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564
상남자 564화
기반 작업을 마친 권세중 대리는, 발표 막바지에 이르러 준비했던 패를 내보였다.
“종합하면, 추가 요구하신 일정과 물량은 저희가 어떻게든 맞출 수 있습니다.다만, 먼저 한성전자에서 물량 확보를 약속해 주셔야 합니다.”
“물량 확보?”
프로모션 담당 이광석 상무의 물음에, 권세중 대리가 과감하게 질렀다.
“네.반도체 디스플레이는 완전히 신규 제품인 데다, 고객은 한성전자뿐입니다.”
“흠.”
“기껏 투자했는데 약속된 물량을 소화 못하면, 저희 회사엔 타격이 큽니다.”
웅성웅성.
회의장 분위기 일순간 술렁였다.
그럴만한 게 지금껏 한성전자가 계열사 부품을 사면서 물량 확보를 약속한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한성디스플레이는 얼마 전까지 같은 회사 사업부였다.
이렇게 선을 긋는 행동은 갑인 한성전자 입장에서 불쾌할 만했다.
이광석 상무는 발표자에게 따지는 대신, 전임 프로모션 담당이었던 홍일섭 전무를 쏘아봤다.
“홍 전무님, 누가 보면 우리가 억지 요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리스크가 큰 일이다 보니, 저희 발표자가 걱정을 한 것 같습니다.의견 청취 개념으로 받아 주십시오.”
홍일섭 전무는 후임이지만 갑이기도 한 이광석 상무에게 정중하게 답하며, 주재오 전무를 힐끔 봤다.
머릿속엔 얼마 전 유현이 했던 말이 떠올라 있었다.
-그룹전략실에서 참관했을 때, 한성전자와의 관계를 정립해야 합니다.운만 띄워 주십시오.그룹전략실에선 분명 저희 쪽 손을 들어 줄 겁니다.
솔직히 홍일섭 전무는 유현의 말을 반신반의했다.
그럼에도 따라 주기로 한 건, 자신에겐 그리 위험한 도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엔 어린 발표자의 실수라는 핑계를 대며 빠져나오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웬걸?
“아니, 지금 같은 식구끼리…….”
이광석 상무가 채 반박하기도 전에, 주재오 전무가 곧장 오케이 신호를 보냈다.
“그냥 전자에서 물량 약속해 주세요.”
“전무님.”
“왜요? 수량 자신 없어요?”
주재오 전무가 턱짓하자, 이광석 상무가 곧장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닙니다.자신 있습니다.”
“됐네요.그럼 그렇게 진행합시다.”
“네.알겠습니다.”
이어진 주재오 전무의 한마디에 모든 게 결정됐다.
여기 있는 한성전자 임원들 중 누구 하나 그의 말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만큼 그룹전략실 인사지원 담당 주재오 전무의 힘은 막강했다.
“…….”
홍일섭 전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껌뻑이는 사이였다.
권세중 대리와 눈을 마주친 유현이 몰래 엄지를 내밀며 성공적인 발표를 격려해 줬다.
척.
입을 꾹 다문 권세중 대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하지만 눈가에 잡힌 진한 주름까진 숨기지 못했다.
유현이 반도체 디스플레이 사업의 가장 큰 리스크로 둔 부분이 바로 물량이었다.
1천만 대란 수량은 고객사의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여지가 있었다.
어느 정도의 변동은 당연히 대비할 수 있었다.
다만 모종의 이유로 주문량이 턱없이 모자라게 될 경우가 문제였다.
고객이 하나뿐인 지금의 구조상, 손실은 하청인 한성디스플레이가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
신화반도체의 손실분까지도 메꿔 줘야 하는 건 덤이다.
이게 중간 부품 업체의 가장 어려운 점이었다.
하지만 권세중 대리의 물량 확보라는 카드가 상황을 바꾸었다.
원했던 대로 한성디스플레이의 존재감을 제대로 보여 준 셈이다.
대단한 성취를 이뤄 내서일까?
미팅을 끝내고 복귀하는 길 내내 권세중 대리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는 그치질 않았다.
운전대를 잡은 그가 여전히 믿기지 않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뭐가?”
조수석에 앉은 유현이 묻자, 권세중 대리가 이유를 댔다.
“정말 너무 쉽게 일이 풀린 거 같아서.”
“네가 발표를 잘한 거야.”
“설마.”
“홍 전무님도 극찬하셨잖아.잘한 게 맞아.”
말 그대로 권세중 대리의 발표가 좋았다.
기반 지식이 없는 사람이 들어도 괜찮을 만큼 쉽고 직관적이었다.
그 덕분에 주재오 전무가 그리 관심 없어 했던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아니었다면?
아무리 그가 유현에게 받은 게 있다고 하더라도 쉽게 결론을 내려 주진 못할 터였다.
며칠 밤을 새우며 발표 준비를 했던 권세중 대리는 민망한지 손을 휘휘 저었다.
“괜히 또 그런다.그런데 정말 한성전자가 물량 확보를 해 줄까?”
“당연히 그렇겠지.그룹전략실 앞에서 약속한 거잖아.무조건 해 줄 수밖에 없어.”
“그러다 구글이 물량을 축소하면 어떻게 돼?”
“한성전자가 떠맡는 거지.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본인들이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거고.”
“헐.넌 이젠 하다 하다 갑까지 부려 먹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네가 잘해서라니까.”
유현이 어이없어 했지만, 권세중 대리는 별로 신뢰가 없어보였다.
곰곰이 생각하던 권세중 대리가 불쑥 다른 주제를 꺼냈다.
“하하.됐고, 주재오 전무님인가? 그분 그룹전략실에 있을 때는 어땠어?”
“왜?”
“화끈해 보여서 하는 말이야.”
“그때도 화끈했지.앞으로도 화끈할 거고.”
간단하게 대답한 유현이 피식 웃었다.
지금부터 뒤에서 바쁘게 움직일 주재오 전무를 떠올렸다.
그의 실력이라면, 윤주탁 부사장의 비리에 대한 실마리 정도는 금방 찾을 터였다.
어쩌면 그 비리가 로열패밀리의 심장부를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될지도 모른다.
모두를 날릴 대형 폭탄의 뇌관이 자신의 손에 쥐어졌을 때,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결국 누를 수밖에 없게끔 유현이 판을 짜뒀다.
문제는 그 과정을 막아설 세력이었다.
‘이준일 실장이 알게 된다면?’
유현이 복잡하게 벌어질 뒤 상황을 떠올릴 때였다.
지이잉.
휴대폰이 울리며, 이 부분을 깔끔하게 정리해 줄 남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바로 나도하가 보낸 메시지였다.
-까짓것 면접 보겠습니다.언제, 어디로 가면 됩니까?
씨익.
순간 유현의 입꼬리가 길쭉하게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던 권세중 대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데 그렇게 좋아?”
“아니.그냥.세중아, 나 이번 주에 휴가 좀 써야겠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실장이 직원에게 휴가 쓰는 것도 허락받냐?”
황당해하는 권세중 대리를 보며 유현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잘 부탁한다는 의미지.”
“걱정 붙들어 매.너 없어도 잘 굴러가게 만들 테니까.”
“땡큐.말만 들어도 든든하네.”
빙긋 웃음 지은 유현은 다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
녀석과 다시 인연이 될 수 있을까?
다른 어떤 일보다 나도하와의 만남이 무척 기대됐다.
며칠 후, 유현의 기대가 실현될 날이 다가왔다.
휴가를 쓴 유현은 체육관 건물 2층으로 출근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먼저 와 있던 박영훈이 유현을 반겼다.
“어서 와, 한 대표.”
“대표라는 말은 이제 빼기로 했잖아.일도 안 하는데 무슨 대표야.”
“입에 붙어서 그래.사외이사로 정정하면 되지?”
“그게 그나마 낫네.근데 사무실 정리는 아직인가 봐?”
유현이 휑한 사무실을 둘러보며 묻자, 박영훈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내부 공사는 어느 정도 끝났어.가구는 다음 주에 들어올 거야.파티션 작업도 그때 같이 할 거고.”
“당분간 인원도 없을 텐데 무슨 파티션이야?”
“나중을 위해서라도 준비해야지.탕비실과 회의실도 최대한 빨리 꾸밀 거야.”
“혼자 있어도 갈 곳은 많겠네.”
따지고 보면 체육관과 똑같은 크기를 혼자 쓰는 셈이었다.
유현이 피식 웃자, 박영훈이 박수를 짝 쳤다.
“아, 대표실은 정리됐어.”
“형이 그렇게 로망을 가지던 대표실 말이지?”
“그래.이리 와 봐.꽤 멋져.”
박영훈은 신이 난 표정으로 유현의 팔을 끌었다.
대표실은 사무실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박영훈은 들뜬 표정으로 내부를 안내했다.
“네가 말했던 대로 방 사이즈를 더 키웠고, 소파는 4인이 앉을 수 있도록…….”
대표실 느낌이 물씬 나는 검은 가죽 소파와 원목으로 된 책상이 무척 인상적이다.
유현이 선택에 도움을 줬던 가구였지만, 직접 마주하니 느낌이 또 달랐다.
그중에 가장 색다른 건 벽면에 붙은 책장이었다.
책장 속을 살핀 유현의 입에서 절로 실소가 나왔다.
“얼씨구? 온갖 외국어 책을 다 가져다 뒀네.러시아 책은 왜 있어?”
“좀 교양 있어 보이지 않냐?”
“그럴 거면 통일이라도 하든지.카테고리가 중구난방이잖아.”
“하하! 사장실에서 누가 그런 거 따지냐? 아, 그리고 이것도 봐 봐.”
어깨를 들썩이던 박영훈이 책상에 놓인 물건을 번쩍 들자, 유현이 눈을 껌뻑였다.
“명패도 만들었어?”
“당연히 제일 먼저 명패부터 팠지.”
유현은 뿌듯해하는 박영훈을 뒤로하고, 그가 건넨 길쭉한 명패를 살펴봤다.
검고 묵직한 명패 위엔 하얀 필기체 글씨가 음각으로 파여 있었다.
-더블와이 대표 박영훈.
유현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이야, 명패만 보면 대기업 CEO 수준이야.”
“안 그래도 관장님이 그거 보고 기겁했어.”
“관장님이 여기 왔었어?”
놀라 묻는 유현에게 박영훈이 상황을 설명했다.
“그건 아니고, 배송을 3층으로 했었거든.나도 명패인 줄 모르고 뜯어보다가 들켰지, 뭐.”
“그럼 건물주라는 것도?”
“하아! 그 부분은 할 말이 좀 많아.”
한숨을 쉰 박영훈이 소파에 앉았다.
마주 앉은 유현은 궁금한 마음에 재촉했다.
“뭔데 그래?”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박영훈의 입에서 다이내믹했던 상황이 재현됐다.
듣고 있던 유현은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미쳤어? 잘 보이면 임대료 깎아 주겠다는 말을 왜 해?”
“관장님이 너무 멍하시길래 농담 삼아 한 말이지.근데 갑자기 폭발하실 줄 누가 알았겠냐?”
“건물주면 자다가도 경기 일으키는 사람인데 당연하지.갑자기 스파링하자고 할 만하네.”
“진짜 사정 봐주지 않고 하더라.죽는 줄 알았어.”
박영훈이 그냥 우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었다.
체력 좋은 유현조차도 관장이 작정하고 운동시키면 초죽음이 될 정도였다.
뻔히 상황이 그려졌지만, 동정의 말보단 현실적인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반신불구 안 된 게 다행인 줄 알고 참회해.”
“이미 수도 없이 했어.관장님도 됐다고 하셨고.그래도 어색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직 많이는 몰라.동식이 형님 정도?”
“그럼 금방 퍼지겠네.그 전에 공식적으로 알리는 게 나아.”
유현의 조언을 들은 박영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시계를 살피며 물었다.
“그래야지.근데 네가 말한 친구는 언제 와?”
“곧 올 거야.시간 약속을 안 지키는 놈은 아니거든.”
시간을 확인한 유현이 답했을 때였다.
지이잉.
유현의 휴대폰이 울리며 나도하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이 녀석, 딱 제 말 하니까 오네.”
“왔대?”
“어.데려올 테니까 커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어.”
“사장이 면접자에게 커피 내려 주는 경우도 있냐?”
“말했잖아.제갈량급이라니까.삼고초려해도 모자랄 판이야.”
유현이 깔끔하게 정리하자, 황당해하던 박영훈이 벌떡 일어났다.
아무 배경 없는 작은 기업 대표의 현실을 직시한 눈치다.
“그렇지.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내 것도 같이 부탁해, 대표님.”
“걱정 말고 조심히 모셔 와.어여.”
유현은 손을 휘휘 젓는 박영훈을 보며 피식 웃었다.
박영훈이 나도하를 보면 어떤 느낌일까?
나도하는 또 박영훈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까?
두 사람 다 독특한 부분이 있다 보니 전혀 예측이 안 됐다.
막연히 잘 어울리겠거니 생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