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ing a Mercenary Unit from Bankruptcy RAW novel - Chapter 24
제 20 장. 흔들리는 드라카르
류코스 산맥 북쪽 초입의 소읍 로흐링엔 인근에 천 명의 군대가 집결했다. 사전에 통지는 있었지만 마을 인구의 다섯 배나 되는 군세가 실제로 목초지에 모이니 주민들이 불안해했다.
농지를 사이에 두고 띄엄띄엄 떨어져 살던 주민들이 목책 안으로 모일 정도였다. 촌장은 그런 주민들을 다독이느라 진땀을 뺐다.
“천 명이나 모인 것도 대단하지만 몇 개 부대에서 모인 거야? 반가운 얼굴도 많구먼.”
“이번 기회에 부대 연합 전투도 연습하는 셈 쳐야지.”
“그거 좋구먼. 아, 힐다.”
“곧 슈비첸의 안내인이 온다고 하니 행군 준비하자. 산악 행군인 걸 감안해서 애들 준비시켜.”
“알았다.”
“힐다, 상대의 위치 정보는?”
“선발대는 이미 산맥 내에서 산병전을 벌이고 있고 본대는 펠트크릭 시에 집결하고 있다는데 그게 이틀 전 정보였어. 지금쯤 류코스 산맥 내부로 진입했을 거야.”
“늦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힐다가 류코스 산맥 지도를 펼치고 현재 자신들의 위치를 표시했다. 그리고 적의 위치를 예상해 선을 그었다.
지도에는 이미 무수히 많은 점이 있었다. 슈비츠에서 제공한 지도였기 때문이다. 그 점들은 적의 선발대와 조우한 장소였다.
적 선발대는 기사와 정예병만 모인 500명 규모의 강군이었다. 슈비츠가 계속 전투를 회피했기에 선발대는 수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본대는 정예만 6천 명에 보급과 후위로 2만 명이 넘는다더군. 반면에 슈비츠는 이제 겨우 4천 명 남짓. 그마저도 정예강군인 슈비츠 용병대는 소수고 대부분이 자유민 모병 부대야.”
“이거 의뢰를 잘못 받은 거 아닌가?”
“솔직히 슈비츠를 압박한다면 무력시위 정도나 예상했지 저렇게 전면 침공을 감행할 줄은 아무도 예상 못 했으니.”
“그리고 니오의 전사라는 놈이 적이 많다고 피할 순 없지.”
“그래. 수가 많으면 쪼개서 치면 돼. 다행히 전장은 산맥이다. 지휘관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 지형에선 그만한 인원을 단일한 부대로 운용할 수 없다.”
“바로 그거지. 서약 동맹에서도 우리의 계획을 수용했다. 우리는 적의 후미, 즉 보급 부대를 치는 역할이다.
“아무리 정예 강군이라도 먹지 못하면 싸울 수 없지. 후후후.”
“풀뿌리에 나무껍질이라도 잘근잘근 씹으면서 싸워 보든가.”
“야야, 그런 소리 마라. 발데마르 대장 밑에 있으면 그거 농담처럼 안 들린다.”
힐다와 게다는 동료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한탄했다. 매해 두 차례는 그렇게 굶주리며 발데마르의 추격을 피해야 했다. 정예 중의 정예만 모은 본부에서도 항상 1할 이상은 탈락하는 훈련이었다.
“그러게 누가 지부장 자리 던지고 그리 가라든? 너였으면 서른 되기 전에 지부장은 따 놓은 거였는데.”
“씁, 너 그럼 본부에서 부르면 안 갈 거여?”
“아유, 저야 감사합죠.”
“맞아. 그러니까 투정하지 말라고.”
“이놈들이…….”
“힐다 대장님! 슈비츠의 전령입니다.”
“오, 딱 좋은 시간이군.”
열 명의 백부장이 지휘소에서 나와 슈비츠의 전령을 맞이했다. 힐다가 그를 기억했다. 길잡이 빌이었다.
“지금은 길잡이 필립이라 합니다.”
“본명이야?”
“그럴 리가요.”
길잡이 빌, 이제는 길잡이 필립이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힐다는 그런 그를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세작이란 짓도 해 먹을 일이 아니구먼.”
“의외로 적성에 잘 맞습니다. 저한테는 다행이지요.”
길잡이와 인사를 나눈 백부장들은 즉각 부대에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이 막사를 해체하고 장구를 챙기며 행군을 준비했다.
“전에도 물었지만 슈비츠 동맹 측에서 식량 보급은 가능하지?”
“물론입니다. 장기전에 대비해 누탈로와 르몽센으로부터 보존 식량을 대량으로 받아 놨습니다.”
“그럼 동맹 사령부에서 원하는 우리의 첫 임무는? 적의 선발대를 꺾는 건가?”
“아니요. 니오 용병대는 동맹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지녔으니 적의 본대를 치기 전까진 숨겨 두고 싶다는 게 사령부의 의향입니다.”
“흐음.”
“그런 만큼 첫 전투에서 가장 화려하게 날뛰셔야겠습니다.”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반나절도 지나기 전에 행군 준비가 끝났다. 인원 파악을 마친 힐다가 행군을 명령했다.
“현재 적의 본대는 성 마리노 가도에 있습니다. 말과 마차가 함께 움직이면서 유사시엔 기병 전술도 활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길이지요.”
“뭐, 그 규모를 보면 당연한 선택이지.”
“하지만 기병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닙니다. 목동들이 쓰는 샛길이 있습니다. 좁지만 기병이 충분히 달릴 수 있지요.”
“작전이 있나 보군.”
“물론입니다.”
“좋아. 내게도 작전이 있다.”
두 사람이 웃으며 산의 그늘로 들어섰다. 그들은 도로를 따라 이동해 슈비츠에서 마련한 중계지에 도착했고 그곳에 막사를 지었다.
거리상으로는 후방이 아니라 전방에 해당했지만 실제로는 지형의 문제와 중간을 가로막은 호수로 적과 조우할 일이 거의 없었다. 임시 거점으로는 훌륭했다.
힐다는 일단 짐을 풀고 기병들을 소집했다. 천 명 중 기병 부대는 350여 명. 상당히 높은 비율이었다.
“일단 기병을 움직일 수 있는 길이라고 해도 좁은 만큼 한 번에 움직이는 수는 제한된다. 무엇보다 치고 빠져나가려면 적들이 점유한 공간을 돌파하거나 말을 뒤로 돌려야 하는데 서로에게 거치적거리지 않으려면 많은 수는 못 이끌어.”
“어떻게 할 생각이야?”
“기병과 보병 혼합운용이지. 보병으로 교란하고 기병으로 돌파한다.”
“정석대로로군. 그럼 일단 궁수들을 모으도록 하지.”
“궁수도 좋지만 투창을 모아 줘.”
“아아, 이해했다.”
트인 평야가 아니라 도로 측면의 산 사면에서 공격하는 일이다. 화살을 쏘려면 나무에 가리지 않은 곳까지 접근해야 하는데 그 정도 거리라면 투창도 가능했다. 그리고 투창은 갑주나 방패에 화살보다 큰 충격을 줬다.
“그럼 내일 공격하는 걸로 하고……. 파트리케. 사냥꾼 출신으로 열 명씩 다섯 개 정찰조를 만들어 줘.”
“맡겨 둬.”
니오 용병대가 습격을 준비하는 사이, 엘라이히 공국군은 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엘라이히 대공, 비크하르트는 기습 공격이 당연히 있을 거라 예상했다. 특히 보급 부대에. 수도 무장도 부족한 슈비츠에겐 선택지가 많지 않으니까.
산길에선 보통 기병이라 해도 말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잘 훈련된 말과 숙련된 기수라면 험지를 주파하는 것도 가능은 하겠으나 말에게 가해지는 부담이 너무 컸다. 도로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당연한 상식이었다. 비크하르트는 그런 상식에 입안해서 습격에 대비했다.
도로 양측에 기사를 포함한 정예병이 경계를 섰다. 그 안쪽에 기병을 나누어 배치해 어느 방향에서 습격이 오건 즉각 출격이 가능하도록 했다.
병력이 나뉘면 그만큼 단위 면적당 전력이 약화되지만 이쪽은 기동성이 뛰어난 기병이고 상대는 보병이라 예상했기에 시행한 배치였다. 기사가 이끄는 정예병이 적의 진입을 저지하고 그 틈에 기병이 모여 적들을 요격하는 것이다.
근처에서 활만 쏘고 도망치는 경우도 예상했다. 그렇기에 경계 근무를 서는 이들은 방패를 패용했고 장전된 쇠뇌를 들고 다니게 했다. 쇠뇌는 십 분 간격으로 화살을 쏘고 새로 장전하도록 해 활체의 부담을 줄였다.
이런 과한 무장으로 외곽 부대의 부담이 크게 증가했으나 그건 순환 근무로 해결했다. 또한 교대 중의 빈틈을 없애기 위해 교대 자체도 소부대 단위로 돌아가면서 했다. 철저한 대비로 피해를 줄이려는 비크하르트의 선택이었다.
대신 행군 속도가 줄었으나 급할 건 없었다. 어차피 슈비츠는 본토를 버리고 도망칠 수도 없고 천천히 진군해도 결국 거점 도시에 도착하면 이기는 싸움이었다.
빨리 이기는 건 중요치 않았다. 손실 없이 이기는 게 중요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면 생기는 유일한 손해는 돈뿐인데 바이젠부르크 가문에 돈이 없지는 않았다.
“전하. 한스 정찰조가 정기 보고 시간에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사고 가능성은?”
“낙석이나 실족 등의 사고라면 한 명이라도 전령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군.”
“행군을 멈추고 습격에 대비합니까?”
“미리 대비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적의 습격을 미연에 차단할 수도 있겠지. 그편이 손실도 줄일 수 있겠고.”
비크하르트는 잠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외곽 경계 부대 전체를 교대하고 적이 기습을 준비 중이라고 알려라.”
“그러하면 적을 요격하는 걸 목표로 합니까?”
“그래. 아군의 손실을 방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의 전력을 꺾는 것도 중요하다. 미리 알고 있는 자는 더 강한 법이지. 철저한 대비로 손실을 최소화하라.”
“알겠습니다!”
“철저하게 짓밟아서 적의 전의를 꺾어라. 놈들이 우리 군대에 다시는 저항하지 못하도록.”
외곽 경계 부대가 즉각 교대했다. 2만 6천 명이나 되는 대부대라 소식을 전달하고 인원을 움직이는 것도 시간이 꽤 걸렸다.
힐다는 정찰병의 말을 듣고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쳤다. 아쉬웠다. 만약 적들이 조금만 더 전진해서 그렇게 수선을 떨었으면 그 취약한 순간을 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샛길은 적들의 현재 위치보다 조금 더 앞에 있었다.
“적들은 우리가 기습하려는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이 자식들을 잡았으니까.”
힐다는 그리 말하며 꽁꽁 묶여 있는 엘라이히 공국의 병사들을 가리켰다. 한스 정찰조였다. 그들을 먼저 발견한 니오 용병대의 사냥꾼들이 기습을 가해 도망치기 전에 제압한 것이었다.
전투 중 네 명이 치명상을 입거나 죽었지만 남은 일곱 명은 사로잡을 수 있었다. 훌륭한 전과였다.
“설마 여기로 말을 몰고 올 수 있을 줄이야.”
“어, 우리도 놀랐어. 그런데 어쩌겠냐. 이런 게 전쟁인데.”
“큭, 전하께 이걸 전해야…….”
“어허, 포로는 얌전히 있어야지. 괜히 포로한테 손대게 하지 말자. 어지간하면 포로는 건드리기 싫다.”
묶인 채 꿈지럭거리는 포로를 보고 힐다가 말했다. 힐다의 말에 포로가 탄식했다.
“거 뭐시냐, 포로 협상 같은 것도 할 테니까 얌전히 있어. 저 친구들도 어지간하면 죽이기 싫었어. 너흰 살아 있어야 좋고 우린 너희가 살아 있어야 돈을 받고 뭐 그런 거지.”
“알겠다. 저항하지 않겠으니 이것만 풀어 주면…….”
“말이 되는 말을 해라.”
“힐다 대장님. 신호입니다.”
“좋아, 가자. 얀, 적당히 다섯 명 뽑아서 이 녀석들 슈비츠 도시로 데리고 가.”
“부대가 아니라 슈비츠로 가는 겁니까?”
“우리 부대가 어디 있는지 알려 줘서 뭐하게?”
“아,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가자. 필립, 안내해.”
“이쪽입니다.”
힐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기병 30명과 보병 120명으로 구성된 별동대가 필립의 안내에 따라 샛길을 타고 능선을 내려갔다.
도로는 도로 위뿐만 아니라 좌우로 완만한 능선을 따라 50미터가량의 나무를 제거해 주위가 탁 트여 있었다. 힐다 부대는 적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빼곡한 나무 그늘에 숨어서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투창.”
“준비 완료.”
“기병.”
“당장이라도 갈 수 있습니다.”
“북.”
“언제든 명령만 내리십쇼.”
“출격!”
힐다의 외침과 동시에 온 산에 북소리가 메아리쳤다. 투창을 쥔 병사들이 일제히 나무 그늘에서 나와 팔을 뒤로 당겼다.
“기습이다! 사수 사격 준비!”
“방패 앞으로!”
나무 그늘 사이로 니오 용병대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적들이 곧장 대응했다. 그 대응 속도는 니오 용병대도 감탄할 수준이었다.
투창이 방패를 때렸다. 몇몇은 방패를 관통해 적의 팔을 상하게 했으나 대부분은 방패에 박히는 선에서 끝났다.
“흥, 투창이라니. 원시적인 무기를! 쇠뇌 일제 사격!”
지휘 기사의 명령에 일부가 방패를 앞세워 지켜 주는 사이 다른 이들이 장전된 쇠뇌를 조준했다. 니오 용병대는 황급히 나무 뒤로 엄폐하거나 방패로 몸을 가렸다.
장력이 강한 쇠뇌는 지근거리에서 투창이나 활보다도 관통력이 뛰어났다. 짧고 날카로운 화살이 미처 엄폐하지 못한 이들의 방패를 뚫고 팔과 복부 등을 강타했다.
“큭!”
“야콥!”
“괜찮아, 갑옷에 막혔어.”
“이제 우리 차례다!”
쇠뇌는 한 번 발사하고 나면 재장전 시간이 매우 길었다. 적의 일제사격이 끝나자마자 힐다가 고삐를 챘다. 순식간에 기병들이 그늘에서 벗어나 적들을 향해 돌진했다.
엘라이히의 지휘 기사가 대경실색했다. 어떻게 저기서 기병을?
하지만 놀랄 시간조차 없었다. 대기 중이던 기병 부대가 출격했지만 그들이 오기 전에 니오 용병대가 들이닥쳤다.
“대기병 방진!”
기사는 급한 대로 지시했다. 어찌됐건 적의 접근을 저지해야 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더 당황할 뿐이었다.
대기병 방진을 짤 수 있는 장창은 들고 오지도 않았다. 이 산악 지대에서 보병이 대기병 전투를 수행할 일이 뭐가 있다고 장창을 들고 온단 말인가? 적에게 기병이 있다 한들 그들과 싸우는 건 아군 기병일 텐데.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옳은 판단이었다. 아주 특수한 상황만 아니라면.
그리고 ‘아주 특수한 상황’이 그들을 들이받았다. 방패벽이 주력 전술도 아닌 이들인지라 바로 뭉칠 수도 없었다.
보병들은 어영부영 검을 뽑아 들고 방패를 앞세웠지만 말과 충돌하는 순간 날아갔다. 말에 치인 것 자체는 의외로 경상에 그쳤지만 나동그라지는 바람에 기병의 진입을 막지 못했다.
“뚫고 들어가! 그대로 관통한다!”
“저, 저, 완전히 미친 건가!”
힐다가 말 위에서 창을 휘둘렀다. 앞을 가리던 병사들은 황급히 몸을 숙이고 좌우로 빠져나갔다.
힐다는 적을 죽이는 대신 겁을 줘서 몰아내고 마차 사이로 길을 냈다. 힐다가 길을 열자 그 뒤로 부하들이 따라 들어왔다.
“불!”
“산불은 안 나겠죠?”
“주변에 나무가 있냐 풀이 있냐. 던져!”
“예잇!”
창을 든 기병들이 보호하는 틈으로 다섯 사람이 활활 타는 횃불을 마차에 던졌다. 횃불은 마차 위에서 한동안 홀로 타오르다 곧 주위로 화염을 퍼뜨렸다.
“부, 불이다! 불!”
“불을 꺼라! 야 이 멍청한 놈들아, 네놈들 손발은 흙이 남아서 붙여 놨냐! 뛰어!”
“힐다 대장, 적 기병이다!”
“알아. 빠져나간다.”
힐다가 말의 옆구리를 톡 찼다. 말은 주인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
“놈들을 막는다! 보병들은 불을 꺼라!”
기병 지휘관이 곧장 고삐를 채며 가속했다. 그들은 막 마차 사이를 빠져나온 힐다 부대의 옆구리를 향해 질주했다.
“이크, 제법 빠르군. 베르세르크 집결! 놈들을 저지한다. 나머지는 빠져나가!”
“예, 대장님!”
서른 명의 기병 중 열두 명이 베르세르크였다. 그들은 동료들의 옆을 이탈해 적에게 돌진했다. 적들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니오 용병대를 보고 자세를 낮추며 창을 단단히 붙들었다.
두 집단이 충돌하는 순간, 힐다를 포함한 베르세르크들은 일제히 창을 찌르고 그대로 선회하며 왼편으로 빠져나갔다.
“쿨럭!”
“알리샤, 괜찮나!”
“한 방 먹었지만 괜찮습니다.”
그 충돌에서 전원이 무사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쓰러지거나 낙마한 이가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알리샤라는 기수는 복부를 부여잡고 대답했다. 창이 방패를 뚫고 그의 복부를 강타했다. 다행히 철판으로 보호받는 곳이었다. 철판이 우그러지고 사슬이 떨어졌지만 목숨은 건졌다.
충돌로 거의 전원의 창이 부러졌다. 적들도 두 명이나 낙마했다. 그나마 옆으로 낙마한 이는 운이 좋았다. 안장의 높이 솟은 부분이 등을 받치는 바람에 창이 찌르는 충격을 몸으로 깡그리 받아 낸 뒤 낙마한 이는 치명상이었다.
알리샤 이외에도 적의 창에 맞은 기수는 여럿이었다. 하지만 요령 좋게 방패로 미끄러트리거나 몸을 돌려 충격을 흡수해 부상을 최소화했다.
“씁, 몇 놈 솜씨 좋은 놈이 섞여 있었어. 돌아가면 바로 부상부터 처치하자.”
힐다는 등 뒤로 적들을 흘끗 보고 다시 말을 모는 데 집중했다. 힐다가 사전에 위치를 파악해 둔 샛길로 들어가자 적 기병 지휘관은 순간 멈칫했다.
무리해서 숲속까지 따라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말머리를 돌릴 것인가.
수는 분명 자신이 우위였다. 힐다 부대는 서른 명 정도로 보였고 지금 출격한 기사들은 쉰 명이 넘었으니까. 하지만 숲에 매복이 있다면 아까운 기사만 잃을 수도 있었다.
“폴 경!”
“후퇴한다. 본대로 돌아가 보급품을 지키고 부상병을 치료하자.”
“크윽. 알겠습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기사들이 분하다는 듯이 숲을 노려보고 말머리를 돌렸다.
힐다는 적이 추격해 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 고삐를 당겼다. 말이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후. 알리샤. 상처 좀 보자.”
“정말 괜찮습니다.”
“파트리샤. 혹시 적이 오는지 경계해. 알리샤, 명령이야. 내려.”
“넷!”
힐다는 알리샤의 웃옷을 들추고 갑주를 살폈다. 찌그러진 철판이 사슬 하나에 의존해 덜렁덜렁 붙어 있었다. 철판을 이어주던 다른 사슬들은 끊어지거나 간신히 갑주에 붙어 있었다.
“철판이 막아 줬군.”
“방패를 먼저 뚫고 들어오느라 위력이 줄었습니다. 덕분에 살았지요.”
“후, 내 동생 알지?”
“리하르트 말씀이십니까?”
“걔가 이걸로 죽을 뻔했어. 복부만이라도 철판이 달린 경번갑을 보급한 게 역시 좋았다.”
“정말 그렇습니다.”
“다른 녀석들은? 키르스텐, 어깨를 맞은 것 같던데 괜찮아?”
“견갑에 부딪쳐 튕겨 나갔습니다. 보호대가 살짝 찌그러졌지만 문제없습니다.”
“좋아. 다들 무사한 걸 보니 기쁘군. 천둥의 자매단 첫 실전이었다. 다들 훌륭하게 해내 줬다. 지휘관으로서 정말 고맙다.”
힐다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의 행동에 부하들이 씩 웃으며 힐다의 어깨를 잡아 허리를 바로 세웠다.
“힐다 대장님과 함께 싸울 수 있어 우리야말로 영광입니다.”
“좋아. 다음에는 본대에서 기다리는 자매들도 함께한다!”
“오!”
“힐다, 적들은 추격을 포기했어.”
“그렇군. 자, 다들 승마. 부대와 합류한다.”
“예, 힐다 대장님!”
힐다가 말에 올라 부하들을 이끌고 먼저 빠져나갔던 기병들을 찾았다. 그들은 능선을 따라 이동하며 본대와 합류했다.
한편 비크하르트는 행군을 멈추고 후방의 상황을 살폈다. 분하고 또 화났지만 짜증을 풀기보단 원인을 분석하고 다음에 있을 손실을 방지해야 했다.
“적이 기병을 몰고 올 줄 예상치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괜찮다. 나도 예상 못 했으니. 혹시 온다면 당연히 도로를 타고 올 줄 알았지 산에서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제부터 잘 막으면 된다. 고개를 들라, 폴 경.”
“감사합니다, 전하.”
“그래, 기병이라. 우리 기병이 출격해 막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기병은 최소한의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넓게 퍼지지 못하고 띄엄띄엄 배치돼 있습니다. 본디 적이 보병이라는 걸 염두에 둔 편제였기에 출격해 현장까지 이동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지. 원래는 보병들이 시간을 벌고 기병이 요격하는 구상이었으니. 그럼 대안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행군 중인 보병만으로 기병을 막는 건 역시 어렵다고 봅니다.”
“내 생각도 그러하다.”
“징집된 병력은 방진을 구사하기 어렵지만 활 솜씨는 쓸 만합니다. 치중에 엄폐하여 밀집 사격을 가해 기병을 저지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자칫 보급 부대의 피로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게 걱정되는군. 더군다나 이 좁은 길에서 밀집 사격은 아군 오사의 위험도 있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기병이 나타나면 저지할 방안은 그것뿐입니다. 적들은 산악에서 움직이기 위해서인지 마갑을 입히지 않았으니 평범한 활로도 충분히 말에게 피해를 입힐 것입니다.”
“으음. 좋아. 각 부대에 전파하라. 보급 부대는 모두 활에 시위를 걸고 화살통에 화살을 채우라고. 그리고 기사들이 그들을 지휘토록 하라.”
“알겠습니다.”
비크하르트가 기사들과 의논해 대응책을 마련한 사이 그들의 후방에선 새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힐다와 함께 출발한 게다 부대가 적의 후방에 도착한 것이다.
힐다가 이끌던 150명보다 더 많은 200명 규모였다. 더군다나 200명 전원이 말을 데리고 왔다.
그렇게 많은 인원이 움직이기 위해 이들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이동했다. 더군다나 실제 전투에 투입되는 건 100명뿐이고 나머지는 100명은 지원 부대였다. 전투 부대의 피로를 줄이기 위해 무거운 갑주와 무장을 대신 짊어지고 온 것이다.
“역시 힐다 대장의 선공에 대응하느라 후미의 방비가 느슨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삼엄하다. 씁, 어지간히도 정예병을 데려왔군. 적당히 만만한 징집병이나 쓸 것이지 근왕군을 싹 끌고 오기라도 한 건가.”
“그나마 보급 부대는 자유민을 징집한 것으로 보이지만 대공의 사병과 용병들이 만만찮아 보입니다.”
“아무튼 할 일은 해야지. 아직 정신을 못 차렸을 때 잽싸게 때리는 거야.”
“예, 알겠습니다!”
적의 추격을 뿌리치려면 말을 타고 달릴 수 있어야 하는데 샛길을 이용하면 이렇게 많은 수가 움직일 수 없었다. 굳이 적의 후미에 나타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자, 말들은 충분히 쉬었지?”
“예. 살살 달래서 여기까지 오느라고 고생했습니다.”
“실없는 소리는. 놈들이 대비하기 전에 곧장 들이친다.”
“예!”
후미는 공격당하기 쉬운 만큼 방비가 단단했다. 우선 적의 기병이 50명이나 있었고 허리 부분과 달리 경계 병력도 2중으로 감싸 방어벽이 더 두꺼웠다.
보병으로는 많은 수를 이끌고 오더라도 뚫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쪽은 중무장한 기병만 100기였다. 힐다가 때와 장소로 의표를 찔렀다면 게다는 수로 의표를 찔렀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지원 부대는 먼저 이탈합니다.”
“좋아. 쇠뇌와 화살에 유의하라. 갑주 결속 상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게다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지원 부대는 뒤로 돌아 다시 산길을 걸어 조용히 후퇴했다.
“그럼 간다. 횃불에 불붙이고 북을 울려라.”
둥둥둥둥둥둥둥둥-. 갑자기 산에 다시 북소리가 메아리치자 비크하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상 공격. 하긴 당연해도 너무 당연한 일이군. 놈들이 어디서 나타나든 철저하게 요격하라!”
비크하르트의 명령이 부대의 꼬리에 도달하기도 전에 게다 부대가 일제히 말을 몰아 숲에서 빠져나왔다. 최후미의 기병 지휘관은 하필 자신의 부대가 지키는 곳을 노렸다며 게다 부대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나무 사이로 말이 끝도 없이 나오는 걸 보고 그는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쇠뇌 사격!”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하지만 힐다 부대와 달리 마갑까지 착실하게 씌운 중기병이었다. 정련한 강철판이 화살을 튕겨 냈다.
“마주 돌격한다! 오오, 용맹한 엘라이히의 기사들이여!”
게다 부대는 쐐기꼴로 달려들어 적의 기병들을 사정없이 박살 냈다. 게다 부대는 충분히 가속한 데 비해 엘라이히 기사들은 가속할 공간이 충분치 않았다. 그게 승패를 갈랐다.
일부 뛰어난 기사가 필사의 반격으로 니오 용병대 하나를 낙마시켰지만 좌우의 동료들이 순식간에 그를 구조해 말에 태워서 빠져나갔다.
수의 차이는 좁고 길게 늘어선 대열 때문에 무의미했다. 앞쪽의 정예 병력이 후미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왔을 때는 이미 게다 부대가 후미를 엉망으로 박살 낸 뒤였다. 후미의 방비가 단단한 만큼 정예병이 더 멀리 배치된 점도 문제였다.
기병대가 모조리 땅바닥에 눕자 보급 부대는 싸우지도 않고 흩어졌다. 마차 주위에만 적어도 200명 이상이 있었지만 기사들이 쓰러지자 사방으로 도망쳤다.
보병들이 저항했으나 수가 부족했다. 애초에 이미 난입한 기병을 상대로 보병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용감한 보병 하나가 칼을 뽑아들고 말의 배나 다리를 찌르려 노력했으나 뒷발에 채여 날아갔다. 그는 달리는 말에 치인 것보다 훨씬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저항을 물리친 게다는 마차에 불을 지르고 도로로 후퇴했다. 뒤늦게 달려온 엘라이히의 기병 일부가 게다를 추적했지만 니오 용병대의 질서정연한 반격에 피해만 입고 물러나야 했다.
“게다 장군, 이쪽입니다.”
“후, 좋아. 추격은 더 없지?”
“예. 방금 전 격퇴한 적들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도로를 타고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지자 대기하고 있던 슈비츠의 지원 부대가 게다를 안내했다. 게다는 말에서 내려 투구를 벗고 땀을 식혔다.
무리한 보람이 있었다. 부상자가 셋 발생했지만 모두 경상이었다.
“모두 하마해서 마갑을 해제해라. 말들이 고생했다.”
“예.”
“장구 운반을 부탁하겠네.”
“맡겨만 주십시오.”
슈비츠의 군인들은 경외감을 갖고 게다를 대했다. 게다 부대가 어떻게 싸웠는지 목도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징집된 자유민에 불과했지만 그들 앞에는 수백 명의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용맹하게 돌격했고 승리를 거두었다.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서둘러 후퇴하겠습니다. 이쪽입니다.”
“가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산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잠시 뒤 200명의 중기병으로 구성된 추격 부대가 도로를 지나갔다. 그들은 게다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르고 한참 동안 도로 위만 달렸다.
* * *
“류코스 동쪽의 도로가 거의 모두 봉쇄된 모양입니다. 히스타치아 상인들이 불만을 터뜨린다는군요.”
네로가 루발라에서 온 편지를 읽으며 말했다. 힐다가 출발하고 벌써 한 달, 아직 전쟁은 한창이었다. 니오 용병대가 분전한들 규모의 차이가 너무 명백했다.
“전쟁의 여파가 무섭지요.”
“서쪽 통로는 아직 무사하지만 파빌리노 공국을 경유해 멀리 돌아가야 하지요. 히스타치아 공화국이야 하이틸란트 제국보다는 남해 무역이 더 주력이었으니 큰 손해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길 하나가 막힌다는 건 불편할 겁니다.”
“전쟁은 어찌되고 있을까요.”
“차분히 기다려 보시지요. 이따금 좋은 소식은 늦을 때가 있습니다.”
현재 용병대 업무에서 지현이 신경 써야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꾸 친구의 안위가 떠올랐다.
근무를 마치고 연병장으로 나오니 석양이 붉고 어두웠다. 갈수록 날이 짧아졌다. 발데마르는 며칠 안에 눈이 올 거라고 말했다. 겨울에 접어든 것이다.
며칠만 더 지나면 근무 시간도 당겨야 했다. 지금도 이미 근무 막바지엔 어두워서 업무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나마 해가 저물어도 건물 밖은 아주 어둡지 않아 다행이었다. 달빛과 별빛으로 충분히 사물을 분간할 수 있었다. 발데마르처럼 밤눈이 밝은 사람들은 야간에 전투까지도 가능했다.
삭월이나 신월일 때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수준으로 캄캄했지만 그 시기만 아니면 어떻게든 생활이 가능했다.
“슬슬 훈련도 바꿔야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오전으로 훈련 시간을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좋겠어요. 여러분은 밤에 뭐 보는 데 문제없어요?”
“예. 지현 양은 밤눈이 어두운 편이십니까?”
“좀, 많이요.”
‘선천적인 건 아닐 테지만.’
지현이 속으로 꿍얼거렸다. 지현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동지에 가까워 해가 무진장 짧았는데 그때도 이른 저녁부터 빛이 없어 곤란했다. 덕분에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 습관은 빨리 들였지만.
“몇 종류의 안력은 훈련으로 강화할 수 있습니다. 빠른 움직임을 잡아내는 안력 등이 그렇습니다. 그동안 했던 시야각을 넓히는 훈련도 그런 것입니다.”
“밤눈도 그렇게 밝힐 수 있을까요?”
“밤눈을 밝히는 건 못 했지만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를 분간하는 건 훈련으로 가능했습니다. 해 보시겠습니까?”
“어둠 속에서 싸울 일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배워서 나쁠 건 없겠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한동안은 동체 시력 향상에 집중하겠습니다. 우선 어둠에 익숙해지는 게 중요합니다. 본격적인 훈련은 닷새 뒤부터로 하겠습니다. 저도 훈련 개요를 작성해야 하는 터라.”
“그럼 그때까지는 훈련 시간을 낮으로 옮길게요. 하인리히 씨는 괜찮으세요?”
“저 혼자서는 어려울 것 같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해야겠습니다.”
“네!”
훈련은 어두워도 사고가 날 우려가 적은 달리기와 맨손 체조로 줄였다. 가벼운 운동을 마치고 식당으로 향하니 멀리서부터 매캐한 냄새가 났다. 뭔가 고소한 냄새에 매캐한 냄새가 섞여 있으니 더 역했다.
식용유를 잘못 태웠을 때, 아니면 쓰고 남은 폐유에서 나는 그런 냄새였다. 지현은 저도 모르게 코를 감쌌다.
“이게 무슨…….”
“으헥, 냄새 참 독하지 않슴까.”
“리하르트 씨. 이게 대체 무슨 냄새예요?”
“발데마르 대장임다. 얀냄 치킨인지 뭐시깽인지를 만들겠다고 주방에 계속 계심다. 대장 요리가 먹기 싫었던 건 이번이 첨임다.”
식당 안의 용병들은 역한 냄새에 속에서 잘도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현은 잠깐 서 있었을 뿐인데 머리가 띵했다.
‘환기 문제가 심각하네!’
지현은 잰걸음으로 주방을 향했다. 주방문을 열자 역한 냄새가 일제히 지현을 덮쳤다.
‘우욱!’
주방은 뿌연 기름 안개가 끼어 있었다. 눈이 맵고 따가울 지경이었다.
“누구, 지현 양? 마침 잘 오셨소. 안 그래도 묻고 싶은 게…….”
“창.문.부.터.열.어.요.”
지현은 성큼성큼 걸어가 창문을 모조리 열었다. 찬바람이 휙 불면서 기름 안개를 흩었다. 바람이 조금 거세지자 샹들리에의 촛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식당 창문도 싹 다 여세요.”
지현의 말을 리하르트가 전했다. 병사들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식당 창문을 모조리 열었다. 맞바람이 치면서 냄새의 농도가 현저하게 낮아졌다. 지현은 크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며 머리를 가다듬었다.
“대체 뭘 하신 거예요?”
“기름을 좀 끓였소. 다른 볶음 요리를 할 때는 이런 적이 없는데 참 당황스럽구려.”
발데마르는 그리 말하며 완성품을 내밀었다. 겉모양은 일단 지현이 아는 튀김과 닮았다.
“저한테 물어보시지 여기까지 혼자서 다 만드신 거예요?”
“튀기는 요리야 일레디온 제국에도 있었고 얘기를 좀 들어 보니 히파시오에도 비슷한 요리가 있더구려. 재료도 알고 조리법도 얼추 아니 몇 번만 시도하니 여기까진 올 수 있었소.”
기름 냄새는 막힌 장소에서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기름으로 많은 튀김을 해서 생긴 거였다. 발데마르는 그나마 잘된 것만 보여 줬지만 그 뒤로 무수한 실패작들이 있었다.
“대단하시네요. 근데 저한테도 물어보시지 그러셨어요?”
“우선 내 힘으로 해 보고 싶었소.”
“좋은 자세이고 저도 응원하지만 사고는 안 나게 조심하세요. 세상에 어떻게 이 한복판에서 멀쩡히 숨 쉬고 있던…….”
지현이 말하는 도중 찬바람이 휙 불어와 촛불을 모조리 껐다. 은은하게나마 주위를 밝혀 주던 빛까지 사라지고 화덕 불빛만 남자 지현은 순간 아무 것도 볼 수 없어 허둥댔다.
“조심하시오.”
발데마르가 그런 지현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 잠시 기다리자 눈이 어둠에 적응했다. 발간 화덕 주위만 겨우 보던 눈이 이제는 침침하지만 주방 전체를 읽었다.
“왜 창문을 열지 못했는지 아시겠소?”
“우선 초에 불부터 다시 붙여요.”
“지금 다시 붙여 봐야 소용없을 것이오.”
지현은 화덕에 더 바싹 붙었다. 발데마르는 어둠 속에서 잘도 주방을 치웠다. 다른 걸 정리하고 기름이 가득한 솥을 번쩍 드는 걸 본 지현은 베이킹 소다와 키친타월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버릴 거라는 지현의 생각과 달리 발데마르는 기름을 도기에 모으고 뚜껑을 덮었다. 식용으로 쓰는 건 무리더라도 기름의 용도는 무궁무진했다. 현지인에겐 지현이 모르는 지혜가 있었다.
“자, 그럼 이거라도 좀 드셔 보시구려.”
발데마르는 화덕 앞으로 돌아와 아까 보여 줬던 닭고기 튀김을 내밀었다. 지현은 한 조각 들고 먹어 보았다. 맛은 좋았지만 지현이 알던 치킨의 맛은 아니었다.
바삭하지만 바삭함만 강하고 쫀득함이 없었다. 튀김옷이 잘 부스러지고 다른 맛도 부족했다. 튀김옷을 만들지 않고 고기에 기름을 바른 뒤 바로 빵가루를 묻혀 튀긴 것 같았다.
“나도 직접 만든 건 아니고 만드는 법만 알지만 가르쳐 드릴 순 있어요.”
“그 정도면 충분하오. 부족한 건 시행착오로 해결하면 되니까.”
“아, 그리고 소스는 못 만들어요. 재료가 없어요.”
“그렇구려.”
지현이 있는 대륙에는 아직 토마토도 감자도 고추도 없다. 이 대륙에서 그런 걸 찾으려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탐험가들이 배를 타고 다른 대륙을 찾아가 그곳의 종자를 가져와야 했다.
앞으로 수백 년은 시간이 필요한 이야기였다. 라주 같이 지식과 기술 모두 갖춘 외계인이 돕지 않는 이상 말이다.
“뭐 그건 나중에 찾아보도록 하겠소.”
“흐흐. 이것도 맛있어요. 고기도 부드럽고.”
지현이 닭고기 하나를 더 집어 먹으며 말했다. 치킨과는 다르지만 이것도 나름의 맛이 있었다. 양념 치킨은 무리더라도 프라이드치킨까지는 실현이 가능해 보였다.
“냄새도 빠졌으니 슬슬 창문을 닫을까요?”
“그게 좋겠소. 불은, 굳이 다시 켤 필요는 없겠구려.”
발데마르가 일어나서 창문을 닫았다. 주방을 나가니 식당도 불이 모두 꺼져 을씨년스러웠다. 주방은 그나마 붉게 타는 화덕이라도 있었지만 완전히 불이 꺼진 식당은 어둡고 차가웠다.
하지만 식당에도 빛은 있었다. 한구석에 작은 등잔불에 의지해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주방에서 나온 지현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번병들이었다.
“일은 끝나셨습니까?”
“아, 기다리고 계셨어요?”
“이 녀석이 오늘 불 당번인 터라. 대장님은?”
“안에 계세요.”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그들이 들어가고 잠시 뒤 발데마르가 닭고기 한 조각만 남은 그릇을 들고 나왔다. 남은 건 리하르트한테 먹여 보겠다고 가져온 것이었다.
“자주 연습할 수 있는 요리는 아니오. 기름이 원체 비싸니 말이오.”
“오늘 쓴 건 올리브기름이었지요?”
“그렇소. 버터로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시도해 봤는데 그 솥은 이제 못 쓰겠더구려. 하지만 라드로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소. 라드로 만들면 가격을 확 낮출 수 있을 것이오.”
“건강할 거 같진 않네요.”
“무슨 뜻이오?”
“아, 아니요. 몸에 나쁠 수도 있다고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인데? 흠, 지현 양 말씀이니 내가 모를 지혜가 있겠지. 그래도 한 번 도전은 해 보고 싶소.”
잠시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지현은 문득 발데마르가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그 말을 못하고 다른 말로 돌리는 것 같은…….
“발데마르 씨.”
“듣고 있소.”
“혹시 고민 있으세요?”
“누구든 고민 한두 가지는 품고 살지 않겠소?”
“그럼 저랑 관련된 고민은요?”
“크흠. 볼바 다 되셨구려.”
발데마르가 헛기침을 했다. 떠날 때가 가까워질수록 감이 좋아지는 지현이었다.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니니 잠시 방으로 갑시다.”
“그러죠.”
발데마르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기 전 혹여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분명히 둘뿐인 것을 확인한 발데마르는 빗장을 걸고 문에서 거리가 먼 창가에 앉았다.
“전에 말해 준 그 건 때문이라오. 지현 양께선 내가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거라 했고 그 말대로 많은 고민이 필요했소.”
“크누트에 관한 일이군요.”
“그렇소. 그래서 결론은, 나는 묻어 두기로 했소.”
발데마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현은 말없이 그런 발데마르를 바라만 봤다.
“모처럼 중대한 사실을 가르쳐 줬는데 미안하오. 도저히 밝힐 수 없었소. 이건 크누트 왕을 견제한다거나 막을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소. 만일 내가 이 사실을 밝히면 반드시 내전이 일어날 것이오.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오.”
“그렇군요. 당연한 이야기였어요. 그럼 아는 사람은 더 없지요?”
“당장은 나와 지현 양, 그리고 어머님뿐이오.”
“어머님께는 말씀드린 거예요?”
“니오의 상황을 더 크고 넓은 시야로 바라볼 지혜가 필요했소.”
“이해했어요.”
발데마르가 바라는 건 니오의 번영이었다. 니오가 번성하기 위해 당장은 평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전쟁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감수할 것이었다. 개인이 평화를 바라는 것과 별개로 말이다.
“물론 크누트 왕을 그대로 두는 것은 옳지 못하지만, 살릴 수 있는 목숨은 살려야겠소.”
“발데마르 씨의 뜻은 깊이 이해했어요. 저도 그걸 지지해요.”
“고맙소.”
“그럼 남은 시간을 더 소소하고 즐겁게 보내야겠네요.”
“무슨 뜻이오?”
“큰일은 다 끝냈으니 떠나기 전까지 여러분이랑 최대한 추억을 많이 쌓아야겠다는 말이에요.”
“아, 그렇구려. 떠나기 전까지 나도 최대한 지현 양의 편의를 봐주겠소.”
“고마워요. 생각난 김에 사진이나 한 장 더 찍어요.”
지현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발데마르는 어색하게 웃으며 스마트폰을 들고 자세를 취했다.
지현은 지난 몇 주 사이에 사진을 수백 장이나 찍었다. 하루에도 열댓 장씩, 이따금 그 이상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런 지현은 이미 본부의 명물이었다.
처음에는 기겁을 했던 니오인들도 발데마르와 하인리히 덕분에 진정했다. 이제는 사진에 익숙해져서 지현을 만나면 오늘은 사진 안 찍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세 회계사와 하이틸란트인 학생들도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천신에게 기도하거나 마녀라고 호들갑을 떨기도 했지만 그 문제는 베겐도르프 주교의 도움으로 해결됐다.
다른 용병들과 달리 제국 관료들은 진정된 뒤에도 사진을 거부했다. 지현도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찍을 마음은 없었기에 그들에게 스마트폰을 들이밀지는 않았다.
반면 사진에 익숙해진 이들은 자신도 사진을 갖고 싶어 했다. 금속 거울조차 간부들이나 조금 갖고 있는 편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그림보다 선명하게 남길 수 있으니 누구라도 갖고 싶어 했다.
지현도 생각 같아선 사진을 인쇄해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싶었다. 그럴 방법이 없는 게 문제였지만.
‘라주 씨한테 부탁해 볼까. 이것도 저것도 너무 신세지는 것 같은데……. 일단 힐다 씨가 돌아오면 또 잔뜩 찍어야지.’
지현은 방으로 돌아가며 힐다와 함께 사진 찍을 콘셉트를 생각했다. 촬영은 요즘 찍히는 것뿐만 아니라 찍는 데에도 익숙해진 발데마르에게 부탁해 볼까?
* * *
엘라이히 공국의 주력군은 슐리히 호수의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 동서로 도로가 났고 남쪽은 완만한 능선이 있었다. 북쪽은 호수로 막혔고 호수 주위는 넓고 평탄한 땅이라 대군이 주둔하기 적합했다.
일단 슐리히 호수에 자리 잡으니 니오 용병대도 더 이상 공격을 가하지 못했다. 좁고 긴 도로에 늘어서 있을 때와 달리 대군이 뭉쳐 있어 타격을 주기 힘들었다.
대신 엘라이히 공국군을 극도로 지치게 만드는 건 성공했다. 그들은 본디 일주일 안에 도착했어야 할 길을 열흘 넘게 걸려 도착했다.
사상자를 늘리고 보급품을 훼손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적을 지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힐다는 적을 괴롭히는 법을 잘 알았다.
발데마르에게 배운 전략이 대단히 유용했다. 힐다는 적이 쉬고 싶을 때 움직이게 했고 움직이고 싶을 때 발을 묶었다. 악랄하기 짝이 없지만 그만큼 효과가 뛰어났다.
니오 용병대가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열두 번이나 공격을 가했지만 엘라이히 공국군의 전사자는 열 명이 넘지 않았다. 부상자까지 다 합쳐야 고작 100명 조금 못 되는 선이었다.
하지만 지쳤다. 몹시 지쳤다.
전투로 인한 사상자보다 피로 누적으로 낙오한 이가 훨씬 많았다. 안 그래도 힘든 산길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들이치는 니오 용병대의 공격에 병사나 기사는 물론 비크하르트도 노이로제에 걸렸다.
힐다는 적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도 지치게 만들었다. 습격할 때마다 울린 북을 슈비츠 정찰대에게 넘겨주고 적들이 휴식을 취하려고 할 때마다 수시로 울린 것이다.
열댓 사람이 북만 두들겨서 수만 명의 군대를 멈췄다. 조금이라도 경계를 늦추면 그 자리로 니오 용병대가 들이쳤다. 짜증이 극에 달한 비크하르트는 슈비츠가 아니라 니오로 군대를 끌고 가야 했다며 소리를 질렀다.
보급품을 넉넉하게 챙겼기에 행군이 늦어진다고 회군하진 않았다. 니오 용병대가 노력했지만 훼손한 보급품은 전체의 1퍼센트조차 안 되는 적은 양이었다.
호수에 진을 친 비크하르트는 오랜만에 푹 쉬었다. 일정이 많이 늦어졌지만 괜찮았다. 지금은 푹 자고 푹 쉬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외곽 경계 부대도 교대로 휴식하며 이틀을 보냈다. 그사이 선발대로 진군한 휘하 장군들과 연락도 취했다. 각각 동남쪽과 동북쪽에서 산맥에 들어와 아직까지도 적을 추격만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슈비츠의 촌뜨기 놈들, 열심히도 했다. 하지만 개미가 아무리 열심히 깨문들 사람을 거꾸러뜨릴 수 있겠더냐.”
“그렇습니다, 전하. 베른하르트 공자의 편지를 보면 적들은 우리 군을 볼 때마다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기 바쁘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슐리히 시를 점령하면 슈비첸 주는 우리 손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네. 그러고 나면 반란군 놈들도 항복하겠지.”
“그걸 막으려면 놈들도 별수 없이 슐리히 앞에 모일 겁니다. 틀림없이 놈들 최대 전력이겠지요.”
“모아 봐야 몇 천 명이나 모았겠나? 단박에 들이쳐 깡그리 박살 내고 전쟁을 끝내자고.”
“물론입니다. 고생한 보람이라도 챙겨야지 않겠습니까.”
“맞아. 고생한 보람이라도 챙겨야지. 지역 귀족들은 본보기로 몇 놈 처형하고 몇 놈은 작위를 박탈하지. 나머지는 농노로 만들어서 참전한 기사들에게 분배하고.”
“영명하신 판단입니다.”
비크하르트는 오랜만에 짜고 질긴 보존육이 아니라 정찰조가 잡아온 사슴 고기로 만든 스테이크를 먹으며 여유를 부렸다. 이렇게 먹으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이곳에 진을 치고 휴식을 취하는 이틀 동안 니오 용병대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슈비츠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북소리가 울렸지만 쳐들어온 이는 없었다.
혹시 몰라 정찰대를 산에 진입시켰지만 동태를 살피다 도망치는 일단의 병사를 발견한 게 전부였다. 주둔지의 안전은 확실하게 확보했다.
“그리고 우리 고생한 병사들에게도 마땅한 보상이 있어야지.”
“역시 병사를 생각하는 건 전하께서 대륙 제일이십니다.”
“다른 놈들이 병사를 너무 소모품으로 여기는 것뿐이야. 어디 보자, 슐리히 시면 그래도 슈비첸의 주도이고 관문 도시로 여행객들 호주머니를 털었으니 얼추 돈이 좀 쌓여 있겠지.”
“예. 최근 세금도 안 냈으니 금을 차곡차곡 쌓아 뒀을 게 뻔합니다.”
“그래그래. 참전한 병사들에게 이틀 동안 약탈을 허가한다고 전하게.”
“사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것입니다.”
“이틀이면 충분하겠지. 전투 부대는 이틀, 보급 부대는 이튿날부터 하루 동안이다. 살인 방화만 빼고 마음껏 즐겨도 된다고도 전하게.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패면서 그동안 쌓인 짜증을 푸는 것도 좋겠지. 내 우발적인 사고 정도는 눈감아 줄 테지만 정도껏 즐기고.”
“알겠습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군기도 엄정하게 세워 두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가 보게. 공격은 내일 시작하지.”
“예!”
출격 전의 마지막 휴식이었다. 병사들은 비크하르트의 지시와 포상을 듣고 크게 고양됐다.
슐리히 시는 호수의 북서쪽 끝에 위치한 도시라 호숫가의 길을 이용하면 걸어서 반나절 거리였다. 보급 부대는 주둔지에서 기다리고 정예 병력만 몰고 가면 순식간에 함락할 수 있었다. 정예 전투 병력만 모아도 슐리히 시의 인구보다 더 많았다.
동맹을 주도한 곳이 슈비첸인 만큼 슐리히 시의 상징성은 컸다. 또한 슐리히 시는 거점 관문 도시로서 다른 슈비츠 지역을 연결하는 곳이라 이곳을 차지하면 서약 동맹의 정보망을 대폭 약화시킬 수도 있었다.
그런 만큼 동맹군은 필사의 각오로 이곳을 지켜야 했다. 그것은 비크하르트보다 동맹군이 더 절실하게 잘 알았다.
“그래서 동맹군의 의향은 어떻지?”
“적을 어떻게든 격퇴할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할 거냐고. 우리랑 합쳐도 고작 4천 명 조금 넘는 수준이잖아. 심지어 중장 보병은 우리 빼면 일천도 안 되고 기병은 아예 없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형을 잘 이용하면 가능합니다.”
“지형, 지형이라. 그럴 거면 한참 전에 놈들이 도로에 있을 때 승부를 봤어야 했어. 저 호숫가는 너무 넓어. 기습의 묘를 살릴 수가 없다.”
“자자, 정보 유출을 걱정하시는 건 압니다. 하지만 우리한테까지 거짓말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씁. 훔쳐봤나?”
“호숫가에 적들이 들어오기도 전부터 호수 반대편에서 쑥덕거리고 계시면 모르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습니다.”
필립의 말에 힐다가 혀를 찼다. 다른 백부장들이 헛기침을 했다.
“속이려던 건 아니네. 자네 말했듯이 정보의 유출을 걱정한 것뿐이지.”
“이해합니다. 저희도 그랬으니까요.”
“자, 그럼 이제 허심탄회하게 작전 얘기를 해 볼까.”
힐다의 말에 필립이 싱긋 웃었다. 그는 새로운 지도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우리가 있는 슐리히 호수 북쪽 면이 지도의 이곳입니다. 적들은 호수 반대편이 이쪽에 있지요. 적들이 슐리히 시로 진입하려면 반드시 이 길로 가야 합니다.”
“그래, 그렇지.”
필립이 손가락으로 슐리히 시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그었다.
“지금 적들이 주둔하고 있는 호숫가는 땅이 평탄하고 넓지만 이곳부터는 다시 좁아집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좁은 구간, 바로 이곳 시지콘 계곡에서 승부를 지을 것입니다.”
“길이 좁으면 한 번에 싸울 수 있는 병력은 제한되지. 하지만 그것만으로 중기병의 돌파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진 않군. 필립 경, 그대도 알다시피 중기병은 다섯만 나란히 선회할 수 있어도 보병의 밀집 방진을 때려 부술 수 있네.”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어떤 상황? 아,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지금 연극할 때야?”
“힐다, 말 좀 조심히 하자.”
“아이쿠,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말이 가속하기 지극히 까다로운 습지대에서 싸운다면 말입니다.”
“설마 저기가?”
“호숫가에 난 흙길을 관리한다는 건 꽤나 까다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우린 전쟁 때문에 꽤 오랫동안 관리에서 손을 뗐지요.”
“적들도 그걸 알고 있을 텐데?”
“알면 뭐합니까? 저기 말고는 길이 없는데. 몇 만 명씩 끌고 우회로 찾아 도로를 뒤돌아 갈 자신 있으면 그러겠지요. 보급품도 슬슬 한계일 텐데.”
“하긴 여기서 돌아가는 것도 만만찮은 짓이지.”
“괜히 슈비츠가 전투를 피하며 산맥 안쪽으로 끌어들인 게 아니었군.”
“아뇨. 그건 그냥 병사가 부족해서 그랬는데요.”
“너 사람 실망시키는 데 재주 있구나.”
“아무튼 계획은 이렇습니다. 여기 길목에서 밀집한 보병이 적의 주력군을 막아설 겁니다. 그리고 여기 절벽과 능선에 병력을 이렇게 배치합니다.”
“지형을 잘 살린 망치와 모루인데. 가만, 그럼 우리는? 우리가 망치 역할이 아닌 건가?”
“니오 용병대에겐 더 중요한 역할이 있지요.”
필립이 깃펜을 들고 호수 남쪽 중앙에 X 표시를 했다.
“적의 보급 부대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겁니다.”
“적의 주력군과 싸우지 않고?”
“주력군을 한 번 막아 낸들 후방에 거점이 남아 있는 이상 적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운이 좋아 엘라이히 대공을 포획한다면 모를까 보통의 방법으로는 무리지요.”
필립의 말마따나 지형을 잘 살려 한 번 막아 내더라도 적이 일시 후퇴했다 재차 공격하면 병력이 부족한 슈비츠 동맹군이 불리했다. 슈비츠는 한 번의 전투로 엘라이히 공국군을 물리칠 방법을 고민했고 그 답이 이것이었다.
“아예 산맥에서 적들을 몰아낼 생각인가. 너무 판돈이 큰 도박인데.”
“애초에 단 한 게임밖에 못할 판돈만 있다면 판을 최대한 키워야지요.”
“주력군이 빠져나갔다지만 2만 명이나 되는 군대다. 천 명한테 너무한 거 아닌가?”
“군사 훈련이라곤 한 달에 이틀 정도나 받는 징집병들입니다. 칼로 벌어먹는 분들이 빼시면 안 되죠. 그리고 사실 다 알고 준비하고 계셨잖아요?”
필립의 말에 힐다가 혀를 찼다. 필립의 말대로 지난 사흘 동안 호숫가에 진을 친 엘라이히 공국군을 치기 위한 준비를 해 왔다. 적의 수는 물론 큰 위협이었지만 숫자만으론 니오 용병대를 막을 수 없었다.
“알겠어. 잘 끝나면 추가 요금이나 받아 내자.”
“예에? 이미 계약 다 하셔 놓고는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몰랐어? 우리 용병대엔 인센티브란 게 있거든. 솔직히 이번 전쟁은 계약 내용보다 훨씬 과로였다고.”
“옳소! 동맹군 사령관한테도 그대로 전달해라.”
“끄응. 사령관님께 상신은 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돈이 많진 않아요.”
“그럼 돈 많은 놈한테서 찾아볼까.”
힐다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단 한 번의 대 전투가 가까웠다.
필립은 동료들과 함께하겠다며 동맹으로 돌아갔다. 필립 이외의 연락책들도 하나둘 떠났다. 단 한 사람의 인력조차도 급했던 것이다.
계곡에서 적을 막아 내겠다고 장담했지만 사실 그것도 어려웠다. 적은 한평생 살인을 위해 훈련받고 그렇게 살아온 전쟁 기계였다. 그에 비해 아군은 양치기와 농부, 사냥꾼이 뒤섞인 부대. 심지어 수도 적보다 적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승산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기 위해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더 가담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전장에.
“쳇, 제법 전사답잖아.”
“어쩌지 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승산 없는 싸움이다. 차라리 우리가 적의 주둔지가 아닌 주력군의 후방을 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한 번 이기면 그 다음은? 그 싸움에서 우리가 온전할 거라는 보장도 없고 슈비츠 동맹군이 무사할 거라는 보장은 더 없어. 아까도 들었겠지만 한 번 막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 한 번 막는 걸로 적의 전투 의지를 꺾어야 해.”
“설령 이곳에서 슈비츠 군대가 전멸하더라도 적이 전투를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만들면 동맹의 승리다. 그런 각오로 임한다는 말인가?”
“또 모르지. 우리가 모르는 기발한 작전이 있어서 진짜로 저 계곡에서 적을 막아 낼지. 아무튼 중요한 건 우리가 우리의 일을 잘 해내는 거다. 알겠나?”
“좋아. 그럼 다들 준비시키지.”
천 명의 군대가 움직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각자 자신의 짐을 챙기고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준비했다. 지금까지 행했던 파상 공격과 비교도 안 되는 대 전투가 눈앞이었다.
* * *
호숫가에 새벽안개가 꼈다. 비크하르트는 촉촉한 공기와 새벽의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일어났다. 결전의 때가 온 것이다.
“안개가 짙구나.”
“예. 더욱 더 기습에 탄탄하게 방비하고 있습니다.”
“그래. 출진은 안개가 좀 가라앉고 나서 하지. 병사들에게 고기를 배식하고 든든히 먹이도록.”
“알겠습니다!”
비크하르트는 막사 밖으로 나와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켰다. 물기를 머금은 풀냄새가 좋았다. 이제 곧 이 냄새 한 줌마저 자신의 것이 되리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안개는 해가 완전히 떠오르자 빠르게 걷혔다. 호수 위는 아직도 안개가 자욱했지만 도로 쪽의 안개는 햇빛에 마르고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쓸고 나갔다.
“좋아. 고수, 진군의 북을 울려라.”
둥둥둥둥. 북소리에 맞춰 6천 명의 병사들이 앞 사람의 등을 보며 행군을 시작했다.
“시작됐다.”
북소리를 들은 건 엘라이히의 군대만이 아니었다. 계곡에서 대기 중이던 슈비츠 동맹군도, 호수 건너편에 있던 니오 용병대도 메아리를 들었다. 다들 긴장감에 근육이 부풀었다.
“놈들이 옵니다!”
“알고 있다. 각오를 굳혀라! 우리의 피가 슈비츠에 자유를 줄 것이다!”
“슈비츠에 자유를! 바이젠부르크를 몰아내자!”
“바이젠부르크를 몰아내자!”
병사들이 도로 위로 도열해 전열을 형성했다. 적이 우회할 수 없도록 바로 옆은 깎아지른 절벽이, 반대쪽은 호수가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폭은 30미터 남짓, 병사들이 다닥다닥 붙어 서면 한 번에 70명 가까이 설 수 있었다. 슈비츠 동맹군은 그렇게 70명씩 10열로 서서 두꺼운 벽을 만들었다.
아무리 대단한 기사라도 이 벽을 돌파할 수는 없었다. 설령 발데마르와 바우그가 오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벽은 소모품이었다. 적과 충돌하면 선두가 죽으며 점차 얇아질 것이었다. 그걸 대비해 후미에는 언제든 대열에 동참할 수 있는 예비 부대가 2,000명이나 더 있었다.
“놈들이 옵니다!”
“전원 준비!”
정찰병이 달려와 대열에 합류했다. 과연 잠시 뒤 비크하르트가 이끄는 6천 명의 대군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비크하르트는 주위를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서약 동맹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알 것 같았다.
좌우가 막히고 길은 좁다. 한 번에 싸울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되면서 동시에 투입할 수 있는 전력이 동일해졌다.
하지만 그건 같은 숫자의 군대가 동일한 전투력을 지녔을 때나 가능한 계산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누덕누덕 기워 모인 슈비츠의 군대는 엘라이히 공국군의 상대가 아니었다.
또한 좌우가 막혀서 우회 공격을 취할 수 없게 됐지만 슈비츠 군대가 도망치는 길도 막힌 셈이었다. 후퇴하려면 뒤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는데 보병이 발로 도망치면 기병의 먹잇감밖에 안 됐다.
“촌놈들이 무덤 자리로는 좋은 곳을 택했군.”
“오죽 급했으면 무기도 엉성합니다. 창의 높이 좀 보십시오.”
“흥, 장창치곤 꽤나 자루가 짧군. 하지만 이상하게 날이 큰 것 같은데?”
“어떤 창이건 저런 걸로는 우리 기병을 막아 낼 수 없습니다.”
“과연 그렇겠지. 루돌프 경.”
“예, 전하!”
“기병대를 이끌고 저놈들을 박살 내게.”
“순식간에 놈들을 섬멸하겠습니다!”
루돌프가 열 명의 기병과 함께 도로에 바르게 섰다. 그들은 돌진용으로 특수 제작한 기창을 들고 나란히 도열했다.
“순차 공격으로 놈들의 전열을 뭉개 버린다. 엘라이히의 기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루돌프가 앞장서서 슈비츠의 진형을 향해 돌진했다. 슈비츠의 병사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손에 쥔 무기를 더 바싹 쥐었다.
“루돌프 경, 바닥이 질척입니다.”
“알고 있다. 말의 피로가 크겠군. 교대 주기를 좀 늘리는 수밖에 없지. 자, 가자!”
“죽여라!”
첫 번째 충돌, 열 자루 창이 정확하게 열 사람의 가슴을 부쉈다. 컥 하는 숨 빠지는 소리를 내며 사람들이 쓰러졌다.
기사들이 속도를 떨어트리며 선회하는 순간 기사를 끌어내리고 싶었지만 무기 길이의 차이로 그것도 어려웠다. 하다못해 선회에 실수하는 기사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하나 같이 베테랑인지 누구 하나 실수하는 이도 없었다.
“하하하, 촌뜨기 놈들. 이게 전부인 모양이구나.”
루돌프가 돌아선 직후 다음 기사들이 다시 열 사람에게 창날을 꽂아 넣고 선회했다. 전형적인 기사의 방진 부수기였다.
비크하르트는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기사가 전장의 주역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키우기도 힘들고 유지비도 비싸지만 전장에서 기사란 최강의 존재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지금이다! 북을 울려라!”
막 세 번째 열이 아군 진영을 두들긴 직후, 슈비츠의 사령관이 벼락처럼 지시했다. 고수 두 사람이 즉시 적의 머리통을 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큰북을 두들겼다.
“루돌프 경, 놈들이 뭔가 준비한 게 있나 봅니다.”
“있어 봐야 후방 침투 정도겠지. 아군의 후방 경계가 고작 그 정도로 흔들릴 것 같은가?”
“하하하. 비크하르트 전하께서 그런 거에 당하실 리가 없지요.”
“응? 갑자기 어두-.”
흙먼지가 하늘을 가렸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하늘을 가린 것은 거대한 바위와 통나무였다.
절벽 위에서 쏟아지는 흙과 돌덩이가 이내 기사들을 덮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절벽 위에 매복입니다!”
비크하르트가 있던 곳은 측면이 높은 절벽이 아니어서 낙석 공격에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앞에 있던 기사들과 일부 보병이 낙석에 맞아 쓰러졌다.
바닥에 바위와 통나무가 부딪치며 흙먼지가 치솟았고 그로 인해 시계가 어두워지며 기사들의 지휘 능력도 약화됐다. 일부 지휘 기사가 낙석에 맞아 죽으며 병사들의 혼란이 가중됐다.
“절벽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디 있느냐?”
“저희가 진군해 오던 길 후방에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당장 1천의 보병을 이끌고 그리로 올라가 적을 소탕하라!”
“알겠습니다!”
비크하르트의 옆에 있던 지휘 기사가 깃발을 흔들며 병사들을 통솔했다. 그사이 먼지가 걷히며 도로 위의 참상이 드러났다.
곳곳에 피와 시체가 늘어져 있었다. 낙석을 피한 사람도 큰 충격을 받았는지 움직이질 못했다.
낙석의 소음과 먼지에 놀란 말들이 날뛰며 기사들이 낙마했다. 그나마 무사한 기사들은 필사적으로 말을 몰아 본진에 돌아왔지만 안 그래도 놀랐는데 급속한 기동까지 시키는 바람에 말이 지쳐 쓰러졌다.
“지긋지긋한 놈들이다. 이런 악랄한 함정을…….”
“그냥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놈들을 깡그리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습니다.”
“마땅히 그러해야지. 응?”
“지금이다! 용맹한 슈비츠인들이여! 울분을 토해 낼 때가 됐다!”
“와아아아!”
사령관의 지시에 지금까지 참고 있던 슈비츠 동맹군이 일제히 방진을 풀고 돌진했다. 그들의 돌격에 비크하르트는 물론 엘라이히 공국군 모두가 당황했다.
아무리 매복에 한 방 먹었다지만 일제 돌격을? 감히 중무장한 기사와 정예 병력을 상대로 농민군 따위가?
물론 상황은 좋지 않았다. 바위와 통나무가 길목 곳곳을 틀어막아 기병 돌진은 어려웠다. 더군다나 기사들 상당수가 도로 위에서 대기하던 중 낙석 공격에 당해 피해가 심각했다.
하지만 기사들을 빼고서도 보병이 수천 명이나 남아 있었다. 비크하르트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저 겁도 모르는 놈들을 모조리 참해라!”
“엘라이히 공국의 정예여, 나를 따르라!”
두 군대가 서로를 향해 달렸다. 이윽고 두 무리가 충돌했다.
슈비츠의 군대는 가장 먼저 말에서 떨어져 움직이지 못하는 기사들을 노렸다. 상당수가 정신없는 상황이라 억 소리도 못 내며 당했다.
“어디 시정잡배들이 꼬챙이 하나 들었다고…….”
일부는 허리에 찬 검을 뽑으며 일어서서 저항했으나 소용없었다. 기동력을 잃고 옆을 받쳐 줄 아군도 없었다. 하물며 상대는 육중한 무기를 든 군대였다.
짓쳐들어오는 창대를 방패와 검으로 밀어내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한 병사가 무기를 높이 치켜들었다 내리치는 순간, 창대에서는 나올 수 없는 강렬한 충격이 기사의 어깨를 찍었다.
기사는 그제야 상대의 무기를 바르게 볼 수 있었다. 창이 아니었다. 창날이라 생각한 부분에는 훨씬 크고 육중한 쇳덩이가 달려 있었다. 흡사 도끼머리와 같은.
“크으윽.”
“빨리 처리해라. 낭비할 시간이 없다.”
오른쪽 어깨를 잃자 곧장 방어 능력을 잃었다. 그 틈으로 세 개의 창날이 들어왔다. 사슬이 막아 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기사는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저항했으나 이내 목덜미를 뚫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쇳조각에 절명했다.
동맹군은 그런 식으로 기사들을 정리하며 전진했다. 아군을 구하기 위해 출격한 엘라이히의 보병들이 마주한 것은 후퇴한 기사가 아닌 피로 칠갑을 한 슈비츠의 군대였다.
“놈들을 처단하라!”
방패와 창을 쥔 병사들이 앞으로 나서서 벽을 만들었다. 방패를 굳건히 쥐고 걸어 나가는 그들의 뒤에 두 손으로 창을 쥔 병사들이 섰다. 그들은 앞선 전우의 어깨 위로 창날을 내밀고 전진했다.
“창으로 우릴 막아 보겠다고? 깃발로 집결!”
산개해 적들을 처리하던 슈비츠 군대가 지휘관에게 뭉쳤다. 그들은 모두 특이한 신무기를 쥐고 장창 방진처럼 섰다.
“할베르트의 데뷔전이다! 놈들을 박살 내자!”
서서히 간격을 좁히던 두 집단이 충돌했다. 선공을 가한 건 훨씬 긴 무기를 든 슈비츠 군대였다.
장창을 챙겨 오지 않은 엘라이히 군대는 2미터 조금 넘는 단창으로 무장했지만 슈비츠 군대의 할베르트는 장대 길이만 3미터였다.
더군다나 날만 덜렁 달린 창과 달리 창날 바로 밑에 길쭉한 도끼머리가 더해진 할베르트는 묵직한 무게로 힘겨루기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억센 산악 민족의 강인한 아귀힘이 빛을 발했다.
창과 창이 부딪칠 때 상대의 창대를 밀어내고 빈틈으로 창날을 찌르는 건 보병 접전의 기본이었다. 엘라이히 군대는 이 기본에서 상대를 이길 수가 없었다.
길이의 차이도 문제였지만 무기 끝에 실린 무게의 차원이 달랐다. 할베르트는 도끼머리의 무게와 형태를 이용해 창대를 찍어 누르거나 옆으로 쳐내며 더 멀리서 일방적으로 엘라이히 군대를 찔렀다.
니오 용병대가 창병과 싸울 때 긴 장대의 수염 도끼를 이용하는 것과 흡사한 응용 방식이었다. 이쪽은 도끼에 창날까지 달렸으니 걷어 내고 바로 찌를 수 있어 응용폭이 넓었다.
“크아악!”
선두에 서 있던 방패가 뚫리며 첫 번째 희생자가 발생했다. 전세가 급격하게 슈비츠 군대로 기울었다.
슈비츠 군대의 선두는 할베르트로 적을 미친 듯이 쑤셨다. 바로 뒤에 서 있던 이들은 자루를 높이 치켜 들은 뒤 내려 찍으며 적의 저항을 분쇄했다.
“방패 일제 발검! 간격 안으로 뚫고 들어가라!”
거리를 둔 힘겨루기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지휘 기사가 작전을 바꿨다. 방패를 들고 있던 병사들은 방패를 살짝 높이 들며 할베르트의 창날을 막아 내고 공간을 만들며 검을 뽑았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사정거리가 짧은 무기로 장병기를 든 적의 간격 안에 들어간다는 건 자살 행위였다. 니오 용병대조차도 장창을 든 슈비츠 용병대의 간격 안으로 들어간 건 막대한 희생을 내야 가능했을 정도니 말이다.
측면 공격이 가능하다면 방진을 흔들 수 있지만 좌우가 막힌 전장에서 그런 건 불가능했다. 이젠 희생을 각오하고 파고드는 수밖에 없었다.
예정된 수순대로 먼저 진입하려던 보병들이 무자비한 할베르트의 공격을 받아 축축한 흙바닥에 쓰러졌다. 방패가 하나의 할베르트를 막으면 그 위로 서너 개의 쇳덩이가 날아들었다.
“접근하고 싶다고? 소원대로 해 주마! 부대 전진!”
지휘관의 명령에 슈비츠 선두가 할베르츠의 날을 허리까지 내리고 자루를 옆구리에 끼웠다. 그들은 허리와 두 손으로 자루를 단단히 틀어쥐고 전진했다. 적의 방패에 부딪쳐 걸리자 온 체중을 실어 그대로 밀었다.
“으, 으윽!”
부딪친 쪽은 방패를 쥔 팔에 힘을 주어 버티려 했다. 이내 그들은 방패가 불안한 소리를 내며 삐걱거리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이들이 그런 아군과 부딪쳐 혼란을 빚었다. 이윽고 창끝에 집중된 한 사람의 온 체중과 힘을 견디지 못하고 방패가 부러지며 그 주인은 팔뚝과 상체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었다.
“2열, 찍어!”
적이 사정권 안에 들어오자 둘째 열에 서 있던 이들이 일제히 자루 끄트머리를 잡고 할베르트를 높이 치켜들었다.
“바, 방패!”
선두가 적의 찌르기로 움직일 수 없었기에 둘째 열에 있던 창병들은 급하게 그 뒤에 있던 동료로부터 방패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미처 머리 위를 다 가리기도 전에 묵직한 도끼날이 그들을 덮쳤다.
손이 재빠른 일부는 자신과 앞의 전우를 가렸지만 상당수가 그러지 못했다. 그나마 투구를 맞은 이는 운이 좋았다. 투구에 부딪친 도끼머리는 옆으로 빗겨 나갔고 충격은 투구가 흡수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전우에게 보호받지도 못하고 운도 없던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고통보다도 전신의 힘이 쭉 빠지고 오금이 풀리는 걸 먼저 경험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바닥에 쓰러져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자신이 쓰러진 걸 인식하는 것보다 통증이 늦게 찾아왔다. 고통에 찬 비명이 온 산맥에 메아리쳤다.
“전진.”
더 이상 전투가 아니었다. 살육이었다. 도축장에서 가축을 도살하듯 슈비츠 군대는 눈앞에 선 적들을 무참히 짓이겼다.
착란에 빠진 엘라이히 군대는 아군을 밀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휘 기사가 검을 뽑아 들고 병사를 베며 독전해도 소용없었다. 최소한 검에 베이면 깔끔하게 죽기라도 했으니까.
혼란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전염병이었다. 앞쪽의 병사들이 홀린 듯 도망치자 뒤쪽 병사들도 혼란에 빠졌다. 넋이 나간 얼굴과 사람의 목소리라곤 믿을 수 없는 비명이 공포를 가중시켰다.
앞에선 도살자의 얼굴을 한 슈비츠 군대가 다가왔다. 뒤로는 아군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도망칠 길이 없자 병사들은 호수에 뛰어들었다.
기괴한 광경이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호수 표면에서 허우적거렸다. 한동안은 수면 위로 사람의 머리가 치솟았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곧 두꺼운 목면 옷이 물을 흡수하고 사슬이 팔을 휘감으며 수면 위로 치솟던 머리가 하나둘 사라졌다.
조금만 더 침착하게 몸에 힘을 빼고 팔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몸을 뉘였다면 어떻게든 물 위에 떠오를 것이었다. 하지만 혼란에 빠진 병사들에겐 그럴 의식이 없었다.
“똑바로 정신 차려라 이 멍청이들아! 적은 우리보다 소수다! 침착하게 대응하면 얼마든지 몰아낼 수 있어!”
선두의 혼란 때문에 공포에 젖은 뒤쪽의 군대는 슈비츠 용병대를 상대로 얼마간 시간을 벌다 이내 선두와 똑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수백 명의 사람이 할베르트의 녹이 됐고 또 수백 명의 사람이 호수에 잠겼다.
저항했던 지휘 기사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비를 소리치다 차가운 시체가 됐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냐! 엘라이히의 정예들이 고작 산골짜기 촌놈들에게!”
“전하, 후방이 위험합니다!”
“후방? 후방에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게냐!”
“놈들이 숲에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절벽 위를 차지하려던 아군 군대가 매복에 당해 패퇴했습니다.”
“매복이 있다는 거야 당연한 거고 그걸 감안하며 올라간 게 아니더냐! 대체 지휘를 어떻게 하면 놈들에게 당한단 말이냐!”
“놈들이, 놈들이 낙엽 밑에 눕거나 나무 위에 숨는 방식으로 눈을 속였습니다. 숲에선 대열을 갖출 수 없어 산개해 올라가다 전 방위에서 기습을 당해…….”
“변명은 필요 없다! 그래서 후방의 방비는 어찌하였더냐!”
“예! 일단의 병력을 도로 측면에 남겨 밀집 방벽을 만들어 놈들이 내려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하지만 산에서 쇠뇌를 쏘고 돌은 던지는 등의 방법으로 아군을 소모시키고 있습니다.”
전방의 혼란은 절정에 달했다. 전방에서 잃은 군대가 천 명을 넘어섰고 적들은 계속 접근하고 있었다. 아직도 4천 명이 넘는 병력이 건재했지만 전장의 기세가 이미 기울었고 좌우가 막힌 지형 때문에 일발 역전을 꾀할 비장의 수단도 쓸 수 없었다.
“전방에 열 개 열을 만들어 500명을 남겨라. 나머지는 질서를 갖추어 후퇴한다.”
“전하!”
“토 달 시간에 실시해!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여야만 한다! 비록 놈들의 치졸한 계획에 당했지만 다음에는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한 사람이라도 많은 병사를 살려서 돌아가야 한다!”
“아, 알겠습니다.”
“지원자를 받을 시간조차 없다. 전방에 서 있는 병사는 그대로 방패가 된다.”
“예!”
비크하르트는 가신들과 함께 병력을 통솔해 후퇴를 지휘했다. 하지만 후방으로 돌아간들 그가 안녕을 얻긴 힘들었다.
* * *
“놈들이 출발한다. 우리도 가자.”
시간을 조금 돌려 오전으로, 비크하르트가 막 군대를 이끌고 출발했을 무렵이었다. 도로의 안개는 이미 흩어졌지만 숲에는 나무 사이로 안개가 짙게 남아 있었다.
니오 용병대는 축축한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숲뿐만 아니라 호수 위에도 진한 안개가 꼈다. 시간이 더 흘러 해의 고도가 높아지면 호수와 숲의 안개도 날아갈 테니 그 전에 움직여야 했다.
“조용히 움직인다. 콧등에 나비가 앉아도 도망가지 않을 만큼 조용히 움직여.”
아직 안개가 가시지 않은 나무 사이로 니오 용병대가 걸어 나왔다. 스무 명씩 머리에 배를 짊어지고.
“배 띄워라. 곧장 간다.”
안개 낀 호수 위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선두를 절대 놓쳐선 안 됐다. 하지만 소리나 빛으로 신호를 보낼 수는 없었다. 남은 방법은 단 하나, 각 배의 선장을 믿고 맡기는 것뿐이다.
지난 사흘 동안 니오 용병대는 숲에서 움직이지 않으며 배를 건조했다. 완벽할 수는 없었다. 물이 새는 건 물론이고 속도도 느렸다. 하지만 물에 떴고, 앞으로 나아갔다.
돛도 닻도 없는 나무배가 잔잔한 수면에 섰다. 모두 다 해 마흔 척, 총 인원 800명이 호수 위에 올랐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호수 남동쪽의 선착장은 이미 엘라이히 공국군이 점령했다. 북서쪽의 도시에 선착장이 추가로 있긴 했지만 작은 어선이나 용선 몇 척이 전부였다. 그걸로 대규모 병력의 상륙 작전이 가능했다면 엘라이히가 먼저 시도했을 것이었다.
니오 용병대는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없으면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흘 동안 나무를 베고 송진을 채취하고 목재를 다듬었다. 익숙하지 않은 지부 병력을 도와 본부의 용병들, 특히 게다 백부대가 고생했다.
니오 특유의 긴 배가 다시 그 이점을 발휘됐다. 흘수가 낮은 덕에 선착장이 없어도 호숫가에 바로 돌입할 수 있었다. 병사들이 깊은 물에서 내려 헤엄치지 않아도 됐다.
이 계획의 마지막은 호수 반대편에서 먹고 자며 정찰과 교란을 담당하던 십여 명의 병사들로 완성됐다. 이쪽에서 신호를 보낼 수는 없지만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서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다할 것이었다.
힐다가 남겨 놓은 북으로. 지난 며칠 동안 엘라이히 공국군을 괴롭힌 바로 그 북으로.
“출항한다. 앞뒤 간격 잘 재고, 길 잃지 말고. 건너편에서 만나자.”
배가 호수를 절반쯤 가로질렀을 무렵부터 먼 곳에서 북소리가 들렸다. 힐다가 빙긋 웃었다.
열네 명. 2만 명의 대군 앞에 나서기엔 너무나도 초라한 수였다. 도망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
나무 사이로 메아리치는 북소리에 엘라이히군이 부산을 떨었다. 병사들이 우왕좌왕하자 지휘 기사들이 사태를 수습했다. 그들은 즉각 지휘 아래 있는 병사들로 외곽 방어 부대를 조직하고 추격대를 편성해서 숲속으로 보냈다.
니오 용병대의 분견대는 숲속에서 도망 다니며 계속 북을 쳤다. 소리가 메아리쳐서 추적이 어려운 게 다행이었다.
“빌어먹을. 어차피 주력군이 도시로 진군 중이니까 그냥 무시하지. 괜히 힘만 빼다 지쳐 쓰러지겠어.”
“망할 놈의 산길.”
“정말 자네 말대로일세. 일단 외곽 방어 부대한테 방패랑 쇠뇌 나눠주고 창과 활을 1 대 2 비율로 배치하세.”
“그게 좋겠네. 젠장, 쉬지도 못하고 이게 무슨 꼴이야.”
지휘 기사들이 투덜거리며 추격대를 다시 불러들였다. 대오를 유지하기 힘든 산에서 매복이라도 당해 병력을 잃으면 그거야 말로 손해였다. 한 사람이 아까웠기에 당연한 판단이었다.
“어차피 제대로 된 피해는 처음 두어 번이 전부였지. 놈들은 수가 적어. 무리해서 들어오더라도 숫자로 밀어내면 그만이야.”
“그래. 그 말이 옳지. 하지만 경계는 철저히.”
“그야 이를 말인가? 경계야 당연히 철저히 해야지.”
만 단위의 숫자가 모여 있는 만큼 방어 부대를 즉각 편성할 수 없었다. 전령과 지휘 기사들이 말을 타고 돌아다니며 경계를 강화하라는 지령을 부대 곳곳에 내렸다.
주둔지의 좌우 폭은 2킬로미터에 이르렀기에 명령이 전달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휴식을 취하던 병졸들이 투덜거리며 일어나 무기를 잡고 산 쪽을 바라보며 섰다.
안개가 많이 옅어진 덕에 숲속도 어느 정도 잘 보였다. 그들은 눈을 크게 뜨고 혹시라도 나무 사이로 움직이는 건 없는지 살폈다. 그렇게 그들의 뒤통수로 날카로운 비수가 호수를 가르며 다가왔다.
가장 먼저 니오 용병대를 발견한 건 호수를 관람할 겸 식수를 채우러 나온 병사였다. 그는 안개 속에서 거뭇거뭇한 그림자를 보고 자신의 눈을 비볐다.
하지만 다시 봐도 그 검은 형상이 그 자리에 있었다. 거기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씩 다가오는 것 같았다.
낚시꾼일까? 슈비츠와 엘라이히가 전쟁 중이긴 하지만 사태를 모르는 민간인이 평소처럼 낚시를 하러 나왔다는 건 충분히 있을 법한 얘기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생각을 고쳤다. 배는 한 척이 아니었다. 거뭇한 그림자는 수십 척의 선단이었다. 순간 그의 머리가 새하얗게 비었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 10초,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다시 10초. 귀중한 시간이 날아갔다. 마침내 그가 소리쳤다.
“적이다!”
다급했기 때문일까. 적절한 외침은 아니었다. 그의 소리를 들은 군대는 더 눈을 크게 뜨고 혹시 자신이 놓친 적이 있나 숲을 자세히 살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지휘 기사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외곽 방어 부대를 돌아다녔다. 이내 그는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서 소리가 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머리를 돌렸다.
“이쪽에 적이다! 호수다!”
마침내 정확한 정보를 전달했지만 때는 늦었다. 힐다가 탄 배는 이미 십수 미터 안쪽까지 접근했다.
“노 접고 방패 들어.”
전력을 다해 노를 저었기에 배의 속력은 거의 10노트에 육박했다. 이들은 노를 배 안에 밀어 넣고 뱃전에 거치한 방패를 집어 들었다.
배는 관성으로 계속 나아가 호숫가의 개흙에 부딪치며 멈췄다. 배 위에 서 있던 이들은 휘청거리면서도 균형을 잡고 곧장 배에서 뛰어내렸다.
“방패벽!”
배에서 내리자마자 힐다가 방패를 앞세우며 소리쳤다. 그 즉시 스무 명의 사람들이 정면을 향해 방패벽을 펼쳤다.
급하게 호숫가로 달려온 기사가 조준할 틈도 없이 시위를 당기며 놓았다. 번개 같이 재빨랐지만 조금 더 빨라야 했다. 안 그래도 충분한 힘이 들어가지 못한 화살은 방패에 부딪치곤 허망하게 튕겨 나갔다.
“가자 놈들아!”
“와아아아아아아아!”
“집결! 깃발을 중심으로 집결하라!”
지휘 기사는 옆에 걸려 있던 깃발을 뽑아 들고 그걸 높이 휘두르며 병사들을 모았다. 지휘자가 없는 병사 개인은 혼란에 휩쓸리기 쉬우니 지휘권이 살아 있음을 보여 줘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자니 아군 병사뿐만 아니라 니오 용병대에게도 잘 보였다. 너무 잘 보였다.
“저놈이 머리다! 머리를 부숴라!”
“아 이런 제기랄…….”
니오 용병대는 눈앞에서 움직이는 적보다도 깃발을 든 자에게 집중했다. 기사는 한 손으로 깃발을 잡고 다른 손으로 검을 뽑아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이내 니오 용병대에게 짓밟혔다.
기사 주위로 모이던 병사들은 기사가 죽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흩어졌다. 니오 용병대의 수는 적었고 다른 기사의 지휘 아래 들어가 조직적으로 저항하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넓은 시야를 가졌고 사람을 통솔할 능력까지 갖춘 이는 이미 니오 용병대의 발아래 누웠다.
아군보다 적의 수가 적다는 것도 멀리서 볼 때나 알 수 있었다. 당장 눈앞에서 전우보다 적이 훨씬 많아 보이는데 그런 걸 어찌 안단 말인가?
적이 실제로 많고 적은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수적 열세라 느끼고 도망쳤다. 더군다나 그들은 도망치며 다른 이들에게 부풀리고 왜곡한 정보를 전달하며 혼란을 가중시켰다.
“게다, 하랄과 배를 지켜. 나머지는 적을 쳐부순다! 가자, 천둥의 자매들이여!”
“천둥과 북풍의 이름으로!”
니오 용병대는 결코 흩어지지 않았다. 백부대 단위로 뭉쳐 다니며 아직 모이지 못한 적들만 박살 냈다. 특히 병력을 어떻게든 수습하고자 노력하는 지휘 기사들이 그들의 먹이였다.
숲 방향에 나가 있던 병력들이 뒤로 돌아 주둔지 내부로 진입했지만 막사와 보급품 등으로 인해 대오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반면 니오 용병대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고 움직였기에 비교적 자유로웠다.
“불.”
굳이 불을 피우거나 가져올 필요가 없었다. 주둔지 안에 불이 많았으니까.
니오 용병대는 화덕에서 불씨를 끄집어내어 던지거나 화톳불을 넘어뜨리며 불을 질렀다. 그 불 때문에 엘라이히의 방어 부대는 더 혼란에 빠졌다.
“이쪽이다! 사격 개시!”
그래도 숫자가 많으니 누군가는 정신을 차리고 움직였다. 일부 부대가 엄폐물 없는 공간을 찾아 사격 위치를 잡았다.
쇠뇌가 화살을 토해 내자 몇몇 니오인들이 쓰러졌다. 쇠뇌는 근거리에서 특히 관통력이 뛰어났다. 그것들은 사슬을 끊고 누비 갑옷을 찢으며 살가죽에 박혔다.
“부상자를 배로 옮겨라. 힐데 조는 투창 준비! 나머지는 방패벽!”
“화살 장전! 조준!”
쇠뇌를 재장전할 시간이 없었다. 병사들은 효용을 다한 쇠뇌를 치우고 허리에 찬 활을 뽑아 당겼다. 지휘 기사는 소수 병력을 뒤로 돌려 쇠뇌를 장전토록 지시했다.
“브륀 경! 측면에 적입니다!”
“창병 옆으로 돌아! 놈들을 저지한다!”
창병들이 일제히 창을 들고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들은 두 손으로 자루를 굳게 잡고 앞으로 내밀었다. 방패를 앞세우고 싶었지만 반대쪽 적이 투창을 던지기에 이쪽으로 돌릴 수 없었다.
“지원군은 없는가!”
“적들에게 막혀서 이쪽으로 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대론 개죽음이다. 첫 돌격을 막으면 곧장 이동한다! 숲에 바싹 붙어 이동해 합류해야…….”
지휘 기사 브륀은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병사를 아끼는 훌륭한 기사였다. 단지 상대가 나빴다.
힐다가 창 사이로 뛰어들더니 도낏자루로 창대를 밀었다. “어어어?” 하는 사이 창 여섯 개가 옆으로 밀려났다. 옆으로 밀리며 쓰러질 뻔한 병사들은 놀란 나머지 바로 다시 서질 못했다. 지레의 원리를 이용했다지만 건장한 사람 여섯 명이 쥐고 버티는 무게를 혼자서 밀어 버린 것이다.
“찌, 찔러!”
단박에 사람 두 명은 넉넉하게 들어갈 공간이 생겨났다. 창병 하나가 창을 옆으로 틀어 힐다를 찔렀지만 힐다는 허리를 틀어 피하더니 오히려 상대의 창대를 붙들었다.
힐다가 창대를 잡고 그대로 당기자 상대는 몸을 못 가누고 휘청거렸다. 힐다는 당긴 창을 다시 앞으로 밀어 자루 끝으로 휘청거리는 적의 명치를 때렸다. 그의 옆에 선 병사들은 경악에 입을 쩍 벌렸다. 세상 어떤 인간이 두 손으로 쥐고 있는 창을 한 손으로 빼앗아 간단 말인가?
정작 그런 위업을 달성한 힐다는 비명을 지르는 손가락을 쥐었다 펴며 투덜거렸다. 무리하게 힘을 줬더니 왼팔 전체가 뻐근했다.
“씁, 아직 대장처럼은 안 되나.”
“사람이 좀 사람하고만 비교하면서 살면 안 됩니까?”
“나도 처음 베르세르크 됐을 때는 세상 못 이길 상대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천둥의 자매단 소속 베르세르크들이 힐다가 만든 길을 뒤따라 들어와 창을 찍어 바닥에 처박거나 밀어내며 저항을 무력화했다. 그들은 여유롭게 적을 분쇄하며 동료들을 위한 길을 만들었다.
두 줄로 서 있던 창병들이 순식간에 바닥에 누웠다. 그 뒤에 있던 병사들은 활을 돌렸지만 그보다 도끼가 먼저 날아들었다.
“크억!”
“측면이 뚫렸습니다!”
“쇠뇌. 장전은 끝났느냐!”
“거의 끝나 갑니…….”
“시간이 없다. 이리 내!”
브륀은 병사에게서 쇠뇌를 빼앗아 권양기를 있는 힘껏 돌렸다. 장전을 마무리한 그는 권양기와 밧줄을 버리듯 바닥에 던지고 쇠뇌를 견착했다.
브륀은 힐다를 정확하게 조준하고 한 호흡 만에 방아쇠를 당겼다. 미처 방패로 가리기도 전이었다.
“대장님!”
화살이 가슴 한복판에 꽂히는 순간 힐다가 휘청거렸다. 짧은 순간 정확하게 심장을 노린 무서운 솜씨였다.
“소란 떨지 마.”
힐다는 외피에 걸려 덜렁거리는 화살을 손으로 잡아 뽑고 소리쳤다. 그가 외치자 브륀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천둥의 자매단은 힐다가 화살을 집어 던지자 흡사 곰의 포효 같은 환호를 내질렀다.
안 그래도 사기가 바닥난 엘라이히군은 회심의 일격마저 무효로 돌아가자 전투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 그들은 점점 물러서다 무기를 집어 던지고 항복했다.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출혈은.”
“쉿. 조용히 해.”
힐다는 멀쩡한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화살촉 끝에는 피가 묻었다. 다행히 깊진 않았지만 아주 무사하진 못했다.
“이놈들 치우면 대충 이 주변 적들은 다 치운 거지?”
“예. 하지만 동쪽에서 적들이 전열을 형성했다고 합니다.”
“맞붙지 말라고 전해. 우리 목적은 달성했다. 주위 보급품 중에 가벼운 것만 대충 챙기고 나머진 모조리 불태워. 배로 돌아간다.”
“알겠습니다!”
“쓰으읍, 이제야 쓰라리네. 젠장. 안 죽은 게 다행이지.”
힐다는 가슴팍을 손으로 누르고 던졌던 자신의 도끼를 찾았다.
완벽한 기습이었지만 역시 적의 숫자가 문제였다. 지휘관을 먼저 제거하며 적의 전투력을 최대한 꺾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치한 적은 천 명을 겨우 넘겼다.
대신 상당한 수의 막사와 보급품을 파괴했다. 힐다는 보급품 더미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내 먹으며 ‘전쟁터에서 사과라니, 돈 많은 놈들은 부럽구먼.’이라고 투덜댔다.
배 근처에는 수십 구의 시체가 늘어져 있었다. 배를 지키던 니오 용병대가 격퇴한 이들이었다.
“적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빨리 빠져나가야 해.”
“좋아. 일단 탈출하고 생각하자. 조별로 집결!”
힐다가 소리쳤다. 사람들이 개흙에 파묻힌 배의 좌우에 달라붙어 호수를 향해 밀었다.
탈출하려는 걸 지켜만 보고 있을 엘라이히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배를 움직이는 니오 용병대를 보고 돌격했다.
니오 용병대는 일사불란하게 방패벽을 만들어 막았다. 산발적으로 달려드는 적들은 방패에 떠밀려 쓰러질 뿐이었다.
“창병 집결! 두 개 방면에서 밀고 들어간다!”
엘라이히군은 대오를 갖추며 시간을 벌기 위해 화살을 쐈다. 니오 용병대는 방패로 동료를 지키며 순서대로 배에 올랐다.
“진입한다!”
“아직 조직이 완벽하지…….”
“놈들은 어디 완벽해 보이냐? 더 놓치기 전에 들어가!”
창병들은 불완전하지만 집단을 형성해 한 걸음씩 니오 용병대에게 접근했다. 벌써 서른 척이 넘게 호수로 탈출하고 남은 인원은 고작 160여 명에 불과했다.
“아군을 지원한다! 사격 개시!”
어느 정도 호숫가에서 멀어져 안전이 확보된 배에서 투창과 활을 집어 들었다. 양측의 치열한 사격전이 펼쳐졌다.
“게다 백부장! 먼저 빠져나가! 여긴 우리가 막는다!”
“어림없는 소릴! 더 이상 인원이 줄어들면 적을 막을 수 없다. 크게 밀어내고 동시에 빠져나간다!”
“그게 됐으면 아까 나갔지, 젠장!”
“파트리샤. 배 돌려.”
“힐다?”
뭍에 남은 동료들이 걱정되는 건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후퇴하지 않으면 아군과 함께 패퇴하고 말 것이었다.
노잡이들이 망설였다. 힐다는 가슴을 부여잡고 다시 지시했다.
“배를 돌려. 아군과 함께 후퇴한다.”
“하지만 힐다 대장. 지금 저기로 돌아간들…….”
“누가 저기로 돌아간대? 방향은 저쪽이다.”
“저쪽? 아앗!”
“알았으면 전파해. 최소한 우리 백부대 전체가 움직여야 한다.”
“알았어. 키르스텐!”
키르스텐이 배에 실은 백부대 지휘기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 즉시 파트리샤가 허리에 찬 뿔나팔을 꺼내 힘껏 불었다.
“천둥의 자매단이여! 지휘기를 따르라!”
파트리샤의 지시에 배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천둥의 자매단을 제외한 배는 서로를 방해하거나 부딪치는 걸 피하기 위해 외곽을 크게 돌아 넓게 퍼졌다.
“힐다 대장님. 무슨 일입니까?”
“포위된 우군을 구조해 함께 탈출한다.”
“하지만 너무 열세입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우리는 저곳으로 들어간다.”
힐다가 가리킨 방향은 아군이 남은 자리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동쪽으로 치우쳐진, 아군과 접전을 벌이는 적의 후방이었다.
그곳에는 창병들을 지원하는 사수들과 지휘 기사만 남아 있었다. 더 뒤쪽으로는 2차 투입을 위해 병력들이 집결 중이었다.
“속도가 생명이다. 전속 전진!”
“대장님만 믿습니다. 천둥의 자매단, 마무리를 지으러 간다! 이름처럼 들이치자!”
힐다의 배를 비롯해 다섯 척의 배가 물 위에서 선회해 적의 옆구리로 들어왔다. 뒤쪽에서 집결 중이던 창병 방진이 급히 진군을 개시했지만 천둥의 자매단은 그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활을 든 이들은 부무장을 뽑아 들기도 전에 제압당했다. 힐다는 뒤에서 접근 중인 적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게다를 공격하고 있는 적들의 등을 걷어찼다.
“후방에 적이다!”
“아아악!”
“아군은 대체 뭘 하는 거냐! 에라이 무능한 놈들! 2열 거창! 거창!”
앞을 향하고 있던 군대가 뒤로 돌아 싸운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창 같은 무장으로 집단을 이루고 있다면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포위망을 부순다! 즉시 탈출해라!”
“힐다 이 멍청아! 너희는 어떻게 탈출하려고?”
“닥치고 일단 배에 타!”
창병 집단 하나가 무너지자 측면에서 공격을 가하던 집단도 위축됐다. 남아 있던 니오 용병대는 힐다와 합류해 그들을 밀어내고 곧장 배에 달라붙었다.
“놈들이 도망친다! 최소한 방해라도…….”
“우리가 열세다. 지금 접근했다간 개죽음이야. 최소한 후방의 2군이 합류해야 한다.”
“크윽.”
남은 배는 여덟 척. 하지만 인원은 260명이 넘었다. 배 하나당 정원은 스무 명이었으나 적어도 열 명, 많으면 열댓 명씩 배에 더 올라타야 했다.
“최대한 중심에 모여! 균형을 잡아!”
흘수가 뱃전에 가깝게 올라오는 걸 보고 다들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다행히 침몰하는 꼴은 면했지만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화살이나 투창은 다 버려! 배를 가볍게 만드는 거다!”
스무 명이 노를 젓는 사이 다른 이들은 짐을 버렸다. 배가 물에 깊이 잠긴 만큼 바닥과 벽으로 물이 샜기에 그걸 퍼내는 역할도 분주했다.
“화살 주의!”
배가 천천히 호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적들은 화살을 계속 퍼부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느린 배를 멈출 순 없었기에 다들 공격을 감수하며 노를 저었다.
대부분의 화살은 물에 빠지거나 배에 꽂히는 걸로 끝났지만 운 없는 몇 명이 화살에 맞기도 했다. 노를 젓다 갑옷이 보호해 주지 못하는 하박에 화살을 맞은 이도 나왔다.
“힐다! 게다!”
“좋아, 노를 멈춰! 인원을 분산한다!”
먼저 호수 중심까지 탈출했던 아군 배 일부가 와서 그들을 구조했다. 화살 사정거리 밖까지 도망친 그들은 서로의 배를 밧줄로 묶어 배가 옆으로 넘어지는 걸 방지하고 서로의 배로 인원을 나눴다.
“후. 상륙하자마자 사상자 파악부터 하지.”
“그 전에, 힐다 너!”
“엉? 왜?”
“가슴에 피!”
“이런 젠장. 좀 조용히 할 줄 모르냐.”
파트리샤가 다짜고짜 힐다의 혁대를 빼내고 서코트를 벗기더니 갑주의 결속을 해제했다. 다행히 사슬 갑옷처럼 위로 벗는 대신 정면의 가죽 끈들을 풀면 좌우로 열리는 형태라 갑주를 벗기는 건 쉬웠다.
경번갑의 앞을 풀어헤치자 피투성이가 된 누비 갑옷이 나왔다. 파트리샤가 거기에 손을 대자 힐다가 이를 악물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아파, 짜식아!”
“어이구, 아픈 건 아는 놈이 그 난리를 피웠어? 그래도 팔팔한 걸 보니 상처가 깊진 않은 모양이다.”
파트리샤의 말대로 상처가 깊지는 않았고 크게 벌어지지 않아 꿰맬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자연히 낫는 걸 기다리기에는 큰 상처였다.
얌전히 기다렸다면 모를까 격렬하게 전투를 펼치느라 출혈이 커진 것도 문제였다. 최소한 지혈하고 연고라도 발라야 했다.
“상륙하면 바로 처치하자. 후, 진짜. 넌 대장이야. 대장이 당하면 부대가 어떻게 되는지 몰라?”
“알아. 괜찮으니까 안심해.”
힐다 주위에는 노 젓는 인원을 뺀 나머지가 다 모여 있었다. 키르스텐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걱정이 뚝뚝 묻어 나오는 표정이었다. 힐다가 한숨을 폭 내쉬고 파트리샤와 키르스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해 줘서 고맙다. 하지만 이 정도는 별거 아니야. 나보다 더 심하게 다친 녀석들 생각하면 어떻게든 움직여야지.”
“쳇. 그래야 우리 대장이지.”
호수 건너편에 도달한 니오 용병대는 배에 싣고 데려온 부상자들을 먼저 내렸다. 호수 건너편에서 대기하던 부대가 그들을 받아 치료를 시작했다.
“지근거리에서 쇠뇌를 가슴팍에 맞고 이 정도로 끝났으면 정말 천신께서 살리신 겁니다.”
“난 그 양반 안 믿는데.”
“천신께선 계획이 다 있으시지요. 아무튼 석회로 지혈할 테니까 이거 입에 무세요.”
“끄으윽!”
힐다가 천 뭉치를 입에 무는 순간 진료하던 여군이 석회 가루와 약초를 뒤섞은 가루약을 상처에 뿌렸다. 그 순간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통증에 힐다가 악을 썼다.
“아직 아픈 걸 보니 다행입니다. 조금 더 참으세요. 고약도 발라야 하니까.”
“퉤, 이건 몇 번을 해도 적응이 안 돼.”
“발데마르 대장님도 그건 적응 못 하실 겁니다.”
“아, 키르스텐. 부상자 명단은 파악했어?”
“명단은 아직 작성하지 못했고 인원만 파악했습니다. 총 부상자 42명. 백부장님 포함입니다.”
“많이도 다쳤다. 죽은 애는?”
“다섯 명입니다. 모두 쇠뇌에 당했습니다.”
“역시 그렇겠지. 젠장! 기병이 없어서 다행이었지. 더 튼튼한 갑주가 필요해. 경번갑이라도 철판 비율을 높여야 해.”
“브리건딘이면 상체 전반을 철판으로 가리니 그게 빨리 완성되기를 기다려야겠습니다.”
“갑주가 팔다리 보호대보다 약하다는 게 말이 되냐고. 후……. 전사자 명단은 파악했지?”
“예. 각 전사자가 속해 있던 백부대의 백부장들이 장례를 집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애들 중에선?”
“부상자만 넷, 전사자는 없습니다.”
“좋아. 훌륭한 전과다. 내가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호숫가에선 전사자를 배에 실어 불을 지피고 있었다. 힐다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고개를 숙여 묵념하고 돌아섰다. 천둥의 자매단 모두가 힐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작전은 성공했다. 모두의 노력이 있었던 덕이다. 너희가 자랑스럽다.”
힐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전사들이여!”
순간 숲 전체가 힐다의 고성에 바르르 떨었다. 호숫가에서 기다리던 천여 명의 군대 모두 귀가 아닌 가슴이 짜르르 울리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우리의 승리다!”
“와아아!”
환성이 메아리도 없이 호수를 가로질러 건너편까지 달려갔다. 청각이 예민한 일부 엘라이히 기사들이 그걸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잠시 뒤 돌아온 비크하르트는 온통 불타고 엉망이 된 주둔지를 보고 말에서 내리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슈비츠 군대에게 기병대가 괴멸했고 보병 피해도 천 수백에 이르렀다. 그런데 주둔지에 돌아오니 막사와 보급품을 1할 가까이 망실했고 1천 명이 넘는 사상자도 발생했다.
이건 악몽이었다. 아주 끔찍하고 깨어날 방법도 없는 악몽. 한동안 비크하르트의 머리에서 두통이 가실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병사들에게, 행군 준비를, 아니, 휴식을 지시하라. 내일 날이 밝자마자 산에서 내려간다.”
“예, 전하.”
비크하르트가 축 처진 어깨로 주둔지를 걸었다. 살아남은 휘하 기사 그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들 또한 패전의 충격이 너무 컸다.
엘라이히 군대가 후퇴할 때까지 추가 공격은 없었다. 사기가 엉망으로 떨어지고 전의가 꺾였어도 엘라이히엔 여전히 2만이 넘는 군대가 있었고 지휘 체계도 살아 있었다.
슈비츠는 지형과 매복을 활용하지 않는 이상 그런 대군과 맞설 수 없었다. 잠깐의 승리에 도취해 정면 공격을 감행할 만큼 정신 나간 지휘관도 없었다.
정찰병들은 엘라이히군이 후퇴하는 걸 동맹 사령부에 전달했고 사령부는 그걸 니오 용병대에게 전했다. 혹시라도 이걸로 적을 격퇴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던 니오인들은 승전 소식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비크하르트의 주력군이 철수하자 산맥 곳곳에 남아 있던 분견대도 철군했다. 이제 남은 건 황제에게서 독립을 인정받는 것뿐이었다.
진짜로 성공하고 만 것이다. 고작 5천 명 안팎의 군대가 3만에 육박하는 적들을 몰아낸 것이었다. 전쟁사에 남을 대단한 위업이었다.
“그럼 우린 이만 돌아가야겠군. 그동안 수고했다, 필립.”
“이제부턴 또 한동안 빌헬름입니다. 당장은 몰아냈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엘라이히에서 살아야지요.”
“크크큭. 어쩌면 그 이름에 전설이 새겨질지도 모르겠는데.”
“빌헬름은 많으니 저보다 진중하고 솜씨 좋은 분의 행적이 전설로 남으면 좋겠네요.”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필립과 작별한 힐다는 용병대 주둔지를 살폈다. 다들 승전 소식을 듣고 돌아갈 마음에 들떠 있었다.
“보급품 점검하고 행군 준비해.”
“그래. 다들 수고했다. 몇 개 부대가 연합했는데도 어긋나는 일 없이 정말 잘해 줬어.”
“이렇게 자주 만나면 좋겠구먼. 지부 녀석들이랑 만나니 배울 점도 많던데.”
“우리야 말로. 본부의 솜씨에는 감탄했다. 발데마르 대장께서 편성을 이렇게 하신 건 다 이유가 있었군.”
“뭐, 우리 대장이니까.”
“그래. 우리 대장이지. 그리고 힐다 백부장. 감탄했다. 다음에도 전장에서 어깨를 맞댈 수 있기를 바란다. 자매들과도.”
“낯간지럽게 왜 이래. 그런 걸 말로 할 필요도 없는 거야. 전우니까.”
“그래. 전우니까.”
각 백부장들이 저마다 힐다와 손을 맞잡고 팔뚝을 맞대며 인사했다. 힐다는 씩 웃으며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전우를 잃고 또 힘들었지만 그만큼 얻은 게 많은 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