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29
129화 혈면귀(3)
천무그룹 본가.
별채에 위치한 응접실엔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 조용히 찻잔을 기울이며 현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굳이 얼굴을 마주할 필요도 없이.
현우는 그녀가 바로 블러드 서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명확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현우가 만나고 상대해본 사흉 중에서도. 일신의 무위만으로 따지면 단연 그녀가 최강일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심지어 전생에는 혈령수라를 제외하면. 서울 방어전이 진행되는 몇 주의 기간 동안 한 번도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던 녀석이었기에.
얼마나 강한 무위를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대체 어떤 녀석인지조차.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블랙 가문 측의 인물 중 하나였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대어다.’
적어도 그녀의 순수한 무위는 현재의 다니엘 블랙에 버금가거나. 그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 정도라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물론, 자세한 것은 직접 주먹을 맞대봐야 알겠지만···.
일단 느껴지는 기세부터 버서커나 페이스 체인저 따위의, 다른 사흉과는 비교되지 않는 압박감이 있었다.
“···블러드 서커.”
현우의 기척을 눈치 챘음에도.
그녀는 구태여 자신을 부르기를 기다려서 고개를 돌렸다. 아마 그가 자신을 가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기다린 모양이었다.
“천무그룹의 잠룡이라고 하던가.”
천천히 일어나는 블러드 서커.
그녀는 허공섭물로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에 돌려놓았다. 그건 다분히 부러 현우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리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인데. 과연, 눈빛부터가 범상치는 않은 놈이로구나.”
비죽 웃음을 머금는 그녀.
이윽고 몇 걸음을 걸어 현우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는, 대뜸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더니. 가녀린 검지로 턱 끝을 살짝 훑었다.
“기세도 범상치 않고.”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특히나 천무그룹의 한 가운데에서. 마치 제 안방마냥 저리 오만방자하게 굴어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버릇이 나쁘군.”
“흠.”
그래서 현우는 그 손을 잡아챘다.
하지만 특별히 마나를 운용하거나. 괜한 힘을 사용하진 않고 그저 손길을 떼어냈을 뿐이었다.
설령, 녀석이 여기서 진심으로 힘을 겨루려 든다 하여도. 충분히 맞받아쳐줄 자신은 있었지만. 녀석의 방문 목적을 듣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본론만 간단하게 이야기해라.”
“본좌를 이리도 기다리게 해놓고. 본론만 간단히 이야기하라니. 이것 참, 건방지다 해야 할지. 아니면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 사내로구나.”
낄낄 웃는 블러드 서커.
그녀는 곧, 고개를 기울이며 웃음을 삼켰다. 하나하나 행동이 거슬리는 여자라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우리 블랙 가문에 재미있는 선전 포고를 했었다지. 본좌가 그곳에 있었다면 참으로 즐거웠을 텐데 아쉬워.”
“본론이나 말해라.”
“음, 그래 본론 말이지.”
그녀는 제 입술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사실 대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줄지. 기대되는군.’
그저 준비해온 이야기를 꺼냈을 때. 일그러질 상대, 잠룡 주현우의 표정을 기대하며 기다렸을 뿐.
“천무그룹 유럽지부.”
그녀의 입이 열렸다.
“본좌가 전원 몰살시켰느니라.”
“···뭐?”
그건···.
현우로서도 놀랄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유럽지부엔 주진석 부회장이 있다.
그의 실력은 주양태 회장에 미치진 못해도. 블러드 서커 하나를 막아내지 못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현우도 그를 믿었고.
유럽지부의 전멸 가능성은 더욱 고려하지 않았다.
‘그게 가능한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저건 천무그룹 본가에 연락조차 넣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전멸을 당했다는 소리 아닌가.
“그런데 말이지. 이미 주진석 부회장을 비롯한 천무그룹 혈족들은 그곳에 없더구나. 뭐, 조금 이상한 일이긴 했지만 덕분에 일이 쉬워졌지.”
흘려듣지 못할 이야기였다.
현우가 더 자세히 캐물으려는 찰나.
“그리고···.”
그녀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드드드드─!
지면이 불길하게 요동치기 시작했고.
“본좌는 이 자리에 없는 블랙 가문의 지존, 다니엘님을 대신하여. 천무그룹,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 세계에 전쟁을 선포하도록 하겠느니라.”
“무슨 개소리를···.”
쿵─!
현우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 거대한 울림이 별채 응접실은 물론, 공간 전체를 관통하듯 훑고 지나갔다.
‘발원지는 여기가 아니다.’
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실제로 코앞의 블러드 서커는 마나를 움직이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건, 훨씬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그리고···.
현우의 추측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별채 창밖으로 들어오던 빛이 일순 끈적끈적한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방금 말하지 않았더냐.”
현우의 눈앞에 서 있는 블러드 서커의 눈초리가. 현우에겐 매우 불쾌하게 느껴지는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진짜 전쟁을 선포한 게다.”
***
한편···.
인천, 계양구 천마산 인근.
한국헌터협회 소속의 두 젊은 의무복무 헌터들은, 오늘도 나른한 기분 속에서 경계 근무를 수행 중이었다.
“하아암···.”
“이게 미쳐가지고 선임 앞에서 하품을 찍찍 싸대네. 요즘 다른 선임들이 많이 편하게 해줬나본데.”
“죄, 죄송합니다!”
선임 헌터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자.
바로 입을 꾸욱 다물며 자세를 고치는 후임. 그러나 피곤한 안색만은 지울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에휴···.”
혀를 차면서도.
선임 헌터는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요즘 근무가 너무 퐁당퐁당이긴 했지. 그래도 너만 힘든 건 아니니까. 다른 놈들이랑 있을 때는 최대한 피곤한 티 내지마라.”
“옙!”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대답하는 후임.
선임 헌터는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저번 부산 사건 이후로 죽을 맛이야. 그런 재앙급 마족들이 우리가 경계를 하고 있다고 해서 안 나타나는 것도 아닐 텐데.”
“그건 그렇습니다.”
“어차피 그걸 우리가 토벌할 수도 없고. 그냥 싼값에 쓰는 인간 화제 경보기라니까. 여기서 뭐라도 나오면 헐레벌떡 무전 한 번 치고 그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이는 선임.
후임은 그를 보며 농담에 웃어야 할지. 아니면 진지하게 반응해야 할지. 짧은 순간 엄청난 내적 고민에 휩싸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선임의 짓궂은 농담에 그가 반응할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더 심각하고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졌기 때문이었다.
드드드드─!
이들이 딛고 있던 지면이 마구 요동쳤고. 갑작스런 상황에 후임은 그대로 자빠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악!”
“뭐, 뭐야?”
당황한 선임.
의무 복무기간을 이제 2달 남겨두고 있는 그였지만.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
“그, 땅이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임마!”
중요한 것은 ‘왜’ 흔들리느냐다.
보통 땅이라는 것은 평소엔 흔들리지 않는 것이 정상이니.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은 명백한 이상 현상이고. 그런 이상현상 뒤에 동반되는 것은 늘, 게이트 브레이크 같이 좋지 않은 일들뿐이었다.
“빨리 지통실에 무전 때려!”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쿠웅─!
다시 한 번, 육중한 울림과 함께. 이들이 근무하고 있던 소초 전방 45도에 위치한 천마산 정상에 무언가 내리꽂히는 것이 보였다.
“헉!”
후임 헌터가 숨을 삼키며 굳었고.
녀석이 당황에 빠져 있는 사이. 선임 헌터는 어느새 재빨리 지휘통제실과 연결된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지, 지통실! 당소 22라 알리고! 현재 천마상 정상 부근에 이상 현상 발생했다고 알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저쪽도 한창 당황하고 있거나. 방금 이상 현상으로 인해 마도공학 무전이 끊어진 걸지도 모른다.
“지통실! 당소···.”
재차 무전기에 대고 외치던 찰나.
후임 헌터가 꽥하고 비명을 지르며 그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미친, 뭐하는데!”
“저, 저기, 저것 좀 보십시오!”
공포로 물들어 있는 눈동자.
이윽고 후임의 시선을 따라간 곳엔. 천마산 정상에 내리꽂혔던 미확인 물체의 정체와 그보다 훨씬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저, 저게 무슨···.”
하늘과 이어진 거대한 사슬.
그리고 그 사실이 내리꽂힌 근처의 지반이 통째로 무너져. 지금껏 보지 못했던 크기의 검붉은 게이트로 변해 있었다.
심지어···.
게이트 너머로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족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건 그야말로 현세에 지옥의 문이 열렸다고 착각할 법한 풍경이었다.
‘죄다 A급 이상의 마족들이다!’
그들의 실력으론 한 마리조차 상대하기 버거운 공포스런 존재들. 그것들이 마치 파도처럼 이쪽으로 밀려오는 중이었다.
저 사슬이 대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직 하나, 확실하게 두 헌터의 뇌리를 동시에 스쳐가는 사실이 있었다.
“···이런 씨발.”
일어나지 않길 바라던 재앙.
그게 하필이면 지금, 두 헌터의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고만 것이다.
***
[마스터.]타나토스의 속삭임.
그에 현우는 직감적으로 녀석이 전하려는 소식이 좋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새로운 페이즈가 시작됐습니다.]“···지금?”
[예, 그렇습니다.]예상은 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그 정확한 타이밍만은 예측하지 못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었던 모양이었다.
“후후···.”
블러드 서커.
그녀는 유쾌한 눈빛으로 슬며시 한 손을 들어 입을 가리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아마 그녀로서는 천무그룹, 그리고 현우의 허를 제대로 찔렀다 생각하고 있겠지.
물론, 그 생각은 완벽히 옳다고 까진 못해도. 어느 정도 맞는 생각이라곤 할 수 있었다.
“장담컨대 앞으로 3시간 이내에 서울은 본좌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니라. 제아무리 천무그룹이라 한없이 쏟아지는 마족과 붙어 이길 수는 없을 테니!”
헤죽 벌어지는 입술.
잠시 생각에 잠긴 현우에게 그녀는 마치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물었다.
“자, 이제 어찌하겠느냐!”
“글쎄···.”
녀석에게 듣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미 제대로 일을 벌인 이상, 고분고분 대답해주진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현우가 선택할 방식은 단 하나 뿐이었다.
“우선은 눈앞의 적부터 처리해야지.”
“오오, 본좌를 공격하려 드는 게냐. 하지만 그래봤자 단순한 시간낭비 밖엔 되지 않을 것이니라.”
비죽, 입꼬리를 끌어올린 그녀.
이윽고 그녀의 얼굴이 핏물로 주르륵 녹아내리더니. 여성조차 아닌 완벽한 타인의 남성의 것으로 바뀌었다.
“설마, 본좌가 이곳에 직접 왔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역용술 같은 스킬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미 안면에 흐르는 마나의 흐름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테니.
“고작 아순시온에서 한 번 상대해본 것으로 본좌의 혈령수라를 전부 파악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흠, 확실히 그건 몰랐네.”
“그래, 혈령수라를 활용하면 이런 것도 가능하지. 화풀이조차 엄한 곳에 하게 되었으니. 가엽게도 분한 마음을 삭일 수도 없겠구나.”
실실 비웃는 녀석.
그러나 현우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아니.”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너도 잘못 생각한 것이 하나 있어.”
현우가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곧, 그 주먹엔 어느 때보다 강렬한 색체의 우레불꽃이 서렸다.
파파팍─!
모든 것을 터트려 태울 것만 같은 광마(狂魔)와 같은 번갯불.
아무리 제 안전을 확신하고 있던 블러드 서커라 해도. 그건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한 걸음 물러나도록 만들 정도로 위협적인 힘이었다.
“방법이 없다면 만들면 그만이야.”
“···!”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 순간, 현우가 제자리에서 가볍게 지면을 박차며 그녀에게 접근했다. 피해야한다는 생각을 미처 떠올리기도 전에···.
“이렇게.”
···휘둘러지는 주먹.
블러드 서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만큼 이곳에서 아무런 피해 없이 빠져나갈 자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 친!’
한데···.
현우는 압도적인 힘과 마나로 그 전재 자체를 박살내 버린다는 선택을 그녀를 향해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에게 있어선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결과를 강요했다.
“카학···!”
블러드 서커···.
아니, 그녀의 혼과 연결되어 조종당하고 있던 혈령수라가 검은 피를 토했다.
타격을 입은 것은, 블러드 서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마치 영혼이 찢어져 타오르는 것만 같은 격통에 일순 사고가 끊어졌다.
“어, 어떻게···?”
“말했잖아.”
격동하는 마나로 이루어진 의념.
현우의 전심전력을 담은 일격은 녀석의 육체는 물론이고. 존재 그 자체에 타격을 입혀버린 것이었다.
권능의 단계를 넘어.
세계급 유물인 궁그닐의 힘을 흡수해. 신화로 나아간 우레불꽃의 열기는 이렇듯, 물질 이상의 것을 불태워버릴 수도 있었다.
“블러드 서커.”
바닥을 구르는 녀석에게.
현우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천무그룹이 아무것도 모르고 당해줄 거라 생각했다면, 그거야말로 큰 오판이자 오만이다.”
단지···.
천무그룹, 그리고 주양태 회장을 비롯해 현우까지. 모두 저들에게 없는 것을 한 가지 가지고 있을 뿐이다.
적이 무슨 수를 쓰던.
반드시 승리할 거라는 확신.
“이게 천무그룹이다.”
오만한 선언.
그러나 늘 그렇듯, 그 오만함엔 명료한 근거가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