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67
외전 8화. 너는 어떠냐?
“네 외할아버지는 성격이 왜 그리 고약하신지 모르겠다.”
백무흔은 꿍얼거리며 부르튼 입술에 약을 펴 발랐다. 장인어른에게 까불다가 호되게 얻어맞은 흔적이었다.
“도무지 적당히를 모르는 양반이라니까. 그나마 검집이라 이 정도로 끝났지, 조금만 더 했으면 며칠은 밥도 못 먹을 뻔했다. 아니, 장난 좀 쳤다고 사위 얼굴을 이 모양으로 만드는 게 말이 되냐?”
마지막에 휘두른 매극렴의 검초가 어찌나 예리했는지, 웬만하면 쉽게 피하거나 막아 냈을 백무흔도 아차 하는 순간 얻어맞아 버렸다.
물론 신이 나서 장인어른을 놀리다가 방심한 것이 컸지만…….
“그러니까 왜 스스로 매를 벌어요?”
백수룡이 입술이 터진 아버지를 바라보지도 않고 혀를 차며 말했다.
그는 가벼운 침의 차림이었는데, 침상에 걸터앉아 가져온 서류를 대충 훑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흘겨보는 백무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 녀석이? 넌 대체 누구 편이냐?”
“저야 청룡학관의 차기 관주님 편이죠.”
“내 아들이 권력자에게 빌붙는 간신배가 될 줄이야…….”
백무흔의 깊은 탄식에도 백수룡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대신 읽던 서류를 옆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솔직히 맞을 만했지. 아니, 뻔히 맞을 걸 알면서 왜 그렇게 장난을 쳐요?”
아들의 한숨 섞인 질문에, 백무흔은 오히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왜냐니? 그야 재미있지 않으냐? 그리고 이런 때가 아니면 내가 저 양반을 언제 또 그렇게 놀려 보겠냐?”
“와…….”
저게 과연 반백 살이나 먹은 어른이 할 수 있는 생각인가?
‘왠지 익숙하다 했더니…….’
장인어른 앞에서 깐족거리던 백무흔의 얼굴과 호시탐탐 자신에게 한 방 먹일 계획을 꾸미는 헌원강의 얼굴이 묘하게 겹쳐 보였다.
‘어쩐지 손이 근질근질하던 이유가 있었네.’
백수룡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흑룡편을 슬며시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백무흔은 아들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묘한 위기감에 흠칫 몸을 떨었다.
“……아들아. 너 지금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불효막심하다만?”
“하하. 설마요. 제가 존경하는 아버지를 상대로 그럴 리가 없잖아요?”
백수룡은 가식적으로 웃어 보이곤 흑룡편에서 슬쩍 손을 뗐다.
그러나 백무흔은 의심을 넘어 확신을 하는 눈치였다. 그가 슬픈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며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한때는 건강하게만 자라 주길 바랐는데……. 약빙. 착했던 우리 아들이 지나치게 건강하게‘만’ 자라 버린 것 같소.”
“왜 어머니까지 끌어들이고 그래요? 괜히 죄책감 들게스리.”
“애비 쥐어팰 생각을 할 때는 죄책감이 안 들고?”
“에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흑룡편이나 내려놓고 거짓말을 해라.”
“어이쿠, 저도 모르게 자꾸만 손이 가네요.”
되바라진 아들을 잠시 째려보던 백무흔은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그는 아들과의 시시콜콜한 잡담이 퍽 즐거웠다.
“얄미운 녀석 같으니. 너도 나중에 너랑 꼭 닮은 자식 낳아 봐라.”
“웬 악담을…….”
매서운 겨울바람도 피해 간 듯, 하루라도 티격태격하지 않는 날이 없는 세 사내의 여행길은 유쾌하기만 했다.
백수룡은 자식 농사를 잘못 지었다며 푸념을 늘어놓는 아버지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생각했다.
‘이렇게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혈교와의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처음 백무관을 나설 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생각해 보면, 그때가 오히려 전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 간단히 치료를 끝낸 백무흔이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듯 물었다.
“그나저나 수룡이 너, 기억이 완전히 돌아온 게냐?”
“……그런 것 같아요.”
백수룡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천신공의 기운을 모조리 몰아낸 이후, 그는 어렴풋하게 떠오르던 과거의 기억들이 온전해진 것을 느꼈다.
평생 꿈을 포기하고 사느니 꿈틀대기라도 해 보고 죽겠습니다.
꿈속에서 본 무공을 익히겠다고 마음먹은, 한때는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절박한 심정이었는지 기억이 났다.
천음절맥으로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좌절감이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미안하다 수룡아.
그리고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아들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던 아버지의 모습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물론 백수룡은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마을 과부들이 아버지한테 잘 보이려고 저한테 이것저것 주전부리를 챙겨 주던 것도 기억나고…….”
“별 쓸데없는 것까지 기억하는구나.”
흠흠. 괜히 헛기침을 하는 백무흔을 보며 백수룡은 킥킥 웃었다.
-우리 수룡이. 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쁠까?
고향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일까.
요즘에는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들도 한 번씩 떠올랐다.
사랑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어머니의 얼굴, 목소리, 좋은 냄새, 촉감 같은 것들까지도.
“……어떤 것들은 어릴 때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이 나요.”
“잘됐구나. 혹시 어릴 적에 이불에 오줌 싼 것도 기억나더냐?”
“이 양반이 또 왜곡을 하시네. 그런 적 없거든요?”
“흐음. 아무래도 기억이 덜 돌아온 모양이다. 조금 더 분발해 보려무나.”
“하여간 감상에 젖을 시간을 안 준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백수룡은 습관처럼 침상 맡에 놓은 창룡신검을 쓸어내렸다.
“…….”
그러나 검신을 부르르 떨며 염려 섞인 잔소리를 쏟아 내던 목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아쉬워하는 아들의 표정을 본 백무흔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녀석. 신녀님이 안 계셔서 허전한 모양이구나?”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긴 하네요.”
혈교와의 싸움에서 대부분의 힘을 소진한 창룡신검, 아니 현천신녀는 다시 긴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의식이 완전히 가라앉기 전, 백수룡에게 작별 인사를 전했다.
-역천의 힘이 사라진 하늘은…… 무척 푸르고 따사롭구나.
당장이라도 꺼질 듯 희미한 목소리에, 백수룡은 창룡신검의 검파를 꽉 쥐었다. 그러자 현천신녀가 담담히 웃었다.
-수룡아. 역천의 운명을 스스로 극복해 낸 네가 대견하고 기특하단다.
대대로 역천의 힘이 퍼지는 것을 막는 운명을 타고난 현천문의 마지막 전인.
그 일생의 뜻을 이룬 현천신녀의 목소리는 세상사에 달관한 듯 잔잔했기에, 백수룡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대로 소멸하는 건 아니지?
-처음부터 숙원을 이루면 미련 없이 인세를 떠날 생각이었단다. 헌데…… 널 보며 배운 것이 많단다.
웃음소리와 함께 현천신녀의 영혼이 창룡신검에서 스르륵 빠져나갔다.
잠시 하얀 빛으로 화한 현천신녀가 홀가분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나도 이제 온전히 나를 위한 삶을 살아 보고 싶구나. 우선은 현무학관으로 돌아갈 생각이란다.
-……잘됐네.
현천신녀의 영혼은 원래의 육신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다. 그 편이 소진된 힘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도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나중에 현무학관에 들러다오.
빛이 한 번 번쩍인 후, 현천신녀의 영혼은 자신의 원래 육신으로 돌아갔다.
“경황이 없어서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전하질 못했거든요.”
백수룡은 따스한 눈길로 창룡신검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현천신녀가 깨어나면 풍월화공이 바로 연통을 주기로 했으니, 그때가 되면 백수룡은 현무학관에 가 볼 생각이었다.
“……정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구나?”
“생사고락을 함께했으니까요. 그녀가 제 곁에 있어 주지 않았다면, 아마 몇 번은 죽었을 거예요.”
“흐음…….”
순간 백무흔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으나, 백수룡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현천신녀만이 아니지.’
혈마를 쓰러뜨리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네 사부들, 제자들, 가족들, 도움을 준 여러 친우들.
뿐만 아니라 무림맹과 구파일방, 흑도맹, 그리고 이름을 알지 못하는 많은 무인들.
그들 모두가 자신의 은인이었기에, 가능한 살면서 조금씩이라도 갚아 나갈 생각이었다.
그때, 백무흔이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아들아. 신녀님의 춘추가 꽤 많으신 것으로 아는데……. 정확히 아느냐?”
“못해도 백 살은 훌쩍 넘었을걸요? 갑자기 그건 왜요?”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친 백무흔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지 않는가 싶어서 말이다. 며느리한테 존대를 하기도 그렇고…….”
“뭔 헛소리래?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해요.”
부친의 오해를 간단히 일축한 백수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할아버지는 왜 안 들어오실까요? 밥 먹고 나가신 지 꽤 됐는데…….”
저녁을 먹은 후, 매극렴은 잠시 마을을 둘러보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 이후로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글쎄다. 혹 아까 그 여인을 만나러 가신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정말로요? 전혀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는데.”
아들의 진지한 물음에, 백무흔도 짓궂게 웃던 얼굴에서 이내 단호한 얼굴로 변해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그럴 리가 있겠느냐. 네 외조부도 나와 마찬가지다. 가슴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올 자리가 없는 양반이지.”
“…….”
“아마도…… 잠이 안 와서 하염없이 걷고 계실 거다.”
백무흔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백무관이 있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가는 곳에, 약빙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두 사람이 살던 백무관 뒤편에 있는 작은 언덕 위에는, 매약빙의 묘가 있었다.
수십 년 만에 딸의 묘를 찾아가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떤 것일지, 두 사람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까도 약빙과 함께 이 마을에 들른 적이 있다고 하니, 그 얘기만 들으시고 여기저기 둘러보고 오겠다고 하시더구나. 하하! 수십 년 전에 고작 하룻밤 거쳐 간 곳인데 말이다.”
두 사람에게는 잠시 떠나 있었던 집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매극렴에게는 삼십 년 만에 딸을 만나러 가는 초행길이었다.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감정이 복잡할 것이다.
백수룡은 그리움이 느껴지는 아버지의 옆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시겠네요.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도 고민되실 테고요.”
“너는 어떠냐?”
“……저요?”
고개를 돌린 백무흔이 당황하는 아들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래. 너는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에게 할 말을 생각해 두었더냐?”
“음…….”
백수룡은 한동안 고민하며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다. 그러다가 이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었다고, 역시 그 말부터 가장 먼저 해야겠어요.”
그 순간 백무흔은 아주 행복한 얼굴로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나랑 똑같구나!”
그리고 다음 날, 세 사람은 백수룡의 고향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