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40
연록흔 – 40화
“나찰, 야차, 그 뉘라도 멸하리라.”
같잖은 노래였다. 어느 누구도 관음의 자비를 제 것인 양 노래할 순 없었다. 특히 엽소단이라면 더욱이 그랬다. 부리마냥 매서운 손톱이 쪼아 대듯 들이대는 순간, 록흔은 입귀를 엷게 찢었다.
“천비장엄보호지.”
일천팔로 거두어 널리 보호하고 지키시어……. 일찍이 무영랑이라 불렸던 이, 록흔의 두 팔이 천개인 양 휘돌았다. 그 즉시, 소단 이하 분신들이 휘청거렸다. 살을 치는 소리 후에 고운 뺨마다 도홧빛이 짙어졌다.
“믿지 않는 자, 이 손 내밀어도.”
소단은 이 갈듯 노래를 불렀다. 붉은 입술에서 한 음이 떨어져 널리 퍼지니, 갈퀴 같은 손마디가 크게 자라 뻗었다.
“천안광명변관조.”
한량없는 혜안으로 두루두루 밝게 보시니……. 핏물 진득이 흐르는 팔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똑같은 분노와 똑같은 욕망으로 오탁해질 순 없어, 록흔은 천수경으로 마음을 닦았다. 어린 시절의 공부는 헛되지 않아 이리 자란 후에 읊어도 크게 소용이 됐다.
“헛되고 헛돼, 저 나락으로 가니…….”
찢고 발기고, 잡아 뜯고 도려내고, 뭉개고 할퀴며, 파내고 짓이겼다. 소단과 관음무희들은 그렇게 록흔을 좨치었다. 적과 적의 동작이 빨라지매, 사람들에겐 그저 한 덩이로 엉겨 보였다. 그 와중에 경을 외는 소리와 요사한 노랫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치륵!
짜아악!
푸욱!
피가 튀는지, 살점이 발리는지, 옷이 뜯기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소리로써 사람들은 그리 짐작했다. 젊은 호분중랑장은 아마 만신창이가 됐을 터였다.
“윽!”
누군가 신음했다.
“영사멸제제죄업.”
중생들의 온갖 죄업 남김없이 멸하신다. 아직 독경 중, 록흔만이 명료한 소리를 냈다.
“하아, 하아…….”
신음 소리는 분명 엽소단의 것이었다.
차라랑, 팍!
금장조가 바닥에 떨어져 박혔다.
“소원종심실원만.”
마음 따라 깨달음이 원만 성취 하여지다. 단정히 떨어진 마지막 음이 진세전을 꿰뚫었다. 그리고 엉킨 매듭이 풀리듯 여럿의 신형이 단정히 갈무리됐다.
“연록흔!”
무진은 질색을 하며 아우 같은 동료를 외쳐 불렀다. 호분중랑장의 백색 정복은 보풀 하나 일지 않고 잔잔하나, 록흔의 우완은 온통 붉었다. 몽림에서 다친 것이 아물 새도 없이 다시 찔려 흉하게 벌어진 것, 선혈은 줄기줄기 돋아 주연의 융단을 적셨다.
“옹주 마마.”
저런 팔로도 신음조차 흘리지 않으니 정녕 독했다. 소단은 절 부르는 이를 힘없이 올려 보았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 나는…….”
일별에 ‘푸름이 많은 사람이고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말 안팎이 푸르렀다. 황룡의 호분중랑장은 미우면서도 고왔다. 소단은 선한 눈을 응시하다 말을 잊고 말았다.
“옹주 마마께서 손에 사정을 두지 않으셨다면.”
소단도 알고 진세전의 모든 이들도 알았다. 되려 한발 물린 자는 호분중랑장 연록흔, 나달거리는 무희들의 옷만 봐도 그건 자명했다. 그들 모두 서로서로 얽힌 금장조에 상처를 입어 살갗이며 머리칼이며 성한 것이 없었다.
“큰일 날 뻔했습니다.”
록흔이 단정하게 머리를 숙이니 만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황망히 단 위에서 내려와 피 칠한 손을 부여잡았다.
“연중랑장,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희 아이가 버릇이 없어 이리 몸을 상하게 하였는데…….”
“아닙니다, 전하. 면목 없습니다.”
그건 록흔의 진심이었다. 소단이 금장조를 들이대매 어리고 못된 마음이 불뚝 돋아, 작정하고 덤빈다는 구실을 붙여 참지 않았다. 경소리에 마음이 맑아지지 않았다면 저런 소리는 뉘가 입을 비틀어도 못했을 터. 그저 어린 처녀일진대 같이 나댄 것에 그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폐하, 용서하소서.”
록흔은 용상 쪽으로도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의 손에게 욕을 보였으니 그로선 당연한 일, 어떤 불호령이 떨어져도 감내할 각오가 돼 있었다.
“뭐, 그럭저럭 좋았다.”
가륜이 한쪽으로 손짓하며 말했다. 그 즉시 그의 오른팔인 우중랑장이 움직였다.
“…….”
의외의 소리에 록흔이 빳빳이 고개를 든 새, 무진은 그를 한 곁으로 끌어냈다. 주군의 명이란 부러 묻지 않아도 저 우직스런 놈 좀 어째 보란 게 분명했다. 작금, 어린 중랑장은 제 피가 물인 양 쏟아 내고 있었다.
“보는 눈이야 즐거웠다만, 정작 소단 옹주께서 어떠셨을지 모르겠군. 안 그런가?”
차고 곧은 시선이 소단에게 떨어졌다.
“폐하, 제가…… 흥이 넘쳤나이다.”
소단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비에게서 꽂혀 들어오는 무언의 질책과 가륜의 칼금 같은 안광에 제 치부를 그리 인정했다. 그러나 참으로 모순되게도 미우면서 고운 이의 목전이라 혀를 고부리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 도를 넘긴 했지.”
듣는 이마다 심장이 오그라들고 간이 졸아붙었다. 천하의 철부지 소단 역시 담이 서늘한데, 그 때 만혁이 두 손을 읍하고 나섰다.
“폐하, 본의 아니옵게 흉한 모습을 보여드렸으니 신이 어찌해야…….”
“무슨 말씀을. 상한 사람이 굽실거리고.”
가륜이 말을 딱 끊었다. 호쾌함 속엔 차가운 그 무엇이 숨은 듯했다. 록흔도 소단도 귀를 바짝 세웠다.
“일 낸 사람이 제 잘못을 인정했는데.”
분명 질타였다. 록흔은 혀끝을 지그시 깨물었다.
“왕제께서 달리 무얼 하시겠소?”
황룡의 하늘이 노하지 않았으니, 이쯤해서 마무리 져야 모양새가 좋을 듯싶었다. 만혁은 더욱 허리를 숙이고 저 위를 향해 말을 사뢔 올렸다.
“폐하, 하해 같은 보살피심에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어리고 못난 딸자식, 앞으로 잘 다스리겠나이다.”
“하하, 엽소단이야 이미 왕제의 손에서 벗어난 듯하오만.”
가륜이 웃으매, 만혁도 웃었다.
“예. 곱다 어여쁘다 했더니 천둥벌거숭이마냥 자랐습니다. 장차 뉘에게 맡길지 걱정이 태산이옵니다.”
“저 독특함이 되려 고울 이도 있으니, 크게 걱정할 건 없겠소.”
“폐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소신 만혁 한시름 놓입니다.”
소단은 칭찬 같은 험담에 입술만 붉게 빼물었다. 아비나 사모하는 임이나 저더러 성미 못됐다만 하니 마음이 과히 좋지 않았다.
“엽소단, 인형 놀인 어릴 때도 하더니 여전하구나.”
가륜의 눈 아래, 험하게 헝클어진 관음무희들이 있었다.
“폐하, 제 혈과 기가 흐르는 것들입니다. 그냥 인형이라 하시면.”
아이 다루듯 하는 태도에 소단은 또 울컥하고 말았다. 그녀가 발끈해서 손을 쳐드니 널브러졌던 것들이 하나로 뭉쳐 연기처럼 사라졌다.
“태울현인께선 잘 계시고?”
“예, 잘 지내십니다. 안 그래도 폐하께 전해 드리란 것도 있었고…….”
관음무희는 태울이란 기인이 만든 괴뢰였다. 소단이 어릴 적엔 하나이던 것이 해 지나면서 둘로 늘고 넷으로 늘어 지금에 이른 것, 그는 그녀의 스승이었다.
“아무래도 태울께서 너무 귀애한 모양이군.”
“폐하께서도, 자꾸 그러시면…….”
“왜, 소단아. 아비 체면 무색하게 울기라도 하려느냐?”
“아버지!”
저 앞에선 황제와 왕제가 이야기를 나누고 한구석에서는 무진이 록흔의 팔을 급하게 싸매 주는 새, 어색하고 어설픈 분위기는 그냥저냥 가라앉았다. 연석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술을 돌리고 주악에 귀를 기울였다.
“폐하, 저희는 이만 물러갈까 하옵니다.”
무진이 그리 말하는 동안, 록흔은 곁에서 어째 이번 다친 팔은 꽤 여러 날 갈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그리하라.”
허락이 떨어지자, 저보다 훌쩍 커다란 무진 뒤에서 록흔은 고개만 깊이 숙였다. 몸의 무게가 전부 다친 팔로 쏠렸는지 득신대고 아렸다. 해진 데가 거듭 해졌으니 괜찮다면 거짓말, 그렇다고 무르게 아픈 태를 낼 수는 없었다.
“가자, 연록흔.”
“예.”
비로소 구석으로 빠졌다. 록흔은 내심 안도하며 진세전을 물러나왔다. 그 곁에서 무진이 성큼성큼 걸었다.
“어려울 텐데.”
지나가듯 하는 말이라 록흔은 대꾸 없이 듣기만 했다.
“너무 차이 져.”
황제와 인월의 옹주를 두고 하는 소리. 무진은 쓴 입맛을 다시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음이 닿으면 대수겠습니까?”
“응?”
무슨 말인가 싶어, 무진이 얼결에 되물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만 군의에게 가 보겠습니다. 처치 후에 다시 오지요.”
“아서라. 고부중랑장에게 맡기고 들어가는 게 좋지 싶은데.”
“호분위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록흔은 제 말만 하고 제 갈 곳으로 몸을 틀었다.
“연록흔.”
“먼저 갑니다.”
“내 참…….”
저만치 멀어지는 이, 관모 아래 동그란 머리통에 고집이 하나 가득 들었다. 무진은 녹안을 조프리고 한참을 보았다. 좁다란 뒷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주군과 닮아, 보는 입이 절로 우그러졌다. 천하의 창동은 그예 웃고 말았다.
***
선명 7년 사월 스무엿새. 황후 후보들이 장성에 속속 도착하니 태화성의 내명부가 잔뜩 긴장했다. 인월의 사절도 채 돌아가지 않은 마당이라, 그 흥성함에 황룡의 도성은 발그레한 도홧빛이었다. 꽃도 고우나 아무리 고와도 정녕 고운 사람보다는 못한 법. 인녕전 뜨락의 창휘루에는 황룡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꽃들이 나름의 향을 풍기며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옳지…….’
인혜태후는 흐뭇한 눈으로 황후 후보들을 바라보았다. 화려하게 아름다운 이, 그윽하게 아름다운 이, 청초하게 아름다운 이, 그 미도 가지각색이었다. 모두 가려 뽑은 참. 손끝이 맵고 천성 또한 온화하다 했다.
‘누가 좋을고?’
대부분이 제후들의 딸이라 누구 하나 빠지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늙은 태후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 처녀들이 다기 다루는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이이나 저이나 음전하여 나무랄 데가 없으니 입은 절로 함빡 벌어지고 눈매는 비단인 양 부드러워졌다.
“보세요, 황상. 누가 마음에 드시는가요?”
태후는 만리경을 눈에서 치우고 평소보다 더 낙낙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의례적인 미소뿐, 혼인할 당사자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후궁이 적다 항시 걱정을 보태기는 했으나 그녀 역시 알았다. 기실 가장 중한 것은 황후 자리, 황룡의 하늘에겐 수십의 비빈보단 제대로 된 정실 하나가 필요했다.
“뉘 집 따님이 가장 고운가요?”
답이 없기에 태후는 재차 물었다.
“모두 곱습니다, 할머님.”
마음에 커다랗게 들어앉은 이 아니니, 가륜에겐 곱든 말든 상관없었다. 저만한 생김이면 어디서든 절색이라 불리니 썩 틀린 소리도 아닐 터. 그저 신기루인 여인을 그리나 싶어 그는 눈귀를 서늘하게 틀었다.
“그렇지요, 모두 곱기야 하지요.”
참으로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이내 태후는 이마를 접었다.
“하지만 황상께 유별나게 더 고와 보이는 처자가 있어야 한단 말씀입니다.”
모두들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을 아는지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음전하고 조신하니 어여쁠 법도 하건만, 가륜은 괜히 비위짱이 틀렸다. 일순, 봉안이 차게 빛났다.
“황상, 심기가 좋아 뵈질 않습니다. 어인 일이신가요?”
“그래 보이십니까? 사람꽃이 하많아 취한 모양입니다. 할머님, 저는 이만 들어가 보렵니다. 천천히 노닐다 들어가십시오.”
가륜이 날파랍게 돌아섰다. 일단 내치면 곁이 없으니, 벌써 저만치 성큼 멀어졌다. 냉정한 성정 번히 알아 태후로선 차마 붙잡지도 못했다.
‘황상, 지나치게 곧으시니……. 이래저래 세상과 어울리셔도 좋으련만, 맑은 물엔 고기가 모이질 않는 법입니다.’
태후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다 몸을 틀었다.
‘그래요, 이 늙은 몸이 나설 수밖에요. 황상, 이 할미가 옥 중의 옥을 골라 보지요.’
인혜태후는 상궁나인들의 부축을 받아 난가(가마)에 올랐다.
타랑타랑.
차앙.
창휘루로 향하는 것은 뉘보다 주렴이 빨라 구슬이 부딪쳐 깨지는 소리가 맑졌다. 태후가 먼발치서 노안으로 보니 용포자락이 아지랑이인 듯 어룽거렸다. 그녀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그 금빛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몹시 청상하구나.”
“예, 그러하옵니다, 태후마마.”
창휘루에 가까우니 코끝에 닿는 차향이 그윽했다. 태후는 자그시 눈을 감고 그 푸름을 들이마셨다. 후각이 맑아지매, 걱정도 엷어졌다. 그녀는 얇은 눈매로 시야를 부드럽게 스치는 화초를 바라보았다.
“태후마마.”
“그래, 알았다.”
태후는 난가에서 내려 늙어 무거운 다리로 누각에 올랐다. 그녀가 맨 위의 계단을 허든허든 밟고 서는데 다기 소리가 딱 멈췄다. 창졸간, 내명부의 가장 웃전의 등장에 황후 후보들은 서둘러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후마마께 인사를 올리소서.”
제조상궁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 곱게 절했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마다 고아하기 그지없었다.
“모두 수고가 많소. 자, 앉으십시다.”
태후가 제일 윗자리를, 일흔두 명의 황후 후보들은 그 아래서 각각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일종의 면대가 시작됐다. 제조상궁이 명단을 차례로 넘겨 부르면 처녀들이 이름대로 일어섰다. 꽃다운 처녀들이 수차례 들고 나기를 반복했다.
“다음은…… 안주 자현성의 진애주 소저!”
곱다운 처녀가 아리땁게 일어섰다. 떨리는 마음이야 떨리는 두 손이야 홀보들한 대수삼의 길고 넓은 소맷자락 아래 감추고, 그녀는 태후 앞으로 나가 허리를 곱게 숙였다.
“진가라……. 선황 시절에 탐족을 물리친 공이 큰 진호송 장군의 가벌이던가?”
“그러하옵니다, 태후마마.”
“그런데, 하상궁…….”
후보들에 대한 자료를 넘기다 무엇을 보았는지 태후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하명하소서, 태후마마.”
“잘못되었나? 어찌 이름이 다른가? 여긴 분명 진사희라고 쓰여 있는데…….”
“그게, 진사희는 후보로 간택되고 사흘 뒤에 죽었다 합니다. 여기 진소저는 진사희의 사촌아우가 됩니다.”
“그런가?”
인혜태후는 쓴 입맛을 다셨다. 진가로선 어렵사리 떨어진 황후 후보 자리를 내놓고 싶지 않았을 터. 본래 아가씨든 아니든 눈을 내리깔고 다소곳하게 앉은 애주라는 처자는 꽤 곱다랬다. 게다가 인성도 맑고 선한 듯싶었다.
“무얼 잘하는고?”
“특별히 잘하는 것 없사옵고 집안 살림은 그럭저럭 꾸려갈 줄 압니다.”
소박한 대답이 썩 어여뻤다.
“그래? 그럼……, 베틀은 웬만큼 다루나?”
태후가 인자하게 물으니 애주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남들 하는 만큼은 하옵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이가 있다면 받은 것 없이 예쁜 이도 있었다. 태후의 눈에 진애주는 후자였다. 저를 낮추는 양이 어여쁘고 기특할 뿐, 작위적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양잠을 해 본 적은 있고?”
“예…….”
애주가 말끝을 사리며 살포시 웃으니 태후도 따라 웃었다. 태후의 눈에 처녀는 마치 어린 시절의 그 뉘를 닮은 듯 마냥 고왔다.
‘순하고 곱고……. 그래, 황상께는 이런 처자가 어울리는 것이다. 지아비의 마음을 든든히 부여잡고 높이 받들 줄도 알 것 같으니……. 게다가 저리 지혜롭지 않은가?’
태후는 고개를 까닥거리다 몇 가지를 더 물었다. 대답마다 흡족해 그녀는 꽤 깊다랗게 웃었다. 그만 물러가라 손짓하니 처녀는 뒷걸음질 쳐 제 몸을 음전하게 사렸다.
“국주 모안성, 팽우희…….”
또 다른 이가 앞으로 불려 나갔다.
‘분명, 내가 본 건…….’
애주는 제 몫의 비단 방석 위에 앉았다.
‘폐하셨어. 뉘가 어찌 보건…….’
꽤 후한 점수를 받은 듯했다. 비단 애주만 느낀 게 아닌지 저마다 같은 방향으로 날을 뾰족이 세웠다. 꼭 시샘 어린 눈초리가 아니라도 미운 마음은 그저 닿으니, 그녀로선 알고도 남았다.
‘저쯤…….’
애주는 황제가 계시다는 무세전 쪽으로 고개를 살짝 틀었다. 내리뜬 눈에 장엄한 풍광이 그득 찼다.
‘나의 연, 폐하께서…….’
높다란 창휘루에서 애주는 미래의 지아비를 그렸다.
‘날 기다리실 거야.’
어느덧, 무세전에 한 무리의 병사가 더해졌다. 그들 모두 갑주가 푸르렀다. 애주가 알기로 청의는 분명 집금위였다.
두벅두벅.
척. 척.
두벅.
일군의 사내는 모두 푸르렀다. 그러나 여느 집금위와는 달라, 우두머리는 말할 것 없고 말단조차 복식이 특이했다. 저마다 걸음새가 늠름하고 몸피가 굵다래 그 뉘든 함부로 덤빌 생각은 못할 듯, 개중 가장 높이 솟은 자가 녹안을 번득이니 무리가 일제히 멈춰 섰다.
“혹 모르니, 예서 대기해라.”
“수명.”
청방으로 이어진 복도는 드넓고 기다랬다. 성큼성큼 걷는 자는 그 어깨가 가히 세상을 떠받칠 만했다. 그 발걸음마다 둔중한 울림이 따랐다.
파랏.
푸른 신형 여럿이 섬광인 듯 사라졌다.
두벅두벅.
두벅.
“오셨습니까?”
산 같은 이를 향해 내관 하나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안에 계시오?”
“예, 드시죠.”
내밀한 실내, 커다란 창 앞. 산인 이에게 태산이어서 우러르는 이가 있었다. 화지는 초여름의 진록, 담긴 풍경은 황룡의 하늘……. 황제의 뒷모습에 무진은 왠지 가슴이 벅찼다.
“폐하, 신 설무진입니다.”
“어찌 됐나?”
“그게…….”
답지 않은 망설임에 가륜은 피그시 웃었다. 진과와는 또 달라서 직언도 서슴지 않는 무진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부드러운 구석도 있어 이리 사릴 줄도 알았다. 그는 무진을 향해 돌아섰다.
“찾지 못했군. 그런가?”
“예, 폐하. 방금 동창의 마지막 무리가 돌아왔습니다. 남월까지 훑었지만, 그런 여인은 없었다 합니다.”
“그래.”
“폐하, 송괴합니다.”
무진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여인을 꼭 찾아내서 저 품에 안겨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했다. 고적한 마음을 헤아린 만큼 녹안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럴 것까지야. 네게도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면목 없습니다, 폐하.”
무진과 가륜, 원래는 벗으로 만났다. 강호에서의 굴곡 많은 나날들, 그들은 심우이며 친우였다. 상하가 극명한 지금도 그것은 다르지 않았다.
“무진, 오랜만에 거닐어 볼까?”
가륜이 흔연스레 말을 꺼냈다. 방금 전의 대화는 있지도 않았던 듯했다.
“그래 볼까요, 폐하?”
무진 역시 서글서글하게 받아쳤다.
“독한 향에 취해 머리가 아프군. 나가자, 이리 지내기엔 볕이 너무 아깝다.”
무진은 가륜을 따라 청방을 나섰다. 무세전을 나서자마자 잘 말린 햇발이 그들 머리 위로 쏟아졌다.
‘꺾어 바칠 봄꽃이려니 생각했건만.’
처음 만났을 때 소년 동궁은 열다섯, 청년 무진은 스물. 그때부터 풍상을 함께 겪어 그로선 웬만한 것 다 알았다.
요즘의 황상은 웅숭깊어 아무렇지 않은 척은 해도 속앓이를 되게 하고 있었다. 모진 세상에서 얼음인 듯 사시는 분께 다슨 온기를 드리고 팠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설무진, 정말 인연이란 것이 있는가?”
볕 아래서, 가륜이 나직하게 물었다.
“왜 그리, 물으십니까?”
속에 들은 것을 주절대는 이가 아니라, 무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턱 막혔다.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이 든다.”
“있을 겁니다. 전 있다고 믿습니다.”
무진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제 말에 힘을 주었다. 이내, 녹안이 연둣빛으로 변했다.
“그래서 그 나이에 여직 혼자인 건가?”
가륜은 입귀를 실긋이 틀었다.
“예, 폐하. 아마도 그런가 보지요.”
그리 대답하고 무진이 한바탕 호탕하게 웃었다. 억만금을 준다한들 저런 벗을 둘까? 가륜도 그예 비긋이 웃었다. 어느 순간,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풀린 듯했다.
“폐하, 너무 심려 마소서. 그 여인, 꼭 찾으실 겁니다.”
허허롭게 웃던 무진이 정색을 했다. 그리고 단정하듯 말했다.
“그래, 나도 그리 믿는다.”
그리 말하면서 걷는 새, 둘은 어느덧 무세전을 지나고 광세전도 지났다.
그들 앞에 당당히 버티고 선 것은 강무관, 어전 시위들은 모두 자리를 비웠는지 너른 연병장은 조용했다.
“폐하, 만혁 전하께선 언제쯤 인월로 돌아가십니까?”
“글쎄. 왕제가 딸이라면 팔불출이니, 그건 엽소단에게 달렸을 터.”
“그렇지요? 아무래도 소단 옹…….”
무진이 말을 하다 말았다.
“…….”
“…….”
둘의 시선이 동시에 가 멎은 곳, 거기에 흰 옷자락이 있었다. 그는 호분중랑장 연록흔, 바라보니 왜인지 눈이 부셨다. 가녀린 이는 뉘 시선은 몰라 석조난관에 걸터앉아 먼 곳만 내다보는데, 빛발이 감싼 그 옆태가 애참하게 고왔다.
‘젠장…….’
록흔은 입안으로 욕했다. 덧나고 해진 팔은 이젠 아예 어깨에 매달린 판, 갑갑하고 답답해서 짜증이 있는 대로 치솟았다.
이러고 한참을 지내라니 미칠 노릇, 군의의 협위에 가까운 말이 아니면 벌써 풀었을 것이다. 팔이 꽁꽁 싸매지니 마음조차 묶인 것 같았다.
널따란 구장에 광범위하게 둘러쳐진 난관 한구석의 돌조각인 양, 벌써 반 시진 남짓 동안 그는 열없이 우그려 앉아 있었다.
‘저쪽인가, 만개한 꽃들은 뉘를 위해 피었을까…….’
창휘루에서 미향이 풍겼다. 작금, 저곳에서 높다란 이는 격에 맞는 배필을 고를 터. 록흔은 가슴 한쪽이 시큰거려 바짝 웅크렸다. 이내, 뚫린 팔도 덩달아 욱신거렸다.
“후…….”
조그만 숨이 몽그라지기 전, 무언가 커다란 것이 훌쩍 뛰어올랐다. 록흔이 곁눈으로 누가 왔나 살피는데, 커다란 덩치가 앞을 가렸다. 이내, 비틀린 눈귀가 부드럽게 퍼졌다.
“무료하십니까, 접두?”
저 아래서 창을 다루다 온 참, 꽤 높직한 곳인데도 창해는 단숨에 치고 올라왔다. 구릿빛 굵다란 몸피가 땀으로 번들거렸다.
“음…… 좀. 그런데, 이거 풀고 다니면 안 될까?”
록흔은 아픈 건 독하게 참아도 사소한 답답함은 견뎌내질 못했다. 그가 투덜거리는데, 창해가 검게 그은 얼굴에 이를 하얗게 드러냈다. 험한 인상도 활짝 웃으니 애처럼 해맑았다.
‘이상도 하지.’
접두는 가끔 손아래 누이 같았다. 그건 비단 창해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통솔력 강하고 무공 드높으며 매사에 강단 있건만, 부접 모두에겐 지키고 살펴야 할 그 무엇이었다.
그는 아예 얼굴을 들이대고 보았다. 어쩌면 가늘고 고운 저 선들 때문에 그리 보이는지도 몰랐다.
“많이 움직이지만 않으면야…….”
“절대 안 됩니다. 그걸 말씀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간혹 어전시위들끼리의 축국 판이 벌어지곤 하는 구장은 지금 적막했다. 방금 전까지 창을 휘두르던 창해마저 없어 그저 넓고 푸르니, 장성의 주산인 구현산에서 내려다보면 아마 호수인 듯 잔잔할 터였다.
“군의께서 하신 말씀 벌써 잊으셨습니까? 먼저 다친 걸 제대로 요치 안 하고 다시 크게 다쳐서, 접두처럼 함부로 내박치면 팔을 자를 지경에 이를 거라고요! 정말 큰일 치를 거라고…….”
“그거야…….”
록흔은 어물거리다 피식 웃었다. 홍시마냥 발개진 창해가 생김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웠다.
“참으세요, 접두.”
창해가 어린애 으르듯 달랬다. 보자 하니 록흔으로선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내가 빗보는지 몰라도 아예 어르는군. 앞일을 어찌 아나? 자넨 아예 꽁꽁 묶어 둘 테니…….”
“예, 예! 기대합지요. 아무튼 접두, 몸 좀 아끼십시오. 저희 모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어디 남아날 곳도 없는 분이 이렇듯 자주 다치시니 속상합니다, 정말.”
“에, 그건…… 미안하다.”
야차 같은 눈귀에 눈물이 글썽대니 록흔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창해가 깜냥에 눈시울을 몰래 훔치는 새, 록흔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창휘루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