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47
847회. 이 세상에 예의 없는 사람은 없어
류사촌으로 들어간 연적하는 복잡하게 뚫린 골목들을 기웃거렸다.
죄다 똑같이 생긴 사합원(四合院, ‘ᄆ’자 형식으로 지어진 주택)들 속에서 풍연초의 집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 어디였는데…….”
그는 꽤 오래전에 인사차 들렀던 기억을 더듬었지만 쉽지 않았다.
같은 자리에서 오락가락하는 그를 보다 못한 마을 사람 하나가 말을 걸었다.
“이보슈. 누굴 찾아왔소?”
“금선상방의 풍연초라는 분의 집을 찾아왔는데 혹시 아세요?”
“아! 풍연초? 다음 골목 끝 집이오. 그런데 뉘슈?”
“의동생요. 감사합니다.”
연적하가 꾸벅 인사를 하자 초로의 노인이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예절이 바른 걸 보니 도적은 아닌 것 같고. 상방에서 사귄 동생이신가 보네. 가 보슈.”
도적 운운하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어째 말 속에 뼈가 있는 느낌이다.
그는 상대가 왜 그러는지 알아 둘 요량으로 슬쩍 물었다.
“풍 형님을 잘 아세요?”
“류사촌에서 풍연초를 모르는 사람이 있으려고. 과거에 잘못된 길로 갔다가 마음잡고 돌아온 사람 아닌가. 그 마음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안 가면? 뭐 다시 산에라도 올라갈까 봐 그래요?”
연적하가 노골적으로 지적하자 노인이 슬쩍 말을 돌렸다.
“설마 장성한 자식들을 두고 그러기야 하겠수?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을 마친 노인은 켕기는 게 있는지 부랴부랴 자리를 떠나갔다.
“거 참. 이상한 노인네일세. 악담을 하는 것도 아니고.”
고개를 젓던 연적하는 노인이 가르쳐 준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골목 끝 집에 도달한 그는 굳게 닫힌 대문을 탕탕 두드렸다.
“누구요?”
연적하는 계면쩍은 얼굴로 귓바퀴를 매만졌다.
오랜만에 풍연초의 음성을 들으니 반갑고 좋았다.
“형님. 저예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풍연초가 대문을 벌컥 열고 튀어나왔다.
“연 아우!”
“그간 잘 지내셨어요?”
“잘 지내다마다. 네 이야기는 계속 전해 듣고 있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풍연초의 목소리가 컸던지 그의 가족들이 우르르 마중을 나왔다.
그날 저녁.
연적하는 처음으로 풍연초의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연적하는 풍연초와 따로 시간을 가졌다.
연적하가 바로 무한으로 가겠다는 뜻을 밝히자 풍연초가 말했다.
“나도 함께 가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느냐?”
“상방의 일은 어쩌고요?”
“나에게는 상방보다 형제들의 일이 더 중하다.”
“그럼 어차피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상방에 말을 하고 같이 가요.”
“그러자꾸나. 오늘은 우리 집에서 묵도록 해라.”
“예. 그런데 큰형님.”
연적하가 풍연초의 안색을 슬쩍 살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본 가족들의 모습이 어째 좀 이상해서다. 풍연초는 저녁 식사 시간 내내 아들과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었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아들하고 대화가 없는 것 같아서요? 다투기라도 했어요?”
“다투기는 무슨. 내가 이 나이에…….”
말하는 풍연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웠다.
뭔가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뭐가 있긴 있죠?”
“사소한 오해? 아니, 오해는 아닌가…….”
풍연초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걸 뭐라고 지칭해야 할지 모르겠다.
인과응보라고 해야 할까? 혹은 원한이라고 해야 할까?
“뭔데요?”
“장문호를 기억하느냐?”
“당연하죠. 그놈이 왜요?”
장문호는 풍연초가 고향을 떠난 사이 형수와 자녀들에게 도움을 베풀었던 자다.
그는 훗날 형수를 첩실로 들이려고 풍연초를 청부 살해하려다가 도리어 죽임을 당했다.
“장문호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집을 구한다고 구했는데. 알고 보니 이곳에 장씨 일족이 여럿 살고 있더구나. 그들이 장문호의 일로 앙심을 품고 이런저런 소리를 해서…….”
연적하는 문득 아까 만났던 초로의 노인이 도적 운운하던 게 떠올랐다.
“혹시 큰형님의 과거를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건 아니죠?”
“그러고 있다.”
“…….”
연적하는 그 부분에 대해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풍연초가 과거 오봉산채의 채주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까.
오봉십걸이 무림에서 존경받는다 해도, 어디까지나 사파에서 그럴 뿐이다.
정파에서 오봉십걸은 그저 의리 있는 도적에 불과했다.
“아들 녀석이 처음에는 좋아하더니 요즘은 나를 부끄러워하더라. 장씨들이 뒤에서 아들을 ‘도적의 자식’이라고 놀려 대는 모양이야.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풍연초는 기나긴 감정 싸움에 지쳤는지 만사 포기한 얼굴이었다.
발끈한 연적하가 소리쳤다.
“뭐가 틀린 말이 아니에요? 조카를 ‘도적의 자식’이라고 놀리는 건 형님을 도적이라고 하는 것과 같잖아요! 형님이 왜 도적이에요? 상방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구만.”
“과거 내가 녹림에 있었던 것은 사실 아니냐.”
“형님, 과거가 뭐 중요해요? 지금이 중요하지. 나라에서도 모른 척해 주는데 저들이 뭘 잘했다고 시비를 건데요? 살인 청부를 했던 놈의 집 안보다는 백배 낫구만.”
연적하가 씩씩거리자 풍연초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사람은 옆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해 주느냐에 따라 오락가락하기 마련이다.
과거가 부끄러워 움츠리고 있던 그는 모처럼 용기백배해졌다.
“그렇지. 살인 청부를 하는 집안보다야 내가 백배 낫지. 그놈의 장씨들, 아주 지겹다. 지겨워.”
“안 만나게 하면 되죠.”
“그게 잘 안 돼.”
“왜요?”
“류사촌에 무관이 하나 있거든. 운비를 그곳에 보내는데 거기에 장씨들도 와. 또래들에게 그런 소리를 계속 들으니까 기분이 나쁜가 봐.”
“큰형님이 직접 가르치지 뭐하러 그런 곳에 운비를 보내요?”
“나는 상방에 매여 있는 몸이라 가르칠 시간이 없어.”
“에이. 큰형님. 하루에 반 시진(1시간)만 형님이 가르쳐도 무관보다 나을 거예요. 무관의 관주가 형님 발끝도 못 따라올 텐데.”
“그, 그런가?”
풍연초가 애매한 얼굴로 연적하를 보았다.
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고, 실은 집 떠난 동안 훌쩍 커 버린 아들 대하기가 어색해서 무관에 보냈다. 그랬는데 그놈의 장씨들 때문에 더 이상해져 버렸다.
“왜요?”
“운비가 나한테 배우는 걸 좋아할까?”
“큰형님.”
“어?”
“저는요. 어릴 때 아버지에게 무공을 배우고 싶었는데, 쳐다도 안 보더라고요. 진짜 아버지랑 눈 마주친 게 몇 번 안 돼요. 그 바람에 지금은 아버지 얼굴도 기억이 안 나요. 큰형님도 그러시게요?”
“그럴 리가 있나.”
“그럼 큰형님이 가르치세요. 무관은 집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잖아요.”
“음, 말이 나온 김에 묻자. 너에게 배운 걸 운비한테 가르쳐도 되겠느냐?”
“되고말고요. 심 노인도 제자를 거두었는데 형님이 못 가르치면 안 되죠”
“그래. 고맙다.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될까?”
“뭔데요?”
“네가 운비를 만나서 슬쩍 떠봤으면 한다.”
“뭘 떠봐요?”
“나에게 무공을 배우고 싶은지를. 혹시라도 무관에 나가고 싶은 걸 잡아 두면 안 되니까.”
“알았어요. 시간이 없으니까 지금 만나 볼게요.”
“그래 주면 고맙겠다.”
연적하는 더 늦어지기 전에 풍운비를 찾아갔다.
다행히 아직 이른 시간이라 풍운비는 잠자리에 들지 않은 상태였다.
“운비야.”
“예, 숙부님.”
풍운비는 두 손을 가지런히 맞잡고 머리를 조아렸다.
천하십대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연적하의 앞인지라 극도로 긴장한 얼굴이다.
“다니는 무관에서 장씨들에게 괴롭힘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사실이냐?”
연적하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본래 무신경한 구석도 있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하기 위해서다.
“그게, 심하지는 않습니다.”
풍운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숙부는 이십 대 중반에 벌써 천하 십대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데…….’
스무 살인 자신은 동네 무관에서 괴롭힘이나 당하고 있으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네 아버지에게 무공을 배워 보는 건 어때?”
“아버지에게요?”
“네 아버지가 동네 무관보다 백 배쯤 뛰어날걸?”
“숙부님이 오봉십걸분들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어. 네 아버지에게 배우면 어디 가서 큰소리칠 수 있을 거야.”
“저는 좋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가르쳐 주겠다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왜 큰형님이 안 가르쳐 줄 거라고 생각해?”
“아버지가 저를 좋아하지 않으시거든요.”
“엥? 그건 무슨 소리야?”
“아버지는 오봉십걸로 명성을 떨치셨지만 한 번도 저를 가르친 적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야?”
“네. 저에게 아버지는……. 어려운 손님이나 마찬가지십니다.”
“그건 오해야. 큰형님은 생김새와 달리 낯을 좀 가려. 네가 서먹해서 그러는 거야.”
“서먹해서 그러시는 거라고요?”
풍운비가 황당한 얼굴로 연적하를 보았다.
무슨 아버지가 서먹하다고 몇 년이나 자식을 피한단 말인가?
“큰형님은 오히려 네가 큰형님에게 배우는 걸 싫어할까 봐 걱정을 하더라.”
“그럴 리가요. 아버지는 오봉십걸의 대형이시잖아요. 그런 분에게 배울 기회를 마다하면 바보죠.”
딱 부러진 풍운비의 말에 연적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맞는 소리다.
오봉십걸의 대형이라면 누구라도 그에게 가르침 받기를 원할 터였다.
“그럼 내일부터 무관에 나가지 마. 큰형님께서 가르쳐 주신다고 했으니까.”
“예.”
“아, 큰형님과 무한에 먼저 다녀오기로 했으니까 며칠 더 다녀도 돼.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되고.”
“무관에 가서 인사만 하고 오겠습니다. 그동안 배운 게 있으니까요.”
“그러든지. 그리고 누가 네 아버지를 두고 험담을 하면…….”
“예.”
풍운비가 눈을 빛내며 연적하를 응시했다.
이 대단한 숙부가 어떤 가르침을 줄 것인지에 대한 기대로 심장이 뛰었다.
“밟아.”
“예?”
“꽉꽉 밟아 주라고. 다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게. 이 세상에 예의 없는 사람은 없어. 응징하는 사람이 없을 뿐이지. 누군가 네 앞에서 아버지를 욕하면, ‘아! 내 응징이 부족했구나’라고 생각하면 돼.”
“그, 그러다가 상황이 더 나빠지면요?”
풍운비는 너무도 급진적인 숙부의 가르침에 말까지 더듬었다.
그러자 연적하가 딱한 눈으로 풍운비를 보며 말했다.
“운비야. 네 앞에서 아버지를 욕하는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이 있을 것 같아?”
“어, 없겠죠?”
“그러니까 밟으라는 거야. 경험해 보고 하는 말인데, 밟아 주니까 착해지더라.”
“예.”
“아, 물론 그 전에 너에게 밟을 만한 능력이 있어야겠지만.”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풍운비가 결의를 다졌다.
생각해 보니 무관에서 장씨들이 부친을 욕한 것도 다 자신의 탓이었다.
자신이 강했더라면 그러지 못했을 터였다.
“그런 의미에서 네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보자.”
연적하는 풍운비에게 구천여일진경의 전반부 삼백 자 법문을 불러 주었다.
풍운비가 반 시진 만에 삼백 자를 외우자 연적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지금까지 심통을 제외하고 누구도 삼백 자를 외운 사람이 없었는데 풍운비가 해낸 것이다.
기특한 마음에 중반부 삼백 자를 더 불러 주었지만 풍운비는 외우지 못했다.
“숙부님, 죄송합니다. 제 자질이 부족해 더는 외울 수가 없습니다.”
풍운비가 고개를 툭 떨구었다.
아직 많이 남은 것 같은데 전반부밖에 외우질 못하니 부끄러웠다.
“구천여일진경은 자질과 무관해. 저 유명한 오봉십걸들도 백 자밖에 못 외웠다고. 삼백 자를 외운 사람은 심 노인과 너밖에 없어. 너는 심 노인만큼 강해질 거야.”
“제가 정말 심 어르신만큼 강해질 수 있을까요?”
풍운비가 들뜬 얼굴로 연적하를 보았다.
오늘날 강호에서 구천노도의 별호는 칠파일문의 장로들보다 더 높게 쳐준다.
그런 사람만큼 강해질 수 있다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