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en Psycho's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21)
21_개혁의 시작(3)
프랑스의 귀족, 로베르 드 후아티에는 생각했다.
‘내가 지금도 영국의 여왕을 무서워해야 하나?”
영국에 있을 때는 공포로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프랑스에 돌아오니 정신이 맑아졌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아, 그냥 영국에 안 가면 되잖아?
그럼 여왕도 날 해칠 수는 없을 텐데?
아무리 미친 여왕이라도 프랑스까지 그를 쫓아오지는 못할 것 아닌가.
그래서 로베르는, 처음의 공포를 잊어버렸다.
여왕이 요구했던 것도, 그냥 왕에게 전달하기만 했다.
달리 왕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걸로 사절의 임무는 다한 것 아닌가.
마음의 안정을 찾으니 세상이 다 좋아 보였다.
홀쭉해졌던 몸도 이전처럼 당당한 체격으로 돌아왔다.
로베르는 영국에서의 악몽을 잊어버리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 끔찍한 소식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뭐라고요?”
로베르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제가 영국에 다시 가야 한다고요? 그, 그것도 상주 대사로 말입니까?”
“그래.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지. 축하하네 로베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긴? 자네가 영국에서 이룬 업적을 좀 보게. 자네가 아니면 대체 누구를 영국에 파견하겠는가?”
아, 그제야 로베르는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리는 자신의 과오.
영국과 에스파냐의 동맹을 자신이 막았다는 그 거짓 보고를 말이다.
아직도 시내의 극장에서는 영국 여왕을 홀린 로베르에 대한 연극이 상연 중임을 잊고 있었다.
“자, 잠깐만요! 저는 거부하겠습니다! 공직을 그만두고 은퇴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폐하께서 특별히 자네를 지목하기까지 하셨는데.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아주 크다네, 로베르.”
압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베르, 사랑하는 내 동생. 네 덕분에 그 꼴 보기 싫은 여자한테 한 방을 먹여줄 수 있었단다.”
로베르의 누나이자 가장 든든한 뒷배.
디안 드 후아티에의 말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꼴 보기 싫은 여자’는 당연히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였고 말이다.
아름다운 왕의 애첩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로베르를 설득했다.
“네가 또 한 번 영국에 가서 여왕을 설득해주렴. 에스파냐와의 지루한 분쟁에서 우리 프랑스의 편을 들어달라고. 그리되기만 하면, 전하께서도 더는 메디시스 같은 천박한 졸부 가문은 필요 없다고 말씀해주시지 않겠니? 그럼 카트린 그 년도 우스운 꼴이 되겠지. 나를 위해 그렇게 해줄 수 있지. 로비?”
로베르는 그 대화에서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자신을 영국 대사로 밀고 있는 것은 제 누이다.
둘째, 따라서 자신은 결코 그 자리를 거부할 수 없다.
제 누이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바라던 걸 가지지 못한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면 나는 여왕에게 살해당할 텐데?’
갑작스레 목숨의 위기가 닥쳐왔다.
로베르는 헐레벌떡 궁전으로 달려가 알현을 청했다.
“폐하! 부디 영국의 메리 여왕이 보낸 제안을 재고해주십시오!”
“오, 로베르 대사. 안 그래도 모직 교역량을 늘리자는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생각하고 있었네. 본래는 별 뜻 없었다만, 여왕이 공장이라는 걸 설치하며 그쪽 모직의 품질이 좋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살았다!
로베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 섣부른 판단이었다.
“하지만 대서양 항해에 투자할 수는 없어. 쓸데없는 재정 낭비일 뿐이야. 이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갈라치기 한 바다 아닌가. 지금처럼 베네치아에서 수입해오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그, 그런···!”
로베르는 그 후 여러 차례 왕을 설득하려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나는 이제 죽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여왕은 분명 대서양 투자에 엄청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죽하면 자신을 독살로 협박까지 했겠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투자금을 가져가지 못한다?
‘그럴 수는 없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해!’
로베르는 그다음부터 다른 귀족들을 찾아다녔다.
하다못해 민간의 투자라도 끌어오려 한 것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로베르의 명성이 좋은 영향을 미쳤다.
“뭐, 로베르 그대라면 믿을 수 있겠지.”
“그대가 담대한 배짱과 축복받은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소. 그대가 이 돈을 배로 불려주길 기대하지.”
하지만 모인 돈은 아직도 터무니없이 작았다.
물론 금액 자체야 적은 금액이 아니었지만, 국가규모의 투자라고 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는 것이다.
로베르가 절망에 빠지던 바로 그때.
그에게 손을 내미는 이가 있었다.
“저는 네덜란드의 재스퍼라고 합니다. 무역상이자, 행정관이죠. 저희 잠깐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황제가 다스리는 땅.
그러니까, 저 수상한 남자는 적국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로베르에게는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 손을 내민 자가 악마일지언정, 그것이 유일한 구원의 손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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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말이지···’
로베르는 잠깐 자신을 반성했다.
영국엔 진짜 악마가 있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어서 오게.”
여왕은 다짜고짜 재스퍼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재스퍼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며 대답했다.
“예? 아, 일단 환대는 감사합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아, 그런 건 됐네.”
여왕이 그의 말을 툭 끊어버렸다.
“그것보다, 자네 지금 네덜란드의 상인이라고 했나? 현시점, 세계에서 가장 회계가 발달한 지역 중 하나인 그 네덜란드?”
“아, 예. 그렇긴 합니다만-.”
“그리고 행정관인 그대 또한 회계에 일가견이 있을 테고?”
또다시 말이 끊겼다.
“그야, 어느 정도는-.”
“겸손할 필요 없네! 당장 나를 따라오도록.”
“예?!”
그렇게, 재스퍼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제 용무도 전달하지 못하고 여왕에게 질질 끌려 사라졌다.
“역시, 진짜 악마는 따로 있었던 거야···!”
홀로 남은 로베르 대사는 사라지는 재스퍼의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자신이 악마의 희생양이 아님을 감사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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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부정부패를 막을만한 행정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재스퍼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물었다.
드디어 여왕이 자신을 끌고 온 목적을 듣게 되었다.
“그래. 그대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데?”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외국인인 자신이 그런 걸 해야 하는가?
재스퍼는 짧게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대충 그럴듯한 말이나 해주고 넘어가자.’
“복식부기를 도입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복식부기?”
“매번 현금의 출납과 거래 상황이 생길 때마다 차변과 대변에 이를 기록하고, 둘을 비교하여 회계의 집행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는 회계법입니다. 그러니까 이원적인 구조로 부채와 자본, 자산을 기록하고···”
재스퍼는 설명 중 말을 멈췄다.
앞에 있는 건 신입 회계사가 아니라 왕이었다.
이런 말을 알아듣지도 못할뿐더러, 관심도 없겠지.
“그냥 자금 흐름을 깔끔히 보여주는 회계법입니다. 부패를 단속하기도 쉽고요.”
“훌륭하군. 국고를 관리하는 내 회계사들에게도 그 방식을 가르쳐줄 수 있나?”
“제가 그 국고를 볼 수 있다면 말입니다. 폐하.”
재스퍼로서는 확고한 거절 의사를 표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게. 내가 허가장을 써주도록 하지.”
“아니,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결국, 재스퍼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를 다짜고짜 끌고 올 때부터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남에게 함부로 국고를 보여주겠다고?
심지어 회계 장부 수정을 위해 국고를 본다는 건, 그 나라 내실을 전부 알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런 걸 생판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보여주겠다니.
이 여자, 자신이 왕이라는 자각이 있기는 한 건가?
온갖 험담이 그 마음속에서 요동칠 때, 여왕이 돌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자네도 잉글랜드의 국고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나? 서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예? 아니, 제가 어찌 감히 그런 걸 궁금해하겠습니까?”
“그런가? 생각보다 간이 작군. 에스파냐를 상대할 동조자를 찾고 있으니, 그 정도는 확인해보고 싶어 할 거로 생각했는데.”
“···!”
재스퍼가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건가? 오히려 내가 더 놀랍군. 대놓고 네덜란드의 행정관이라 말했으면서, 방문 의도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여왕은 진심이었다.
그야, 여왕에게는 정보가 있었으니까.
‘앞으로 10여 년 뒤,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에 대항해 독립 전쟁을 일으킨다.’
네덜란드는 현재 에스파냐의 식민지 상태.
부유한 상업 도시라는 이유로 불합리하게 많은 세금을 부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에스파냐는 선을 넘어버리기까지 했다.
기존 네덜란드의 지배층이었던 행정관들을 내쫓고, 친 에스파냐 귀족들로 그 자리를 채우려 한 것이다.
전쟁은 10년 뒤부터 시작일지라도, 이미 네덜란드의 불만은 잔뜩 고조된 상태.
이런 상황에서, 네덜란드의 행정관이 에스파냐의 적대국 프랑스의 배를 타고 영국에 나타났다?
얼마 전 에스파냐 차기 황제를 내쫓아버린 영국에?
당연히 배신하기 전 동맹국을 구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네덜란드와 손을 잡을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여기까지 추측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지.’
여왕으로서는 정말 대수롭지 않은 추리였다.
문제는, 추리의 밑바탕이 되는 정보들을 이 시점에 영국의 여왕이 가지고 있을 턱이 없다는 점이지만.
‘대체 무슨 수로 그걸 알아챈 거지?’
재스퍼의 등골이 싸늘해졌다.
그의 의도를 완벽히는 아니어도 얼추 비슷하게 맞췄다.
영국의 여왕은 독심술사인가? 아니면 악마?
게다가, 여왕의 말은 아직 끝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네덜란드가 진심으로 나와 조약을 맺으려 했다면, 자네 혼자 딸랑 보내지는 않았겠지.”
그야 그랬다.
재스퍼는 일국의 사신이라기엔 제대로 된 예절과 형식을 갖추어 왕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비밀리에 보낸 밀사라기엔, 너무 대놓고 프랑스 대사의 배를 타고 왔고.
“그래서 나는 생각했네. 자네는 네덜란드에서 우리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혹은 시험하기 위해 왔다고.”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군요.”
재스퍼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틀림없이 여왕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여왕은 뜻밖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뭐. 상관없네. 확인하고 싶은 만큼 확인해보게. 그래서 국고도 보여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냥, 이거 하나만 명심해두게나.”
여왕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그대가 나를 시험할 때, 나 또한 그대를 시험할 거라는 것을.”
재스퍼는, 웃고 있는 여왕의 눈이 늑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재스퍼는, 자리에서 일어나 직각으로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감히 폐하를 속이려 했습니다. 복식부기는, 아마 이 나라에선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왕이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왠가? 그대가 내게 해준 설명이 잘못된 것이었나?”
“아니요. 틀리지 않습니다. 틀리지 않았기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고 한 것입니다. 복식부기는 지나치게 투명하니까요.”
지나치게 투명하다.
모든 추악함과 더러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단점 아닌 단점 탓에, 복식부기는 발명된 지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빛을 보지 못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네덜란드처럼 지배층이 확고하지 않은 지역에서나 유용하게 쓰일 뿐이었다.
영주나 군주 중에 복식부기의 유용성을 알아보고 도입하려 시도했던 자들도 있었지만, 성공한 자는 없었다.
“그러한가?”
여왕은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해 보였다.
“다른 방식으로 회계 문제를 해결하려면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네덜란드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물론 네덜란드에 돌아간 뒤, 유능한 회계사들을 몇 보내드릴 수는 있겠습니다만 시일이 조금 걸릴 겁니다.”
“괜찮으니, 그대가 이야기한 대로 하게.”
“예. 그러면 제가 회계사를 보낼 테니···”
“아니.”
여왕은 언제나처럼,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복식부기인가 뭔가 하는 그거. 도입해보라고.”
재스퍼는 자신만만한 여왕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멍하니 정신을 못 차리는 재스퍼를 버려두고, 여왕이 시녀를 불렀다.
“편지지와 잉크를 가져와 주렴. 아무래도 서신을 보내야 할 것 같아.”
“어머, 누구에게 보내시나요?”
“서리 백작. 아, 혹시 모르니 스티븐 주교에게도.”
여왕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계획이 정리되었다.
복식부기 도입? 어렵지 않았다.
여왕은,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