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30
029화 두 여인 (1)
내 인생의 1차 대목표는 희망봉을 돌아 유럽으로 향하는 신항로를 개척하는 것.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유럽 항로 개척은 최상위 레이드.
아메리카 항로 개척은 확장팩.
세계 일주는 고인물을 위한 엔드 콘텐츠라고 할까.
쪼렙 중 쪼렙인 내가 도전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당연히 쪼렙인 나와 내 선단을 위한 레벨업 장소가 필요하다.
돈과 배, 숙련된 선원, 그리고 내 경험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광주야말로 초반 레벨업하기 가장 좋은 거점이다.
명나라라는 세계 최강국의 주요 항구.
동쪽으로는 조선과 일본, 남쪽으로는 동남아시아를 잇는 지리적 요충지이기도 하니까.
다른 곳은 안 되냐.
복건성 천주로 하자니, 원나라에 의해 한번 초기화된 상태라 여러모로 미비하다고 한다.
더욱이 곧바로 해금령이 내려지는 바람에 망가진 항구 시설을 제대로 복구를 못 했다고 한다.
남경을 거점으로 삼는다?
이웃이 영락제다.
따라서 내게 있어 광주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요지다.
광주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광주, 그러니까 광저우 바로 아래에 붙어있는 도시가 홍콩과 마카오다.
지금은 시골에 불과하지만, 남방 무역이 중요해지면 발전할 수밖에 없는 위치라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 광주의 유지인 허가장과 어떻게든 잘 지내야 한다.
근데 협조를 안 해주네.
그렇다고 지위를 이용해서 겁박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정화는 그런 걸 극히 혐오할뿐더러, 영락제에게 약점을 넘겨주는 셈이니까.
게다가 내가 상업과 무역을 중시할수록 조선과 명나라 사대부와 마찰이 심해질 텐데, 트집 잡을 거리를 늘릴수록 한순간에 고꾸라질 수도 있다.
“일단 결혼 제안은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쉬운 길이고, 확실한 길이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많았다.
“제 손녀딸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가주는 금방 안색을 회복하고는 다시 들이댔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송구하오나 무엇이 마음에 걸리시는지 말씀해주신다면 시정하겠습니다.”
시정······ 하겠다고?
아예 자존심마저 버리고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변한 듯한 느낌인데······.
“첫째는 허 소저의 나이입니다. 열셋에서 열일곱에 결혼하는 게 보통이라고는 하나, 저는 약관은 넘어야 사람 보는 눈이 조금씩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부모가 배우자를 결정해주는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본인의 의사가 무시되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설화나 기담을 듣고 열정적인 사랑 후에 혼례를 올리는 게 낭만적이라 착각하지만, 부모가 정해주는 상대와 결혼할 때 더 행복하게 사는 예가 훨씬 많습니다.”
나도 안다.
전생에 결혼할 나이였던 지라 결혼에 관련된 여러 자료를 찾아봤으니까.
의외로 연애결혼보다 맞선이나 중매를 통해 결혼한 사람이 평균적으로 더 행복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혼기엔 연애결혼이 더 행복한데, 5년 정도 지나면 오히려 중매나 맞선으로 결혼한 사람이 더 행복하게 살았다.
비슷한 수준끼리 결혼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기대가 적으니 실망할 일도 적어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더.
조혼, 그러니까 미성년자 때 결혼하면 대부분 불행했다.
반대로 만혼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만 나이 기준 18~23세 사이, 연애 경험 횟수 3회 이하일 때 결혼 만족도가 제일 높았다.
어디까지나 사람에 따라 다르다지만, 통계와 평균이라는 건 기준의 척도.
초보자가 참고하기에 매우 좋은 자료다.
“하지만 잘못되었을 경우 누가 책임을 집니까?”
그런데도 부모가 정해주는 상대와 결혼하는 걸 싫어하는 이유는 책임 때문이다.
내가 선택했으면 잘못되어도 내 탓이라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부모가 선택해서 잘못되었을 때, 망가진 내 인생은 대체 누가 책임져 주는가.
“또한, 제가 가정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분명 부인을 외롭게 하겠지요.”
“대인께서는 혼례에 관해 지나치게 부담을 가진듯이 보입니다만, 실제로는 상상과 매우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죠?”
“일례로 가장은 지탱을 받는 존재지, 지탱해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네?”
“가족 구성원이 몇인데 가장 혼자서 일일이 다 지탱해주겠습니까. 그런 일을 했다간 가장이 먼저 무너져 내릴 겁니다. 가장이 쓰러지면 가정이 무너질 테고요.”
생각해보니 이 시대는 대부분 대가족이 함께 산다.
허가장만 해도 이렇게 큰 저택에 가주와 소가주의 직계만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시대에는 가주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가장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가문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고, 번영케 하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누군가를 희생할 수도 있지요.”
그렇게 말하며 잠시 이소군을 보았으나, 여전히 미안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태도랄까.
“냉혹하다 여기실지 몰라도 그것이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시대가 잔혹하다.
가주의 나이라면 원말명초의 혼란기와 홍무제의 숙청기, 그리고 정난의 변까지 다 겪어봤을 테니 그의 사고방식이 무조건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허가장 가주와 정반대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소군의 친척, 방효유가 아닌가.
방효유는 충신의 상징과도 같은 사람.
하지만 지나치게 대쪽 같았던 나머지 회유하려던 영락제를 도발했고, 그 결과 십족 멸살이라는 참담한 결과로 끝났다.
근본적인 원인은 영락제에게 있지만, 방효유도 책임을 피하긴 어렵다.
그가 적당히만 했어도 이소군의 가문이 멸문되고, 그녀가 기녀가 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허가장 가주와 방효유.
양극단에 있는 인물이다.
과연 어느 쪽이 옳다 하겠는가.
역사는 당연히 방효유에게 찬사를 보내겠지만, 내가 만약 방효유의 가족이나 친척이었다면 그에게 온갖 저주를 퍼부었을 것이다.
“대인께서 원하신다면 이소화에게 정식으로 사죄하겠습니다. 그것이 허가장을 지키는 일일 테니까요.”
“가주를 이해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고, 틀리지 않았습니다.”
딸과 외손녀를 버렸지만, 대신 허가장 식솔을 살렸으니까.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내 사람 누구도 버리지 않을 겁니다. 최소한 구하려는 시도라도 할 겁니다.”
이소군도 바보는 아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이해했겠지.
그 근거로 허가장을 원망하는 말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감정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더욱이 눈앞에서 기녀니까 첩으로 삼으라느니.
인제 와서 필요해지니까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느니.
너무 하잖아······.
“어쩌면 그 차이가 우리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고랑일지도 모르겠군요.”
“젊으시군요.”
“시대를 보는 눈이 다른 거겠지요.”
“미래에는 달라질 것 같습니까?”
“그럼요. 10년에서 20년에 걸쳐 혼란은 잦아들고, 점차 태평성대로 향해 갈 겁니다.”
그 태평성대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동아시아 역사 500년을 결정한다.
조선도, 명나라도 아직 초기다.
지금이라면 나라의 기조 자체를 바꿀 수 있다.
“가주의 방식은 생존에 적합할지 몰라도, 위로 올라가려면 명확한 한계가 찾아올 겁니다.”
버려진 자들이 계속 발목을 잡을 테니까.
지금처럼.
“······.”
“······.”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시간이 없다.
나흘 뒤면 출항이니까.
지금이라도 빨리 대장간을 수소문해서 포탄을 만들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권력을 이용하고 웃돈을 얹어주더라도.
허가장과의 관계는 다음에 개선하면 되겠지.
서로의 필요가 더욱 강해진다면 해묵은 감정을 뒤로할 수 있을 테니까.
나 역시도 내 배가 나오기 전이니만큼, 당장 어떻게 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다.
“고랑을 메울 수 없다면 다리를 놓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맑고 여린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허 소저?”
“지금. 할아버님의 결정이 아니라, 저의 뜻으로 결정했습니다. 대인과 함께하고 싶다고요.”
그녀가 방긋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오른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이소군의 손을 잡았다.
외간 남자의 손을 잡는 건, 이 시대의 정조 관념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행동이다.
“그리하여 대인과 허가장 사이의 다리가 되겠습니다.”
“헐.”
16살 소녀가 치밀함을 숨김.
이래서 핏줄은 못 속인다고 하나 보다.
순진한 척하더니······.
인제 보니 제 할아버지의 눈빛을 똑 닮았네.
***
허신애 돌발 행동으로 극적인 화해에 성공했다.
그 덕에 소가주가 약속했던 만찬에 참여하기로 했다.
“아. 그······ 소저. 제가 대사를 앞두고 있는지라.”
근데 허신애는 당돌하게도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애정 가득한 눈으로 나에게 하트를 마구 쏘아 보냈다.
도대체 어디서 반한 걸까.
정5품 내각군보 임명장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혼례는 약조만 해주시면 상관없습니다. 대인께서 스무 살 여인을 원하신다면 기꺼이 4년을 기다리지요.”
“······네?”
“단순히 기다리기만 하는 건 아닙니다. 대인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많은 것을 배워두겠습니다.”
“아마 소저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힘들 겁니다.”
괜히 장거리 연애가 힘들다는 게 아니니까.
교통과 통신이 훨씬 발전한 미래에도 그런데, 지금은 한 번 떠나고 나면 기약이 없지 않은가.
“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지금 힘들고 나중에 마음 편히 지내겠습니다.”
“예?”
“대인이라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저를 버리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좋은 말이긴 하다만, 네 할아버지 앞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동족 혐오인가.
“처세술도 훌륭하셔서 애초에 위험한 일을 만들지 않을 것도 같고요.”
이번 기회에 알아놔야겠다.
대체 나처럼 엄청난 인재를 어떻게 알아보는 건지.
“어째서 그렇게 판단하셨습니까?”
“정5품 내각군보라는 고관이신데도 직접 말씀해주시기 전까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당연하다.
오늘 아침에 임명되었으니까.
“그런데요?”
“이는 스스로를 낮추시는 게 습관화되어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떻게든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젊은 혈기로는 하기 힘든 겸손한 태도지요.”
누구나 영락제와 킬방원이 지켜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겸손해져.
개차반에 분노조절 장애로 유명한 한왕 주고후도 영락제 앞에서는 얌전해지더라.
“겸손한 태도로 불필요한 적을 만들지 않고, 확실한 선을 그어 얕잡아 보이지도 않으니, 그야말로 처세술에 있어 으뜸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옆에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볼 때, 저런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거잖아.
······소름 돋는데.
“또한, 직접 말씀하신 것도 권세를 자랑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대인의 사람을 위하는 게 목적으로 보였습니다.”
“예. 뭐······.”
“재능과 능력도 인정받은 인재가 이러한 모든 것을 갖추기는 쉽지 않지요. 아니요. 역사에 손을 꼽을 정도로 적을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혼처를 결정해도 됩니까?”
“그럼 무엇을 봐야 합니까?”
“······재물이라든가?”
“걱정하지 마세요. 재물은 제가 허가장에서 받아내겠습니다.”
와우.
가주와 소가주가 보고 있는 앞에서 대놓고 가문의 등골을 빼먹겠다는 선언을 하네.
정말 범상치 않아.
“대인께서 허가장에 오신 이유가 무엇이었죠?”
“그······ 특수한 포탄이 필요해서.”
“화포와 화약이라면 관에서 금지하고 있기에 만들 수 없지만, 포탄이라면 허가장 산하의 대장간을 섭외할 수 있습니다.”
“······그거 소저의 뜻대로 됩니까?”
질문은 허신애에게 했지만, 가주와 소가주 보고 들으라고 한 소리다.
“그렇게 하지요.”
가주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대인께서 오히려 좋아하셔서 의외입니다만······ 실은 손녀딸의 이런 면모 때문에······.”
혼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에라이.
장난하냐?
이것이 상인.
눈도 깜짝 안 하고 코 베어 가려고 하네.
앞으로 더욱 주의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