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120
정도마신 119화
순간, 만사무와 천화는 깜짝 놀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죽립까지 눌러 쓴 백의의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조금도 볼 수가 없었지만, 하늘하늘한 몸매는 그녀의 가녀린 음성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하지만 만사무와 천화가 놀란 이유는 그녀가 언제부터 객잔에 들어와 있었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짧게 마주 본 뒤, 객잔 구석의 묵영을 바라봤다.
묵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고, 만사무와 천화의 눈빛에 입을 소리 없이 달싹거렸다.
-반 시진.
이 죽립의 여인이 반 시진 전에 왔다는 의미의 전음이었다.
‘왜 나는 못 봤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나?’
천화는 그렇게 생각하며 여인을 다시 한번 살폈지만, 특별히 무공을 익힌 흔적은 없었다.
물론 만사무와 천화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높은 경지의 무인일 수도 있으나, 그럴 확률은 극히 낮았다.
같은 여인인 천화가 물었다.
“말씀하세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식사를 나눠 주는 것…… 을 생각한 사람이 이 객잔의 주인인가요?”
천화가 생긋 웃으며 답했다.
“네. 사완악 공자님입니다. 처음 들어 보시나요? 요즘 이 근방에서 사 공자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텐데?”
천화의 말에는 은근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죽립 여인이 조금 수상쩍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외지에서 왔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실까요?”
죽립 여인이 말했다.
“그 사람을 만나 보고 싶습니다.”
만사무가 조금 차가워진 음성으로 물었다.
“이유는?”
죽립의 여인은 별다른 기색 없이 답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그저 물어보고 싶다고만 하는 죽립의 여인.
천화와 만사무는 죽립의 여인을 위아래로 살펴보았으나, 특이점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신시에 다시 오시오. 사 공자님은 그때 나오시니.”
그런데 그때였다.
“뭘 물어보고 싶은데?”
갑자기 들려온 것은 사완악의 음성이었다.
천화와 만사무, 그리고 이번에는 묵영까지, 세 사람은 놀라면서도 놀라지 않았다.
사완악이 언제 어떻게 이곳으로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기에 놀랐고, 하지만 늘상 있는 일이기에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죽립의 여인은 매우 크게 놀란 듯 옷이 펄럭일 정도로 빠르게 돌아섰다.
그 앞에는 사완악이 탁자에 앉아 해맑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그 객잔 주인이야.”
“어, 언제……!”
“그게 중요해?”
“…….”
사완악은 씩 웃으며 물었다.
“우리 초면인 거 같은데. 뭘 물어보고 싶은 거야?”
죽립 여인은 안정을 되찾았는지 힐끗 주변을 살피고는 말했다.
“당신과만 대화하고 싶군요.”
“그렇게 말하니 모두 함께 대화하고 싶어지는데.”
죽립 여인은 당황한 듯 사완악을 쳐다봤다.
하지만 곧 사완악은 농담이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따라와. 여기는 손님들이 계속 올 테니까.”
사완악은 객잔 밖으로 나가 신법을 펼쳤다.
마치 죽립의 여인이 당연히 따라올 수 있을 거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리고 만사무와 천화의 입장에서는 매우 놀랍게도, 죽립의 여인은 가볍게 몸을 날려 그 뒤를 쫓았다.
“무, 무공을 익힌 흔적은 없었는데…….”
천화가 당황하여 중얼거렸다.
그럼 설마 저 여인이 천화와 만사무의 이목을 속일 수 있는 정도의 고수라는 걸까?
묵영이 어느새 천화의 옆에 다가와 말했다.
“은신술.”
“응?”
“훌륭한 은신술이었어. 자신의 기척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는.”
“아!”
묵영은 사령문에서 내려오는 암기술과 은신술을 익혔다.
둘 다 뛰어난 수준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은신술의 성취가 더 높았다.
그런 묵영의 입에서 훌륭하다는 칭찬이 나왔을 정도라면, 죽립 여인의 은신술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천화는 궁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누구일까?”
* * *
사완악은 인근의 동산으로 향했다.
죽립 여인의 신법은 아주 빠르지는 않았지만, 경쾌하고 표홀했다.
두 사람은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공간에서 멈추었다.
“이 정도면 됐나?”
죽립 여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사완악이 말했다.
“그전에 잠깐, 그 죽립이랑 면사부터 치우지. 난 불공평한 것을 싫어하거든.”
사완악 자신도 얼굴을 드러내고 있으니 상대도 그러라는 뜻이었다.
죽립의 여인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으나 순순히 죽립과 면사를 벗었다.
사완악은 그녀가 멈칫했던 이유를 깨달으며 작게 감탄을 흘렸다.
“호오. 상당한 미인이었군.”
미인(美人)!
어떤 남자들은 습관처럼 내뱉을지 몰라도, 사완악의 입에서는 가장 듣기 어려운 칭찬이 바로 미녀라는 말이었다.
절세미녀 채보령을 보고 자란 탓이었다.
물론 죽립의 여인 역시 사부 채보령에는 미치지 못하는 미모였으나, 그럼에도 자신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맑고 투명하게 깊은 눈동자와 오뚝하게 솟은 코,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삼단 같은 머리카락.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분위기였다.
그녀의 전신에서는 순수하고 고결한 기품이 느껴졌고, 지혜로움과 탈속함이 느껴졌다.
뭐라 표현할까…….
마치 숲속의 맑은 공기가 미녀로 환생한 듯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기에, 백의장삼을 입은 사완악과 마주하고 서 있으니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선남선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죽립의 미녀는 사완악의 칭찬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 무표정했다.
그녀는 보통의 여인과 달리 자신의 외모가 어떻게 비치든 상관이 없는 듯했고, 오히려 신경 쓰고 싶지 않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은 정말 훌륭한 일을 하고 있더군요.”
“객잔? 훗, 그렇게 보인다니 다행이네.”
죽립의 여인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진심이에요. 힘없는 약자를 돕는 것이 협이라면, 당신은 정파의 어떤 명문대파보다 더 훌륭한 협을 행하고 있어요.”
사완악이 웃으며 말했다.
“맞아. 난 대협이지.”
“…….”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게 뭔데?”
죽립의 미녀는 묘한 눈으로 사완악을 바라보다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문제를 내고 싶어요.”
“문제?”
“하나의 길이 있는데, 그 길의 양쪽은 낭떠러지예요. 길의 중앙에는 열 명의 어린아이가 앉아 있고, 반대쪽에서 세 명의 사내가 말을 타고 거칠게 달려오고 있어요. 가만히 있으면 열 명의 어린아이는 말에 밟혀 목숨을 잃을 게 분명한 상황이에요. 이때 당신에게는 하나의 활이 있어서, 쏜다면 달려오는 말들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하지만 그 말들을 쏘면 말 위에 있는 세 사내는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겠죠.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요. 오직 이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있을 뿐이에요. 아이들이 죽는 것을 지켜볼지, 말과 함께 세 명의 사내를 떨어뜨릴지.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실 건가요? 무엇이 더 정의로울까요?”
죽립 미녀의 말에 사완악은 팔짱을 끼며 흥미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문제는 매우 뜬금없었으나, 사완악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종류의 질문이었다.
사완악은 언제나 새롭고 흥미로운 것을 좋아했기에,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재밌는 문제군. 어떤 선택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아이들이 죽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테니…….”
평소 어떤 질문에든 곧바로 대답을 해내는 사완악이었으나, 죽립 미녀가 낸 문제는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죽립 미녀는 사완악이 어떤 선택을 할지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사완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 문제는 매우 교묘하군. 어떤 선택을 해도 나로 인해 누군가가 죽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야. 만약 내가 아이들이 죽는 것을 지켜보겠다고 한다면, 그때는 열 명이 아니라 백 명, 혹은 천 명의 아이여도 같은 선택을 할지 물어볼 것 같단 말이지.”
죽립의 미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사완악의 말이 정확했기 때문이다.
사완악은 이 문제가 묻고자 하는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선택을 하실 건가요?”
사완악은 그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정답이 없는 문제에는 답을 내놓을 수 없지.”
“실제 상황이라면 반드시 하나의 답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말씀하신 대로 답을 하지 않는다는 건, 아이들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그녀의 물음에 사완악은 재차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서 잘못된 문제라는 거야.”
죽립의 미녀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사완악은 찬찬히 말했다.
“실제로는 그런 상황이 존재할 수 없으니까.”
“그건 모를 일이죠.”
“아니. 이 문제는 결국 두 선택 중 무엇이 더 옳은지, 내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이지.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것이 합당한가에 대한 물음이야.”
죽립의 미녀는 사완악이 이렇게 날카로운 답변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거기에는 큰 허점이 있어. 다른 여러 가지의 조건을 모두 배제해 놓고, 반드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들었다는 거야.”
사완악은 계속해서 말했다.
“세상에는 반드시 전후 사정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선택지 역시 여러 길이 있을 수 있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올바를 때가 있지만, 그것은 오로지 소의 의지에서 비롯되어야 하겠지. 다른 사람의 강요로 될 일은 아니야.”
순간, 죽립 미녀의 얼굴이 멍해졌다.
“오로지 소의 의지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사완악은 다시 말했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들을 구해야 한다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볼 거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요?”
“그건 모를 일이지. 다른 사람의 눈에는 없어도, 내가 그 방법을 찾을지도 모르니까.”
“만약 당신이 그 다른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혹은 당신이 발견한 그 방법이 잘못되어 열 명, 백 명의 아이들이 죽게 된다면요?”
사완악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내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리고 사완악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때는 저놈을 욕하면 되는 거야. 원래 남 탓이 편하거든.”
“당신은…….”
죽립의 미녀는 머릿속이 복잡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사완악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정말 강하고 용감한 사람이군요.”
“칭찬이지?”
“부탁을 하나 하고 싶어요.”
사완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려운 문제에 답해 달라는 것에 이어 부탁이라. 바라는 것이 참 많은 여인이군.”
죽립의 미녀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언젠가, 당신에게 한 가지 큰 부탁을 할 거예요. 그때가 되면 그 부탁을 들어주세요.”
“하하하.”
사완악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 여인의 말하는 방식은 어쩐지 사완악을 재밌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나중에 할 부탁을 들어달라는 게 부탁이란 말이군?”
“염치없지만, 맞아요.”
사완악은 묘한 미소를 짓다가 대답했다.
“좋아, 그러지.”
죽립의 미녀가 오히려 반문했다.
“무슨 부탁일지 알고요?”
사완악이 말했다.
“모르지. 다만 나쁜 부탁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
그리고 이때 사완악이 말했다.
“하지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니까.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군.”
“말씀하세요.”
그러나 이어지는 사완악의 한마디에, 죽립 미녀의 안색은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넌 천기자의 몇 번째 제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