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246)
246화
“헌터님!”
엄청나게 두꺼운 손이 내 어깨를 잡아 흔든다.
나는 그제야 테르티의 주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나는 고개를 내려 바닥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내 몸을 감싸고 있던 암흑 물질은 산화해 버렸고, 다른 마인들처럼 바닥에는 작은 유기물이 보였다.
“……!”
처음으로 그 유기물을 밟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르티는 죽어서까지 내 마음속에 재앙의 씨앗을 남겼다.
키릴이 나를 구해 준 이유.
그건 정의로움이나 인류애 같은 게 아니었다.
살찌워 잡아먹어야 할 대상이 당장 죽으면 안 되니까, 일단은 살려 둔 것이다.
적어도 테르티가 내게 알려 준 진실은 그랬다.
‘정말일까?’
테르티가 가진 능력으로 보건대 기억은 얼마든지 날조할 수가 있다.
하지만 탈혼수를 통해 먼저 보았던 장면과 토씨 하나 다른 점이 없었다.
키릴은 정말, 내 능력을 빼앗기 위해 이 모든 일을 준비한 걸까?
욱씬.
갑자기 아킬레스건이 아려 온다.
그래.
키릴이 내게 ‘독보’를 가르쳐 주기 위해 넘겨준 블랙 에테르.
그것이 아직도 내 몸에 남아 있었다.
스르륵…….
지금까지 그건 내게 훈장 같은 것이었다.
최고의 헌터가 선물해 준 특별한 훈장 말이다.
나는 손바닥 위로 키릴의 블랙 에테르를 추출한 뒤, 그것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파스스.
독보를 익혔으니 더 이상 키릴의 블랙 에테르는 필요가 없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힘을 계속해서 몸 안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키릴을 만날 때, 이 기운이 내 목을 조여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야. 천해선. 지금 뭐 해?”
“어. 테르티 때문에 좀 멍해서.”
“그렇구나. 그 지독한 새끼. 너랑 같이 자폭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랬는지 몰라.”
비수가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일리아 또한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변 상황을 정리했다.
“죽은 헌터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 정도면 엄청난 성과야. 마인 셋을 잡아 죽이고 키메라까지 전부 소탕했으니, 결과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무거운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마인들과 전면전을 하게 되면, 언젠가는 키릴이 나타나 도와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인류의 편이면서 동시에 내 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 기본적인 대전제가 무너져 내렸다.
키릴은 나를 죽임으로써 인류를 지키려는 것인가?
아니지.
이미 인류는 그녀를 한번 배신한 전과가 있다.
어쩌면 인류와 마인의 공멸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헌터님. 괜찮으세요?”
생각에 너무 깊이 잠겨 있던 탓일까.
마리아가 옆에 다가와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 별거 아니에요.”
“별거 같은데요.”
그녀가 동그란 눈을 하고 조금은 고집을 부린다.
이럴 때 보면 누나 이상으로 내 마음속을 잘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테르티가 마지막으로 발악을 했을 때. 정신적으로 충격을 좀 받았어요. 그런데 정말 괜찮아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겁니다.”
“알겠어요.”
마리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손바닥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남들이 보면 체온을 체크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건 치유였다.
시전자의 체력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을 회복시켜 주는 치유.
샤르르…….
치유 스킬과 인류애.
그 두 가지가 차고 넘치는 마리아만이 해 줄 수 있는 유니크한 능력이었다.
‘따듯하네.’
화창한 봄날 오후.
햇살을 받으며 침대에 늘어져 있을 때 딱 이런 기분이었다.
그녀의 치유 덕분일까.
혼란스러운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지금 당장은 무엇도 확신할 수 없어.’
테르티가 전해 준 장면이 거짓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내가 죽인 적이 제공한 정보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굳이 나를 위해서 진실을 알려 준다?
상식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차라리 ‘키릴이 내 힘을 빼앗는다면 마인들에게 가장 위협적이기 때문에’라면 아귀가 들어맞는다.
마인들의 입장에서는 나와 키릴이 대립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전개일 것이다.
‘진실을 알려 줄 대상은…….’
테르티는 죽었고 키릴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날의 대화를 정확히 알려 줄 수 있는 존재가 분명히 존재했다.
뽀리의 아버지이자 당시 키릴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던 장본인.
‘크라수스 드래곤을 만나야겠어.’
지옥의 계단을 빠져나온 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 * *
“쟤 좀 이상하지 않아요?”
홀로 생각에 잠겨 있는 천해선을 보며, 비수가 동료들에게 속삭였다.
비수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아까운 헌터 한 명을 잃었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쾌거’라고 할 수 있는 성과였다.
인류의 가장 큰 위협이라 할 수 있는 마인을 셋이나 없앴고, 그들이 암암리에 모아 왔던 키메라를 모두 무력화시켰다.
매스컴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이레귤러를 찬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더불어 사일리아 체제로 개편한 WHPO도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며 호평 일색이었다.
문제는, 이 성과에 있어 가장 역할이 컸던 인물의 변화였다.
비수를 데려오고 난 뒤 사흘 동안.
천해선은 말수도, 표정도 잃었다.
메루스를 익히는 훈련은 비수가 돌아온 뒤에도 연일 혹독하게 이어졌다.
그 과정 속에서 천해선은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게. 잠깐 후유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봐.”
“그쵸?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죠?”
두 여성의 대화에 강정현도 자신의 생각을 보탰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멍하니 있는 시간도 많아지고, 뭐라고 했는지 되물어보는 횟수도 늘었어요.”
“흠…….”
오전 훈련이 끝나고 쉬는 시간.
한켠에 턱을 괴고 앉아 생각에 사로잡힌 천해선을 보며, 동료들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테르티가 최후의 발악을 할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천해선은 그저 ‘테르티가 생각할 숙제를 던져 줬다’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침묵은 며칠이 지나도 쉬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됐다!”
천해선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앗! 깜짝이야!”
골똘히 바라보고 있던 대상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자 비수가 비명 비슷한 소리를 내었다.
“응? 뭐야. 왜.”
천해선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모든 동료들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훈련이 이제 할 만한가 보네? 예전에는 한눈팔 시간도 없더니. 내일부터 강도를 좀 더 올려야겠어.”
“언제는 안 올렸냐. 이 악마 같은 자식.”
비수가 고된 훈련에 진절머리가 나는 듯 으르렁거렸다.
“흐흐. 잠시 다녀올 테니까 요령 피우지 말고 있어.”
“다녀와? 어디를?”
그녀의 얼굴에 불안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뭐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비상시국이었다.
이런 와중에 천해선은 어디를 간다는 것일까.
“영계에 가서 크라수스 드래곤을 만나고 올 거야. 물어볼 게 있었는데 계속 자리에 없더라고. 영계에 있는 생물한테 ‘비’를 붙여 놨는데, 지금 막 도착한 거 같아.”
“물어볼 거라는 게 뭔데?”
“그건 다녀와서 알려 줄게.”
“흠.”
비수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양 볼을 부풀렸다.
그러나 더 이상 천해선을 닦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나중에 알려 주겠다’ 해 놓고 입을 싹 닫는 부류가 아니었다.
언제고 시간이 되면 반드시 이레귤러에게 그 이유를 알려 주었다.
비수뿐만 아니라 모든 동료들이 같은 생각이었다.
천해선이 무슨 일을 한다면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레귤러를 만들기 전부터 이어져 온 생각이었다.
“땡땡이 치면 안 됩니다.”
천해선이 투명한 막 앞에서 동료들에게 당부를 했다.
마리아와 육철완은 피식 웃었고, 첸과 비수는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속을 알 수 없는 스승과, 나를 전적으로 믿고 따라오는 동료들.
천해선은 복잡한 마음을 품은 채 차원의 문을 넘어섰다.
* * *
-사실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마음 한켠에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방금전 크라수스 드래곤의 대답으로 천해선은 명확한 현실을 알게 되었다.
키릴은 정말로 그의 힘을 빼앗을 작정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군. 나와 키릴이 나눈 대화가 새어 나갈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렇게 됐어.”
천해선이 익살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미소 안에는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미안하다.
뜻밖의 사과에 천해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체 높은 영계의 수호령.
그중에서도 대표자 격이라 할 수 있는 크라수스 드래곤이 한낱(?) 인간에게 사과를 한 것이다.
“고개를 그렇게 숙이니까 사과를 하는 건지 브레스를 뿜으려는 건지 모르겠네.”
천해선이 피식 웃으며 크라수스 드래곤의 사과를 에둘러 받았다.
-너에게서 키릴에 준하는…… 어쩌면 그보다 더한 가능성을 봤을 때 망설였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그 이야기를 발설하는 순간, 너와 키릴의 유대는 반드시 깨어질 테지. 나로서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해해.”
오로지 영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까?
크라수스 드래곤의 선택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언제 마계의 존재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마당에, 두 명의 포이즈너가 서로 싸우는 것만은 막아야 했을 터.
둘 중 하나만 남는 것보다는, 불안한 공존 관계가 그들에게는 나은 선택이었다.
크라수스 드래곤은 그래서 사과를 한 것이다.
천해선에게 이 이야기를 해 줄 타이밍이 분명히 있었지만, 외면한 것이니까.
-그러나 오로지 네가 키릴에게 먹히기만을 바란 건 아니다.
“그래? 이제 와서?”
다소 위험한 미소를 지으며 천해선이 이죽거렸지만, 크라수스 드래곤은 확고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랬다면 내 아들을 데리고 갔겠지.
“흠. 그것도 일리가 있네.”
크라수스 드래곤의 자식.
뽀리는 현재 천해선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강제로 거두어들이고자 하면 얼마든지 데려갔을 것이다.
드래곤은 키릴의 의도를 숨긴 한편, 뽀리로 하여금 천해선의 곁을 지키도록 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보험을 양쪽에다 깔아 두고. 머리를 잘 썼네? 영계의 동물들은 대부분 순수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다 고정 관념인가 봐.”
천해선의 말에 드래곤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어라 반박할 말이 없는 명확한 팩트 폭행이었다.
-우리는 단지 신뢰할 수 없을 뿐이다. 먼저 마음을 열었던 10년 전의 사건을 잊을 수가 없으니까.
영물들은 인간을 자신들의 편이라 여기며 차원의 문을 개방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키메라로 변한 인간들의 습격뿐이었다.
천해선에게는 야속한 일이지만, 각자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았어.”
세상에 믿을 놈은 많지 않다.
같은 종족인 인간에게도 통수를 맞는 마당에, 다른 차원의 종족에게 그런 걸 기대하는 게 어리석은 일이다.
“나 간다.”
확인해야 할 정보는 확인했다.
유감스럽게도 키릴과 드래곤의 대화는 사실이었다.
가슴이 아프지만, 이제부터는 키릴도 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천해선은 휑휑해진 마음을 애써 무시한 채 등을 돌렸다.
-알려 줄 것이 하나 더 있다.
천해선의 등 뒤로부터 크라수스 드래곤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죄책감 때문이라면 안 그래도 되는데?”
-아니. 그런 게 아니다. 내가 그동안 자리를 비운 이유는 ‘전조’ 증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조? 뭐에 대한?”
크라수스 드래곤이 잠깐의 뜸을 들였다.
-…….
영계의 수호령이 호흡을 가다듬고 말해야 할 내용이라는 건 뭘까.
과연.
그 대답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제 곧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인간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