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Swordsmith RAW novel - Chapter 171
3.
“아미타불.”
불호를 내며 정중하게 합장례를 취하는 인물을 장효는 예리한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심중의 긴장과 격동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저 이밤에 찾아온 자들의 면면과 이렇게 된 천하의 상황, 만독비경만을 생각했다.
‘소림사의 새로운 사대금강.’
이들이 그들이다. 눈앞에 다탁을 마주하고 앉은 네 명의 승려다.
현자배의 이들은 그동안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던 자들이다.
광현방장의 사형제였으나 임여진 전투 때에 등장했던 광일과 광해와 광조라는 승려들처럼 소림의 숨은 고수들이다.
소림의 힘이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는 증거다.
“이렇게 늦은 시간이 방문하여 결례를 끼치게 되어 송구합니다. 또한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상면하여 주신 문주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정중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자가 현범(賢梵)이라 했다. 사대금강의 수좌다.
이들은 장강의 지류인 오강(烏江)이 흐르는 사남(思南)으로 이르는 길로부터 왔다. 봉강산의 외곽에서 자칫 충돌이 일어날 뻔하였던 출현이다.
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이들이 고절한 무공으로 오독문 무사들의 공격을 피하기만 해서였고, 소림사의 사대금강이라는 것을 적극 밝힘과 동시에 방문의 이유를 또한 밝혀서다. 만독비경의 행방을 거론했음이다.
이 자리에 와 마주앉기까지 가장 큰 힘을 발휘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소림사가 아니라 그 누구라 해도 오독문의 독맛을 봐야 했을 터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가지 않았다. 오독문의 심장을 건드려서다.
경직한 얼굴의 오독문주 장효를 응시하면 현범은 본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전에 연락도 없이 이렇듯 불시에 방문하게 된 이유는 문주께서도 짐작하시듯이 천하의 정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천하는 지금 혼란과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혈천이라 하는 무리가 준동하여 살육을 일삼았습니다. 그에 대응키 위해 소림과 무당을 위시한 구대문파는 백혈맹을 조직하여 준엄히 맞서 싸웠고 그들을 응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악의 뿌리는 깊고도 견고한지라, 또 다른 사마외도들이 기치하여 세상을 혼탁게 하고 있음입니다. 그들 중엔 오독문이 너무도 잘 아는 자들, 당문이 있습니다.”
꿈틀 미간을 경련하는 장효의 표정을 살피며 현범은 이야기를 이었다.
“당문이 본맹의 주요인사들을 살해하였습니다. 무당의 원혜진인을 비롯하여 종남파와 점창파의 장문인이 그들에게 살해되시었습니다. 지도자를 잃은 문파들은 비탄과 분노에 빠져 있습니다. 백혈맹 전체가 그러합니다.”
현범의 눈동자가 심유한 빛을 뿜어냈다.
“그러나 분노와 슬픔에만 빠져 있어선 사마외도를 응징할 수가 없는 것, 본맹은 강호정의와 천하의 화평을 위해 슬픔과 분노를 털어내고 대의만을 좇아 다시 일어섰습니다.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사악한 무리들을 응징코자 함입니다. 그 대사에 오독문의 도움을 받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백혈맹의 이름으로 청하는 바입니다. 본맹의 일원이 되어 주십시오.”
장효는 눈꺼풀을 바르르 떨었다.
일원이 되어 달라.
너무도 의외의, 충격적인 제안이다.
중원강호가 독벌레로 취급하고 염오하는 곳이 바로 오독문이다.
저들은 그 멸시를 서슴지 않았다.
소림과 무당을 위시한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와 정파를 자처하는 모든 문파가 그러했다. 당문을 보고 대하는 눈과는 하늘과 땅 차이의 차별이었다.
오독문의 독을 무서움 대신에 더럽고 추악한 것으로 매도했다.
건드리면 다칠 것이기에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우며 그렇게 취급했다.
반면에 당문의 독엔 외경을 가졌다.
그들을 당당한 오대세가의 일원으로서 인정하고 힘을 인정했다.
당문이 그럴만한 힘을 가진 건 맞지만 치졸한 짓이다.
강호무림이 보이는 이중성이고 차별이다.
당문에게 퍼부어야 할 욕과 폭력을 오독문에게 퍼부었다.
오독문은 함부로 강호행을 할 수가 없다.
문파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몇몇 사람들이 강호행을 했지만 늘 척살당했다. 분쟁이 생기면 약속이라도 한 듯 중원강호는 가혹하게 응징했다.
그러한 핍박의 역사를 유일하게 바꿔놓았던 인물이 바로 만독자다.
천재적인 오성으로 오독문의 독에 대한 경지를 한 단계 올린 인물이다.
그가 있었기에 오독문은 현재의 독공을 이루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오문 무리와 다를 바가 없었으리라.
그런 업적을 이룬 만독자가 사라졌다.
그는 강호행을 하며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중원인사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비무를 제안했고 그들을 독공으로 죽였다.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고 피 토하며 죽어간 강호인의 숫자가 백을 넘어갔다.
만독자라는 이름은 강호의 전설이 됐다.
그러나 그 전설은 오래가지 못하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 이유를 아무도 모른다. 오독문에서도 모른다.
그래서 오독문은 다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만독자라는 인물로 인해 성세를 구가하려던 기운은 바로 흩어졌다.
그를 찾고자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웅덩이에 떨어진 물 한 방울처럼 종적이 묘연한 그는 만독비경과 같이 잊혀갔다.
장효는 새삼스러운 격정과 복잡하고 헤아리기 힘든 마음속의 바람 한가운데서 다시 되뇌었다.
‘본맹의 일원이 되어 주십시오‥‥‥’
백혈맹이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불시에 찾아와 저런 소리를 할 줄은 꿈에도 예상 못 했다. 그만큼 저들이 다급하다는 반증이리라.
당문이 출현하여 백혈맹의 고위인사들을 살해한 마당, 그들의 의도가 뭔지도 모르는 가운데 당문에 대항키 위한 수단을 찾아 이렇게 온 거다.
천천히 마음속의 바람을 누르고 잠재우면서 장효는 입을 열었다.
“오독문과 같이 비천한 변방의 문파가 어찌 백혈맹과 같은 곳에 합류하여 물을 어지럽히겠습니까? 본문은 이곳 귀주의 한 귀퉁이에서 자족하는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중원의 전쟁이라 하는 것도 여기선 모르지요.”
현범의 눈에 무심한 듯 하면서도 예리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말씀의 뜻을 십분 이해합니다. 귀주처럼 무탈한 곳에서 이렇듯 외부의 바람과 상관없이 지내시는 오독문이야 말로 진정 평화로운 삶을 누리시는 것이겠지요. 빈승도 이곳의 평화가 진심으로 부럽기 그지없습니다.”
현범의 눈동자에 떠오른 강렬함으로 지금 말이 진심임을 장효는 알았다.
“허나, 평화로운 삶만을 추구할 수 없기에 빈승과 사형제들은, 소림은 전장에 발을 담그고 있음입니다. 방치하면 더 큰 피를 흘리고 끝나지 않을 전쟁이기에 끝내고자 함입니다. 그 일에 도움을 청하고자 찾아왔습니다. 문주의 뜻과 오독문의 의지를 알겠습니다만, 부디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장효는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언제 소림의 승려에게, 사대금강에게서 이런 말을 들어보겠는가?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저런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겠는가?
격세지감이다. 저들을 저렇게 만든 것이 이번 전쟁이다.
전쟁을 벌인 당사자는 혈천이지만, 그들을 괴롭힌 자들은 따로 있다.
‘맹호, 종패‥‥‥’
지금 마주한 사대금강 이전에 찾아온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장효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만독비경의 행방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들었습니다만‥‥‥”
기어이 그것이 거론되자 현범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좀 더 상대방을 애닳게 하고 시간을 끌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던지려 했던 거다. 하지만 상대가 먼저 꺼냈다. 강호의 삶을 잊고 오랜 시간 폐관에 들었던 결과다. 그러나 아직이다. 기회를 놓쳤지만 칼자루는 쥐었다.
“아미타불. 빈승 등이 오독문을 방문한 이유입니다. 오독문의 비전인 만독비경, 그것을 백혈맹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장효는 눈을 부릅떴다.
“마, 만독비경을?”
현범은 육중한 눈빛으로 장효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합니다. 만독비경이 있습니다. 그것을 오독문에 드리는 조건으로 독공의 전수를 원합니다. 당문의 독에 대항할 수 있는 수준이면 됩니다. 그것을 위해 오독문의 참여를 원하는 것입니다. 현명한 판단을 부탁합니다.”
충격과 놀람으로 허둥대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장효는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거짓을 말한다고는 생각지 않소이다만, 무엇으로 그 말을 믿어야 하겠소이까?”
만독비경의 실재에 대한 것이다. 그것을 확신해야만 결론이 날 일이다.
차가운 눈빛을 번득이며 말없이 앉아 있던 현범은 승복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기름 먹은 유지로 싸인 그것은 네모난 책자의 모양이었다.
다탁 위로 내려진 그것을 보는 장효의 눈동자는 흔들렸고 현범은 말했다.
“이것이 만독비경입니다.”
현범은 기름 먹은 종이를 펼쳤다. 그 안에서 모습을 보인 것은 낡은 책자였다.
표지에 ‘만독비경’이라고 써놓은 책자다. 만독자의 수결도 있다.
“그, 그것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는 장효에게 현범이 경고했다.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장효는 움직임을 멈췄고 현범과 사대금강은 삼엄한 기세를 발산했다.
“빈승 등은 위해를 당할 경우 만독비경을 바로 없앨 것입니다. 감정을 추스르시고 경각심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자칫 만독비경은 한 줌 재로 변할지도 모릅니다. 오독문이 숨겨놓은 힘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겠으나, 소림사대금강의 손안에서 원하는 것을 취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장효는 눈꺼풀은 물론 안면까지 경련했다.
* * *
“새로운 사대금강이 분명해, 그들이 찾아왔다. 그것도 만독비경을 거론했어. 오독문이 꿈에서도 그리는 그것을 말한 이유가 분명 있을 거다.”
함윤이 불안과 초조를 담은 얼굴로 말하자 종패는 검자루를 잡았다.
“죽여버리자.”
앞뒤를 다 자른 말이지만 목계백과 함윤은 다 알기에 무거운 숨소리만 흘려냈다.
사대금강이 찾아온 배경과 목적은 분명하다.
당문에 대항하기 위해 오독문을 찾아온 거다. 자신들과 같은 이유다.
그런데 저들은 그냥 온 게 아니다. 오독문이 목매어 마지않는 만독비경을 거론했다.
목계백은 차가운 눈빛을 발하며 입을 열었다.
“거래를 하려는 걸로 보인다.”
“거래?”
“그러니까 죽이자는 거다.”
연이어 대꾸한 함윤과 종패도 짐작한다.
사라진 만독자의 비전을 이야기한 백혈맹은 오독문에게 거부하지 못할 제안을 하려는 거다.
바로 만독비경이다. 그것을 백혈맹이 가지고 있거나, 최소한 행방을 아는 거다. 그것으로 오독문을 움직이려는 거다. 이건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종패가 다시 살기를 뿜었다.
“죽이자. 그럼 끝난다.”
함윤은 황당한 눈으로 종패를 바라봤지만 목계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자.”
황당한 함윤의 눈은 목계백에게로 돌아갔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여긴 오독문 안이라고?”
종패는 함윤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래서? 백혈맹 놈들이 수작 부리는 걸 보고만 있자는 말이냐? 가만있으면 칼이 우리에게 돌아올 텐데? 지금 해야 한다. 사대금강을 죽여버리면 끝나는 거야. 네 말대로다. 여긴 오독문 안이지. 여기서 사대금강이 죽는 거다. 자연히 오독문과 백혈맹은 적이 될 테지. 우린 손해 볼 게 없다.”
“그, 그건‥‥‥”
“맞는 말이야.”
한마디로 결론을 내린 목계백은 차분하게 이어 말했다.
“오독문주는 만독비경이 없는 자신들을 당문의 대적자가 되지 못한다 말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들이 필요하다. 독에 대해서 당문만큼 아는 곳은 오독문 뿐이야. 그렇기 때문에 백혈맹도 찾아온 거다. 더구나 그들은 오독문이 혹할만한 조건을 가지고 왔다. 이대로 둔다면 우리가 위험해.”
바로 일어선 목계백은 살기를 뿜어냈다.
“길이 없을 땐 길을 만들어야지.”
* * *
장효는 현범의 손이 덮어 누르고 있는 다탁 위의 책자, 만독비경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숨조차 잊은 그 집중 속에서 미친 듯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이 현실을 슬기롭게 타개할 것인지, 어떤 결정을 해야 오독문의 미래를 위하는 것인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만독비경을 취해야 해!’
그것이 절대적인 목표다.
어디 있는지 냄새조차 맡지 못하던 저것이 눈앞에 나타난 이상 죽는 한이 있어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상대는 소림의 사대금강이다.
독을 사용한다고 해도 저들 정도라면 빼앗기 전에 책자를 없앨 수 있다.
당문의 무형지독이라면 모를까 그런 수단은 없다.
‘힘으로 취할 순 없고‥‥‥ 저들의 제안에 응해야 하는 건가?’
장효는 이를 악물었다.
현 시점에서는 그게 가장 합리적이고 현명한 결정이다.
백혈맹에 참여하여 당문의 독에 대항할 조력을 한다면 만독비경은 오독문의 것이 된다.
당연히 당문을 공격하여 멸문케 할 수도 있다.
일석이조의 수다.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다. 하지만 저들의 본성을 안다.
독벌레로 멸시하던 오독문이다, 소용이 다하면 태도가 달라지리라.
당문을 멸문하고 난 다음엔 오독문을 공격할 수도 있다.
저들은 그런 자들이다.
‘빼앗을 수만 있다면‥‥‥’
간절한 염원을 곱씹던 장효는 순간적으로 그들을 떠올렸다.
맹호와 종패다. 그들이 한 일도 떠올랐다.
그 두 사람이라면 이들을 베어버릴 수 있으리라.
‘그들에게!’
뭔지 모르지만 충동적인 생각을 하는 것 같은 장효의 얼굴을 현범은 예리한 눈으로 바라봤다. 동시에 간절히 바랐다. 피를 보지 않고 결과 맺기를.
‘받아들이시오, 만독비경을 이렇게 지니고 온 이유를 헤아리시오.’
그렇다, 그 이유가 있다. 위험을 무릎 쓴 도박이다.
실물을 보여 마음을 움직이고 결정하도록 하려는 이유가 제일 첫 번째, 화급을 다투는 일이니 시간을 줄이기 위한 이유가 두 번째다.
무엇보다도 첫째 이유가 우선이다.
실물을 쥐고 흔들어 주면 당연히 저희의 손에 들어올 것을 확신하게 될 터, 이곳 오독문에서부터 당문의 공격에 대한 대비를 시작함이다.
“문주 다시 말씀드리지만‥‥‥”
입을 열던 현범은 칼을 돌리듯 시선을 문으로 돌렸다.
“아버지‥‥‥”
오독문의 소문주 장양이 겁에 질린 얼굴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목에 시퍼런 검이 닿아 있다.
검자루를 잡고 붙어 들어서는 자는 젊은 사내였다.
그가 장강수로채주 수룡왕 함윤이라는 것을 사대금강은 모른다.
“무 무슨 짓이오!”
오독문주 장효가 소리치는 순간 월창이 부서지며 두 개의 그림자가 튀어 들어왔다. 그들로부터 이탈하는 도광과 검광이 사대금강을 휩쓸었다.
현범을 비롯한 사대금강은 경악한 가운데 연대구품을 발휘해 피했다. 동시에 소림의 절기들로 반격했다. 그러나 그 반격은 허무하게 갈라졌다.
장효는 분명히 봤다.
흉신악살처럼 그어대는 맹호의 장도와 종패의 대검, 그 병기들이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공간의 난자 속에서 소림의 사대금강이 쪼개지고 갈라지며 흩어지는 광경을 경직한 눈동자로 목격했다.
핏덩이만 남은 자리에서 돌아선 자, 맹호가 다탁 위 만독비경을 들어 내밀었다.
“문주, 만독비경을 되찾으셨습니다. 경하드립니다.”
눈자위를 경련하는 장효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만독비경을 받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