이라도 그렇게 했을 게다.
‘큰일 났군.’
이제 시체를 파내는 일은 기정사실이 됐다.
처음 연적하가 반월현에 가자고 할 때만 해도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자신을 반월현으로 데리고 왔다.
서윤의 시체를 파내면 자신의 거짓말이 드러나는 것도 시간문제.
‘어쩐다.’
자신이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그가 납득할 만한 새로운 변명거리를 찾아야 한다.
그가 한창 머리를 굴릴 때 연적하가 말했다.
“어디예요?”
“저쪽입니다.”
황우연은 서윤이 묻힌 곳으로 앞장 서 걸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제 묻었기에 그랬다가는 괜한 의심만 살 터였다.
황우연은 숲 가장자리의 작은 흙무더기 앞에서 멈춰 섰다.
아무런 표시도 없어 겉으로만 봐서는 무덤이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대인, 흙을 걷어 낼 만한 걸 구해 오겠습니다.”
“…….”
연적하가 대답이 없자 황우연은 엉거주춤하게 서서 그의 눈치를 봤다.
연적하는 황우연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한참 동안 묵묵히 작은 흙더미를 응시하던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후드득. 흙더미가 공중으로 떠오르자 얕게 묻혀 있던 서윤의 작은 몸이 나타났다.
순간 긴장한 황우연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하고 넘어갔다.
이윽고 서연의 몸이 천천히 떠올랐다.
눈 높이까지 떠오른 서연의 몸이 그 자리에서 천천히 회전했다.
“독사에게 물린 데가 어디예요?”
머뭇거리던 황우연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답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독사에게 물려 죽은 건 어떻게 알았는데요?”
“그게 그러니까……. 아침에 갑자기 죽어 있는 걸 보고 ‘독사에게 물렸구나’ 생각했습니다.”
횡설수설에 가까운 황우연의 말을 듣고도 연적하는 뭐라 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던 연적하가 서윤의 얼굴을 가까이서 살폈다.
당운망과 지내는 동안 독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을 들은 바가 있다.
낯빛을 보니 서윤은 독에 죽은 게 아니었다.
‘왜 갑자기 죽었지?’
의술에 조예가 깊지 못한 연적하는 그저 찬찬히 살피기만 했다.
굳게 다문 입과 찡그린 얼굴.
그런데 맞붙은 입술의 경계에 뭔가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연적하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앙다문 서윤의 입을 벌렸다.
진득하게 굳어 가던 검붉은 핏덩이가 이빨 사이로 삐져나왔다.
입 안쪽에 상처가 없는 걸 보니 속에서 올라온 피였다.
내상을 입은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열두 살의 아이가 내상으로 죽었다니?
고명한 의원에게 데리고 가면 정확한 사인(死因)을 알 수 있으리라.
물론 더 빨리 알아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연적하가 황우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황 아저씨.”
“예.”
“나는 누가 나를 가지고 노는 걸 아주 싫어해. 이를테면 거짓말 같은 거. 그냥 농락당하는 거잖아. 내가 얼마나 병신처럼 보였으면 그랬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야.”
“…….”
황우연은 연적하가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려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때로는 알면서도 응하지 못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랬다.
그래서 묵묵히 듣기만 했다.
“말해 봐. 서윤 누가 죽였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죽어 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사실 황우연은 서윤을 죽일 마음이 조금도 없었고, 죽은 줄도 몰랐다. 서윤의 죽음도 아침에 그의 처가 말해 줘서 알게 되었을 뿐이다.
연적하는 뜨거운 그의 눈빛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알았어요. 믿어 줄게요.”
“감사합니다.”
황우연이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쉴 때다.
돌연 연적하가 황우연의 눈을 응시하며 소리쳤다.
“공야자와 청불노의 제자 연남천의 이름으로 명한다! 진실을 말해라! 서윤을 죽인 자가 누구냐!”
순간 황우연은 마치 뱀을 만난 개구리처럼 얼어붙었다.
반신의 경지에 이른 연적하의 언법(言法)은 광명진천의 광명안 못지않았다.
황우연은 저항이라도 하듯 머리를 세차게 좌우로 내저었다.
그러나 꼭꼭 감추고 싶은 마음과 달리 입이 제멋대로 나불거렸다.
“으윽! 제, 제가 죽였습니다. 비싼 단약을 자꾸 달라고 해서 발로 딱 한 번 걷어찼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죽어 있었습니다. 죽이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헙!”
황우연이 다급하게 제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연적하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황우연을 노려보았다.
서윤의 그 작은 몸을 얼마나 세게 걷어찼으면 피를 토하고 죽었을까.
“자기 딸을 죽이다니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냐!”
그러자 아직 언법에서 풀려나지 않은 황우연이 답했다.
“서윤은 저의 딸이 아닙니다. 지금의 처가 데리고 온 서씨 집안의 앱니다.”
언법의 영향으로 황우연은 자신의 본심을 가감없이 털어놓았다.
“야 이 개자식아! 네 딸이 아니면 발로 차서 죽여도 된다는 거냐!”
듣다 못한 연적하가 황우연을 발로 걷어찼다.
황우연의 몸이 일 장(약 3미터)이나 날아가 풀숲에 처박혔다.
퍼뜩 정신이 돌아온 황우연은 허겁지겁 연적하 앞에 달려가 넙죽 엎드렸다.
“사, 살려 주십쇼! 정말 죽이려고 그런 게 아닙니다. 철없는 소리를 해서 발로 찼을 뿐입니다. 그랬더니 아침에 죽어 있었습니다.”
“철없는 소리? 그게 뭔데? 맞아 죽을 정도로 철없는 소리가 뭔데?”
“그, 그게, 단약을 달라고 졸라서…….”
“단약? 내가 준 선단을 말하는 거냐?”
“예…….”
순간 연적하는 가슴이 먹먹했다.
결국 선단이 서윤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적하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자 황우연이 변명하듯 말했다.
“단약 하나로 쌀 한 가마를 샀습니다. 단약으로 식량을 구할 생각이었는데 윤이가 자꾸 떼를 써서 그만…….”
“뭐? 떼? 야 이 개놈아! 선단이 네 거냐? 내가 서윤에게 준 것인데 왜 네놈이 주인 행세를 해? 그리고 그게 뭔지나 알아? 쌀 한 가마로 바꿨다고? 이 미친놈아. 그거 한 알이면 성도(省都)에 집 한 채를 살 수 있어. 한산주에 가서 하나만 팔아도 너희 가족들이 충분히 먹고살 수 있었단 말이다!”
“…….”
황우연은 선단의 값에 충격을 받았는지 입만 뻐끔거렸다.
그게 또 연적하의 신경을 건드렸다.
황우연은 서윤을 죽인 게 탄로 난 것보다 선단 값에 더 놀란 것 같았다.
“이 미친놈이…….”
연적하가 발로 황우연의 머리를 밟았다.
“억!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발에 밟힌 황우연이 버둥거리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분노로 이성을 잃은 연적하에게 그의 말이 들릴 리가 없다.
연적하가 발에 막 힘을 실으려고 할 때다.
“연 대인, 저에게는 노부모와 처와, 두 명의 어린 아이들이 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쇼. 제가 죽으면 죄 없는 저의 가족들도 모두 죽게 될 겁니다.”
“…….”
그 말이 연적하의 가슴에 꽂혔다.
맞는 말이다.
여기서 황우연이 죽으면, 피난 중이던 그의 가족들도 굶어 죽을 게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발에서 힘이 스르륵 빠졌다.
머리로 가해지는 압력이 사라지자 황우연은 연적하의 마음이 바뀌었음을 알았다.
“대인! 남은 평생을 윤이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노부모와 처와 아이들을 봐서라도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쇼!”
연적하가 황우연의 머리통에서 발을 뗐다.
“일어서.”
“…….”
행여나 연적하의 마음이 바뀔까 발딱 일어난 황우연은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황 씨, 남은 평생 속죄하겠다고? 누굴 위해서? 속죄한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줄 알아?”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서윤을 찬 발이 어느 발이야?”
불길한 느낌에 주저하던 황우연이 마지못해 말했다.
“……오른발입니다.”
“그래, 앞으로는 오른발을 볼 때마다 서윤이 생각나게 될 거야.”
“예?”
황우연이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릴 때다.
돌연 황우연의 오른쪽 무릎아래가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악!’ 하는 비명과 함께 황우연의 몸이 오른편으로 확 기울어졌다.
황우연은 넘어가지 않으려고 팔을 휘저었지만, 끝내 균형을 잃고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의 잘린 무릎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와 지면을 붉게 물들였다.
뒤늦게 황우연이 다리를 움켜잡았지만 피는 멈추지 않았다.
핏속에서 허둥대는 그를 보던 연적하가 격공점혈의 수법으로 지혈을 해 줬다.
잠시 넋 나간 얼굴로 앉아 있던 황우연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 그에게 연적하가 손을 내밀었다.
“남은 선단 내놔.”
눈을 끔뻑이던 황우연은 품에서 선단 주머니를 꺼내 연적하의 손에 올렸다.
선단 주머니를 회수한 연적하는 서윤을 풍광이 좋은 곳으로 옮겼다.
이윽고 삼매진화로 선단과 주머니를 통째로 태운 뒤, 잿가루를 서윤의 몸에 뿌렸다.
그리고 땅을 깊게 파고 그 안에 서윤의 시체를 내려놓았다.
서윤의 몸에 흙을 덮으려던 연적하가 멈칫했다.
한순간 서윤과 메누아의 얼굴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연적하는 처음 서윤이 묻혀있던 구덩이로 돌아갔다.
나무 막대기를 짚고 서 있던 황우연이 절뚝이며 그에게 다가왔다.
황우연을 본 연적하는 또다시 울컥해서 그를 힘껏 걷어찼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황우연이 땅바닥을 굴렀다.
내상이라도 입었는지 비칠거리며 일어나는 그의 입가에 핏기가 비쳤다.
그러나 연적하는 눈곱만큼도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너는 가족들만 아니면 죽었어. 알아?”
“예…….”
황우연은 종문 고수들의 괴팍함과 잔혹함을 익히 아는지라 무조건 굽혔다.
연적하는 보기와 달리 섬세한 사람이다.
그는 황우연의 표정과 눈빛에서 그가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았음을 알았다.
자신이 서윤에게 준 선단의 주인 행세를 할 때부터 알아봤다.
제 자식을 죽이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지독한 이기심은 그의 천성일까?
아니면 이 세계에 속한 인간의 숙명일까?
생각할수록 정나미가 떨어지는 세상이다.
기막힌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연적하는 운종술을 펼쳤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기다리고 있을 황우연의 가족들에게 황우연을 던져 주고, 광명진천과 합류해야 한다.
광명진천을 생각하자 마신, 메누아가 떠올랐다.
자신은 광명진천을 도와 메누아를 죽일 수 있을까?
혹시 서윤의 얼굴에 메누아가 겹쳐 보인 것은 육신통(六神通)의 예시(豫示)였을까?
아니 어쩌면 자신이 메누아를 서윤처럼 여겨서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연적하는 후자(後者)이기를 바랐다.
‘가 보면 알겠지.’
씁쓸한 눈으로 먼 산을 보던 그는 황우연의 뒷덜미를 잡고 구름에 성큼 올라탔다.
이윽고 두 사람을 태운 구름이 서쪽으로 쾌속하게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