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35
635화. 네 얘기냐?
절세고수들은 하나같이 종잡을 수 없는 성품을 지녔다.
그마저도 최대한 좋게 표현한 것일뿐, 솔직하게 말하면 제정신인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사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타고난 재능만으로 절세고수가 되는 경우는 없다.
강해지고자 하는 지독한 집념과 끈기, 거기에 적당한 악운(惡運)과 적절한 천운(天運)이 더해져도 간신히 닿을까 말까 한 경지가 바로 절세고수의 영역이었다.
그래서인지, 절세고수들은 집착하는 ‘무언가’를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무공에 대한 흥미, 협의나 정의에 대한 사명감, 누군가에 대한 맹신, 복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것들…….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백수룡은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느꼈다.
평생을 쌓아 올린 내공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소년처럼 눈을 빛내며 비무를 기다리는 한 사내 때문이었다.
문제는.
“……왜 거기 앉아 있는 거요?”
백수룡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소지광을 바라봤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이 청룡학관 학생들의 자리, 그것도 청룡오망이 앉아 있는 한가운데였기 때문이었다.
헌원강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소지광이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젊고 유망한 도객들의 비무를 관전할 명당을 찾던 참인데, 마침 이 자리가 비어 있다고 해서 말이지.”
“미친놈인가…….”
그렇다고 전 흑사련주라는 인간이 새파란 정파 후기지수들 옆자리에 앉아?
아무리 청룡오망이 사파무인들에게 익숙하다고 해도, 상대가 천하제일도라 불리는 인물이면 숨쉬는 것도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백수룡은 자신의 제자들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저희는 상관없어요. 나이 든 헌원강 같아서 익숙한데요.”
“어르신. 천하제일도의 안목으로 보셨을 때 전낭을 건다면 어디에 거시겠습니까?”
“형님. 등 한 번만 만져 봐도 됩니까?”
여민, 거상웅, 야수혁은 소지광과 넉살 좋게 어울렸다. 누가 보면 원래부터 알던 사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하하! 네 제자들은 하나같이 절세고수가 될 만한 담량을 지니고 있군!”
소지광 또한 까마득한 무림의 후배들이 편하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이 재밌는 듯했다. 흑사련에서는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리라.
덕분에 소지광은 자연스럽게 청룡오망 사이에 엉덩이를 뭉개고 앉을 수 있었다.
“참나……. 마음대로 하시오.”
백수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소지광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부상 치료와 운기조식을 위해 자리를 비운 위지천의 자리였다. 그가 소지광을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흑도맹의 수뇌부 자리도 충분히 좋은 자리 아닌가?”
“거긴 이상하게 집중이 안 돼서 말이다. 마음껏 떠들기도 좀 그렇고…….”
대충 추혼궁귀의 눈치가 보여서 이리로 왔다는 말로 들렸다.
백수룡의 눈빛에서 한심함을 읽은 것일까, 소지광이 당당한 표정으로 변명을 덧붙였다.
“불편한 오해가 있는 듯한데. 그렇게까지 잡혀 살지는 않는다.”
“어련하실까. 비무 도중에 흥분해서 너무 큰 소리로 떠들지만 마시오. 다른 사람들한테 방해되니까.”
“음. 노력해 보지.”
소지광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은 못 하겠다는 말투였다.
비무대 위에 올라간 헌원강과 팽사혁이 마주 서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비무대가 꽉 들어찬 느낌이었다.
그 사이에서 천무학관주가 흡족한 얼굴로 생사결에 임한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라는 둥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데, 백수룡은 한 귀로 흘리며 관중석 한편을 살폈다.
‘……둘은 어디 갔지?’
관중석에 있는 옛 제자들 중 사곤과 일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넷 다 인피면구를 쓰고 변장을 하고 있었지만, 백수룡이 그들을 인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호와 삼호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백수룡과 시선이 마주치자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
“세기의 대결을 앞두고 딴 곳에 정신을 팔다니. 관중석에서 옛 정인이라도 봤나?”
그때 옆에서 들려온 소지광의 핀잔에, 백수룡은 옛 제자들에게서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
“뭐, 비슷하게 절절한 사연이 있지.”
어딘가 묘하게 서글퍼 보이는 백수룡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본 소지광이 코웃음을 쳤다.
“황당한 소리를 그럴듯하게 하는구나. 네 성품으로 연애질이 가당키나 한가.”
“못 할 건 뭐요? 그래도 나 정도면 절세고수 중에서는 인격자 아닌가?”
“정파 기준으로는 어림도 없을 테고, 사파의 기준으로 봐도 아슬아슬하다.”
두 사내는 구시렁거리며 이제 곧 시작될 비무에 집중했다.
* * *
헌원강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후우-
관중석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환호성, 목청이 터져라 외치는 학생들의 응원 소리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거, 되게 시끄럽네.”
괜히 투덜거리면서 인상을 썼다.
긴장이 되지 않는다면,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하며 지난 일 년 동안 도를 휘둘렀으니까.
꾸욱…….
주먹을 쥐자 손바닥에 단단히 박인 굳은살의 감촉이 느껴졌다.
몸 상태는 최고였다.
용봉비무 예선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딱히 강한 상대는 없었다. 중간에 작년에 용봉에 들었다는 뭐시기를 만난 것 같은데, 이름은 까먹었다.
‘너무 날로 먹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헌원강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상대가 팽사혁이 아니었으면 누구든 까먹었을 테니까.
두둑. 두둑.
맞은편에서 목을 좌우로 꺾는 팽사혁이 보였다. 마치 거대한 맹수 같은 기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런데 어째선지 자꾸만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 팽사혁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처웃기는. 무서워서 실성했냐?”
“병신. 너야말로 쫄았냐?
얼굴에 여유가 없네.”
“뒈지고 싶으면 무슨 말이든 못할까.”
“미리 의원이나 불러 놔. 기어 내려가게 될 테니까.”
대뜸 욕설부터 내뱉으며 서로를 도발한다.
언제부터였는지 팽사혁과 만나면 자연스럽게 늘 이래 왔다. 그들만의 방식이었다.
피식.
두 소년의 입가에 비슷한 웃음이 맺힌다. 사나우면서도 투쟁심이 들끓는 미소. 둘 다 이미 만전이었다.
“굳이 격려할 필요도 없었군.”
천무학관주는 흡족한 얼굴로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시작하라는 말조차 필요 없었다. 둘 다 듣고 있지 않았으므로.
스르릉.
두 소년의 도가 뽑혀 나온 순간, 비무대에 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쿠웅!
동시에 진각을 밟으며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헌원강의 도가 빛살처럼 공간을 가르고, 팽사혁의 도가 대기를 찢어발겼다.
까가가각!
칼날끼리 긁히며 불티가 거칠게 튀었다. 두 도객은 같은 방향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손목을 틀었다.
스걱!
흑도의 칼날이 팽사혁의 옆구리를 훑는 순간, 헌원강은 허벅지에 희미한 통증을 느꼈다. 칼끝에 맺힌 핏방울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것이 느리게 보였다.
‘보여.’
가속된 사고가 세계를 느리게 받아들인다. 헌원강은 천부적인 감각으로 상대의 다음 수를 예측했다. 날카롭게 변한 눈동자가 팽사혁의 빈틈을 찾았다.
쩌어엉!
팽사혁의 팔이 위로 들렸다. 사납게 웃는 얼굴 뒤로 당혹스러운 눈빛이 보였다. 헌원강은 빈틈으로 파고들었다.
촤아악!
핏물이 튀어 오른다. 팽사혁의 어깨를 스친 칼날이 햇빛을 반사했다. 헌원강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진득해졌다.
그 순간 팽사혁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댔다.
“제법.”
하북팽가의 도는 무겁고 강맹하다. 거기에 타고난 체구가 크고 힘이 좋은 덕분에 패도적이고 실전적으로 발전했다.
크르르릉-!
팽사혁의 도가 부르르 진동하며 도명을 토해 냈다. 그 소리가 마치 호랑이의 울음을 닮아 있었다.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 하북팽가의 직계에게만 전해지는 신공절학이었다.
그 순간, 헌원강은 자신을 향해 호랑이가 발톱을 휘두르는 환영을 보았다.
촤아아악-!
제대로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무복이 찢겨 나갔다. 칼날이 가슴을 스치고 간 상처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이 새끼가!’
눈이 반쯤 돌아간 헌원강도 본격적으로 수라혈천도를 펼쳤다.
화아아아악!
주변이 붉게 물들며 헌원강의 등 뒤로 수라의 형상이 나타났다. 수학여행에서 십대악인의 목을 베었을 때보다 더욱 선명해진 모습이었다.
본격적으로 수라혈천도와 오호단문도가 부딪치기 시작했다. 서로를 스쳐 간 도기가 비무대 바닥에 섬뜩한 상흔을 새기고, 칼날이 정면으로 부딪칠 때마다 그 충격파가 가까운 관중석까지 전해졌다.
“둘 다 굉장하군!”
“누가 올라가든 검재가 우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칼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 같지 않습니까?”
관중들은 입을 떡 벌린 채 두 도객의 싸움을 바라봤다.
정파 후기지수들의 싸움이라고 보기 힘들 만큼 거칠게 부딪치는 그들의 모습은 비무대 주변을 제외한 모든 곳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눈조차 깜빡이지도 않고 그 싸움을 지켜보던 소지광이 입을 열었다.
“……둘이 무슨 원수라도 졌나? 가문의 비화 때문이라기엔 개인적으로 맺힌 감정이 많아 보이는데?”
절세도객의 눈에는 보이는 모양이었다.
두 소년의 싸움이, 지금까지 용봉비무에서 치러진 그 어떤 비무보다도 거칠고 사나운 이유가.
백수룡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랫동안 쌓인 감정의 응어리가 많지. 그렇다고 말로 풀 생각은 없고, 어떻게든 서로를 쥐어팰 생각밖에 없는 놈들이라.”
“사내놈들이 다 그렇지. 무인이기까지 한 놈들이니 더 그럴 테고.”
게다가 도객은 백 마디 말보다 칼을 몇 번 휘둘러 보는 게 서로를 더 잘 알 수 있는 방법이지.
그렇게 혼자 납득하던 소지광이 문득 웃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조금 부럽군.”
“……뭐가 말이오?”
“평생 칼을 맞댈 호적수가 친우라는 것 말이다.”
소지광은 잠시 누군가를 떠올렸다.
-벌써부터 저 둘의 대결이 기대되는군. 한편으로는 좀 부럽기도 하고.
-……?
-저 나이대에 호적수를 만난 것 말이야. 나는 어려서부터 또래에 적수가 없었거든. 당신도 그랬을 테지?
그 사내도 저 소년들의 비무를 지켜보면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진 않을까 궁금했다.
쩌저저저정!
헌원강과 팽사혁은 쉴 새 없이 칼을 부딪치면서 점점 피투성이가 되어 갔다. 무복은 갈가리 찢어지고, 전신이 베인 상처로 만신창이였다.
“벌써 지쳤냐?”
“네 얘기냐?”
“미친 새끼.”
“그것도 네 얘기냐?”
두 소년은 마주 보며 큭큭큭 웃었다. 피를 뚝뚝 흘리고, 진득한 혈향을 풍기면서도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퉤.”
바닥에 핏물을 뱉어 낸 헌원강은 이마에서 흐르는 피도 손등으로 대충 닦아 냈다.
“성가시군.”
팽사혁은 거치적거리는 무복 상의를 자신의 손으로 부욱 찢어 버렸다. 피에 젖은 바윗돌 같은 근육이 잔뜩 성난 듯 꿈틀댔다.
“이제야 몸이 좀 풀리는데.”
“나야말로.”
히죽 웃은 헌원강과 팽사혁은 이제 막 비무가 시작되었다는 듯, 다시 서로에게 사납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