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56
956회. 시간을 조금만 주세요
연적하는 뒤늦게 자신이 한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았다.
‘범천욕계왕재천’과 현세에서 보여준 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네 번째 하늘’이 어떤 상황일지 눈에 훤했다.
“저어, 그런데 구천현녀님. 그 네 번째 하늘이란 곳은 제가 살고 있는 현세보다 훨씬 뛰어난 곳이잖아요?”
“‘왕들의 하늘’보다도 상계이니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뛰어난 곳이다.”
“그럼 그곳에 저보다 뛰어난 존재도 많겠네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
“그럼 그들이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자 구천현녀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 번째 하늘’에서 천자마와 금사를 능가할 정도로 강한 존재는 없다. 그래서 세계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의 신이라고 한 것이다. 특히나 지금 천자마의 권능은 창조신에 필적할 정도로 막강하다. 천자마에게서 뒤틀린 욕망을 떼어 낼 때와는 모든 것이 달라졌지.”
“아…….”
연적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천자마와 금사가 ‘범천욕계왕재천’ 에 갇혀 있는 동안 진신(眞身)들도 발전을 한 모양이다.
“너만 놓고 보면 아직은 네 번째 하늘에 있는 금사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드넓은 우주에서 구천검령을 가진 자는 너 하나밖에 없다. 오직 너만이 ‘네 번째 하늘’의 혼란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소리다.”
“…….”
연적하는 입을 꾹 다물고 듣기만 했다.
돌이켜 보면 ‘범천욕계왕재천’과 ‘현세’에서 천자마와 금사를 죽인 것은 구천검령이었다.
문득 구천검령과 처음 조우할 때의 일이 떠올랐다.
-우리는 아홉 하늘[九天]의 수호자로 ‘구천검령’이라 불린다.
-신들조차 우리 중에 셋 이상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
-우리 중 하나만으로도 능히 악신(惡神)에 맞설 수 있다.
-구천검령을 온전히 받으면 만신(萬神)조차 앙복(仰伏) 하리라.
“그런데 구천검령은 뭐길래 그처럼 강한 거예요?”
구천현녀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구천검령은 우주의 신비로 그 실체를 아는 자가 없다. ‘아홉 하늘의 수호자’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지.”
“저어, ‘아홉 하늘’이라는 건 설마……. ‘범천욕계왕재천(왕들의 하늘)’이나 ‘네 번째 하늘’과 같은 세계를 의미하는 건가요?”
연적하는 구천현녀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현세를 지칭하는 말에 ‘하늘’이 들어가지 않아 물어본 것이었다.
“용케도 거기까지 생각을 했구나. 네 말대로 ‘왕들의 하늘’과 ‘네 번째 하늘’도 아홉 하늘에 포함된다.”
“현세는요?”
“네가 말한 현세를 진선(眞仙)들은 ‘필멸자의 하늘’이라 부른다.”
“아홉 하늘에 포함된다는 거네요?”
“그렇다.”
“와아! 구천검령이 정말 대단한 거였네요?”
“그 대단한 구천검령이 한 사람의 몸에 깃든 것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일이다.”
연적하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그런 대단한 일을 해냈다니 자랑스러웠다.
“내가 너에게 구천여일진경(九天如一眞經)을 가르쳐 준 것은 구천구검의 연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서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구천검령까지 얻었으니 하늘의 뜻이 오묘하구나.”
그제야 연적하는 그 모든 것이 구천현녀의 안배 때문임을 깨닫고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했다.
“모두가 구천현녀님 덕분입니다.”
“하늘이 한 사람에게 구천검령을 허락한 것은 쓰일 데가 있어서이다. ‘네 번째 하늘’의 혼란을 막아 주겠느냐?”
한참 고민하던 연적하가 물었다.
“제가 못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러면 ‘네 번째 하늘’이 멸망의 길로 접어들겠지.”
연적하가 제 이마를 문지르며 다시 물었다.
“제가 구천현녀님과의 약속을 안 지키면 ‘보증의 징표’를 거둬 가실 건가요?”
“그럴 일은 없다. 너의 인생이 걸린 일이니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제 인생이 걸려 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네가 ‘왕들의 하늘’에서 돌아왔을 때를 생각해 보아라. 네가 없는 동안에도 현세의 시간은 흘러갈 것이다. 거기다…….”
구천현녀의 말을 연적하가 끊고 끼어들었다.
“아! 이 년 정도가 지났죠?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구천현녀는 설명을 이어 가려다 말았다.
‘네 번째 하늘’의 격은 ‘왕들의 하늘’보다 높다. ‘왕들의 하늘’보다 격이 낮은 ‘현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런 만큼 시간의 흐름도 완전히 다르다.
그러니 그걸 거절했다고 연적하를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말 그대로 그의 인생이 걸려 있는 문제인 까닭이다.
하지만 연적하는 ‘범천욕계왕재천’을 떠올려 그와 비슷한 시간이 소요될 거라 착각했다.
‘짧으면 이 년…… 길면 삼 년, 사 년…… 넉넉잡아 오 년이면 되려나?’
오 년이면 연지안의 나이 일곱 살이다.
남궁연과 딸을 못 본다니, 생각만 해도 속이 쓰리고 피가 마른다.
그렇다고 한 세계의 멸망을 수수방관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평생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으리라.
“하겠습니다.”
“정말이냐?”
“예. 하지만 지금 당장은 수습해야 할 일이 있어서 무리고요. 시간을 조금만 주세요.”
“그러마.”
구천현녀는 흔쾌히 허락했다.
‘네 번째 하늘’의 시간에 비하면 ‘현세’의 시간은 허망할 정도로 짧았기 때문이다.
문득 연적하가 물었다.
“참!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네 번째 하늘’에는 어떻게 가요? 팔황신모처럼 이상한 그림과 주문을 외워야 하는 건가요?”
“너는 천문(天門)을 열기만 하면 된다. 천문이 너를 ‘네 번째 하늘’로 인도해 줄 것이다.”
“천문요? 그건 구주(九州)에 있지 않나요?”
“구주에 있던 천문은 사라졌다. 정확히는 너의 구천검령으로 옮겨 갔다고 해야겠지.”
“옮겨 갔다고요?”
“천문은 돌비석이 아니라 그곳에 깃든 창조신의 권능이다. 구천검령이 돌비석을 파괴할 때 창조신의 권능은 구천검령으로 옮겨 갔다. 그러니 구천검령이 천문을 품고 있는 셈이다.”
“허!”
“구천검령을 팔방에 꽂고, 중심부에 신맥의 검령을 세우면, 천문이 열릴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아무 때나 열려요?”
“여는 건 아무 때나 열 수 있다. 하지만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천문에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우주 어디에 떨어지게 될지 모르니까.”
“목적지는 어떻게 정하는데요?”
연적하의 눈이 반짝였다.
그걸 알면 언제라도 가족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천문은 창조신의 영역으로, 목적지를 정하는 것도 창조신이다. 그분께서 너를 ‘네 번째 하늘’로 인도해 줄 것이다.”
“아…….”
잔뜩 들떠 있던 연적하는 머리를 툭 떨궜다.
좋다가 말았다.
창조신이 허락할 때까지 현세로 돌아올 수 없다니 뭔가 억울했다.
가족들과 한동안 떨어져 지내는 것은 피하지 못할 숙명인가 보다.
적막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 보니 구천현녀가 보이지 않았다.
활활 타오르던 불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썩은 채로 방치된 나무 제단과 곰팡이가 잔뜩 피어 있는 제기(祭器)들을 보니 모든 게 꿈 같았다.
천막으로 터덜터덜 돌아가 자리에 누운 그가 중얼거렸다.
“꿈인가?”
몇 년이나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니!
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꿈일 리가 없다.
꿈이라면 자신이 어떻게 ‘네 번째 하늘’에 대해 알겠나 말이다.
***
다음 날 아침.
일찌감치 눈을 뜬 연적하는 관도로 나가 지나는 아무나 잡았다.
“아저씨. 여기가 어디쯤 돼요?”
“상수현이오.”
“허창을 지나야 하는데 저쪽 방향이 맞죠?”
연적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던 사내가 말했다.
“방향은 맞는데 산을 넘어갈 게 아니면 관도를 따라 쭉 가다가…….”
“산을 넘어가려고요.”
그러자 사내는 연적하의 아래위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무리 여름이라 해도 준비 없이 산을 넘으려다가는 객사하기 딱이오. 그냥 관도를 따라가는 게 나을 게요.”
“예, 예. 방향만 알면 돼요.”
연적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뒷걸음질 쳤다.
사내는 군소리 없이 돌아서 가던 길을 갔다.
관도에서 벗어난 연적하는 다시 운종술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반 시진(1시간)쯤 날아가자 눈에 익은 지형이 나타났다.
오봉산이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은 소림사를 찾아가는 게 우선이다.
오봉산에서부터는 마음이 놓였다.
오봉산 인근의 지리는 꿰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숭산(書山)이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연적하는 헤매지 않고 소림사까지 바로 온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소림사 상공을 빙글빙글 돌던 연적하는 가장 크고 화려한 전각 위에 멈춰 섰다.
대웅전이었다.
그는 이기어검으로 천둔검을 날려 보냈다.
잠시 후대웅전 앞마당에 검 한 자루가 나타났다.
검은 저 혼자 이리저리 움직였는데 그럴 때마다 바닥에 깔린 청석이 쫙쫙 갈라지며 글자가 나타났다.
쩌저저적! 쩌억!
[경내의 전각을 비워라.]그 기이한 일을 목격한 승려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곧이어 소림사에 급박한 종소리가 울렸다.
땡! 땡! 땡! 땡! 땡!
무슨 일인가 싶어 전각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전각이 비자 연적하는 손바닥으로 아래를 지그시 눌렀다.
콰르르르-!
천년 사찰 소림사의 대웅전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재앙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대웅전을 시작으로 장경각, 천불전이 차례로 주저앉았다.
이윽고 천불전 앞에 깔린 청석 위로 ‘사람을 상하게 한 죄’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잠시 후.
천불전 앞으로 소림사의 고승들이 모여들었다.
현백 대사의 사망 이후 소림사 장문인 자리에 추대된 공백 대사가 황망한 얼굴로 물었다.
“사람을 상하게 한 죄?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아는 분이 있소?”
그러나 고승들은 술렁거리기만 할 뿐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소림사 역사상 처음 접한 괴사에 다들 몸을 사리는 것이다.
그 와중에 누군가 나섰다.
공백 대사를 대신해 집법당 당주 자리에 오른 무백 대사였다.
“장문인, 탁발 수도 중인 제자들 외에 하산을 한 제자는……. 삼십육 동인(銅人)밖에 없습니다. 혹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지른 게 아닐까요?”
그러자 고승들이 한마디씩 했다.
“삼십육 동인은 무극문을 지원하기 위해 나갔는데 사고를 쳤겠소?”
“내가 삼십육 동인의 현문을 아는데 그는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외다.”
“삼십육 동인은 사람을 상하게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런 제자들은 애초에 동인으로 뽑히지도 않습니다.”
소림사 승려들은 ‘사람을 상하게 한 죄’라는 글귀를 누군가의 일탈 정도로 받아들였다.
사실 앞뒤 설명 없이 청석에 새겨진 글자만 보고 그걸 남맹과 연결 지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공백 대사는 달랐다.
“잠시 조용히 해 주시오. 그 전에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서, 이기어검으로 글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
기이한 침묵이 감돌았다.
생각해 보면 이건 최소한 천하십대고수가 벌인 일이었다.
공백 대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대웅전이 소림사의 얼굴이라면, 장경각은 심장이고, 천불전은 무승들의 피가 밴 곳이외다. 그런 대웅전, 장경각, 천불전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졌소. 마교 교주와 유명교주 외에 이처럼 광오한 인물이 당금 무림에 있소?”
순간 모든 승려들의 머리에 한 이름이 떠올랐다.
남천 연적하.
가공할 무위도 그렇지만,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인 소림사를 상대로 이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