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Life Returner RAW novel - Chapter 31
9 화
마스터 박스!
첼린저 박스 바로 아래 다.
역시 차순위자에게도 넉넉하게 구는 시스템다웠다.
“아……
반면에 우연희는 실내에 이 열로 배 치된 열 대의 컴퓨터들을 보고선 또 할 말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옷 못 봤어?” “종이봉투? 내 거였어?”
“샤워부터 하고 와.”
우연희가 샤워하는 동안,사설 업체 에서 보내 온 사진들을 확인했다. 이번에도 꽝이 었다.
우연희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 녀는 차순위 각성 보상자가 아니 었다. 즉, 팔악팔선 녀석들 중 한 녀석에게 차순위 각성 보상이 들어갔을 확률이 높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능성 높은 것은 다름 아닌 일악(一惡) 혹은 일선(一 善).
그래도 우연희가 차순위 던전 발견 자 지위를 획득한 걸 보면 팔악팔선 놈들은 물론이고 어느 사전 각성자도 던전을 발견하는 불행을 겪 지 못했다. 아직까지는.
잠시 후.
우연희가 머리 젖은 꼴로 나타났다. 이번에 얻은 부상 때문에 그렇지 그녀 의 피부는 사전 각성자답게 일품이다. 잡티 하나 없이 청초하기 그지 없다. 그녀의 자취방에도 화장품은 최소로 만 준비되어 있었다.
본인의 피부가 타고났다고 생각해
왔겠지만.
애초부터 주름에 바르는 화장품 따 위는 필요 없는 게 우리 각성자들이지 않은가.
“이리로 와서 앉아.”
내가지시했다.
야산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냐고는 따로 묻지 않았다.
그녀가 일주일간 헤매다 던전 입구 를 찾아냈다면, 그동안 그녀가 겪 었을 일이야 뻔했다.
밟으면 그대로 찌그러질 것 같이 작 은 몸을 하고서는 의외의 강단이 잠재 되어 있었던 애송이였다.
펜과 종이를 내밀었다. 우연희는 일 전에 아버지의 신상 정보를 썼던 걸 먼저 떠올렸던지,‘누구?’ 라고 되물 었다.
“상태 창을 띄우고 보이는 대로 써. 특성 정보와 스킬 목록까지.”
“상태 창.”
우연희가 펜을 들면서 중얼거 렸다. 그렇게 받은 우연희의 정보는 다음 과 같았다.
[ 이름: 우연희 정신: F (20)누적 포인트 : 50
특성 ⑴ 스킬 (3)] [ 감응 (특성)
효과: 불규칙적으로 대상의 감정이 전해 집니다.
등급: F (0) ] [ 공포증 치료 (스킬)
효과: 자신을 제외한 대상의 공포증을 치료합니다.
등급: F (0)
재사용 시간: 24시간 ] [ 육체 치료 (스킬)
효과: 자신을 제외한 대상의 육체 부상 을 치료 합니다.
등급: F (0)
재사용 시간: 5분 ]
거기까지는 평이하다. 기다리고 있 던 바는 지금 작성 중인 마지막 스킬 하나, 마스터 박스에서 나왔다는 물건 이었다.
[ 마리의 손길 (스킬)효과: 대상의 전투 불능 상태를 비약적 으로 상쇄시깁니다.
등급: F(0)
재사용 시간: 24시간 ]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는 마스터 박스에서나 나올 법한 물건이다.
훗날 우연희가 쓸 코드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리.
그것이 그녀가 쓸 코드명이다.
S, A급 헌터들 중에서 마리라는 코 드명을 썼던 자가 있었다면 바로 기 억 해 냈을 것이다.
그랬다면 마리의 손길이라는 잠재력 A급의 스킬 효과.
‘전투 불능 상태를 비약적으로 상쇄’ 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단번에 파악 했을 것이다.
“시스템에선 단어의 정의가 중요하 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상쇄라 면, 이 스킬은 양날의 검이나 다름없 어.”
마저 덧붙였다.
“하지만 리더와의 스킬 보유자의 집 이 클수록, 이만큼 좋은 스킬도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겠어?”
“우리의 팀워크에 대한 것이지?”
맞혔다.
“이건 대상의 부상을 자신에게 가져 오는 스킬이라고 본다. 등급 보이지? ■,.,,
우연희가 고개를 끄덕 였다.
“처음에는 리스크가 커. 하지만 스킬 등급이 올라감에 따라 리스크도 줄어 들지. 효과,지속 시간,재사용 시간 같은 것들. 이 경우도 그럴 거다. 오늘 훈련은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 군. 몸 상태는 어때?”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우연희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졌 다.
이번에는 둘 다인 것 같았다. 내가
느끼기 시작한 긴장감에 더불어, 그녀 본인의 긴장감까지 더해지고 있을 것 이다.
고통은 절대 익숙해지는 게 아니다. 수없이 겪어 왔어도 늘어나는 건 인내 (忍耐)뿐이지 자극이 무뎌지는 법은 없었다.
전투 상태에서는 흥분으로 가득 차 서 그나마 덜한데.
이렇듯 스킬을 시험할 때는 밀려오 는 자극과 통증에 집중하고 말아진다.
운동실로 나가 서 랍장을 열 었다.
뒤따라온 우연희는 컴퓨터실에서 보 였던 반응을 고스란히 반복하기 시작
했다.
그녀의 두 눈에 주사기와 엠플 그리 고 플라스틱 약통들이 한가득 맺혔다.
“알겠지만 나는 힐러가 아니야.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고통을 덜어 주는 것 뿐이다.”
그렇게 말하며 주사기를 엠플에 꽂 았다. 엠플액이 빨려 들어왔다. 그것 을 철제함에 갈무리하고서 일어났다.
그녀에게는 먹는 알약보다 피하에 직접 주사하는 방식이 필요해 보였다.
“뭘 하려는지는 알겠지?”
우연희에게 물었고 그녀는 동그래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 였다.
전투 불능에 빠지는 건 어떤 식이 좋 을까.
복싱장에서처럼 나를 끝없이 때려 보라고 할까? 오히려 그녀의 손뼈가 먼저 분질러질 거다.
표적지로 걸어갔다.
거기에 꽂혀 있는 단검 하나를 빼내 서 우연희에게 내밀었다.
“뭐해. 받지 않고. 칼 갖고 싶어 했잖 아. 그거 생각보다 비싼 거다.”
“……선후야?”
나는 우연희의 손에 단검을 쥐여 준 다음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뒤처리는 귀찮다. 피는 의외로 잘 지
워지지 않는다. 세면실은 우연희가 샤 워를 하고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증기가 여전히 뿌옇게 채워져 있었 다.
우연희는 단검을 쥔 채로 떨면서 들 어왔다.
지극히 당연한 반응.
그래서 그녀를 재촉하고 싶지 않았 다.
“이렇게 진행될 거야. 그걸로 날 찌 르고 내가 전투 불능에 빠지면. 그러 니까 하라고 할 때 너는 마리의 손길 을 시전한다. 상쇄? 전이(轉移)라고 표현해도 되겠지. 내 부상은 네게로
전이된다. 너는 끔찍하게 아파지겠 지.,’
“이 층은 내가 다 쓰는 데다가 위 아 래층도 다 비워져 있어. IMF잖아. 비 명을 참지 않아도 돼.”
거기까지 말하고선, 주사기가 든 철 제함을 바닥에 내 려놓았다.
“스킬을 시전한 후에 그걸 허벅지에 꽂아. 효과는 장담하지.”
제 심장이 얼마나 빠르게 뛰는지 확 인하고 싶어서였을까.
우연희는 자신의 심장 부위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 전에 옷부터 벗자.”
상의를 탈의했다.
그것을 수건걸이에 걸어 놓은 다음 우연희를 기 다리기 시작했다.
우연희는 조금 망설이고 있었다.
한때 제자라고 생각했던 남자 앞에 서 상의를 벗는 게 수치스러울 수도 있겠다만.
우연희가 망설이고 있는 진짜 이유 는 제 손에 쥐어진 단검 때문인 것 같 았다.
부들부들.
검 끝이 팔 전체와 함께 떨리고 있 다.
이윽고 우연희가 상의를 벗었다.
속옷에 가려져 있는 작은 가슴을 양 팔로 감싸며 내 시선을 피하는 건, 그 래 그것도 당연한 일이다.
고작 일주일간 야산을 헤매고 다녔 다고 해서 한국 여자 우연희가 헌터 마리로 단번에 변신하는 건 아니지 않 은가.
우연희가 상의를 벗기 위해 내려놓 았던 칼을 주워 들었다.
“칼로 찌르고, 칼에 찔리는 거다. 우 연희. 준비됐어?”
“됐어.”
우연희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단검 손잡이를 움켜쥐게 된 우연희의 두 손.
나는 그것을 천천히 내 복부 쪽으로 잡아당겼다. 정확히 췌장에서 살짝 비 껴 나간 부분이었다. 차가운 금속 일 점(一點)이 피부에 닿았다.
“있는 힘껏 찔러.”
우연희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 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하지만 바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한 참을 부들부들 하던 끝에.
다시 외친 내 목소리가 신호탄이 되 었다.
“찔러!”
화악 –
화끈한 게 복부에서 번졌다. 이가 악물어졌다.
우연희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 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형용할 수 없 는 표정으로,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 까지 맺혀 있었다.
그런 우연희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 다.
“잘했어. 적당히…… 큭…… 자리 잡 고 있어.”
빌어먹게 아프다.
손잡이만 남아 있는 단검을 한 손으 로 움켜쥐었다.
그때 우연희는 욕조에 기댄 채로 주 저앉아 있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가슴에서 문신 을 발견했을 때만큼이나,우연희의 두 눈이 눈물로 가득 차 있더니. 그렇지 않아도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 렸다.
그 시점에서 단검을 뽑아 버렸다. 내 몸은 저절로 떨리기 시작했다.
우연희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처 럼 그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당연
한 일이었다.
나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찔린 부위 에서 피가 샘솟아 나오고 있었다.
우연희에게는 타일을 따라 구불구불 흘러가는 핏물들이 살아 있는 생물처 럼 보였는지, 제게도 흘러온 그것을 망연자실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다급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우연희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직이야?”
“기다려……
애초부터 눈알을 도려낼 것이 아니 었다면 피가 더 쏟아지길 기다려야 했 다.
예기된 한기가 찾아왔다. 몸이 더 심 하게 떨리는 시점에서 눈앞이 가물가 물해지고 있었다. 기다려 왔던 메시지 도 그 순간만큼은 뿌옇게 보였다. 화 장실에 가득 차 있었던 수증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딴 것들은…….
[역경자가발동하였습니다.]그 순간이었다.
흐리멍텅하던 메시지들이 갑자기 뚜 렷해지며 온몸의 떨림도 잦아들었다.
나는 목소리를 터트렸다.
“지금.,,
우연희는 내 지시를 기다리고만 있 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새로운 메 시지와 함께 우연희의 비명 소리가 귀 곡성처럼 울렸다.
“아아악! 아아아-”
[ 우연희가 마리의 손길을 시전 하였습니다. ]역경자 특성으로 근력과 민첩이 한 등급 올라간 상태 라 약간의 근육 움직 임만으로도 몸이 튀어오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
몹시 가뿐하다.
일전에 역경자 특성을 터트렸을 때
보다 훨씬!
그때는 소폭의 부상 회복과 고통을 일시적으로 잊을 수 있을 뿐이었지, 부상 부위에서 오는 반사 반응에 완전 한 컨디션을 찾은 게 아니었다.
한편 우연희의 비명 소리가 계속되 고 있었다. 그녀는 비명 중간에 숨이 끽꺽 넘어가는 소리를 내뱉으며 바닥 에 쓰러져 있는 상태 였다.
우연희가 배를 깔고 있는 바닥에서 새로운 핏물이 시작됐다.
그것들이 흥건히 잔존해 있던 내 핏 물을 하수구로 밀어내고 있었다.
우연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그 정도로 안 죽어. 미칠 듯 이 아픈 것뿐이다.”
우연희의 새파래진 고개가 천천히 들려졌다.
호소하는 눈빛이 간절했다.
거기에 대고 나는 한마디만 뇌까렸 다.
“주사기를 꽂아. 우연희.”
정신 잃은 우연희를 바라보고 있으 면 정말로 옛 생각이 난다.
안타깝게 사그라져 버린 애송이 녀 석들. 절대 잊을 수 없을 거라고 탄식 했던 얼굴들인데, 숫자들처럼 선명하 지가 않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나를 부르던 소리만 아련하다.
“길드장님. 길드장님! 홍콩에서 던전 이 떴답니다. 자그마치 S급이랍니다!”
나를 이 새끼 저 새끼라고 부르지 않 기까지,사이코 녀석들을 사람으로 만 들기 위해서 얼마나 갖은 노력을 다했 던가.
특히 한 녀석에게만큼은 더 큰 공을 들였었다.
그녀석.
운발이 엄청났던 녀석.
담배를 물었다.
회귀한 이후로는 처음 무는 담배였
다.
후우 –
창밖으로 담배 연기를 뿜고 있을 때 우연희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창틀에 눌러 꼈다.
“움직이지 마. 일주일은 꼼짝없이 누 워 있어야 돼.”
“갑자기 억울해지네. 이런 몸이란 걸 진작 알았다면 병원 같은 데는 안 갔 을 거야. 참으면 될 걸.”
우연희가 끄응 하는 신음 소리와 함 께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척이고 나서 야 발견한 모양이 었다.
우연희는 속옷을 포함한 전부가 새 것으로 갈아입혀진 제 모습을 내려다 보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어졌다. 이 윽고 그녀가 제 손에 꽂힌 링거로 관 심을 돌렸다.
“못 하는 게 없네?”
비 마약성 진통액이다. 계속 마약 성 분만 밀어 넣을 수는 없으니까.
“나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는 건 아니 야?”
“던전 외에도 할 일이 많다. 당분간 은 너도 낫는 데에만 집중해.”
“저쪽 방의 컴퓨터들을 봤어. 화이트 보드와 벽보들도. 그것들 주식 거래에
쓰이는 것들이지?”
“관심 있어?”
“나 이제 부자잖아. 누구 덕분에.” 우연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 사람과는 어떤 관계야? 무척 친 근하게 대하던데. 널 많이 걱정해 주 기도 하고.”
“진통액 때문에 다 나은 것 같겠다 만,그쯤 하고 더 자라.”
“자고 싶은데 계속 걱정돼. 나, 너무 많은 돈을 받았잖아.”
“어디에 뒀어?”
“장롱 속에 가방들 그대로. 은행에는
바로 넣지 말라고 했잖아. 산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도둑이 들지 않았을까 너무 걱정돼. 갈 수만 있다면 지금 당 장 가서 확인하고 싶은데.”
“……그럴 거면 은행에 그냥 집어넣 어. 세무 조사란 게 2억 가지고 그렇 게 쉽게 들어오지 않아. 가능성의 문 제지.”
“이런 몸이잖아. 부탁해도 될까?” 우연희가 링거 꽂힌 손을 들어 보이 며 말했다.
“퀘스트라면 포인트라도 주지.”
등을 돌렸다.
“내 자취방이 어디인지는 알아? 열
쇠는 차 속에 있을 거고……
뒤 쪽에서 우연희의 설명이 이어졌 다.
그녀가 우려했던 일은 없었다. 우연 희의 자취방은 이틀 전에 둘러봤던 그 대로였다.
현금 2억 이 나눠 들어 있는 가방뿐만 아니라 그녀의 옷과 속옷 그리고 세면 용품들도 함께 가지고 돌아왔다.
“고마워. 귀찮았을 텐데.”
우연희는 복부의 압박 붕대를 풀은 상태 였다. 약간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 긴 했지만 그뿐,신기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조금씩 아물고 있어.”
“다 나을 때까지 여기서 머물러. 딴 소리 나오지 않게 집에도 연락해 두 고.”
“그건 걱정할 것 없어.”
우연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 지만, 순간 스치고 간 씁쓸한 미소의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을 도와주고 있는 거야?”
또 조나단 이야기였다. 그러고는 혼 자서 단정 지어 버렸는지,우연희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조나단과 다름 없어졌다.
“너무 갑자기 생긴 목돈이라서 어떻 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은행에만 넣어 둬도 이율이 17% 다.,,
우연희는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숫 자인지 알 턱 이 없었다.
IMF가 터지기 직전까지만 해도 꾸 준히 경제 성장을 해 온 시기였던 탓 에 두 자리 수 이율은 당연한 일로 취 급되 었다.
그래서 대중들의 제테크 수단은 별 게 아니 었다. 한 푼 두 푼 모아 적금을 드는 것. 그리고 실제로 그게 먹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두 자릿수 이율이라니. 나중 에는 헤지 펀드에게 수십 억을 맡겼을 때에나 그만한 수익률을 볼 수 있다.
“그런 몸으로 돈이야기냐?”
“던전이 밥 먹여 주는 거 아니잖아. 백조가 되니까 생각이 많아지네. 부자 백조.”
우연희는 빙그레 웃고는 또 통증 때 문에 인상을 껑그렸다.
백조. IMF가 낳은 신조어.
추억의 단어에 나는 그만 피식하고 웃어 버렸다. 확실히 기특한 애송이에 게 마음이 조금 풀어지고 있는 것 같 았다.
그래도 된다. 우연희는 기대 이상으 로 잘 따라와 주고 있었다.
그녀는 각성자인 자신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비록 시험의 장을 겪지 않 아서 육체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 모두 뒤떨어지긴 하지만.
시험의 장을 겪지 않았다는 것 자체 가 오히려 내게는 이점이 될 수 있었 다.
등 뒤를 내놓고도 안심할 수 있을 테 니까.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몰라 항상 그쪽 을 경계하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주식에는 손도 대지 마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잠이나 자.”
두 명의 박(Park).
온 국민들에게 잠시나마 IMF의 설 움을 잊게 만들어 준 두 영웅의 전성 기와 함께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의 박이 미 델리어웨주에서 여성프로골 프협회 (LPGA) 챔피언에 등극하던 날
우연희는 더 이상 누워만 있을 필요 가 없어졌다.
“와!”
우연희가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리는 같은 장면을 보고 있었으나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 자면 관점이 달랐다.
우연희는 여성 영웅이 우승을 결정 지은 골프공을 바라보고 있으나,나는 그 순간 여성 영웅의 모자에 박힌 스 폰서 로고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부를 때까지 대기해. 체력 단 련 잊지 말고.”
우연희를 뒤로하고선 몸을 일으켰 다.
금고에서 장부를 꺼내 컴퓨터실로
들어갔다.
확인한 대로였다.
굳이 일성뿐만 아니라 모든 재벌 기 업들의 지배 지분 재편성 작업이 IMF 의 혼란을 틈타 진행 중에 있었다.
물론 하루 이틀 사이로 완료될 일이 아니긴 하나,시기를 놓쳐 버리면 그 들의 지배 구조를 뚫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닐 것이다.
내 나름대로 계산한 데드라인은 10 월.
주식 시장이 안정세를 되찾을 그 무 렵이 넘어가면 재벌 기업들의 지배력 만 공고해질 뿐이다.
모니터를 여러 개 띄웠다.
시간 차로 들어오는 짧은 포지션에 러시아 시장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 다.
전초전이긴 하지만 치열한 양상이 펼쳐져 있다.
두 개의 진형이 전쟁 중이었다.
러시아가 망하지 않을 거라는 진형 하나와 망할 거라는 반대의 진형 하 나.
반대 진형은 다름 아닌 맨 섬이 본거 지일 터.
뉴욕은 오나이더 어소시예이츠를 인
수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인수를 끝마 치고 이 전쟁에 뛰어들려면 몇 주는 더 걸릴 일.
나는 장부를 펼쳐 놓고,벌써부터 머 리가 지끈거렸다.
역외에 남아 있는 삼십억 달러.
그 자금들이 천여 개에 이르는 유령 회사에 다양하게 분산되어 있다.
그 말인즉,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장부를 대조해 가면서 일천 개의 투자 기업에서 해야 할 업무를 수행해 나가 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러시아 시장에서 전초전이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곧 러시아와
관련된 영역들도 전장으로 변할 것이 다.
유럽 주요국,아시아 주요국,원유 등.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를 주시하고 있을 세력이 없다는 거다. 아시아를 놓고 한판 벌였던 헤 지 펀드들 간의 전쟁에서는 조나단이 완승을 거둔 걸로 되어 있다.
그러니 사설 조사 업체를 쓰면서까 지 내 뒤를 쫓는 세력은 없을 것이다.
화마(火魔)의 시작은 태국이었다.
최종 목적지인 우리나라에서 있는 힘껏 타올랐다. 하지만 남겨진 불씨가
러시아로 옮겨 붙었다.
러시아발 금융 전쟁이 시작됐다. “판돈부터 키워 볼까.”
98년 6월 초.
조나단은 러시아에 있었다. 그에게 도 기다리고 있었던 초청장이 날아왔 다.
18세기 러시아 제정시절에 지어진 화려한 건물 안에는 러시아 정, 군의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조나단과 같은 미국인들도 상당했다.
그중에는 미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현직 고위층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 전직 대통령과 악수를 나눈 조나 단은 월가의 보석이라는 찬사를 받고 선,멋쩍은 미소와 함께 주위를 두리 번거렸다.
물론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금빛 테두리를 단 현수막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행사 참석자들에게 이렇게 말하 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예요. 우리,러시아. 우리가 어떻게 망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 우리의 국채를 사세요. 이율 조대박을 보장한답니다.
“이게 누구신가.”
조나단을 알아본 한 사람이 접근했 다.
이 행사를 주최하고 있는 실버만 삭 스의 고위 관계자였다.
조나단과 같은 미국인이면서,러시 아까지 날아와 러시아의 국채를 대신 팔아 주고 있는 자다.
“자네가 왔다는 건 좋은 징조지. 로 건이네.”
그는 조나단의 참석을 진심으로 반 가워했다.
“알고 있습니다. 조나단입니다.”
“축하하네. 오나이더 어소시에이츠 건을 들었네. 이러다 조나단 인베스트 먼트가 경쟁사가 되겠구만. 그건 그렇 고어때 보이나?”
“훌륭합니다.”
“자네도 이왕 온 김에 거들고 가지 그래?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걸세.”
“그렇지 않아도 쇼핑 중입니다.”
조나단은 샘플 보고서를 들어 보였 다.
이 행사를 위해 실버만 삭스에서 참 석자들에게 배포한 것이 었다.
그리고 단순히 보고서로써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보고서에 미리 달아 둔 라벨에는 대상의 이름과 함께 색깔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다.
붉은 색 스티커는 VIP 등급을 뜻했 다.
조나단의 샘플 보고서에도 똑같은 색의 스티 커가 반짝였다.
“보다시피 본 행사를 성공적이라네. 이로써 러시아는 숨통이 트일 거야. 다 팔리기 전에,자네도 서두르는 게 좋을 거네. 얼마 남지 않았거든.” 남자가 떠났다.
조나단은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코웃음 쳤다.
‘실버만 녀석들. 러시아가 망하지 않 는다고 정말 믿고 있는 건가. 판매 대 행을 하면서 수수료는 대체 얼마나 챙 기는 거야? 5천만 달러? 1억 달러? 돈 벌기 아주 쉽지, 그래? 웃을 수 있을 때 웃어 둬. 다 토해 내게 되거든.’
그러던 문득 조나단은 웃음이 났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도 러시아는 절대 망하지 않을 거 라는 사람 중에 한 명 이 었지 않았던 가.
그때.
조나단의 두 눈이 부릅떠 졌다.
‘찾았다!’
조나단은 애초부터 러시아 국채 하 나만 보고 온 게 아니 었다.
이 긴 비행을 감수했던 까닭은 선후 의 회신에 포함되어 있었던,지시 아 닌 지시 때문이었다.
조나단은 옷매를 추슬렀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오늘을 위해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서도 간단한 러시아어를 배우고 온 그 였다.
“안녕하십니까. 블라디미르 행정 실 장님 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