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48
648화. 옳은 결정
백수룡이 허공에 검을 그어 혈마와 함께 전장에서 사라진 이후.
“…….”
남궁수는 투명하게 일렁이는 공간을 고요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것은 백수룡이 검을 그을 때 생겨난 흐릿한 흔적이었다.
기감이 예민한 절세고수는 그 너머에 무언가가 존재함을 느꼈다. 무공을 넘어선 초월적인 어떤 것. 감각을 극도로 집중하면 끔찍하도록 강렬한 기파의 충돌도 희미하게나마 전해졌다.
-힘을 아껴. 아직은 네가 나설 때가 아니니까.
그 말을 조용히 곱씹으며 남궁수는 일렁이는 공간을 노려봤다. 바로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도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군. 자네는 아는 바가 있나?”
검성이었다. 피에 젖어 넝마가 된 무복 사이사이로 깊은 상처들이 보였다. 적어도 몇 달은 요양해야 할 만큼 중한 부상이었다. 그가 지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도들이 갑자기 도망치질 않나, 혈마는 청룡신협과 함께 사라지질 않나, 무엇보다…….”
잠시 말을 멈춘 검성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봤다.
콰콰콰콰콰콰-!
잠시 약해졌던 소용돌이가 다시금 거세지고 있었다.
검붉은 먹구름이 도시를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규모로 회전하고, 그 너머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빛이 쏟아지는 형상은 마치 세상의 종말을 경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 듯, 검성은 허망하게 실소를 흘렸다.
“대체 하늘이 저토록 진노한 이유가 무엇인지…….”
“저 또한 아는 바가 없습니다.”
남궁수는 덤덤한 어조로 대답했다.
진짜로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 숨기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검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는 더 캐묻는다고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허면 자네는 여기서 뭘 하는 겐가? 청룡신협 덕분에 한숨 돌렸다지만,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네.”
윤회연옥진이 한 번 크게 흔들리며 약해졌다지만, 여전히 전장에는 역천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마공을 익힌 혈교도들에게 유리한 상황임은 변하지 않았다.
“지존께서는…… 다시 돌아오실 것이다!”
혈교 팔대세가의 수장인 주일천이 살아남은 장로들, 마공을 깊게 익힌 혈교의 고수들을 수습해 진두지휘했다. 그들 하나하나가 전부 위협적인 고수였다.
검성은 그런 적들을 질린다는 듯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 끔찍한 기파를 견디고도 혼절하지 않은 놈들이야. 하나같이 대마두라고 여겨야 할 걸세. 그나마 사도들이 없기에 망정이지…….”
사도들이 저들과 함께 남아 있었다면, 정사연합은 이미 몰살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정사연합의 누구도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하리라.
남궁수 역시 적들의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전열을 재정비 중인 정사연합의 다른 고수들과 달리, 그는 여전히 일렁이는 공간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힘을 아끼는 중입니다.”
“무엇을 위해?”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 싸움보다도 중한가?”
“예.”
한 치의 고민도 없는 대답이었다. 남궁수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단호한 의지에, 그를 응시하던 검성은 별다른 의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수룡은 피 칠갑을 한 채로 서서 남궁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궁수가 지상에 내려서자 백수룡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거 참, 꼴이 말이 아니지?”
처참하다는 말로도 형용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전신에 새겨진 수많은 상처와 굳은 핏자국. 천천히 상처를 재생하고 있음에도 시체나 다름없는 참혹한 몰골이었다.
“남궁수.”
그의 머리 색과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변했다가 돌아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백수룡이 입술을 푸들거리며 느릿하게 말했다.
“네가 해야 할 일을 해.”
내뱉는 말과 달리 몸은 싸울 자세를 취한다. 오른손에 쥔 혈마검이 피를 머금은 듯 붉게 물들고, 찢어진 의복이 기파에 펄럭이기 시작했다.
“여기서라면, 날 죽여도 아무도 모를 거야. 그러니까…….”
백수룡은 힘겹게 손가락을 움직여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그 위에는 일전에 본 적이 있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
“여길 찔러. 한 번에.”
백수룡은 남겨질 사람들이 남궁수를 원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궁수만을 이곳으로 불렀다.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누구도 알 수 없을 테니까.
혈마와 함께 심상 세계에서 소멸한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였다.
“……과연. 이게 네 계획의 마지막인가.”
남궁수는 백수룡의 흉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만 이 지옥을 기억하면 되겠지. 다른 이들에게는 네가 혈마와 동귀어진했노라고 전하면 될 테고.”
“그래. 그러니 어서…….”
옳은 결정을 내려, 그 말을 끝으로 백수룡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완전히 적발적안으로 물들었다.
스스슷…….
굳은 표정이었던 입꼬리가 나른하게 올라가며 매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피투성이가 되고서도 마주한 상대를 단숨에 홀릴 듯 요사스러운 기운을 흘리는 존재.
저것은 더 이상 백수룡이 아니다.
남궁수는 그것을 알면서도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백수룡에게 말을 걸었다.
“백수룡. 기억하나?”
그 순간 보석처럼 붉은 눈동자에서 광망이 일렁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발동한 혈마안이었다.
“물론이다. 내 너를 기억하고말고.”
그러나 지금껏 수많은 이들을 현혹시켜 온 혈마안도 남궁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파지직-
천뢰제왕검형의 기운이 삿된 기운을 태워 버렸다. 혈마안에 잠시 당혹스러운 감정이 어리는 것이 보였다.
남궁수는 눈앞의 혈마를 무시하고, 그 안에 있는 백수룡에게 말했다.
“내가 네 일 학기 중간고사 시험을 도와줬을 때, 너는 내게 보답이라며 한 번의 소원을 쓸 권리를 줬다.”
-명찰을 가장 많이 뗀 사람에겐 무슨 부탁이든 한 가지는 들어줄게.
그 기억을 떠올린 걸까. 눈을 크게 뜬 백수룡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배신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혈마에게 육신의 통제권을 대부분 빼앗긴 백수룡이 힘겹게 입을 움직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남궁수도 억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딴 소원권 따위로 백수룡을 삿된 것에게서 떼어 낼 수 없다는 것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남궁수는 뻔뻔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그걸 쓰겠다. 백수룡. 무슨 수를 쓰든 그 삿된 것을 떨쳐 내라.”
고작 이런 것에 의지하고 싶을 정도로 절박한 심정이었기에.
“하하하하……!”
돌연 혈마가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귓가를 간질이는 나른하면서도 요사스러운 목소리. 사특한 기운이 점점 강해지자 남궁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화아아악-
역천의 기운이 혈마의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그대로 두면 다시금 회복될 것이 분명했다.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였구나. 내 너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마.”
자신의 결정을 조롱하는 삿된 존재와 마주하면서도, 남궁수의 금안에는 흔들림조차 없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너와 관련된 일은 매번 그랬으니까. 그리고…….”
파지직-
남궁수의 금안에서 벼락이 번뜩였다. 그 순간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쇄도해 백수룡의 면전에 들이닥쳤다.
“백수룡이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주겠다고 말한 적은 없다.”
한 줄기 벼락처럼 뻗어 나간 주먹이 혈마의 얼굴을 후려쳤다.
퍼억! 방심하다가 일격을 허용한 혈마가 비틀거리면서 뒷걸음질 쳤다.
“어째서……?”
“예전부터 버릇없는 후배의 기강을 한번 잡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잘되었군. 보는 눈도 없으니.”
남궁수는 검을 풀어서 바닥에 내려놓고 주먹을 우두둑 풀면서 백수룡에게 다가갔다. 주먹 위로 뇌기를 잔뜩 휘감은 채였다.
“백수룡. 이빨 꽉 깨물어라. 나는 네가 정신 차릴 때까지 멈추지 않을 생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