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28
128화 혈면귀(2)
“이것 참, 의외로구나.”
블러드 서커.
그녀는 요사스러운 붉은 기운이 감도는 눈으로 네크로맨서···. 아니, 네크로맨서가 혼을 정착시켜둔 한 구의 허접한 백골을 바라보았다.
“천무그룹의 적마녀 오수진과 비견되던 그 네크로맨서가. 한낱 스켈레톤의 몸을 빌려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니···.”
그녀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는 분명한 비웃음이었으나. 이 자리에서 네크로맨서는 그에 대한 불만조차 터트릴 수 없었다.
같은 블랙 가문의 혈족.
그리고 한때는 다니엘 블랙의 수족인 사흉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으나.
이런 시기에 이곳에서 이렇게 마주쳐버린 이상. 지금 이 상황이 그녀에게 있어 절대로 긍정적으로 돌아가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평소 인형을 모으듯 애지중지 수집했던 언데드도 모조리 잃어버린 모양이군. 이래선 교황청의 성가대 놈들만 와도 쉽게 끝을 낼 수 있겠구나.”
이죽이는 블러드 서커.
네크로맨서는 별다른 반박도 하지 못하고. 그저 최대한 불쾌한 기색을 숨기며 말을 아낄 뿐이었다.
“그나저나···.”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미 유럽지부 습격에 실패한 시점에서 천무그룹 놈들에게 죽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 녀석들이 네년을 살려둔 것을 보니. 뭔가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모양이군.”
[그건···.]“아, 대답해줄 필요는 없다. 그 정도는 본좌도 추측할 수 있느니라.”
장난스럽게 손을 내젓는 블러드 서커.
그러나 네크로맨서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분위기가 서서히 위협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분명 이들에게 무슨 쓸모 있는 정보를 넘겨주는 대가로, 그리 비참한 모습으로라도 삶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게지.”
“음, 아직 본좌의 추측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무형의 마나가 사방에서 네크로맨서의 목을 움켜쥐어 압박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스켈레톤의 육신이 아닌, 존재 자체를 압박하는 의념의 힘이었다.
“과연 네년이 천무그룹에 무슨 정보를 넘겼을까. 본좌가 추측하기엔 네년 목숨을 살릴만한 가치를 지닌 정보는, 그리 많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되느니라.”
저건 추측이 아니다.
이미 머릿속에서 결론과 처분을 정해놓고. 살살 약을 올리며 그에 대한 네크로맨서의 반응을 즐기는 것뿐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대응할 수도 없었다.
보유한 언데드를 모두 잃고.
육신마저 이 허접한 스켈레톤에 종속된 네크로맨서로선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불가능할 테니까.
“그 몇 가지 중에 최근의 사태를 돌이켜 보면, 딱 하나 네년이 발설했을 만한 귀한 정보가 하나 있더군.”
[···.]“복마전의 위치.”
만약 네크로맨서에게 살아 있는 육신이 있었다면. 지금쯤 그녀는 목울대를 움직여 마른침을 삼켰으리라.
[그게 무슨 소리야?]“음음, 모르는 척도 나쁘진 않은 선택이지. 이곳에 구금되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만일 본좌가 네년이었더라도 그런 궁색한 변명부터 떠올렸을 테니.”
[내가 이렇게 된 후에 복마전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모양인데. 아무리 그렇게 몰아붙여도 나는 정말로 모르는 일이거든.]잡아떼기 밖에 되진 않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정도뿐이었다.
“한데···.”
블러드 서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가볍게 앞으로 손을 뻗자. 주위의 마나가 움직여 네크로맨서의 신체를 서서히 허공으로 끌어당겼다.
“네가 가볍게 입을 놀려준 덕분에 주양태 회장, 그 미친 늙은이에게 복마전이 직접 공격받았다. 그리고 그걸 수습하는 과정에서 다니엘님까지 부상을 입으셨지.”
네크로맨서.
그녀는 골통만 남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필사적인 변명이 블러드 서커에게 전해지길 바랐다.
물론, 불가능할 거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오해라?”
블러드 서커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런 통하지도 않을 허접한 변명보단. 차라리 솔직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진짜 아니라니까!]“대외적으로 비밀에 부쳐져 있는 복마전의 위치를 발설할 수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 붙잡혀 있던 네년 말고는 없잖느냐.”
[···시, 심증에 불과하잖아.]“그래, 심증이지.”
그녀는 백골의 두개골을 검지로 톡, 밀쳤다. 위협적이진 않은 손길이었으나. 네크로맨서로선 섬뜩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천무그룹의 그 애송이가 전쟁을 선포한 직후. 지금껏 극비리에 숨겨왔던 복마전을 제 할애비와 함께 습격했다.”
“네년에게 정보를 제공받지 않았다면,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이더냐?”
블러드 서커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필사적인 변명은 재밌게 감상했느니라.”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겠지.]“잘 알고 있군.”
네크로맨서를 옥죄이던 힘이 조금씩 그 강도를 더해갔다. 마치 이대로 짓이겨 터트려버리려는 것만 같았다.
“네년의 재롱은 나름 보는 맛이 있긴 했다만. 아쉽게도 본좌는 이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지.”
그런데 그때.
네크로맨서를 속박하고 있던 무형지기가 단숨에 흩어졌다.
갑작스런 이상 현상에 블러드 서커가 아주 잠시 반응이 늦어진 사이. 주변 일대의 지면에 기이한 문양이 빼곡히 새겨진 마법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
정확히 무슨 마법인 지는 모르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네크로맨서가 일부러 시간을 끌며 그녀의 의표를 찌르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다는 점이었다.
[누굴 멍청이로 알았나본데.]이곳엔···.
블러드 서커, 그녀의 손에 죽임당한 수많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고. 그건 네크로맨서에게 있어선 최고의 환경이었으니까.
[엿이나 드셔! 아줌마!]시체에서 시체로, 블러드 서커가 추적할 수 없는 속도로 혼을 빠르게 도약시키며. 네크로맨서는 그녀의 머릿속에 한 마디의 전음을 남기고 사라졌다.
“···도망인가.”
쯧, 하고 혀를 차는 블러드 서커.
“뭐, 상관없다.”
그러나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그녀는 길게 늘어진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기며 가볍게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이미 이곳에 온 목적은 반 이상 달성했다.
그리고···.
“본좌가 전면에 나선 이상, 지금부터 이 세계는 본격적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테니.”
네크로맨서는 따위는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그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곧, 주위의 시체들이 모조리 녹아 흐르는 핏물이 되어 그녀에게 모여들었다.
***
“끄으응···!”
신전을 나서자마자.
로이스 멘도자는 매우 개운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켰다.
비록 가문의 보물인 신화 등급 아티팩트, 케챨코아틀의 황금 비늘을 저쪽에 반강제로 양도하는 꼴이 되었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아주 손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목숨을 구한 것만 해도 다행인데.
보상의 10퍼센트까지 손에 넣었으니.
멘도자 가문 본가가 이번 사태의 피해를 복구하기는 한결 수월해진 셈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본가의 피해가 막심하긴 해도. 카르텔의 권력을 쥘 기회가 생겼어. 그리고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천무그룹과 좋은 관계도 맺을 수 있었고···.’
그녀는 흘끔 주건우 쪽을 보았다.
얄궂게도 서로 타이밍 좋게 눈이 마주쳤고. 주건우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마냥,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며 황급히 반대로 시선을 돌렸다.
“후후, 귀엽네···.”
흔들다리 효과라고 하던가.
다분히 전략을 끼워 넣은 제안이긴 했으나. 사실, 로이스는 어느 정도 주건우에게 마음이 있긴 했다.
물론, 오늘 처음 본 사이지만.
언제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시간 보다는 사건에 더 강렬하게 움직이기 마련 아닌가.
대균열 아래서 제 한 몸을 스스로 불살라.
거대한 마족, 불카누시온과 홀로 맞서던 그의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묘하게 흔들어 놓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
갑자기 뒤통수가 따가웠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니. 그곳엔 주영미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무, 뭐에요. 그렇게 노려보고.”
“···왠지 방금 그 눈빛,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이지.”
“누굴 어떤 시선으로 보든, 그건 보는 사람 마음 아니겠어요!”
“맞긴 해.”
주영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날카로운 시선은 거두지 않았다.
“그게 내 아들이 아니라면.”
여전히···.
그녀는 로이스가 주건우의 신붓감으론 영 탐탁치 않은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만일 공식적인 혼담이 오간다고 해도. 실제로 성사되기란 쉽진 않은 일이 되겠지.
“아무튼···.”
지금 걱정할 일은 아니다.
로이스는 짐짓 개의치 않는 것처럼,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곤 말을 돌렸다.
“이걸로 이쪽 일은 일단락 된 셈이네요. 천무그룹의 두 분은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됐고. 마음에 들지 않던 오르테가 패밀리도 처리했고.”
일석이조.
아니, 천무그룹과 원하던 것 이상의 관계를 맺은 로이스에겐. 엄밀히 따지면 일석삼조에 가깝다고 해야겠지.
“아니,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그러나 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부터 시작이라뇨?”
“이 시각부터 로이스, 당신과 멘도자 가문은 카르텔 전체를 빠르게 휘어잡아야 할 겁니다.”
“카르텔은 수많은 미등록 헌터와 길드의 연합이에요.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도. 시간이 좀 걸릴 수밖에 없을 거에요.”
점조직일 수록, 이들의 뜻을 한데 모으는 것은 쉽지 않다. 심지어 오르테가 패밀리가 머리를 잃은 지금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녀석들이 날뛸 것이 분명했다.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방법은 생각해두었으니까요.”
“방법이라니···.”
“마침 저기 오는군요.”
현우가 손을 들어 가리킨 곳.
그곳에는 한 사내가 보였다. 로이스는 그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호세 페레즈.
그가 뒤에 협회의 헌터들을 달고. 이쪽으로 머리칼을 휘날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마치 선착순 달리기라도 하는 것 같은 기세였다.
“호세 씨.”
“자, 잠룡님!”
숨을 헐떡이진 않았다.
아직 S급 헌터이긴 하나. 그는 무투 계열의 스킬을 사용하는 헌터였고. 고작 잠시 동안 전력질주를 한 것으론 숨이 차오를 리가 없었다.
“무사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다른 분들도 큰 문제없이 돌아오신 것 같고. 그런데···.”
하지만 무투 계열이라 해도.
정신까지 철저하게 단련할 수는 없는 법.
그는 아순시온 한복판에 솟아오른 거대한 대지 모신의 신전을 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저건,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건 이쪽이 차차 설명해줄 겁니다.”
“이쪽이라면···.”
그의 시선이 현우를 따라갔고.
곁에서 어색한 낯빛으로 미소를 짓는 로이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윽, 로이스 멘도자···.”
그는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로이스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멘도자 가문이 오르테가 패밀리와 함께 카르텔의 핵심 세력이었던 만큼, 협회와 사이가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설령 원수였더라도 손을 잡아야 할 때다.’
다니엘 블랙.
녀석의 소재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으나. 그가 뿌리내릴 만한 곳에선 모조리 블랙 가문의 영향력을 몰아내는 편이 안전하다.
“두 분이 협력을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협력이라니. 카르텔과 말입니까?”
“예.”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텔 소속, 그리고 카르텔에 소속되지 않은 몇 가지 길드 명단을 드리겠습니다. 두 분이 록펠러 가문과 함께. 그들을 전부 남미에서 축출해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남미 전역에서 카르텔과 협회의, 전례 없는 협동 작전이 시작되었다.
***
그런데···.
남미의 사건이 일단락되고.
일행이 천무그룹 본가로 귀환한 직후.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천무그룹 본가에서.
생각지도 못한 기이한 사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주영미가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고요?”
“예, 그런데 그게 말입니다···.”
대체 어떤 인물이 찾아온 건지.
김태훈 실장은 매우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김 실장님.”
“아, 예.”
“천무그룹 소속으로 일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내가 답답하게 구는 걸 싫어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실 텐데요.”
“그, 죄송합니다.”
그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입술이 바짝 마르는 모양인지. 슬쩍 입맛을 다시곤 긴장한 태도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실은 블랙 가문에서 사절을 보냈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시작한 전쟁에 대해서 긴히 논할 사안이 있다고 말입니다.”
“···블랙 가문?”
주영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한 지금, 천무그룹의 본가에 사절로 찾아올 만한 이들은 절대 아니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말도 안 되는 배짱이다.
혹, 자살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라면. 뒤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본가엔 아버지가 있을 텐데. 아직 기다리고 있다니. 아버지가 만나주지 않으신 건가요.”
“그게, 회장님이나 이사님이 아닌. 주현우 도련님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우랑요?”
“예, 반드시 단 둘이만 이야기를 나눌 거라며 우겨대는 통에···.”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
이렇게 사절을 보낸 것만으로 도발이 아닐까 싶을 정도인데.
“그럼, 아버지께선?”
“회장님께서도 썩 기분이 좋아보이시진 않았지만. 일단 제 목숨을 내놓고 찾아온 사절이라곤 하니. 천무그룹의 명예를 생각해 위해는 가하지 않겠다하셨습니다.”
“···하, 사절이라.”
주영미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그녀의 곁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현우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사절이라는 게 대체 누굽니까. 본가에 보낼 정도면 이름 없는 혈족을 보내진 않았을 텐데요.”
“아, 그건 주현우 도련님께서도 이미 아시는 이름일 겁니다. 블러드 서커라고···.”
블러드 서커.
현우가 그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혈면귀.”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아마도 블랙 가문이 남은 세계급 유물을 모두 손에 넣었을 확률이 높다. 적진 한 가운데 직접 찾아올 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하지만 놈들만큼이나.
현우 역시도 두 번째 기회를 받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블랙 가문에 대항할 수단을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해. 시간을 단 한 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그러니 현우에게 이건···.
다니엘 블랙 다음가는 대어가.
제 스스로 그물 위에 올라온 꼴로 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