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f-standard grade analyst RAW novel - Chapter 133
132화
-옹케스토스(4)
디르케가 은 조각 하나를 주인에게 건네주자 여관 주인은 희희낙락하며 가장 큰 방을 이현 일행에게 단독으로 쓰게 해주었다.
게스트하우스처럼 여러 일행이 함께 묵는 형식이었다.
방문을 꼭 닫고 일행만 남게 되자 이현은 긴장을 풀고 긴 의자에 드러누웠다.
“여기선 그나마 화폐가 통하네.”
화폐라고 해봤자 정식으로 만들어진 화폐는 금이나 은화 정도였고, 이런 노점 거리에서 쓰이기엔 고액 화폐였다.
거래에 쓰이는 건 주로 구리 조각이나 은 부스러기 정도였다.
심지어 청동도 거래 수단으로 쓰기엔 너무 고액이었다.
“대부분은 물물 교환으로 거래를 하지요. 이곳은 항구 도시라 조금 더 화폐가 통용되는 편입니다.”
다행히 디르케가 우다이오스 가문에서 가져온 화폐가 있었기에 거래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 양이 많지 않아 곧 청동 주괴를 화폐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이현 씨, 아까 조심하라는 소리는 뭐였어요?”
나진이 이현에게 아까의 일을 질문했다.
이현은 다른 일행에게 아까 자신이 보았던 이노 아니, 세멜레의 정보와 거짓말을 밝혔다.
“맙소사, 세멜레라고 하셨나요?”
“아는 자야?”
디르케가 유독 놀라기에 이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디르케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바로 던전으로 사절을 보낸 에키온 가문의 가주예요.”
“……뭐?”
이번엔 이현이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 * *
옹케스토스는 이스메이아에 비하면 작고 위세도 약한 도시였다.
그나마 항구 교역으로 입에 풀칠하는 편이었지만, 배를 타는 사우레노르가 적은 탓에 큰 규모는 아니었다.
자연스레 옹케스토스의 왕은 권력이나 위세가 이스메이아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 결과가 지금 이노 아니, 세멜레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에키온 가문의 가주를 내 형제처럼 환영합니다. 하하하.”
세멜레를 환영하는 그의 태도는 도시의 왕이 아니라 마치 여관에서 호객하는 점원 같은 모습이었다.
비굴하고 자존심 상하는 짓이었지만, 그녀는 보에온의 맹주 이스메이아에서도 왕 다음으로 일컬어지는 에키온 가문의 가주였다.
이런 소도시의 왕보다는 훨씬 격이 높은 자였다.
“환대는 감사하지만, 오랜 여행으로 피곤하네요. 물러나 주시겠어요?”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아니, 어이없게도 손님은 세멜레였고 쫓겨나는 것이 주인인 옹케스토스의 왕이었다.
말도 안 되는 푸대접에 열이 받은 왕이 부욱 뿔을 드러냈다.
“뭐 더 할 말이라도 있어요?”
“아, 아닙니다. 제가 배려가 부족했군요. 편히 쉬시길.”
하지만 어쩌겠는가.
격의 높고 낮음은 신분보다도 더 뚜렷한 존재의 차이였다.
“왕이라는 작자가 한심하기는.”
물러나는 옹케스토스 왕이 세멜레의 중얼거림에 움찔했지만, 결국 분노를 삭인 채 방에서 물러났다.
오늘 밤, 그의 분노를 풀기 위해 인간 노예 몇이 채찍질을 당하겠지만, 불행한 그 노예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접근할까?”
세멜레는 왕이 마시는 최고급 꿀 음료를 들이켜며 이현 일행을 떠올렸다.
옹케스토스에 그들을 초대할 지인이 없는 것 같아서 왕궁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다른 접근 방법이 필요했다.
“분명 그 수컷 인간이 던전의 보스겠지.”
자기 딴에는 노예인 척하려 했겠지만, 이현에게서 풍겨 나오는 격은 노예가 가질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솔직히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세멜레는 본능적으로 격을 겨루어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절대 보통 놈이 아니야. 더 흥미가 생기네.”
이따금 그녀를 훔쳐보는 이현의 눈빛에는 숨이 멎을 정도의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다.
마치 눈빛만으로 자신의 모든 걸 샅샅이 파헤치는 느낌이었다.
이현의 눈빛을 떠올린 세멜레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을 느꼈다.
“나를 이 정도로 설레게 한 건 왕위를 빼앗아 간 오빠 이후로 처음이네.”
이현에게서 느껴지는 격의 품격,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이상하게 끌리는 던전의 냄새.
모든 것이 그녀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번식기에 든 사우레노르들이 이런 느낌일까?’
인간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건 평소의 세멜레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인간 수컷은 그 짧은 만남만으로 세멜레의 정신을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꼭 내가 갖겠어.”
세멜레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 * *
여관 판도케이아의 방에서 일행은 새로 알게 된 사실 때문에 생각에 빠져 있었다.
정체를 숨기고 그들에게 접근한 세멜레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였다.
“믿어지지 않네요. 그 콧대 높다는 에키온 가문의 가주가 직접, 그것도 정체를 숨기면서까지 저희에게 접근하다니요.”
“아는 사이야?”
디르케가 한숨을 깊게 내쉬며 말하자 이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디르케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어릴 적엔 몇 번 어울렸던 적이 있어요. 지금은 제가 몰라봤던 것처럼 세멜레도 저를 못 알아보는 것 같지만요.”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5대 가문의 자제들은 어릴 적부터 서로 만나며 교류를 쌓는다고 했다.
“훗날 이스메이아를 지배할 고위 귀족들 간의 인맥을 위해서라는 구역질 나는 이유에서였죠.”
디르케는 본인이 말하면서도 당장이라도 토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세멜레는 또래 아이 중에서 가장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샌가 무리를 이끄는 대장이 되었죠. 모두가 그녀의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신세였어요.”
“너도?”
이현이 다른 이에게 휘둘리는 디르케의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아서 되묻자 디르케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런 모습이 싫어서 일부러 어울리지 않았어요. 만약 나이 차이가 크게 났던 언니가 아니었다면 험한 꼴을 봤을 테죠.”
헬레와 그때부터 그녀에게 관심을 두던 파이오스의 보호 덕분에 괴롭힘을 피할 수 있었다.
“혹시 그쪽이 널 알아볼 일은 없어?”
이현의 걱정에 디르케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가문의 일을 싫어해서 교류는 거의 없다시피 했고, 가문과 절연한 이후에는 본 적도 없어요. 당장 저만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으니까요.”
거기다 지금의 디르케는 병간호를 핑계로 천으로 얼굴을 반쯤 가려 정체를 숨기는 중이었다.
“그 정도라면 세멜레가 우리를 알아볼 일은 없겠네.”
이현은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결국, 누가 목적인 거지?”
디르케나 리코스도 아니었다.
이노 아니, 세멜레는 함께하는 동안 리코스의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럼 자동적으로 남는 건 이현과 나진뿐이었다.
나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설마 저는 아니겠죠?”
“아무래도 제가 목적인 거 같습니다.”
생전 만난 적도 없는 건 당연할뿐더러 그녀가 이현의 정체를 알아챌 일은 없을 터였다.
그 순간 이현은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때 그 사절단…….”
이현과 같은 생각을 한 리코스가 중얼거렸다.
“그 사절은 주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름 위장까지 했는데?”
이현이 노예의 복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자, 나진이 지적해왔다.
“우리는 여기 사람들이랑 인종이 다르잖아요. 그래서 쉽게 알아챈 게 아닐까요?”
“아, 그렇겠네요. 젠장.”
이현이 그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멍청한 자신을 탓하며 혀를 찼다.
사우레노르 행성의 인간들은 대부분 지구의 라틴계 백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황인종인 나진과 이현의 외모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내가 던전 보스인 걸 알았다고 해도 왜 관심을 두는 거지?”
“던전에 사절과 선물까지 보냈던 걸 보면 주인께 목적이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리코스의 추측에 이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분명히 거절했고, 경고도 했는데 말이야.”
이현의 말대로 우호적으로 접근하는 세멜레와 에키온 가문에게 그는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단호히 선을 그었었다.
“세멜레는 집착이 강한 사우레노르예요. 한 번 거절한 것으로는 포기하지 않을 테죠.”
“디르케도 세멜레의 목적이 나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현의 질문에 디르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에 그녀가 원하는 게 있었을 거예요.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성격상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게 분명해요.”
세멜레의 강한 집착을 아는 디르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탐이 났던 장난감을 가지기 위해 그녀는 한 달이 넘도록 장난감을 가진 아이를 괴롭혀 결국 그걸 얻어냈었다.
“이현 씨, 던전 사람들은 괜찮을까요?”
나진이 남겨두고 온 사람들이 걱정되어 불안해했다.
이현도 걱정으로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최소한 협약을 지켜야 할 테니 던전 안으로 들어오진 않을 겁니다.”
디르케가 본가에 들르면서 알아 온 정보에 의하면 이스메이아의 왕이 이현의 던전과 얽히는 일을 엄히 금지했다고 했다.
“왕가인 에키온 가문의 가주라면 더더욱 왕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리코스도 이현의 말을 긍정했다.
“던전에는 언데드 부대도 있고 티타니아랑 민아도 있으니까요.”
이현이 그렇게 말하며 나진을 달랬다.
사실 이현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탐험을 포기하고 되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리고 크라쉬의 위협에 대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죽는 길일 겁니다.”
곧 던전에 닥칠 재앙인 크라쉬가 언급되자 일행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현 역시 한철의 이야기 속 크라쉬의 공포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을 아껴야겠어. 팀을 나누자.”
이현이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바꿨다.
“알을 이 방에 두고 모두 자리를 비울 수는 없으니, 교대로 움직이자.”
이현의 배려에 리코스와 디르케가 대단히 고마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 씨는요?”
“저는 정보를 구해오겠습니다.”
나진이 묻자 이현이 대답했다.
다른 일행이 교대로 움직일 동안 이현은 혼자서 움직일 생각이었다.
“정보를 구하다니, 어떻게요? 말도 안 통하잖아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잖아요? 말보다 보는 게 더 정확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아!”
이현이 씩 웃으며 자신의 눈을 가리키자 나진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이현은 분석안으로 거리를 살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걸로 가능하겠어요?”
나진의 걱정대로 분석안으로 알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이름, 종족, 격, 스킬, 그리고 간혹 업적까지 알 수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전에 리코스가 말한 대로 스킬은 평생 쌓여온 경험과 훈련의 결과입니다. 스킬을 알 수 있으면 대충 그 사람의 삶도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이현의 말에 리코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킬을 알아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던전이 강해지는 데 스킬이 중요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질문은 타당했다.
스킬이 있는 사우레노르를 납치해서 던전으로 데려가지 않는 한, 던전이 강해지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내가 찾는 건 정보 관련 스킬이거든.”
이현의 말에 리코스를 비롯한 일행은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스킬, 혹은 정보랑 관련 있는 스킬을 가진 자를 찾을 거야.”
항구 도시인 옹케스토스는 물자와 함께 정보도 함께 드나드는 곳이었다.
그중에는 필히 정보를 다루는 데 삶을 바쳐온 이들도 있을 터였다.
“원래라면 비밀리에 활동하는 자들이겠지만, 내 앞에선 숨을 수 없겠지.”
평범한 상인이나 시민으로 위장하고 있다 해도 이현의 분석안에는 고스란히 스킬이 드러날 터였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찾아내면….”
“그들을 통해서 정보를 얻는다는 소리군요”
드디어 이해한 리코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디르케에게 협상을 맡길 거야. 협상의 수단이 될 건 많으니까.”
잔뜩 쌓인 청동 주괴든지 날카로운 도끼날이라든지.
재물이든 폭력이든 협상의 수단은 충분했다.
“자, 그러면 움직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