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247
245화. 파기 전편 (3)
“항상 정장만 입으시네요.”
“왜, 이상해?”
“아뇨. 절대 그런 건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일할 때 정도는 불편하지 않으실까 했습니다. 정장은 착용감이 좀, 아무래도 그렇긴 하잖습니까.”
정하성은 제 옆의 각성자를 가만히 살펴봤다.
흉통에 딱 맞춘 조끼에서 시작하여 고동색의 옥스퍼드 구두로 끝나는 냉소적인 수트 차림.
기억을 뒤져봤지만 역시 상대방이 정석적인 포멀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는 듯하다.
물론 각성자는 물체와 접촉하면 기본적으로 ‘마력 전도’라는 특수 법칙을 따라서, 평범한 가위를 아티팩트급 흉기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고.
일부 고체에서 발현하는 저 현상 덕분에 시판품을 걸쳐도 최소한 방어력을 보장받아 B급 바람 속성 몬스터의 입김 하나로 헐벗은 나그네 꼴이 된다는 참사는.
다행히 벌어지지 않는 것이지마는.
신축성이니 뭐니. 편하게 만들었다고 아무리 광고해봤자 결국 저것은 정장이다.
정하성은 수더분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추정되던 인물이 트레이닝복 같은 선택지를 놔두고 굳이 양장 차림을 고집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지난 3개월간은 겸상해도 썩 잡담이 많지 않았던 영웅이 이런 사적인 질문이라니.
하지만 직접 운전까지 해서 인천에 데려다준 고마운 지구인에게, 이 정도 답례야 못 할 것도 없었다.
“역시 정장을 좋아하시는 편이십니까?”
“좋아한다기보단 개인적으로 입고 싶었던 옷이라서.”
“죄송한데 둘이 같은 의미 같은데요.”
“그런가?”
기려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상태로 입만 열어 답해줬다.
“사실은 ‘내’가 예전부터 유니폼을 입고 일해보는 게 소원이었어.”
어쨌든 거짓말은 아닌 문장.
“한때는 욕조 공장이나 배달 대행 같은 직종에서 일하고 살다가, 어찌어찌하다 보니 교도관 시험 준비를 시작했었는데…….”
“욕, 욕조? 욕조 공장이요?”
“지금보다 어릴 때 잠깐. 아무튼 수험생이 자기가 합격했을 때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쯤은 자주 있는 일이니까.”
“…그렇죠. 저도 대입 때 그러긴 했습니다.”
“깨끗한 유니폼을 입고 간수 일로 벌어먹는 게 내 장래 희망이었는데 그게 잘 안됐네.”
금발의 남자는 마치 제삼자의 이야기를 하듯 무미건조한 태도로 사담을 이었다.
“여러모로 잘 안됐어. 그래서 지금은 공무원 근무복 대신으로 이거라도 기분 맞춰 입는 중이지. 자기만족이야.”
휙.
시선을 내리자 바로 보이는 흰 셔츠.
방금의 말처럼 그는 잃어버린 몸 주인의 기억을 되찾은 뒤로, 차지한 그릇이 사망 당시 입고 있던 검은색 양복이 기려가 좋아하던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특정 복식을 유지했다.
‘사실은 에스더가 선물해 준 옷의 80%가 정장이라는 원인이 가장 크긴 해도.’
교정직 공무원이라는 꿈 외에.
이 육신의 진짜 주인이었던 지구인 김기려는 단순 노동 직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서인지 화이트 칼라에 대한 묘한 갈망이 있었다.
그래서 외계인은 이참에 생전에 동경한 그 사무직들의 옷이나 실컷 걸쳐보라는 의미에서 작금의 포멀 스타일을 고수했다.
어차피 이해도 못 할 지구식 유행.
발전한 해파리 입장에선 어떤 섬유든 결국 불편하긴 매한가지인데. 그렇다면 차라리 이 강제적인 문화에 작은 뜻이라도 부여하는 게 낫지.
‘효율적이고 좋잖아.’
기려는 제 목에 있는 실크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이때.
평상시에는 먼저 화두를 꺼내는 경우가 적었던 원시 술사가 다시 말을 걸었다.
“교도소에서 일하는 게 꿈이었다니. 확실히 김기려 헌터님 같은 분이 지키고 있다면 죄수 틈바구니에서도 안심이 됐을 거 같긴 합니다.”
“음, 미안하지만 그거 혹시 내 인상이 험상궂어서 범죄자들도 겁먹었을 거란 맥락으로 한 이야기니?”
“아뇨. 훨씬 정확하고 좋은 의미의 표현이 있는데 왜 그런 식으로 자책하시나요.”
“그 표현이 뭔데?”
“카리스마요.”
정하성은 벨트에 고정해 둔 일몰의 검 칼자루 위로 손목 한쪽을 걸쳤다.
그리고 기려의 검은색 넥타이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는 떠오른 문장을 바로 늘어놓기보다 제 머릿속의 거름망에 몇 번이고 들이붓곤 하는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유니폼 개념으로 저렇게 정장을 입는 거였구나.’
역시 특이하네.
기려와 대화를 할 때면 종종 예상치 못한 답변을 돌려받고는 했는데, 오늘도 그랬다.
눈앞의 파도 치는 바다와 함께 놓고 보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잠잠한.
저 각성자는 기실 무언가의 표면보다는 수권의 매우 깊은 해저와 닮은 차분하고 표리일체한 인물인데 왜 막상 말을 나눠보면 항상 이리도 예측이 어려울까.
‘머리카락이 온통 노란색인 걸 보면 염색을 주기적으로 하고 있단 소리인데. 의외로 외모에 관심이 많아서 잘 차려입고 다니시는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니었나…….’
하성은 미용실에 갈 주기가 한참은 지난 제 새치를 잠시 살펴보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아무튼 꿈을 못 이루셨다니 아쉬우시겠어요. 저도 다 아쉽습니다. 헌터님은 그 일도 잘 어울리셨을 것 같은데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예측이 어렵다고 생각한 지 몇 초나 됐다고 벌써 이런 생소한 질문이라니.
“너도 원래는 수의사 하려다가 각성해서 자퇴한 거라며.”
특정 직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니 정하성은 무덤덤하게 입매를 꾹 다물고 묘한 반응을 보였는데.
그때였다.
기려는 영웅의 눈치를 살살 보며 추가로 묻기 시작한다.
“하성아, 그런데 너는 이 일 계속할 거야?”
“예?”
“그냥, 헌터 쪽 일을 평생 할 생각이 있나 싶어서…….”
많은 뜻을 내포한 발언이었다.
어쩌다 보니 현대의 대표적인 영웅이 되어버린 정하성.
하지만 그의 본래 목표는 개나 앵무새 등의 소동물 전문 수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어쨌든 칼을 잡을 일이 있긴 한 직업인만큼 결국 운명적으로 피를 보는 건 회피할 수 없었을 테지만, 무언가를 살리기 위한 수술과 단지 내장을 가르기 위한 개복은 차이가 큰 법.
“힘든 일이잖아.”
게다가 강건한 신체와는 다르게, 저 청년은 정신력이 따라주지 않아 한때는 병원 신세까지 졌으니 원.
“솔직히 나는 정하성 네가 가끔 너무 쓸데없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생각해.”
“쓸데없는, 이요?”
“예전부터 말했지만, 각성이 뭐가 대수냐…….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데 외국에서 연구한 거 보면 최근 몇 년간의 각성 발현 통계가 이렇게, 딱 상향 곡선이거든?”
“…….”
“생각보다 우리 인류가 마력에 적응하는 속도가 빨라서 말이야. 아마 10, 20년만 기다리면 지금보다는 훨씬 각성자 비율이 늘어날 거야. 그럼, 헌터 시장은 커지고 시민들은 점점 자율 방어가 가능해질 테고.”
“그렇군요.”
“결론은, 네가 지금부터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세상이 망하거나 하는 최악은… 아마 없을 테니까. 만약 네가 그러고 싶기만 하다면, 사실 최소한의 필수 던전 브레이크 정리만 하고 살아도 사회는 멀쩡히 유지될 거야.”
기려는 철썩대는 파도 소리를 뚫고 정하성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헌터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퍽 신경 써주는 듯한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사실 내면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곳에 서 있는 F급의 사기꾼은 정하성에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한 상태이지 않던가.
한데 만약에라도 정하성 쪽에서 퇴직하게 된다면, 문제의 강의 보상(정규 팀)을 당사자에게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은퇴하지 못한다면 너라도 은퇴하게 만들겠다는 음침한 속셈!
‘정하성을 키워두는 건 어찌 보면 미래를 대비한 투자였으니 그간 들인 시간이 좀 아깝긴 하지만. 달성될 가능성도 없는 대가로 한 달에 60억 원어치의 사기를 쳐왔다는 게 들통날 바에는……!’
크윽.
금발의 남자는 긴장한 눈치로 상대의 답을 기다렸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 말입니까? 그거야 매일 하죠.”
오오!
한국의 네 번째 S급은 영혼 단위에서부터 들뜬다.
“그런데 안 그러려고요.”
그러나 불과 잠깐 사이에 곤두박질치고야 마는 내면.
“사실 저는 수의사를 뭐 대단한 사명감으로 목표했던 게 아니라. 그냥 성적은 어느 정도 되는데… 평소에 개를 꽤 좋아라하고, TV에서는 자꾸 앞으로 반려동물 시장이 더 커질 거란 이야기를 하니까.”
“…….”
“그런 직업이면 보통 돈을 많이 벌잖습니까?”
이윽고 흑발의 화염술사가 절대 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몸짓언어를 선보인다.
검지와 엄지를 이어 동그라미를 만들고 나머지 손가락은 가볍게 펼친 모습.
이곳에서는 금전을 뜻하는 전형적인 제스처다.
“어차피 백분율에 맞춰 고른 꿈이었습니다.”
“맙소사.”
“그러니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초능력 때문에 해야 할 직업이 바뀌더라도 뭐.”
어깨를 으쓱하는 하성.
그는 이전부터 주관이랄 게 없는 물 같은 성격이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유부단한 성향까지 강해 작금의 상황에 오히려 만족한다고 한다.
나 하나가 없다고 수많은 사람이 곤란해지는 세계?
따져보면 이만큼 보람차고 중요한 인생도 없지.
중년 회사원들이 으레 떠올리는 ‘내 삶의 의의는 무엇인가’라는 고찰을 정하성은 거칠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한국의 첫 S급이 된 거나, 능력이 제대로 조절되지 않을 정도로 마력량이 크게 각성해 버린 건 아무래도 너무 과했다고 생각하지만… 옆에 있는 이 사람 덕에 훈련으로 많은 부분을 개선해서. 사실 요즘은 그렇게까지 자괴감이 들지도 않네.’
하성은 담담한 태도로 뒷짐을 졌다.
그리고 특유의 깔끔하고 정석적인 옥성(玉聲)으로 대화를 끌어나갔다.
“김기려 헌터님.”
“어.”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아까부터 하시는 말씀들이 꼭, 제 퇴직을 은근히 종용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어?”
“마치 제가 헌터 일을 그만두면, 정규 팀에 넣어달라고 징징대는 꼴도 볼 필요가 없을 거라는 듯이…….”
“…….”
“기분 탓이겠죠?”
직후, 정하성은 눈을 크게 뜨고 누군가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지만.
“제 기분 탓이죠? 헌터님?”
“으, 응.”
“대답 감사드립니다.”
아무튼 괜찮았다.
저번 부대찌개 집의 겸상 이후로 정하성이라는 지구인의 태도가 눈에 띄게 변한 것은 이미 외계인 본인도 인지했으나, 여하튼 당장 통구이 신세가 아닌 걸로 감사할 일일 터다.
김기려는 체온조절인지 뭔지 모를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이내 말했다.
“그나저나 하성아. 슬슬 배고프지 않아……? 여기까지 기름 써서 데려다줬는데 내가 고마워서라도 밥은 살게.”
“아, 식사요?”
“해산물 먹을래?”
“죄송하지만 제가 오늘은 마력 소모 액세서리를 깜빡하고 안 챙겼습니다. S급 각성자를 이 시간에 받아줄 식당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럼 뭐 근처에 빵집 많던데 빵이라도 사서 바다 앞에서…….”
이어지는 논의.
그렇게 두 S급 헌터는 인근 제과점에서 먹을 것을 골라 야외에서 끼니를 때우기로 일시 합의했다.
중간에 휴대전화를 꺼낸 정하성이 ‘그나저나 인천까지 왔는데 기념 삼아 식사 후에 게이트나 하나 깰까요?’라는 제안을 꺼냈지만, 동행인의 건조한 혹평과 함께 즉시 기각됐고.
“미쳤구먼. 이거 안 되겠네. 야, 정하성. 어차피 정해진 일정도 없댔는데 너도 나랑 같이 오늘 하루쯤은 쉬어야겠다.”
“예에?”
“너 내가 휴양 끝낼 때까지 공략 들어갔다간 봐라. 예전에도 말했는데 일에 그렇게 집중하는 건 병 된다니까? 아니면 이미 병이거나.”
터덜터덜.
정하성과 김기려는 새로운 식량을 공수하러 해안가를 나갔다.
그들은 일반인들을 피해 비교적 험한 지형까지 찾아 들어간 상태였기에 돌조각들을 한참을 밟고 나서야 모래사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데 아직 모래가 깔린 경계를 다 벗어나지 못한 시점에 그들 앞으로 익숙하면서도 의아한 정보값이 다가온다.
무겁거나 날카로운. 또는 은하수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괜히 연상되는 특유의 차가운 청자색 머리카락. 더불어 큰 키 같은 것.
“어?”
“뭐야.”
기려는 시야로 하나씩 들어오는 시각 자료를 종합한다.
‘강창호잖아?’
예의 맹약 대상자가 이 한낮의 모래사장에 등장했다.
검은색의 반소매 티와 긴 면바지를 가볍게 걸친 특이점이라고는 없는 행색. 게다가 콧대에는 떡하니 여름용 선글라스까지 걸치고 있어 언뜻 보면 평범한 피서객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 단위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큰 자산을 지닌 부자가 굳이 이런 공개된 장소를 올해 피서지로?
“김기려!”
아니나 다를까. 곧 상대방의 방향에서 진짜 목적이 나왔다.
어깨에 웬 골프용품 업체 로고가 적힌 보스턴백을 걸고 있는 거구의 각성자.
그가 다가오자, 김기려는 숨도 쉬지 않고 바로 의문을 표현했다.
“뭐예요?”
주어조차 제대로 말하지 않은 한 마디였지만, 계약자는 선글라스를 가방 겉주머니에 정리해 넣으며 무리 없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째 방향이 이상하다 했더니 진짜로 바닷가에 있었네. 이거 혹시 내가 어린 사람들 노는데 방해했나?”
“음?”
“미안해. 그런데 김기려 헌터께서 요즘 하도 헛짓거리를 자주 하셔서. 내가 사실 잠깐 다른 일을 하느라 네가 서울을 뜬 걸 뒤늦게 확인했거든?”
“아.”
“그래서 네가 이상한 수작으로 또 던전에 들어갈까 싶어서 급하게 따라왔는데. 분위기를 보니 그건 아니었나 봐?”
국민 영웅은 대화 도중 나온 헛짓거리라는 단어에 반응하여 불쾌감 섞인 눈초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김기려의 반응은 단조롭기만 했다.
“던전이요?”
감포항 사건 시기에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 저 한국인 스토커가 붙어 있는 한 이런 상황은 언제든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뻔히 예상되는 사건에 일일이 놀라줄 필요는 없는 법.
“텐타클 때 같은 우연이 어디 흔한 일도 아니고. 제가 왜 아무 이유도 없이 위험한 곳을 나다니겠어요.”
“흠.”
옆에 제삼자가 있긴 한데, 그래도 이 정도는 향상심을 직접 가리키는 말이 아니니까 괜찮으려나?
“어차피 맹약도 걸어놨는데 뭐가 그리 걱정이세요?”
“누가 별 희한한 방법으로 꼼수를 부리진 않을까 걱정이지.”
강창호는 슬렁슬렁 움직여 헌터 업계의 상위 순위자들이 서 있는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기려는 평탄히 대답하는 강창호의 태도를 보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고.
“저는 [기사의 맹약]을 어길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으니 안심하세요.”
이다음으로는 애초에 생명이 걸린 계약 따위를 어떻게 사람이 어기겠느냐는 등의 문장을 꺼낼 예정이었다.
-달그락.
하지만 어째서인지 금발 남자의 한마디가 끝나자마자 근처에서 알 수 없는 소음이 울렸다.
달그락이라니.
워낙 순식간에 지나간 거라 확신은 없지만, 이건 마치…….
“음?”
강창호는 이쪽으로 걸어오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문제의 소음이 들려오자마자 제 가방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는 뜻이다.
“아, 그렇지. 참. 이걸 잊고 있었네.”
그는 알 수 없는 몇 마디를 중얼거리다 잠깐 기다려 보라며.
너희에게도 신기한 걸 보여주겠다며 한쪽 어깨로 메고 있던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골프용품이 들어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정하성이 이런 생각을 할 때쯤이었다.
강창호의 방향에서 변화가 생겼다.
시종일관으로 은근하게 호선을 그리던 누군가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간 것이다.
조용히 무표정해진 강창호.
저 가방 내부에 대체 뭐가 들어있었길래 S급 헌터가 돌연 저런 반응을 하는가?
“…….”
강창호는 그저 눈을 살짝 크게 뜬 덤덤한 낯으로 가방 안쪽을 한참이나 살피다가, 곧 근처의 금발 각성자를 한 번.
그리고 가방 안에 담긴 무언가를 번갈아 본 뒤에 이런 반응을 보였다.
한참이나 말을 잃고 침묵하더니.
갑자기 눈살을 찌푸려가며 조용히 폭소한 것이다.
소리는 따로 내지 않았지만, 그 S급 헌터가 아래쪽 어금니가 다 드러날 정도로 이토록 크고 훤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겉으로만 보면 강창호의 웃음은 분명 그의 소년 시절을 짐작게 할 정도로 긍정적이었는데.
누군가의 머릿속에 불현듯 섬뜩한 경고등이 켜졌다.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