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158)
158화
“그런 세상이 오지 않도록 막는 게 저희가 할 일이겠죠.”
잠시 동안 이어진 침묵을 깬 건 도이수였다.
연구소 안으로 들어온 도이수는 나와 마리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천해선 헌터님. 그리고 마리아 헌터님.”
“안녕하세요.”
나야 그렇다 치고, 마리아와도 일면식이 있는 건가?
하긴, ‘엄브렐라 인더스트리’가 과거 협회와 긴밀히 일한 적이 있으니 서로 알고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도이수는 여전히 곱게 늙은 귀공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손에는 질 좋은 헝겊으로 쌓인 기다란 물건이 있었는데, 그는 그 물건을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하. 대충 놓으셔도 됩니다. 설마하니 이게 깨질 물건도 아니고.”
“그래도…… 너무 귀한 물건인지라.”
뭔데 저러는 거지?
나와 마리아는 서로 고개를 마주 보며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저번 게이트 예측, 완전 대박이었어요. 협회고 길드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이상 현상을 엄브렐라에서 기가 막히게 잡아냈던데요?”
“하하. 그게 다 천해선 헌터님 덕분입니다.”
“엥?”
“주기적으로 포이즌 몬스터의 혈액을 저희 쪽에 보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그렇죠.”
암시장에서 야차와 함께 도이수를 만났던 그날.
우리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계약을 체결했다.
도이수는 포이즌 던전에 대한 자료를 제공했고, 야차와 나는 던전에서 물건들을 건네주기로 합의했다.
그동안 도이수가 알려 준 신규 던전에서 혈액을 채취한 것은 물론, 우발적으로 상대했던 포이즌 몬스터 혈액까지 샘플링해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듯 일반 몬스터와 포이즌 타입은 혈액의 성분이 꽤나 다릅니다. 특히나 최근에 보내 주셨던 그레이 하피처럼, 처치 난도가 높은 몬스터들일수록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죠.”
“오호…….”
“저희는 여러 가지 가정을 대입한 끝에 포이즌 몬스터의 혈액 속 DNA 배열과 이상 현상이 발생한 게이트의 파장 패턴이 매우 흡사하다는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이번 계룡시의 게이트를 알아낸 것도 다 그 덕분이지요.”
“과연, 정확하게 이해했어요!”
나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감탄사를 터트렸지만, 아무래도 마리아에게는 통하지 않은 것 같았다.
“또 또. 거짓말.”
“…….”
“하하하. 이해합니다. 저도 보고만 들어서 그런가 보다 할 뿐, 정말 어려운 내용은 엄브렐라 인더스트리의 연구진들이 맡고 있죠.”
마리아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도이수 대표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대단하세요. 혈액의 성분과 파장의 패턴을 비교할 생각을 하시다니. 도이수 대표님 덕분에 계룡시의 수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어요.”
“최고의 힐러님에게 그런 소리를 듣다니, 너무나 영광입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도이수가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이번 이상 게이트를 통해 어느 정도 오차율을 잡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이상 파장이 감지되는 대로 이레귤러 분들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어차피 저희는 딱히 관할 구역이랄 게 없으니까 지역이 어디든 연락 주세요. 마침 새로운 헬기도 얻었거든요. 모델명이 SGG-01이었던가?”
그러자 도이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SGG-01이요? 그건 서른 명 이상을 수송 가능한 대형 헬기인데. 그걸 사셨습니까?”
“네. 정당하고. 공정한 방법으로.”
“?”
내 말에 도이수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솟아올랐고, 마리아는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기야 이레귤러 헌터님들의 업적을 생각하면 뭔들 못 사겠습니까. 덕분에 저희도 한결 마음이 편해지겠습니다. SGG-01이라면 설령 땅끝마을이라 해도 금방 도착할 테니 말입니다.”
도이수는 그렇게 말한 뒤 암흑 물질에 관한 연구는 당분간 오래 지속될 것 같다며 양해를 구했다.
제아무리 진 박사가 천재 과학자라고는 하나, 마계에서 온 물질을 연구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혹시라도…… 암흑 물질 중 일부가 필요하시면 따로 담아 드리겠습니다.”
“음?”
등 뒤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진다.
보나 마나 마리아일 테지.
“아니요. 저한테 주실 필요는 없어요. 연구를 위해서라면 암흑 물질을 모두 다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애초에 이 세상에 있어 봐야 좋을 게 없는 거잖아요. 혹시나 다른 헌터가 탐을 낸다면 희생자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아낌없이 사용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하며 마리아를 쳐다보았다.
지금의 대화를 잘 기억하시오, 마리아 선생.
“귀한 자료를 받았으니, 저희도 답례를 할까 합니다.”
“답례요?”
“네. 최근에 검을 사용하는 헌터가 이레귤러와 함께한다고 들었는데…….”
“아. 첸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네. 소문에는 그 첸이라는 헌터가 부러진 검을 사용한다고 해서, 진 박사님이 소드 디바이스를 하나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 이런.”
이제 보니 헝겊에 쌓여 있던 긴 물건이 바로 그 소드 디바이스인 것 같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반색을 하며 반겨야 정상이지만, 첸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어차피 검기를 발동시켜서 싸우는 녀석이다 보니, 칼날의 유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녀석은 칼의 손잡이 부분만 있어도 전투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왜 그러시죠?”
“감사히 받겠지만, 첸이 이 칼을 가지고 다닐지 모르겠네요. 워낙 쓰던 것만 쓰는 녀석이라.”
“하하. 하지만 이 칼이라면 다를 겁니다.”
도이수, 그리고 진 박사가 동시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다.
뭐로 만든 칼이길래 그래?
하지만 곧, 나는 그들이 표한 자신감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번쩍.
오색 찬란히 빛나는 영롱한 검날.
이 색깔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프, 프라니움?”
“그렇습니다.”
“와……. 말도 안 돼.”
그건 실전용 검이라기보다 장식품에 더 어울릴 만한 외형이었다.
검날의 한쪽 끝 전체를 눈부신 물질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건 일전에 내가 진 박사에게 전해 준 프라니움이었다.
이 세계는 물론이요, 이계의 물질을 통틀어 가장 강한 금속이라 여겨진 물건.
“와……. 정말 멋있네요.”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실전에서도 꽤 좋은 능력을 발휘할 게다.”
“그래 보여요. 근데 여기에 들어간 프라니움이 대체 얼만큼이죠? 제가 이렇게 많이 드렸던 것 같지는 않은데.”
“하하. 제대로 봤다. 본래 있던 소드형 디바이스 표면에 프라니움을 얇게 코팅했지.”
“아하.”
하긴.
이 전체 면적을 몽땅 프라니움으로 만들기에는 어마어마한 양이 필요했을 것이다.
금액으로 따지면 건물 하나를 휘두르고 다닌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테지.
단순히 검날 표면을 코팅한 수준이라고는 하나, 그 영향력은 하늘과 땅 차이다.
아무리 잘 만든 디바이스라도 에테르를 주입하면 에너지 손실이 나기 마련.
하지만 프라니움 소재로 만든 디바이스는 사용자의 에테르를 사실상 무손실로 이끌어 낼 수 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챙긴다더니……. 가만히 있던 첸에게 이런 물건이 간다라…….”
내가 나직이 중얼거리자 마리아가 옆으로 다가왔다.
“또 무슨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죠?”
“네? 제가요?”
“헌터님은 모르겠지만, 뭔가 일을 벌일 때마다 항상 지금 같은 표정을 짓거든요.”
“하하. 아닙니다. 설마요.”
내가 뭐 틈만 나면 뭐 뜯어낼 궁리만 하는 사람인가?
아무렴.
그렇고말고.
* * *
공교롭다고 해야 할지.
이사순 회장이 알려 준 ‘히든 던전’은 암시장과 가까운 대전에 있었다.
“분명 이곳이 맞는 것 같은데…….”
좌표가 가리키는 곳은 보문산의 어딘가.
허리 높이까지 솟아오른 풀과 나무를 헤치며 이레귤러 멤버들이 전진을 계속한다.
“맨 나무랑 풀떼기밖에 없는데, 이런 곳에 던전이 있는 게 맞아?”
계속되는 등산이 버거운지 비수가 내게 물었다.
“던전이 언제는 사람 편의 봐 가면서 생겼냐. 지들 마음대로 나타났지.”
“그래도 이건 좀 심한데. 사람들이 잘못 알아봐서 ‘히든 던전’이라고 부른 건 아닐까?”
“설마.”
얼토당토않은 말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갈 때 즈음, V1이 신호를 보냈다.
현재 GPS 위치가 히든 던전의 좌표와 동일합니다.>
“엥?”
“왜 그래.”
“여기라는데?”
“뭐?”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입구’라 부를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이름부터가 히든 던전이긴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냐?
-킁킁.
그때, 어깨 위에 올라있던 뽀리가 유난히 코를 킁킁거린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쏘옥 빼고 냄새를 맡는 녀석을 보자니, 굶주린 사람이 음식 냄새를 쫓아가는 모습이 연상된다.
“얘가 왜 이러지?”
산에 들어올 때부터 뽀리는 자신의 모습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이레귤러 멤버들이 모두 뽀리를 주시했고, 녀석은 곧 짧게 포효하며 날아올랐다.
-꾸왕!
“음?”
반가운 목소리가 무색하게, 뽀리가 날아간 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사방을 감싸고 있는 나무와 풀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을 뿐.
“이상해요.”
마리아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뽀리에게 향한다.
“진 박사님이 그러셨죠? 이 아이는 일반적인 이계의 몬스터가 아니라고.”
“네. 진 박사님뿐만 아니라 대범이…… 그러니까 임페리얼 타이거도 뽀리가 자신과 같은 영물이라 했어요.”
그러자 마리아가 흠칫 놀라며 나를 외계인 보듯 했다.
이봐, 그런 눈빛은 실례라고.
“그때 그 사자랑 대화를 나누셨단 말인가요?”
“네. 영문은 모르겠지만 걔랑은 말이 통하더라구요.”
“와아. 미쳤네. 야 천해선. 넌 진짜 가끔 보면 사람이 아닌 거 같아.”
“극찬 고맙다.”
내가 비수와 티격태격하는 사이, 마리아가 뽀리의 발에 손바닥을 살짝 대었다.
그러자 뽀리가 자연스럽게 손바닥에 걸터앉았다.
“저쪽에 뭔가 있는 거지?”
-꾸왕.
마리아가 반대편 손으로 뽀리를 한번 쓰다듬은 뒤, 곧 잠시 몸을 숙여 조그만 돌멩이를 들었다.
“히든 던전이 영계와 비슷하다면, 뽀리가 그곳을 고향으로 착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과연.
꽤나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마리아는 돌멩이를 든 손을 허리 뒤로 빼더니, 가볍게 전방을 향해 던졌다.
휙!
“?”
제아무리 조그만 돌멩이라도 풀이나 나뭇잎을 스치면 소리가 나야 정상이거늘.
방금 전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작아서 못 들은 것이 아니냐고 하기에는, 내 오감은 다른 헌터와 비교해도 몇 배는 예민한 편이다.
“그럼…….”
육철완이 근처에 있던 바위를 뽑아 들었다.
테스트를 하기에는 과한 구석이 있으나, 만약 이것까지 같은 현상이 발생한다면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실과 똑같아 보이는 저곳에, 보이지 않는(hidden) 입구가 있는 것이다.
“흡!”
짧은 기합과 함께 육철완이 바위를 던진다.
정말 기가 막히게도, 바위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버렸다.
으레 들려야 할 ‘쿵’ 소리마저 삼켜진 이상, 더 망설일 것은 없었다.
“더 볼 것도 없지?”
비수의 물음에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계와 매우 비슷한 환경이라 불리는 ‘히든 던전.’
이곳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혹독한 훈련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마인…….’
잠시 눈을 감고 랭킹전의 그날을 떠올렸다.
도저히 범접할 수 없었던, 절망스러운 격차를 느껴야 했던 그날을.
하지만 이제 실낱같은 가능성이 생겼고, 전력을 다해 달릴 일만 남았다.
번쩍.
감았던 눈을 뜬 뒤, 나는 동료들의 맨 앞에 섰다.
“강해지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