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06
906회. 불편한 점이 있는데 지금 말하면 돼요?
세상에는 자의식 과잉인 사람들이 있다.
호천맹 총사부의 공손암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총사의 조카인 그는 위명이 쟁쟁한 남천 연적하 앞에서도 기죽지 않았다.
강호에서 남천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지만, 공손가 역시 호천맹의 주류인 까닭이다.
남궁천과 대화하던 연적하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삼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낯선 남자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연적하가 선두의 사내를 지그시 보았다.
이런 경우 자신의 소개를 먼저 하고 물어야 하는 게 예의였다. 자신의 소개가 빠진 경우 고압적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전에 아저씨는 누구?”
그제야 공손암은 자신을 밝혔다.
“저는 호천맹 총사부의 공손암이라 합니다. 두 분을 귀빈석으로 모셔가기 위해 왔습니다.”
그는 조금의 굽힘도 없이 형형한 눈빛으로 연적하와 남궁천을 보았다.
좋게 보면 기개가 뛰어난 거지만, 달리 보면 시건방진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꼬여 있던 연적하에게는 후자로 다가왔다.
“아하! 종사부 사람이었구나. 어쩐지.”
연적하가 묘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시비를 걸기 위한 사전 동작임을 감지한 남궁천이 얼른 나섰다.
“하하하! 안내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장문인들께 인사를 드리러 가려던 참입니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가볍게 눈인사를 한 공손암은 미련 없이 뒤로 돌아섰다.
그의 뒤를 따라가던 연적하가 남궁천에게 말했다.
“형님. 제 말 맞죠? 상석에서 보면 다 보인다니까요.”
“나는 너와 달리 상석에 앉아 본 일이 없어서 몰랐다.”
사실 남궁천이 후기지수 중에 최고 고수라고 해도 상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 반해 연적하는 녹림에서의 높은 지위로 언제나 상석에 앉곤 했다.
“헤헤. 형님의 자리도 머지않아 상석에 만들어질 거예요. 다음 세대의 천하십대고수로 형님의 이름을 꼽는 사람이 많잖아요.”
“에혀! 나는 관심 없다.”
남궁천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동생의 조언대로 호천맹에 왔지만 이게 잘한 짓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 와중에 연적하가 호천맹에서 사고를 칠 예정인지라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호천맹 상석.
무당파 장문인 영결상인과 의천문 문주 군자검 이연익을 제외한 다른 문주들의 표정은 영 시원치 않았다.
일단 연적하라는 절대고수가 호천맹 행사에 참석해 준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남맹 맹주의 사위인 그가 왜 호천맹 행사에 참석한 단 말인가?
그간 남맹에 각을 세웠던 장문인들은 연적하의 참석 이유를 두고 설왕설래했다.
“남천은 검왕의 사위요. 그가 온 것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음이 분명하오.”
“맞소이다. 그의 처가 십전무후가 아니오? 남천의 방문에는 우리가 알지 못할 깊은 계략이 있을 게요.”
“하지만 십전무후와 남천은 이미 남맹을 떠난 사람들이 아닙니까? 남천을 남맹과 연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남천이 호천맹에 올 이유가 있소? 설마하니 그가 무당파 장문인에게 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생각하시오?”
“여러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다. 그는 본래 제멋대로인 사람이니 호기심에 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저 기인의 변덕쯤으로 생각합시다.”
“그의 처가 십전무후만 아니라면, 나도 편하게 생각했을 게요. 십전무후가 어떤 사람인지 잊었소? 앉아서 천 리 밖의 일을 내다보는 사람이외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중차대한 행사에 남천을 그냥 보냈겠소?”
장문인들의 의견은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서로가 반대되는 의견을 내도 피차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사실 검왕의 사위, 십전무후의 선견지명, 연적하의 제멋대로인 성정을 생각하면 답이 없었다.
결국 칠파일문의 장문인들은 대책을 세울 틈도 없이 연적하를 맞이해야 했다.
공손암이 연적하와 남궁천을 데리고 오자 무당파 장문인이 알은체를 했다.
“남천 왔는가?”
무당파 속가제자인 연적하는 영결상인에게 인사를 올렸다.
“장문인,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내고말고. 득녀(得女)를 했다지? 시국이 수상하다는 이유로 얼굴도 보지 못하였구나. 무림대회가 끝나면 길일을 택해 방문해 보도록 하겠다.”
“예.”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영결상인은 다른 장문인들을 위해 한 걸음 물러났다.
기다렸다는 듯 육파일문의 장문인들이 연적하에게 우르르 몰려갔다.
“남천 대협, 오랜만이오.”
“천지맹 때 뵙고 처음 뵙는 것 같소. 잘 지내셨소?”
“득녀를 축하드리오. 진즉 찾아뵙고 축하드렸어야 하는데 마교 때문에 그러지 못했구려.”
“득녀를 하셨다지요? 조만간 선물을 들고 찾아뵙겠소이다.”
“축하드리오. 오늘 호천맹에서 만날 줄 알았다면 부인과 영애에게 드릴 선물을 가져왔을 터인데. 나중에라도 석경장으로 보내 드리리다.”
칠파일문 장문인들의 인사는 뒤로 갈수록 과열돼 축하와 선물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가장 먼저 짧게 인사했던 전진파 장문인 무종산인은 왠지 자신만 손해를 본 것 같아 속으로 탄식했다.
‘허어! 조금 전까지 연적하를 경계하더니만 이 무슨…….’
손바닥 뒤집듯 돌변해 버린 장문인들을 보고 있으려니 기가 막혔다.
세상인심을 확인한 그는 다음 기회에 점수를 따야겠다고 다짐했다.
마지막으로 종사가 나섰다.
“남천 대협. 남맹에서 무림대회가 열림에도 불구하고 우리 호천맹 무림대회에 참관하러 와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무림대회는 삼 일 동안 열릴 예정입니다. 지내시다가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라도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연적하가 말했다.
“불편한 점이 있는데 지금 말해도 돼요?”
“예. 말씀해 주시면 즉시 조처해 드리겠습니다.”
연적하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남궁천이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적하야 꼭 지금 그 말을 해야겠느냐?”
“그런 건 당사자들 모여 있을 때 하는 게 좋아요. 전해 들으면 오해를 할 수도 있거든요.”
연적하는 칠파일문의 장문인들이 한자리에 있는 지금이 적기라 생각했다.
남궁천은 단호한 그의 표정에 슬며시 옷깃을 놓았다.
‘난리 났군.’
호천맹 무림대회에서 총사가 맞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신은 호천맹의 무림대회에 참관하는 게 목적인데 어째 일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다.
호천맹 맹주인 무극상인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천 대협. 무슨 문제인지 몰라도 편하게 말씀해 주시오. 남천 대협을 불편하게 한 것이 있다면 바로 시정하도록 하겠소이다.”
총사가 무림대회의 시작을 알렸지만 무림대회는 시작되지 못했다.
수천의 관중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귀빈석에서 오가는 대화에 집중했다.
뒤로 갈수록 귀빈석과 멀어-내공의 고수가 아니면-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분위기에 눌려 함부로 입을 놀리는 사람이 없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연적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시정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거기까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순간 칠파일문 장문인들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이 알아서 시정하겠다는 것은 호천맹을 향한 도발과도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총사 공손기는 그 말에 담긴 뜻을 그냥 흘릴 수 없었다.
“남천 대협을 불편하게 하신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호천맹의 잘못된 부분은 저희 호천맹에서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호천맹의 잘못된 부분은 호천맹에서 바로잡겠다? 말은 참 아름다운데, 잘못을 한 당사자가 뭘 바로잡는다는 거지? 지금 나한테 도둑에게 도둑을 잡으라고 맡기라는 건가?”
“…….”
나름 화기애애하던 귀빈석이 한순간에 얼음 구덩이로 변했다.
칠파일문의 장문인들은 속으로 ‘이것이로구나!’라고 외쳤다.
그들은 연적하가 호천맹 무림대회에 온 이유를 깽판을 치기 위함으로 받아들였다.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든 공손기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호천맹에서 개최한 무림대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남천 대협께서 찾아오신 목적은 혹 호천맹 무림대회를 방해하기 위함이었습니까?”
“방해? 내가 왜 호천맹 무림대회를 방해하러 왔다고 생각해?”
“그야 남천 대협이 남맹 맹주의 사위니까요. 그보다 더 타당한 이유가 또 있습니까?”
“하여간 공부 좀 했다는 인간들은 생각하는 게 배배 꼬여 있어. 사람이 말하면 그 말에 집중할 생각을 해야지. 왜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지?”
“나는 남천 대협을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없고, 남천 대협과 관계된 어떤 일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에게 잘못을 한 당사자라고 하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요. 도대체 나의 무엇이 남천 대협을 그토록 불편하게 만들었습니까? 설사 있다 한들, 그게 호천맹의 무림대회를 방해할 정도로 큰 일입니까?”
“어.”
“남천 대협! 이곳은 호천맹이며, 나는 호천맹의 총사입니다!”
“그런데?”
“내가 남천 대협을 존중하듯 남천 대협도 나를 존중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왜?”
“내가 호천맹의 총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남천 대협이 반말을 해도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르셨습니까!”
그러자 연적하는 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파서는 공손기의 얼굴로 ‘후!’ 하고 불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공손기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자 호천맹이 잠잠해졌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의 큰 소리는 호천맹 구석구석까지 확실하게 울려퍼졌다.
이로써 긴가민가하던 수천 명의 사람들도 귀빈석에서 대판 싸움이 났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무극상인은 암암리에 장탄식을 터트렸다.
어째 매끄럽게 잘 진행되던 무림대회가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느낌이다.
“총사, 고정하시오. 그리고 남천 대협. 총사가 무슨 실수를 한 모양인데, 다른 곳에서 두 분이 잘잘못을 가리면 안 되겠소?”
무극상인은 잔칫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는 연적하에게 간청했다.
만약 연적하가 천하제일의 무인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끌어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날뛰는 연적하를 제압할 고수가 없었다.
그러자 연적하가 무극상인을 돌아보았다.
그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한 무극상인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도사님. 도사면 도사답게 살아요. 도사님은 평생 호천맹에서 이전투구만 하다가 죽을 거예요? 그러려고 화산파에 입문했어요?”
무극상인이 뜨악한 얼굴로 연적하를 보았다.
망나니처럼 날뛰는 그를 타박하지 않고 간청까지 했건만, 왜 불똥이 자신에게 튀는지 모르겠다.
“그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소이다. 빈도가 호천맹에 있는 것은 천하창생을…….”
“닥쳐요! 그런 사람이 호천맹의 이름 좀 띄워 보겠다고 사람들을 사지로 끌고 들어가요? 무한 지부 사람들에게 마교를 목련산으로 유인하라고 했었죠? 무한 지부는 마교 고수 다섯 명만 만나도 싹 다 죽는다는 거 몰라요?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지시를 내린 거예요? 명색이 도사라면서, 사람들 생명은 안중에도 없어요? 속세의 맹주 자리가 도사보다 위에 있어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
무극상인은 변명하려는 듯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손기는 달랐다.
여기서 밀리면 끝이라는 생각에 도리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당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오! 우리 호천맹의 무인들은 의를 위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소! 역사를 봐도 이기는 싸움만 하는 예가 없소! 그날 호천맹이 목련산에서 마교를 물리치지 않았다면, 오늘 호천맹의 무림대회에 몇 명이나 참석했겠소? 살을 내어 주고,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이 없이 얻어지는 게 있다고 생각하시오!”
순간 연적하가 공손기의 앞에 솟아났다.
“너희들의 살을 내어 주고! 너희들의 뼈를 깎으면 나도 뭐라고 안 해! 다른 사람들을 사지로 내몰고서 자기가 큰 희생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이 개새야!”
욕설과 함께 연적하의 주먹이 공손기의 안면을 강타했다.
‘악!’ 소리와 함께 휘청거리는 공손기의 멱살을 연적하가 움켜잡았다.
뒤이어 찰진 파열음이 호천맹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