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664
상남자 664화
탁.
결심과 함께 찻잔을 내려놓은 유현이 운을 띄웠다.
“부사장님께는 죄송한 마음이 많습니다.”
“자네가 내게 왜?”
“미국에서 조용히 잘 지내는 부사장님을, 제가 전쟁 한복판에 끌어들인 것 같아서요.”
5년 전, 미국에 있던 신경욱 부사장을 자극한 게 유현 본인이었다.
덕분에 과거보다 이른 시간에 그가 한국으로 왔다.
회사를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유현이 그를 끌어들인 셈이다.
신경욱 부사장이 바로 손을 내저었다.
“무슨 소리.자네 덕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데.실제로 자네가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
“도와준 것보단 변덕을 더 부렸던 것 같습니다.”
“어떤 변덕?”
“여러모로요.부사장님 뜻에 어긋난 행동도 많이 했고요.”
유현은 갑자기 그룹전략실에 갔고, 돌아와서는 신화반도체 인수를 하겠다고 나섰다.
안정될 때쯤 조직 혁신을 하겠다며 신경욱 부사장과 크게 대치하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모두 유현의 독단적인 선택이었다.
함께한다고 했으면서 그렇게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신경욱 부사장은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내게 고맙다는 소리를 더 듣고 싶어서 그런 건가?”
“그럴 리가요.”
“그게 아니라면 그 정도만 해.”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고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간지러워? 자네 차에만 술이라도 섞인 거야?”
유현의 분위기가 전과 달라서일까?
신경욱 부사장이 장난스러운 미소로 유현에게 맞춰 줬다.
이 또한 그의 배려였다.
숨을 고른 유현이 가방에서 들고 온 보고서를 꺼내 들었다.
그러곤 대답 대신 보고서를 건넸다.
스윽.
“일단 이걸 한번 보셨으면 합니다.”
“이건 뭔가?
“보시면 어떤 내용인지 바로 아실 겁니다.”
고개를 갸우뚱한 신경욱 부사장이 이내 두툼한 보고서를 넘겼다.
사락.
첫 번째 페이지가 넘어간 순간부터 그는 빠르게 몰입했다.
안에 담긴 내용이 그만큼 놀라워서 멈출 수가 없었다.
당면한 상황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앞으로의 위기에 대한 서술까진 이해할 만했다.
그간 유현이 보여 준 놀라운 혜안 덕분이다.
하지만 위기 극복 방안을 케이스별로 정리하고, 결과까지 예측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뿐만 아니라 여기엔 앞으로의 대외적인 상황 및 정치 지형의 변화, 그리고 후계자 구도에 따른 해외 자본의 움직임까지 담겨 있었다.
물론 유현의 최선을 다해 작성한 기획안이기도 했다.
신경욱 부사장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어떻게 이런 생각까지…….”
유현은 그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줬다.
턱.
보고서를 덮은 신경욱 부사장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에게 유현이 말했다.
“이제 알려 드려도 될 거 같아서요.”
“허.진작부터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건가?”
“아뇨.지주회사로 체제 개편되었을 때에 맞춰 새로 정리한 겁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군.내용이 너무 그럴듯해.충분히 일리 있고.”
유현은 여전히 보고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신경욱 부사장에게 바람을 전했다.
“꼭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히 도움이 되고말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꼭 떠나려는 사람 같은데?”
신경욱 부사장이 알고 물은 건 아닐 터였다.
그의 얼굴에 장난기가 남아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이젠 말할 때였다.
유현은 신경욱 부사장의 깊은 눈동자를 보며 고백했다.
“네.부사장님, 저 그만 한성을 떠날까 합니다.”
“뭐?”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온 겁니다.”
순간, 신경욱 부사장은 충격을 받은 듯 얼어붙어 버렸다.
유현은 그가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기다려 줬다.
“…….”
공백이 무척 길게 느껴질 때쯤, 신경욱 부사장이 고개를 저었다.
얼굴엔 어색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번 아웃이 온 모양이군.그럴 수 있어.그간 고생했으니 충분히 이해해.”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 맞아.잠깐 쉬면 해결될 거야.쉬고 나서 다시 같이 일하면 돼.”
신경욱 부사장은 단정 짓듯 말했다.
현실을 부정하는 그에게 유현이 의지를 전했다.
“잠깐 쉬는 걸로 되는 게 아닙니다.”
“내 대접이 소홀했나? 물론 자네가 들인 공에 비하면 적은 면이 있을 거야.하지만 이번 일을 끝내면…….”
“아뇨.절대 그렇지 않습니다.그런 거였다면 부사장님 곁에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럼 대체 이유가 뭔가? 자네가 일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잖아.누구보다 전력투구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왜 이제 와서 멈추려 하냐고.”
신경욱 부사장은 따지듯 빠른 목소리를 뱉었다.
그 속에 유현의 결심이 서게 만든 답이 있었다.
“그래서 그만두려고 하는 겁니다.”
“뭐라고?”
“있으면 계속 집착할 것 같아서요.”
신경수에 대한 집착, 그리고 과거 인연들에 대한 집착이 유현을 계속 옭아매고 있었다.
이대로 잠깐 쉬었다 돌아온들, 회사에 있으면 그 생각이 변하지 않을 터였다.
그게 유현이 회사를 떠날 결심을 한 이유였다.
“집착이라니.그건 열정이야.”
“그 열정을 이제 회사가 아닌 인생을 바로잡는 데 쏟으려 합니다.”
“대체 왜…….후.”
더 따지려던 신경욱 부사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차를 벌컥 마신 그가 흥분을 애써 억누른 채 말했다.
“제대로 말해 봐.이유를 듣고 내가 판단하지.”
변명할 방법은 많았지만, 그에게만큼은 숨기고 싶지 않았다.
유현은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전했다.
“사실…….”
오랫동안 품어 왔던 생각부터, 최근 있었던 일련의 변화까지.
제법 긴 이야기 속에 알맹이는 명확했다.
눈을 감은 채 듣고 있던 신경욱 부사장이 그 부분을 되짚었다.
“회사가 아닌 인생을 바꾸려 한다라…….”
“네.제겐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군.”
신경욱 부사장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이 또 두 사람 사이를 훑고 갔다.
이 또한 과정인 터라 유현은 묵묵히 기다렸다.
어색함이 무뎌질 때쯤, 신경욱 부사장이 속내를 밝혔다.
“자네의 의지는 충분히 이해했어.솔직히 공감하진 못하겠지만,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도 했고.”
“감사합니다.”
“아직 내 얘기는 다 안 끝났어.”
“네.듣고 있겠습니다.”
유현이 한 발 빠지자, 신경욱 부사장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넨 이제 자네가 빠져도 회사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물론입니다.뛰어난 동료들이 있으니까요.”
“자네의 공백이 클 거야.”
“잠시일 뿐입니다.결국 더 잘해 낼 거예요.”
다른 때 같았으면 이렇게 단정 짓진 못할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신현호 회장이 건재했다.
이것만으로 신경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현은 신경수의 손발을 자를 준비를 마쳤다.
이런 외적인 상황을 떠나, 동료들이 제 역할 이상을 해내고 있었다.
잘 굴러갈 모습이 유현의 눈에 훤히 보였다.
자신 있는 유현의 말에, 신경욱 부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회사도 잘될 거 같고, 동료들도 좋다는 거지?”
“물론입니다.”
“그래.그렇다면 사표는 받지 않겠네.”
“그건…….”
갑작스러운 결론에 유현이 바로 의견을 전하려 했다.
하지만 신경욱 부사장의 말이 더 빨랐다.
“알아서 쉬어.언제 돌아오라는 말은 하지 않을 거야.하지만 돌아왔을 땐 한성이었으면 좋겠어.”
“…….”
“내 바람이 그렇다는 거지, 반드시 돌아와야만 한다는 것도 아니야.이 정도면 받아 줄 수 있지 않나?”
유현 자신이 대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서 잡으려는 걸까?
신경욱 부사장 입장에선 자존심까지 다 내어 준 터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유현은 이 정도 선에서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네.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받아 줘서 고맙군.여 전무님과 나 팀장에겐 내가 말하지.자네가 말하면 둘 다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거야.”
이 한마디에서 신경욱 부사장의 배려심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유현은 간질간질한 가슴을 억누른 채 고개 숙였다.
“감사합니다.부사장님께 많은 걸 배웠고, 또 얻어 갑니다.”
“마지막 인사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내 마음이 그래.”
“알겠습니다.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유현은 다시 인사한 후 돌아섰다.
신경욱 부사장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철컥.
유현이 나가고 난 후였다.
한참 동안 문을 바라보고 있던 신경욱 부사장이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뭉치를 들었다.
빼곡하게 들어선 글자 위에 절절한 동료의 마음이 전해졌다.
떠나는 와중에도 어린 동료는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했다.
페이지를 넘기던 신경욱 부사장이 나지막이 뇌까렸다.
“끝까지 받기만 하는군.”
그의 입가엔 씁쓸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자리에 돌아온 유현은 마우스를 눌러 메일창을 띄웠다.
동료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하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게 방해가 되는 상황이다.
유현은 조용히 회사를 나가면서도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예약 메일을 작성했다.
타다다다닥.
오랜 기간 팀원들의 역할에 대해 생각한 터라, 유현의 글에는 막힘이 없었다.
단지 지금 할 일에 멈추지 않고, 앞으로 벌어질 각종 상황에 대한 대처 방안도 적었다.
다소 복잡한 내용도 포함됐지만, 담당자라면 이해할 수 있을 터다.
물론 팀원들에게만 메일을 쓴 건 아니었다.
혁신전략실의 다른 부서 동료들과 한성디스플레이 주요 인원들에게도 메일을 보냈다.
신경욱 부사장에게 했던 것처럼 마지막 인사는 하지 않기로 했다.
단지 아끼는 동료들에 대한 바람을 적었다.
이 메일은 유현이 떠나고 난 후, 각자에게 닿을 터였다.
그들은 어떤 반응일까?
동료들의 면면을 떠올리고 있는 유현에게 나도연 팀장이 다가왔다.
그녀의 표정이 무척 굳어 있었다.
유현은 말없이 나도연 팀장을 따라 팀장석으로 이동했다.
의자에 앉은 유현에게 나도연 팀장이 차가운 목소리를 뱉었다.
“본부장님 만나 뵙고 오는 길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왜 보고 순서가 그따위인지는 따지지 않겠어.이미 엎어진 물이잖아.안 그래?”
“먼저 말씀 못 드린 부분은 죄송합니다.”
유현이 고개 숙이자, 나도연 팀장이 손을 내저으며 핀잔을 줬다.
“죄송할 게 어디 있겠어.잘난 한 과장이 선택한 건데.팀 이렇게 만들어 준 데다, 막힌 부분을 탁탁 처리했으니 이제 할 만큼 했다, 이걸 거 아냐.”
“그런 건 아닙니다.”
“이유는 필요 없어.중요한 건, 한 과장이 마음대로 나가겠다고 한 거고, 난 팀 운영에 차질을 겪는다는 거야.내 말이 틀렸어?”
“맞습니다.”
일언반구 대꾸할 거리도 없는 말이었다.
갑작스러운 팀원의 공백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건 나도연 팀장이니 말이다.
유현도 그 부분을 충분히 이해한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연 팀장은 그런 유현을 쏘아봤다.
“한 과장, 혹시나 착각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뭘 말입니까?”
“한 과장 없이도 우린 보란 듯이 잘해 낼 거야.아니, 더 잘하도록 내가 만들 거야.그러니까 콩고물 떨어질 때쯤 어기적거리면서 기어들어 올 생각 하지 마.”
다그치는 목소리 속에 유현을 위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딱딱한 그녀의 껍질 속에 감춰진 아쉬움과 섭섭함이, 유현의 가슴에 고스란히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