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9
8. 임무 유형, 생존(2)
* * *
지드와 한슨의 시체는 고블린들 사이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는다.
수백, 수천 쌍의 빨간 눈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
“제나, 등 뒤의 벽 보이냐?”
“보여요.”
“그 벽을 타고 올라.”
우리가 등지고 있는 높은 벽. 그 위에는 건물의 지붕이 펼쳐져 있다. 제나는 슬쩍 뒤를 보았다.
“이러면 저 혼자 도망치는 건데.”
“누구 맘대로? 네가 오르면 다음에는 내가 오른다. 다음에는 아론. 넌 먼저 올라가서 손이나 내밀어줘.”
“알았어요.”
아론의 꼴은 말이 아니다.
말할 여유도 없는지, 가쁜 숨을 내쉬고 있다.
“온다! 아론, 자리를 지켜!”
“먼저 갈게요!”
제나가 돌담을 오르기 시작했다.
“키야아아아!”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일거에 몰아쳤다. 나는 반원을 그리듯 베었다. 고블린들의 가슴팍이 속살을 드러냈다. 아론도 창을 거칠게 휘둘렀다.
“찌르기는 쓰지 마! 한 번에 한 마리는 안 돼!”
나는 방패로 검격을 막은 다음 후려쳤다.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고블린의 수가 대폭 늘었다. 아무리 나라도 다 막고 피할 수 없다. 곳곳에 잔상처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다 올랐어요! 빨리 와요!”
“간다!”
여력을 쥐어짜 길게 휘둘렀다. 고블린들이 토막 났다.
그리고 즉시 등을 돌려 돌담을 올랐다. 곳곳이 파여 있어 딛고 올라설 틈은 있다.
[03 : 12]“아론, 너도 올라와!”
“…….”
“안 들리냐!”
불현듯 정신을 차린 아론이 이쪽을 돌아봤다.
“아, 안 들려서. 가, 가, 갑니다!”
“손 잡아요.”
제나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피로 얼룩진 그 손을 잡고 지붕에 올라왔다. 아래에는 황급히 올라오는 아론이 있었다.
“내 손을 잡아라.”
나는 지붕 위에서 손을 내밀었다.
아론이 손을 잡고 올라오려는 찰나.
“컥!”
아론이 신음을 질렀다.
“…….”
아론의 종아리에 칼이 꽂혔다.
칼은 벽의 틈새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저, 저는 안 될 것…….”
“제나, 아론을 잡고 있어.”
지붕 끄트머리를 잡고 담을 내려갔다.
“뭐하려는 거예요?”
“발을 자른다. 자르면 바로 끌어올려.”
“……알았어요.”
왼쪽 손으로 지붕을 잡은 채, 오른손의 검을 세게 휘둘렀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자세지만, 단번에 잘라야 한다. 짚단 허수아비를 일격에 베던 그 느낌을 떠올렸다.
“아아아악!”
아론의 다리 한쪽이 피를 뿌리며 공터로 떨어졌다.
“끌어올려!”
제나가 아론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잡고 끌어올렸다.
잘린 다리에서 흐르는 뜨거운 피가 얼굴을 적셨다.
“퉤.”
나는 입가에 들어온 피를 내뱉고 다시 지붕으로 올랐다.
[‘아론(★)’이 출혈에 걸렸습니다. 일정 시간마다 체력이 감소합니다.]아론은 몸부림칠 힘도 없는지, 지붕 위에서 축 늘어졌다.
나는 지붕 아래를 내려다봤다.
“하, 진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고블린이 지붕 아래에 모여 있었다. 고블린은 우리를 올려보며 끽끽거렸다.
“된 건가요?”
“그럴 거 같냐?”
고블린 한 마리가 엎드렸다. 다른 고블린이 그 위에 올라 엎드렸다. 고블린들은 피라미드를 쌓기 시작했다.
“우와, 똑똑하네.”
“똑똑하기는 개뿔!”
맨 위의 고블린은 돌벽의 틈을 집을 수 있었다. 그렇게 계단을 만든 고블린이 차츰차츰 벽을 타고 올라왔다.
지붕을 살폈다. 성치 않은 지붕에는 망가진 벽돌 조각이 널려 있었다. 나는 벽돌을 아래의 고블린에게 던졌다.
“쿠엑!”
코에 정통으로 벽돌을 맞은 고블린이 추락했다.
“못 올라오게 해!”
“네!”
그나마 있던 벽돌도 다 떨어졌다.
이제는 아예 사방에서 고블린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제나는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아론(★)’이 빈사 상태에 빠졌습니다. 목숨이 위험합니다!]아론은 시체처럼 늘어져 있다.
죽지는 않았지만, 머지않았을 것이다. 출혈이 너무 심했다.
“아론의 창을 써. 오는 대로 다 찔러버려!”
제나는 단검의 날을 검지와 중지로 잡고 집어던졌다. 단검은 고블린의 미간에 꽂혔다.
창을 집어든 제나는 아래로 찌르기 시작했다. 나도 검을 길게 세워 올라오는 고블린들을 마구 찔렀다.
맨 위의 고블린들이 아래에 있는 놈들을 길동무 삼아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지는 놈들보다도 올라오는 놈들이 더 많았다.
한 벽의 고블린을 떨어뜨리면 다른 벽의 고블린이 올라오고, 그 벽으로 가면 다시 원래 있던 벽에서 올라온다.
‘다른 도망칠 곳은…….’
나는 지붕 위로 손을 짚으려는 고블린을 발로 걷어차면서 주변을 살폈다.
‘제길.’
다른 지붕들은 이미 고블린들에 의해 점거된 상태다. 놈들은 눈을 새빨갛게 빛내면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꺄아악!”
“뭐야, 찔렸어?!”
나는 황급하게 뒤를 보았다.
여기서 제나가 당하면 곤란하다. 나 혼자서 사면을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제나가 오른팔을 부여잡고 있었다.
다치진 않았지만, 가지고 있던 창이 없었다.
“창을 놓쳤어요.”
“간 떨어지게 할래!”
“이제 어떡하죠?”
“어떡하긴. 발로 차서 떨어뜨려!”
제나는 지붕의 경사면 위에 몸을 누인 채, 올라오는 고블린의 안면을 걷어찼다. 놈은 쿠엑, 소리를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 01 : 24 ]“끼이이, 끼이이익!”
담벼락 아래에서 수십 개의 손이 물결치더니 검을 움켜쥐었다. 초록색 살갗이 베여 피가 흘렀지만 고블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끌어당겼다.
“큭!”
나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놓았다. 검은 고블린의 파도 속에 삼켜져 사라졌다.
남은 거라곤 곳곳이 찌그러지고 피투성이 된 방패 하나뿐.
나는 지붕에 올라온 손을 방패 모서리로 찍었다. 잘린 고블린의 손가락이 피를 뿌리며 허공을 날았다.
“너무, 너무 많은데요! 얼마나 남았어요? 더 이상 못 버틴단 말예요!”
“30초다, 30초만!”
“1시간은 지난 거 같은데에!”
“진짜야, 한 번만 믿고 좀만 더 버텨!”
[ 00 : 32 ]시야가 흐릿하다.
오른쪽 눈이 피로 뒤덮여 잘 보이지 않았다.
내 피인지, 고블린의 피인지 분간할 수 없다.
몸은 휴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쉬라고. 너는 충분히 분발했다고.
이를 악문다.
약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나에게도 자존심이란 것이 있다. 5층에서, 아직 5층에서!
마침내 한 마리가 지붕에 발을 디뎠다.
바로 방패 모서리로 모가지를 날렸다. 놈은 떨어지면서 검을 휘둘렀다. 오른팔이 깊게 베였다. 피가 확 튀었다.
[‘한(★)’이 출혈에 걸렸습니다. 일정 시간마다 체력이 감소합니다.]불합리하다.
왜 내가 이런 곳에서 개고생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구에서는 이럴 일 없었는데. 따뜻한 곳에서 자고 맛있는 밥을 먹었다.
왜 내가.
왜 내가!
[스킬 각성!] [‘한(★)’이 ‘광폭성’ 스킬을 습득했습니다!]“이 개새끼야!”
나는 방패를 막 올라오는 고블린에게 집어던졌다.
옆에서 짧은 비명이 들려왔다.
“으윽!”
[‘제나(★)’가 출혈에 걸렸습니다. 일정 시간마다 체력이 감소합니다.]“아직, 아직 안 죽었냐?”
“괜찮아요, 버틸 수 있어요.”
제나의 옆구리에 단검이 박혀 있다.
원피스 자락이 붉게 물들었다.
아론은 흰자위를 보이고 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잘린 다리에선 피가 간헐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죽지 마! 끝날 때까지 안 죽으면 돼! 그럼 돌아갈 수 있다.”
“저, 저는 여기까지인 거 같은데…….”
“입 닥쳐!”
더 이상 막을 수 없다.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일거에 지붕에 올라왔다.
“후퇴해, 지붕 안쪽으로, 지붕 안쪽으로 가라.”
“안쪽이고 뭐고 공간이 없어요!”
“가라면 가!”
오른팔에서 감각이 없어졌다.
나도 빈혈이 왔는지 세상이 빙빙 돌고 있다.
“케르르, 케르라르르락!”
“날 죽이고 싶냐. 오냐, 들어와, 다 들어와, 새끼들아!”
검도 방패도 없다.
몇 초 남았는지도 인식할 수 없다.
제나가 어떻게 됐는지도 신경쓸 수 없다.
“키아아아!”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피로 젖은 칼날이 전신을 갈가리 찢으려 했다.
그리고.
[ 00 : 00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블린들은 내게 칼을 향한 채 정지했다.
[스테이지 클리어!] [‘한(★)’, ‘제나(★)’, ‘아론(★)’, 레벨업!] [보상 – 30,000G, 철광석(B) X 3, 가죽(B) X 2, 널판지(B) X 2] [MVP – ‘한(★)’]“…….”
망가진 도시의 풍경이, 수많은 고블린들이, 지드와 한슨의 시체가 빛으로 사라져간다.
하얀빛이 내 전신을 감싸며 상처를 복구했다. 팔에 감각이 돌아오고, 터질 것 같은 폐가 호흡을 되찾고, 찢어진 근육이 회복된다.
제나의 옆구리에 박혀 있던 단검이 저절로 툭 떨어졌으며 아론의 잘린 다리에서 새 살이 솟았다.
“아, 아하하핫.”
제나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주저앉았다.
“손 좀 잡아줄래요? 다리가 풀려서 못 일어나겠어요.”
나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제나는 손을 잡고 몇 번이나 휘청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저희, 살아남은 건가요?”
“……그래.”
익숙한 방이었다.
[탑을 등반, 세상을 구원하라!] [메인 던전 : 현 등반 층수 – 5]왼쪽 거울의 메시지가 클리어를 알렸다.
쿠르르르.
익숙한 진동음과 함께 대기실이 상승을 시작했다.
시공의 틈 바닥에 아론은 쓰러져 있다.
의식은 없는 것 같지만, 규칙적으로 호흡하고 있다.
이 녀석도 살아남은 것이다.
“5층부터 이런 식이에요? 이러면 정말…….”
“이번이 특이한 거였어.”
전투를 되짚었다.
세 개로 나뉜 통로. 몰려드는 고블린.
한 명이라도 제 역할을 못하면 전멸이 강요되는 구조였다. 지드와 한슨을 조금만 더 키웠다면 이렇게 처절하게 싸울 필요도 없었다.
생존 임무는 파티가 갖춰지면 그렇게 어려운 난이도가 아니다. 단지, 가장 취약할 이 타이밍에 운 없게 걸렸을 뿐이다.
나는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철검과 방패를 집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던 장비도 깔끔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아아, 진짜 너무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빡세게 훈련하는 건데!”
제나가 볼멘소리를 흘리며 활과 화살통을 등에 걸었다.
목소리는 밝았지만, 안색은 밝지 않았다.
지드와 한슨이 죽었다.
나는 쓰러진 아론을 둘러업었다.
광장으로 나오니, 기다렸다는 듯 디카가 달려왔다.
“형님,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묵묵히 숙소를 향해 걸었다.
“지드랑 한슨은 안에 있나요? 클로에 누나가 맛있는 걸 준비해놨다는데.”
“죽었어.”
“네?”
“죽었다고.”
디카가 선 채로 굳었다.
나는 무시하고 숙소로 들어갔다.
로비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내게 시선을 보냈다. 나는 아론을 로비의 소파에 눕혔다. 창도 옆에 놓아둔다. 상처가 회복됐으니 정신을 차릴 것이다.
광장에서 이셀의 호통이 들렸다.
저층에서 서브 파티를 육성하려는 모양이다.
‘머리가 아프군.’
대기실의 누군가 죽었다고 감상에 빠져 있을 생각은 없다.
이곳에서는, 더군다나 탑의 최전선을 달리는 내게는 죽음이 일상일 테니까. 하지만 머리가 지끈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복도 맨 안쪽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숙소에서 정해진 나의 방이었다. 이제는 현대식 집이 아닌 이곳에도 익숙해졌다.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축하합니다, 마스터! 5층을 무사히 클리어하셨군요. 이제부터 요일 던전이 개방됩니다. 각종 재료를 모아 대기실과 영웅을 강화해보세요.]5층을 클리어함에 따라 요일 던전의 개방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광폭성 스킬을 얻었던가…….’
침착성과 광폭성은 공존할 수 없다.
명백한 버그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게 해주는 침착성과,
이성을 희생하는 대신 전투력을 대폭 끌어올리는 광폭성.
마스터와 영웅이 반쯤 섞인 듯한 나의 체질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아직은 모른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내일부터는 다시 바빠질 것이다.
1성의 한계 레벨인 10에 거의 근접했고 재료를 얻을 수 있는 요일 던전도 오픈되었다. 이제 2성 승급을 노릴 차례였다.
그러니까, 오늘만 쉬기로 하자.
나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