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66
연록흔 – 66화
수하들이 아득해지자, 록흔도 혈루마에 올랐다. 어언간, 연붉은 입술 새에서 잗다란 한숨이 깨져 나왔다.
“록흔.”
“예, 폐하.”
“그 검, 잘 지녀라. 긴히 쓰일 테니.”
“폐하, 하오나…….”
록흔은 저만 앞세워 지킬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단백검에서 눈을 들었다.
“아무 말 마라. 내가 더 강하니, 헛된 걱정이다. 여기서 더 다치면 혼을 내겠다.”
가륜이 보는 것은 현완대로 매단 팔이었다. 이제 거의 나아가 조만간 풀어도 될 듯했다.
“하지만, 제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행동으로 드러나, 록흔은 제 것보다 커다란 손을 그러잡았다.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만큼 거세게 틀어쥐었다.
“뭐냐, 록흔?”
묻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록흔은 단단하고 서늘한 손에 입술을 묻었다. 딱히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도 모를 행동일 뿐이었다.
“참고 참는 중이다만.”
세 번의 밤, 그 각각의 열정을 록흔은 알고 있었다. 비록 사내는 아니나, 가륜이 사내로서 가진 탐도 어렴풋이 이해했다. 하여 작야의 일은 그녀로서도 의외였다. 그러나 그러기에 더욱 소중했다. 멋대로 앗기만 하는 손이라면 선뜻 잡아지지도 않았을 터였다.
‘부디 강녕하셔야 합니다, 폐하…….’
소리 없이 하는 말이나 닿았다. 가륜은 록흔의 정수리에 입술을 깊게 묻었다.
“어떤 일이 생기든, 내가 곁에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나를 새기고, 너 자신을 잊지 않도록.”
머리 위로 산바람이 일었다. 수엽이 초록으로 일렁였다.
“…….”
“…….”
사랑만큼 곱고도 추한 게 없는 것이, 세상에는 그 이름 하나 둘러쓰고 별별 일이 다 일어났다. 하많은 사랑 중에 섞여 남 보기에 그들이 하는 것보다 유별날 것도 없으나, 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귀했다. 뺨을 어르는 바람인 듯, 록흔은 가륜에게 섭슬려 들었다.
“네 심장은.”
어언간, 가륜이 한 손을 록흔의 가슴에 놓았다.
“내 것이다.”
왼쪽 가슴에서 심장이 갈빗대를 바술 기세로 뛰었다. 록흔은 얼굴이 발개져 아무 말도 못했다. 거세지는 박동에 머리까지 울렸다. 그녀는 온전한 도홧빛이었다.
“화한 아침에 보니 무덤 천지로군. 불쌍한 이들이 내 산하에 이리 많았던가?”
록흔의 떨림이야 짐짓 모른 체하고, 가륜이 날카로운 봉안으로 주변을 훑었다. 보이는 곳마다 창귀들의 무덤이었다. 풀 한 포기 머금지 못한 삭막한 풍광에 그는 눈귀를 비틀었다.
“단순히 인호의 짓이라 보기엔 규모가 크다. 다른 것과의 연관도 배제할 수 없겠군.”
“예, 폐하.”
엇박으로 뛰는 가슴 따윈, 뉘 말마따나 이미 제 것이 아닌 듯했다. 록흔은 무되게 덮어 버리고 가륜을 따라 나섰다. 그들 뒤로 돌무덤이 아스라하게 바랬다.
타그닥타그닥!
호식총의 맨 꼭대기, 시루마다 맺힌 이슬이 햇발에 섧게 깨졌다. 무덤 위로 해가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침녘이나 그늘은 애운하게 짙었다.
“호류가라 하셨습니까?”
“범 호에 흐를 유, 복성입니다.”
“호류가는…….”
태수관저에서 처음 맞닥뜨렸을 때, 태수 진신은 태도가 몹시 공손해 기실로만 보였다. 태화성에 왔노라 록흔이 패를 보이자, 그 몸을 더욱 낮췄다. 그에게는 목민관다운 위엄보다는 선함이 더 많았다.
“호류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그 집안 멸문을 했건만…….”
진신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계 쪽으로도 없습니까?”
록흔이 되묻자, 진신이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야말로 깨끗이 말랐지요.”
“그럼, 제가 본 것은 신기루일런지요?”
“예……, 그것은……. 습기 많은 여름밤엔 그런 환상이 떠오르기도 하겠으나, 그리 커다란 것은 저도 잘은…….”
“호류가의 가주는 태수께서 외숙이 된다 하더군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제겐 누이도 없거니와…….”
진신이 몹시 어이없어 했다. 그야말로 호류가는 공중누각이었다. 록흔은 가륜을 돌아보았다. 그는 내내 듣기만 할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태수께선 이 일을 어찌 보십니까?”
“그게…….”
사류성의 참상을 태화성에 알린 이는 진신이건만, 목전에 황제를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사내답게 어연번듯하고 준미하다 속으로 감탄할 뿐이었다.
“산달이라 대호 무리가 든 듯합니다.”
순진타 웃어야 하는가? 록흔은 눈을 사다리꼴로 일그러뜨렸다.
“그러면 어떤 방책을 강구했습니까? 폐하께 보고 올린대로라면 인명 피해가 상당하잖습니까?”
“범 사냥꾼을 여럿 불렀습니다. 하나같이 이름 드높고 솜씨가 뛰어나지요. 마침 관저에 모였는데……, 함께 가서 준비하는 걸 보시겠습니까?”
무능하다 바로 눈앞에서 호류이현이 이죽대는 듯했다. 록흔은 마뜩찮은 눈으로 진신을 훑다, 질문의 방향을 바꿨다.
“호류가의 내력을 아십니까, 멸문의 이유라든지?”
“그거라면 사류성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얘기지요.”
진신은 턱수염을 한 번 쓰다듬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전해진 바로는 호류가의 시조가 금호랍니다. 그래서인지 매 대마다 아이 하나가 범의 생김으로 태어났지요. 사류성은 예로부터 증호숭호(범을 증오하는 것과 범을 숭상하는 것)가 묘하게 어우러진 곳이라, 그런 아이가 나면 가차 없이 죽였다 합니다. 핏덩이를 그리 잃고, 넋 나간 어미는 교수암에 제 목을 매달고……. 거듭되는 핍박으로 결국 대가 끊기고, 멸문이 되었지요.”
목을 맨 이, 한이 하많을 터. 금호, 반인반호, 액사(목을 매어 죽음)……. 사고는 고리로 이어졌다.
“호류가 관련 사료는요?”
“글쎄요. 사고를 뒤지면 몇 권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시켜 찾아보라 하지요. 그런데 아침들은 들고 오셨습니까?”
진신은 가륜을 향해 사람 좋게 웃었다. 일은 시급하나, 딸자식 둔 아비로서 그에게 눈탐이 났다. 황제에게서 받은 패를 지닌 이도 해사하니 잘나긴 했으나, 저이에 비길 바가 못 되었다.
“그보다, 새로 호환 당한 이는 없습니까?”
말랑하던 눈이 일시에 굳었다. 진신이 정신이 번쩍 난 얼굴로 록흔을 쳐다보았다.
“그걸 어찌 아십니까? 새벽녘에 물려가 머리만 남은 자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 식솔들이 장례를 치르고 있을 겁니다.”
“상가가 어딥니까?”
“가보시게요?”
“사료 찾는 동안 다녀왔으면 합니다.”
“정히 그러시면 사령 하나를 붙여 드리지요. 이봐라…….”
막 문 앞을 지나던 자가 불려왔다. 록흔이 따라나서려는데, 가륜이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가 옴쭉도 못하게 팔을 그러잡았다.
“이 사람, 끼니도 거르고 동동거리는데, 수고스럽지만 아침상을 부탁해도 되겠소?”
연빛 눈이 떨든 말든 아청빛 눈동자에 웃음기가 비긋이 담겼다.
“아, 그러셨습니까? 당연히 올려야지요. 그 집이 그리 멀지 않으니 아침 들고 가셔도 충분합니다. 마침 저도 아직 조찬 전이니 함께 하시지요. 그럼 이쪽으로…….”
무엇이 급한지 진신이 허둥지둥 앞장섰다. 그 뒤에서 가륜이 상량히 웃었다. 부쩍 많아진 웃음에 그가 달라 보였다. 미소 그득 담긴 눈이 다사해, 어언간 록흔도 따라 웃었다. 해사한 뺨에 볼우물이 깊다랗게 팼다.
“비쩍 마른 여자는 질색이다.”
“폐하!”
록흔은 외쳐 놓고 놀라서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지나는 이는 없으나, 가륜은 이미 저만큼 앞서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그를 쫓았다. 맑진 바람에 열 오른 뺨이 조금은 서늘해졌다.
“앉으시죠.”
간소하나 허술치 않은 상이었다. 진신이 막 앉으려는데 기실이 들어왔다. 둘은 한참을 소곤댔다.
“먼저 드십시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진신이 나간 후, 가륜이 록흔 앞에 버티고 앉았다.
“어서 들어라.”
“예, 폐하께서도…….”
시장하다 생각지 않았는데, 막상 음식을 대하니 반가웠다. 록흔은 이것도 집고 저것도 집어 아침을 달게 먹었다. 무엇보다 비린 피내가 없어 기꺼웠다.
달칵.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이제야 와 닿았다. 가륜이 알기에 여인들은 그 앞에서 깨작대며 새인 듯 먹었다. 그러나 록흔은 먹는 모습도 탐스러웠다. 가륜은 그저 눈이 불러 보기만 했다.
“같이 안 드십니까?”
하도 반히 보아 고개가 절로 들렸다. 록흔은 잠시 젓가락질을 멈추고 가륜을 올려 보았다. 어언간, 제 배만 챙긴 것 같아 조금은 멋쩍었다.
“폐하, 호류장에서 드신 것도 없잖습니까?”
“금호의 음식은 변변찮더라만, 술만큼은 달게 잘 마셨다. 염려 말고 많이 들어라. 몇 끼 걸렀다 금세 태나는 너랑 같을까? 쑥 들어간 그 뺨 나올 때까진 어지간히 먹여야겠다.”
날캄한 이라 그 미소가 더 귀했다. 그로 인해 가슴이 찼다. 연한 동공이 드맑게 부풀고, 보드란 입술이 사분히 휘었다. 봄꽃인 양, 록흔은 수줍게 만개했다.
“그거 아나?”
“예……?”
“넌 봄빛 같아, 햇살인 양 웃지. 이리 어여삐 미소 지으면 얼음장 따윈 죄 녹아난다.”
“…….”
일순, 말문이 막혔다. 꿈을 꾸는 듯했다. 록흔은 눈귀에 힘을 주었다. 거듭 깜박여 봐도 비치는 상은 같았다. 설렘이 가슴속에서 일렁댔다.
“그래서 난 널 놓아줄 생각이 바이없다.”
창…….
젓가락 떨구니 소리가 맑게 깨졌다.
“봄맛을 알아 동장군은 눈이 돌았단다, 록흔.”
갑자기 목이 뻑뻑해졌다. 록흔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부지런한 우리 접두께선 한시라도 바삐 현장에 가고 싶겠지. 먼저 나가있겠다, 내 덕에 체할 것도 같으니…….”
록흔은 가륜의 뒷모습을 좇았다. 태화성을 벗어나 성정마저 바뀌었을까? 쉽게 마음을 드러내고, 놀라게 하고, 냉량하나 다사하고……. 더 이상 식욕이 돋지 않았다. 그녀는 그릇들을 앞으로 밀어냈다.
“후.”
한숨이 절로 나왔다.
탁.
록흔은 결연히 탁자를 짚고 일어섰다. 그녀가 문을 나서자마자, 사령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런, 염통이 그리 얇아서야.”
가륜이 비긋이 웃었다.
“뉘든 안 그럴지요?”
사령이 서너 걸음 앞서 나갔다. 할끔거리지는 않아도 귀는 종긋 세운 듯했다.
“가자, 더는 곤란케 안 하지.”
“예.”
록흔은 채 못한 말은 그대로 삼켜 버렸다.
진신의 말대로 상가는 가까웠다. 울을 넘자마자 향연기가 매캐하게 달려들었다. 울다 기진했는지, 곡소리는 없었다. 새로 생긴 돌무덤만 덩그러니 돋아 보기에 몹시 쓸쓸했다. 시루에 꽂힌 식칼에 햇발이 시퍼렇게 깨졌다.
“계십니까?”
끼이익!
높이 매달린 문이 조금 열렸다. 좁다란 틈새로, 주글주글한 얼굴이 비죽 뵀다. 벌겋게 핏발 선 흰자위나 짓무른 눈가가 애참했다. 데꾼한 눈에는 빛이 없었다.
“뉘신지 모르나, 손을 맞을 형편이 못 됩니다.”
객담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 노인은 몹시 그르렁댔다.
“관에서 나왔습니다. 경황 중이지만 몇 가지 여쭤도 되올지요?”
“무엇을 말하리까?”
오면서 듣기로는 희생자가 이 집의 외아들이라 했다. 록흔은 극히 조심하면서 말을 꺼냈다.
“작야, 수상한 일은 없었습니까?”
“며늘애 말로는…….”
노인이 구부정한 허리를 힘들게 펴더니, 비치적대며 밖으로 나왔다. 말할 때마다 앙상히 마른 뺨이 멋대로 실룩거렸다.
“아들놈이 새벽녘에 자꾸 누가 부른다며 밖으로 나가려 했답니다. 며느리가 잡고 말렸지만, 어디 장정의 힘을 당합니까? 아무래도 창귀한테 홀려 그랬나 보지요. 남은 것은 달랑 머리 하나뿐, 온전히 먹혀서…….”
기가 막힌지 노인이 게서 입을 다물었다. 눈도 탁하고 목소리도 무돼 더 캐기가 난감했다. 묵도 후, 록흔은 조용히 돌아섰다.
“가만, 록흔.”
록흔은 가륜을 좇아 시선을 옮겼다. 커다란 드므 옆, 옹기 새에 껴들어간 것이 눈에 익었다. 그녀는 다가가 몸을 낮췄다. 이내, 가슬가슬한 것이 손에 잡혔다.
“이건 그 학의…….”
오익학이 떨군 게 분명했다. 보통 깃털보다 훨씬 커다래, 족장으로 치자면 서넛은 가뜬히 들어갈 듯싶었다.
“일단 돌아가자.”
“예.”
둘이 가든 말든, 노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굳어서 호식총을 바라볼 뿐, 아무 소리도 안 했다. 늙은 눈에 고인 그늘이 금세 흘러내렸다.
“…….”
애끓는 마음에 장이 끊길 터, 자식을 앞세운 아픔을 뉘라서 안다 할까? 록흔은 애참함에 눈귀를 좁혔다.
“점점 더 짙어지는군.”
“예, 몹시도.”
부러 후각을 세우지 않아도 피내는 그냥 맡아졌다. 록흔은 이를 윽물었다. 도륙하고 도살하고, 베고 또 쳐내도 저렇지는 않을 터. 이곳에서 삶을 일구는 이들이 놀라웠다.
‘제길.’
대기 자체가 축축하고 비렸다. 록흔은 대지를 지르밟고, 좁은 산길을 헤쳤다. 피내에 숨이 막힐수록 울분은 더 커다래졌다.
“하앗!”
말 좨치는 소리가 날파랬다.
타닥타닥!
피를 피로써 갚는 것은 옳지 않았다. 뉘든 나름의 사정이 있겠으나, 악연의 고리는 그런 식으로는 결코 끊을 수 없었다. 록흔은 말에 박차를 가하며 오직 앞을 보았다. 핏빛 바람이 눈귀를 귓전을 사납게 스쳤다.
“접두!”
아청빛 그늘 밑, 검게 섞였던 것이 벌떡 솟았다. 사내 여섯이 훌쩍 일어서서 그들을 반겼다.
“알아낸 건 없나?”
하마하자마자, 가륜이 물었다. 록흔 역시 가분하게 내려 그 곁에 섰다.
“폐하, 사류성은 요괴들의 소굴입니다.”
창해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벌름대는 콧구멍에 씰룩대는 입귀에, 거한의 흥분이 그대로 묻어났다.
“탐문 결과, 미심쩍은 게 하나 더 나왔습니다. 머리만 남은 시신 외에도 액사한 여인들도 많았습니다.”
사강이 창해의 말을 이어 조목조목 살펴 아뢨다.
“목을 맸다? 진태수는 그러한 말은 하지 않았는데…….”
록흔은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수수께끼를 푸는 듯, 갈수록 얼크러졌다. 주인의 속을 아는지 그 곁에서 혈루마가 고개를 내둘렀다. 잇단 투레질에 핏물 같은 땀이 사방으로 튀었다.
“사람들 말이, 모두 쉬쉬하는 터라 관은 잘 모른다 했습니다. 더욱이 그들이 죽기 얼마 전에 아이를 낳았는데, 그 생김이 범을 닮았다 하고요.”
사강이 잠시 입을 다문 새, 창해가 다소 격앙된 어조로 다시 껴들었다.
“한 달 남짓 새, 이 집 저 집에서 멀쩡한 처녀들이 배가 불렀다지요. 그리고 요상하게 생긴 핏덩이들이 태어났답니다. 검은 학을 타고 다니는 구척 거한이 그 아이들을 모두 거둬 갔다 하온데, 접두! 그놈 생김이 호류사백과 거의 일치하지 뭡니까?”
록흔은 가륜을 올려 봤다. 잔금 없이 날파란 눈이 바로 와 닿았다.
“폐하,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인호란 놈, 높다랗게 솟아 작금도 내려 보겠지. 나름, 긍지도 높더군. 어쨌든, 사람과 귀 사이엔 다름이 있으니 경계를 넘나듦은 온당치 못하다. 하여, 내 짐작으론.”
가륜이 말을 멈추고, 예리한 빛으로 부접들을 훑었다. 칼빛 눈매에 모두 몸을 바짝 굳혔다. 그리고 하나 된 눈으로 그를 올려 보았다.
“오늘 밤 안으로 모두 마무리 져질 듯싶다. 사악한 것은 바른 것을 이기지는 못하니, 놈 역시 좌불안석일 터. 있을 곳에 있지 않으면 모든 게 어그러지지.”
뉘든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가륜의 명만을 기다렸다. 그는 하늘, 황룡의 주인이었다.
“남사강.”
얼음 같은 눈이 상량하게 빛났다.
“예, 폐하!”
“액귀(목매 죽은 귀신) 건은 없는가?”
“폐하, 그것이…….”
사강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탐문한 바론, 여인들이 하나같이 교수암이란 바위에서 목을 매달았다 하옵니다.”
록흔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액귀까지 껴든다면 일이 복잡해질 터. 하많은 귀 중에 그 귀가 얼마만큼 악독한지, 그녀는 복륭사에서 수차례 들었다. 구마식이 가한 스님마다 목매단 이는 다루기 어렵다 했었다. 고강한 승려, 혜덕 또한 사미 시절에 크게 당한 적이 있다 했다.
“접두, 액귀란 게 뭔데 그렇게…….”
유장이 록흔의 낯빛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예부터 목매달려 죽은 이보다, 목매달아 죽은 이가 더 잔독하다 하지. 액귀란 액사한 이 중에 자살한 이의 귀를 일컫는데, 그들은 환생치 못하며 지옥에 들지도 못한다. 항상 제 죽은 자리를 떠돌며 기약 없이 죗값을 치르지.”
“그깟 귀신 따위가 무에 그리 겁나십니까? 홍랑 사건도 잘 마무리 지지 않았습니까?”
창해가 따지듯 물었다. 이것저것 얼크러진 사류성의 참상 때문에 잔뜩 성이 난 듯했다.
“사람이 목을 매고 죽을 정도라면. 창해, 마음속 미움과 한이 보통은 넘는다. 생각해 봐라, 그런 자가 귀가 되면 그 한이 얼마나 깊다랄지. 그들에겐 구별이란 게 없어 아무런 죄 없고 연관 없는 자들도 제 꼴로 만드니, 수많은 이가 목숨을 앗긴다.”
가륜이 피긋 웃었다. 찬별 같은 눈동자가 빛접게 번득였다.
“천 년 묵은 여우도 액귀에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는 옛 이야기가 있지.”
부접들이 입을 떡 벌렸다. 사계(죽은 자들의 세계)나 귀계(귀가 사는 세계)에 관한 지식이 황제 또한 많아 탄성이 절로 나왔다.
“금호와 그 여인들, 관련이 아주 많다. 어차피 놈은 밤에나 나설 테니, 해 떨어지길 기다려라. 그전에 원기보충이나 두둑이 하고.”
“예, 폐하.”
모두들 고개를 깊다랗게 숙이는데 가륜이 록흔을 향해 눈짓을 했다. 어언간, 그녀는 입술만 버긋지게 벌렸다.
“……?”
“아직, 절경을 못 봤잖나. 교수암, 절명애, 볼 만할 거다.”
“예.”
수하들 앞에서 연한 속을 내비칠 뻔했다. 록흔은 저도 몰래 입귀를 틀었다.
“그럼 폐하, 예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러자. 일몰 후에 보자.”
가륜이 먼저 말에 올랐다. 그리고 록흔도 바로 그를 쫓아 따랐다.
“접두, 잘 다녀오세요.”
창해가 해맑게도 웃었다. 록흔은 고개만 짧게 끄덕여 주었다. 마음이 편치 않아 마주 웃는 건 무리였다.
사류성의 밤은 유독 검었다. 해가 지자마자, 어둠이 무작스레 내려 사위가 괴괴했다.
찌륵찌륵.
풀벌레 소리조차 을씨년스러웠다.
“접두, 절명애는 어떻습니까?”
하균이 대부의 날을 세우다 나직이 물었다. 두껍다란 적막을 깨뜨린 첫마디였다. 일시에 모두 눈을 들어 록흔을 보았다.
“겉은 아름다우나…….”
하많은 사연 품은 그곳이건만 그저 푸른 나무 품고 아름다운 물을 낀 절경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록흔에게는 섧게 보였다.
“깊이 들여 보아 속이 갉혔지.”
가륜이 차게 뱉었다. 뉘든 나무람으로 들을 것이나, 록흔은 걱정인 줄 바로 알았다.
씨륵, 씨르륵!
밤이기도 하거니와 금출령이 내려 사람이란 그림자 하나 없었다. 가륜이 미리 지시한 대로 진신이 잘 따른 덕, 사류성 전체가 죽은 듯했다. 이곳저곳에 어둠이 되직해 곁의 이만 간신히 보였다. 하늘에서 기인한 불비는 호류가의 장난이었던 듯 그런 횃불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초충이 내지르는 비명만 선연히 돋았다.
“그럼, 교수암은…….”
창해가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쉬이이익!
뼈골까지 시릴 바람이 일었다. 고산지대라 하나, 턱도 없이 냉량했다. 여름 햇발 내는 하나 없고, 겨울 달빛만 지녔다.
스이이이익!
작은 바람이 뭉쳐 크게 됐다.
덜컹덜컹!
높은 곳의 집들이 몸체를 흔들었다. 풍백이 입아귀를 늘였는지, 풍신이 머리칼을 풀었는지 바람은 점점 광혹해지고 거대해졌다.
파락파락!
모두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할 만큼 바람은 강했다. 록흔의 푸른 옷자락도 맵게 날렸다. 그러나 가륜만은 바람 너머에 선 듯, 표차로웠다. 태풍 한가운데 있더라도 머리칼 한 올 흩트리지 않을 것처럼 표표해, 그 안광 역시 날캄하기 그지없었다.
“놈이 온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라!”
록흔이 맵차게 내긋는 소리에, 부접들이 제각각의 무기를 바투 쥐었다.
파드랏!
파탓파탓!
날갯짓 소리가 거대했다. 이내, 무섭도록 커다란 바람이 일어 산천초목을 뒤집었다.
크어어어엉!
으르렁대는 소리가 바람마저 발겼다.
“접두……, 저기!”
유장이 고개가 꺾이도록 뒤로 젖혔다.
키오오오!
오익학이 우짖었다. 놈의 등에 올라탄 이, 호류이현이었다. 이제는 본연의 모습대로 불눈을 노랗게 밝히고, 금발을 찬란히 산발했다. 놈은 형형한 금빛으로 세상을 일그러뜨렸다. 그 주위에서 천지간의 기운이 마구 헝클어졌다.
“내 앞을 막는 자, 죽음뿐이다!”
높은 하늘 위, 오익학이 날개를 접었다. 이내 지상에서 들끓던 바람까지 잦아들었다. 붙박이별처럼 호류이현은 허공 높이 떠, 카랑카랑하게 외쳐댔다. 음기가 그 뒤를 쫓아 스멀스멀 퍼졌다.
“창귀들아, 깨어나라!”
피 토하듯 탁한 음이라 듣는 속이 뒤집혔다.
“일어나, 산 것은 모두 도륙해라!”
우우웅!
대지가 울었다.
턱턱!
돌덩이들이 공중으로 치올랐다. 모두 호식총을 이뤘던 것, 자연의 이치를 어기고 하늘 높이 떴다.
찰락찰락!
철옹성이라 해 무쇠시루였다. 그러나 그 역할 무색하게 쉽게 무너졌다. 다르르 떨다, 이리저리 되똥거리다…… 쇳소리 내며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
철럭!
챠아앙!
쇠가락, 식칼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곳저곳에서 험하게 부스댔다. 소름끼치는 철성에 살갗마다 소름이 절로 돋았다.
“일어나라, 일어나! 산 자를 죄 삼켜라. 네 주인이 명할진저! 창귀여, 도륙해라.”
점입가경. 담 강한 부접들이건만, 모두 입을 떠억 벌리기만 했다.
츠륵.
츠르륵!
츠으으윽!
창귀는 귀답게 낯빛이 푸르뎅뎅했다.
슈아아악!
츠륵!
깨진 호식총마다 창귀들이 기어 나왔다. 무덤은 아귀를 커다랗게 찢어, 그 뻘건 속을 내보였다. 귀의 무리는 채 썩지 않은 제 머리통을 옆구리마다 꼈다. 인호가 부리는 대로, 놈들은 비치적대고 비틀거렸다. 구멍은 지옥의 불구덩인 양 역하게 뜨거웠다.
“저들을 물어뜯어라.”
인호는 직접 나서지 않았다. 다만 창귀를 부릴 뿐, 오익학에 앉아 불눈만 번득댔다.
크으으으…….
살아생전과는 일체 달랐다. 창귀들은 의지란 게 없어, 시퍼런 손만 산 자들에게 내밀었다.
“록흔, 단백검을.”
가륜이 나직하게 명했다. 즉시, 록흔은 단백검을 풀어 그를 향해 던졌다.
“사류성행이 네 불운이니, 널 이곳으로 이끈 하늘을 원망해라. 명세제, 내 오늘 너의 피를 맛보련다!”
호류이현이 오익학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크아아아앙!
흉포한 포효 후, 호류이현의 잘난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 깜짝할 새, 인두겁은 줄어들고 호피가 선연히 돋았다. 양손은 발톱이 잔독히 돋고, 단정한 입매는 야멸치게 찢겼다.
닥.
땅을 사분히 지르밟고 선 것은 금호였다. 놈은 록흔이 꿈에서 봤던 것만큼이나 몸피가 컸다. 호류가의 뿌리라는 금범처럼 한눈에 들이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닥.
다악.
금빛 범은 소리 없이 유연히 다가왔다. 그것은 두려울 만치 아름다운 짐승이었다. 오래 보면 넋을 앗길 것도 같았다. 연빛 동공에 놈이 가득 들어찼다.
“록흔, 물러서라.”
“폐하!”
“항명 따위 하지 말랬다!”
가륜이 야멸치게 쏘아붙이며 록흔을 훔켜잡았다. 그리고 거칠다 싶게 뒤로 밀었다.
사르릉!
류검은 무색투명하나 드맑았다. 최초의 검광은 미약했으나, 장마에 물 불듯 점차 드세졌다.
흐륵흐륵!
말캉말캉 휘청휘청, 칼은 몹시 유연했다.
콰륵, 콰르륵!
격랑이 맵차게 일었다.
‘사기를 먹는가?’
록흔은 눈을 가늘였다. 아록이 내준 검은 기괴했다. 요기가 강할수록 커지는 듯, 수검이 창귀들을 향해 몸피를 급히 늘렸다. 스스로 배배 뒤틀어 한 자도 되지 않던 것이 높다랗게 치솟았다. 물은 노호하고 아르렁댔다.
휫!
휘르륵!
단백검이 장창만큼 길어지자, 가륜이 한 손으로 그러잡아 휘돌렸다. 이내, 묵천이 걷혔다. 얼굴 보얀 달이란 놈이 사류성의 하늘에 새뜻하게 돋았다.
“너! 어찌하여 그 검을 갖고 있느냐?”
금호가 입아귀를 커다랗게 찢었다. 그저 짐승의 목소리, 더 이상 호류이현이지 않았다. 여럿이 섞여 되갈려, 군데군데 섬뜩하게 역한 것이 돋아 들렸다.
“겁먹었군.”
가륜이 사늘하게 웃었다. 칼금처럼 가는 빛이 그 눈 안에서 번득 찢겼다. 휘휘 돌아가는 검 끝에 냉량함이 가리었다 다시 드러났다. 록흔은 빛너울인 양 어스레한 물빛 새로 보았다. 모든 걸 차치하고, 그는 황제 이전에 고강한 무인이었다.
카르륵!
검은 단단하지 않으나 강했다. 물의 속성을 지녔으되 쉽게 깨지지는 않았다.
샤앗!
사아앗!
가륜이 부리는 대로 단백검은 제 몸을 바꿨다. 검기 닿는 족족, 창귀들이 찢겨나갔다. 시퍼렇게 바랜 영체가 종이쪽처럼 나달나달 바스러졌다.
“뉘에게 받았나?”
예리한 이빨 새, 노성이 아득바득 깨졌다.
“반갑잖나? 백 년 만이지.”
가륜이 단정했다. 그는 야멸치게 눈을 조프렸다.
크하아아앙!
금호가 비명처럼 포효했다.
‘그렇군.’
백 년 전부터 작금까지, 록흔은 찰나에 간파했다. 금호는 분명 단백검으로 인해 스러졌고, 그때도 뉘인가 정의로운 이가 있었다. 허망한 꿈은 그예 바스라지고, 피비린내는 잠시 묻혔을 터였다. 그러나 씨앗은 마르지 않아 놈은 또다시 발호했다.
“천만에! 단백검 따위 두렵지 않다. 어림없어, 이번만큼은 무너지지 않는다!”
금호가 크게 부르짖었다. 효포에 창귀들이 목 잃은 몸을 발딱 쳐들었다.
“황제라 하여, 목숨이 두 개더냐!”
노란 눈이 불을 뿜었다.
“장담부터 마라.”
사방에서 옥죄고 들어오는 창귀들을 향해, 가륜이 물검을 채찍처럼 늘여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