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31
131화 차원 쐐기(2)
“끄아악!”
“으악, 사, 살려줘!”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진다.
인천 계양구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에 급히 설치된 1차 차단선, 그곳을 방어하는 헌터들의 비명소리였다.
진군하는 마족의 군단.
이건 아무리 연륜이 쌓인 베테랑 헌터라고 한들.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을 초유의 사태였다.
‘상황이 매우 좋지 않군.’
한국 헌터협회 기획조정실장 권준성.
협회장인 서민욱의 오른팔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어떻게든 차단선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 둘씩 죽어나가는 헌터들을 보며 어금니를 꽈악 깨물었다.
“실장님, 여기서 더 이상 버티다간 애꿎은 헌터들만 희생될 겁니다. 빨리 퇴각 명령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으음···.”
“실장님! 이대로 두고만 보실 겁니까!”
인상을 쓰며 재차 묻는 헌터.
그러나 권준성으로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앞으로 그가 내려야할 결정에는 단순히 차단선 전투를 치르고 있는 헌터들의 목숨만 걸려 있는 게 아니다.
현재 대피가 끝나지 않은 계양구와 강서구 근방 민간인 수천, 수만의 목숨까지 걸려 있으니.
퇴각 결정을 내리는 순간.
그들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으리라.
“우리는 끝까지 이곳을 사수한다.”
“하지만 실장님···!”
“···여기서 우리가 퇴각하면 민간인들은 전부 죽는 거나 다름없다. 나는 도저히 그런 명령은 내릴 수가 없네.”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 잘 버텨주었으니. 앞으로도 그러기만을 바라야지.”
권준성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한 가지는 약속하겠네.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반드시 나 또한 자네들과 운명을 함께하겠네.”
“그럴 일이 없길 바라야겠군요.”
“하하, 그렇지.”
당연한 소리겠지만.
협회 소속의 헌터들이라고 해서. 그저 저항도 없이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방어 대형을 짜고. 마치 전쟁을 수행하는 것처럼 마족 군단의 진격을 최대한 저지하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또 몰려옵니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까지는···.
전황이 생각만큼 유리하진 않으나. 그 전략은 마족 군단에겐 꽤나 잘 먹혀들어가고 있긴 했다.
“크윽, 전원 측면 방어에 신경 써라!”
“놈들이 좌측을 파고듭니다!”
다시 시작된 피 튀기는 방어전.
그런데 늘 그렇듯이.
인간이란 여러 한계를 지닌 존재다.
특히, 상황이 극한으로 치달을 수록 체력과 정신력 면에서 그 한계는 명확하게 드러나기 마련.
“···여, 여기는 지옥이야!”
“어이! 정신 차려!”
“나는 여기서 나가야겠어!”
몸을 바들바들 떨더니.
그대로 뒤를 돌아 대열을 이탈하는 헌터.
“미친! 뭐하는 거야!”
“난 살고 싶다고!”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면, 마족 군단과의 압도적인 머릿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그나마 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바로 여러 헌터가 한데 아우러져 만든 합동 방어진에 있었다.
“비, 비켜엇!”
그리고 그가 공포에 질려 동료 헌터들을 밀치며 대열을 벗어난 순간. 그들이 간신히 붙잡고 있던 얄팍한 우위는 바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 이런···!”
방어진 선두에 서 있던 선임 헌터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일탈의 결과는 불과 몇 초가 지나지 않아 결과로 드러났고. 곧, 방어선의 한 방향이 마족들의 거친 공세에 속절없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2분대! 좌측의 4분대를 지원해!”
“저희도 지금 간신히 버티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여유를 만들어라!”
그러나···.
목숨이 오가는 전투에서 그런 억지가 통할 리가 없었다. 결국, 하나의 구멍에서 시작된 방어선의 붕괴는 걷잡을 수 없이 가속도를 더해갔다.
“크으윽···.”
“이제 정말 끝인가!”
그 순간에도 마족 군단은 저마다 괴이한 비명을 지르며 덤벼든다. 정말 저 끔찍한 존재들의 진격에 끝은 없는 걸까.
헌터들의 얼굴이 차츰.
절망으로 물들어 가는 그 순간이었다.
꽈르르릉─!
고막을 찢는 폭음과 함께 그들의 눈앞에 한줄기 푸른 번개가 내리쳤다. 그 여파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마족 군단이 갈라져 틈이 만들어졌다.
“···헉!”
훅, 하고 헌터들의 안면을 거세게 훑고 지나가는 뜨끈한 후폭풍. 이윽고 폭발의 휩쓸린 마족들의 처참한 시신과 흙먼지 속에서 한 사람의 인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늦진 않았군.”
검은 정장.
그리고 코트 위에 수놓아져 있는 푸른 용의 문양. 그건 그가 천무그룹 혈족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자, 잠룡!”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최근,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그 위명을 떨치고 있는 천무그룹의 젊은 용. 흔히 잠룡이라고 불리는 주현우였다.
그리고···.
잠룡의 등장뿐만 아니라.
곧, 이들은 더욱 놀라운 상황과 마주했다.
“이제 여러분이 반격할 차례입니다.”
현우가 주먹만 한 녹색 보석을 꺼내들자.
따스하게 느껴지는 광체가 보석으로부터 뿜어져 나와.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헌터들 사이로 넓게 퍼져나갔다.
대지 모신의 심장.
현우의 인피니티 코어가 발하는 무한한 마나가. 아티팩트의 힘에 의해 정제되어 그들의 몸에 깃든 것이었다.
“오오, 뭔가 강해진 느낌이야!”
“저건 설마 토템 계열 아티팩트인가?”
그 빛과 접촉한 즉시.
전신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마구 샘솟기 시작했고. 평소 만전의 상태와 비교해도 족히 두 배 이상은 될법한 힘에, 이들은 격한 고양감에 휩싸였다.
“과연, 대단하군.”
권준성은 저도 모르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곳 방어선의 총책임자로서 그런 감상에 빠져 있을 여유는 없었다. 이내 그는 목을 한 번 가다듬은 다음 크게 소리쳤다.
“전원! 지금부터는 공세로 전환한다!”
““예!””
그들보다 한 발 빠르게.
현우가 지면을 박차고 마족 군단의 한 가운데로 돌진했다.
그의 뒤로 푸른 광체로 빛나는 우레불꽃의 궤적이 길게 이어졌고. 이는 곧, 폭발로 화하여 주위의 마족을 눈 깜짝할 세에 증발시켰다.
“다들 잠룡의 뒤를 따라라!”
그렇게─
전장엔 때 아닌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
한편···.
최전선에서 조금 떨어진 곳.
“감히 마족 따위가.”
쿠르르르─!
하늘이 타오르며 내려앉는다.
아니, 그렇게 착각할 정도로 엄청난 광경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 주양태와 맞서보겠다는 게냐.”
창천십팔무(蒼天十八武)
제18초식 유운비천(流雲飛天)
마치 구름처럼 펼쳐진 창염에서 비롯된 가공할 열기가. 일대의 공기와 함께 지면의 모든 마족을 산채로 끓이며 허공으로 증발시킨다.
“끼이익!”
“캬르르륵!”
마족의 고통스런 비명.
그러나 아무리 비명을 질러 봐도 바뀌는 것은 없다. 그들은 전부 산채로 전신의 수분이 끓어올라 기화되는 격통을 그대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분명 그들에겐 현세의 지옥이나 다름없이 느껴지겠지.
‘역시, 주양태 회장이다.’
그 광경을 목격한 주변의 모든 헌터들의 머릿속엔, 그와 같은 생각이 공통적으로 스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곁에서 함께 싸우고 있는 천무그룹의 헌터들, 그 중에서도 특히 무영대의 대장인 검존(劍尊) 구동철은 열 두 자루의 어검을 자유롭게 다루며 주위의 마족을 말 그대로 갈아버리는 중이었다.
“캬···.”
몇몇 헌터가 그를 보며 동경의 눈빛을 보냈다. 그들 중에 대부분은 손에 검을 하나씩은 쥐고 있는 검사들이었다.
같은 SSS급이라 해도.
구동철에겐 등급을 능가하는 검의 재능과 경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검사라면 누구라도 그를 동경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이거, 괜찮은 건가?”
“뭐가 말이야?”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들은 조금씩 가슴 속에서 불안감이 싹트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것들 계속해서 몰려오잖아···.”
마족의 군단.
그들은 천무그룹의 활약으로 더 이상 진격하진 못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밀려나지도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죽이는 만큼.
아니, 그 이상의 머릿수를 앞세워 끝없이 이쪽으로 돌격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시간이 갈수록, 녀석들은 점점 체계적인 대형으로 돌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저, 정말 괜찮은 건가?”
“설마, 주양태 회장이 있는데.”
“그래 맞아. 저 사람이 밀리면 대체 누가 대신 여기를 막겠어.”
그 말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안 좋은 예감이 그들 사이에 습한 안개처럼 내려앉았다.
아무리 강인한 헌터라 해도.
체력까지 무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그들의 예감처럼.
실시간으로 한계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회장님···.”
구동철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그래, 알고 있다.”
주양태 회장은 무심히 대답했다.
다른 이들은 눈치 채지 못하겠지만. 구동철만큼은 그를 오랜 시간 곁에서 모셔왔으며, SSS급 헌터 중에서도 나름 눈썰미가 좋은 편에 속했다.
‘회장님 상태가 예전 같으시지 않다.’
눈에 띄게 숨이 가빠져 있고.
고작 이정도로 흘리지 않던 땀마저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가 발하는 마나는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의 중후함을 지니고 있지만. 이제 노쇠한 신체가 그 힘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쪽은 저와 무영대에게 맡기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괜히 회장님께서 무리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리라···.”
주양태 회장은 픽 웃었다.
그 역시도 본인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더욱 물러날 수 없었다.
“여기서 이 주양태가 꼬리를 말고 뒤로 물러난다면, 안 그래도 우리 천무그룹을 우습게보고 있는 녀석들에게. 아주 달고 좋은 먹잇거리만 던져주는 꼴이 될 게다.”
“하지만, 회장님···.”
“내 상태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주양태 회장은 딱 잘라 말했다.
더 이상의 이견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굳은 뜻이었다. 그렇기에 구동철으로서는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바꾸시진 않겠군.’
그는 주양태 회장을 잘 알고 있다.
설령 몸이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가 이곳에서 물러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구동철이 해야 할 일은 하나 뿐이다.
“뒤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그래.”
그런데.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은 그때. 마족들이 몰려오던 방향에서 심상치 않은 마나의 파장이 느껴졌다.
쿠르릉─!
그리고 곧, 마치 천둥번개라도 내리 꽂힌 것 같은 거센 폭음과 진동도 그 뒤를 따르듯 터져 나왔다.
“저쪽은···.”
구동철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주양태 회장 역시, 그 방향에 무엇이 있는지 어렵지 않게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하핫!”
주양태 회장은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마나의 파장이 누구의 것인지.
적어도 천무그룹 측의 인원들은 하나같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주현우.”
그는 조용히 읊조렸다.
“손주 녀석이 정말이지 훌쩍 커버렸어. 이제는 이 할애비보다 더 앞장서 나가기도 하고 말이야.”
“회장님 말씀대로 도련님의 성장 속도가 매섭긴 한 것 같습니다.”
“어떤 것 같으냐. 동철아.”
“무얼 말씀하시는지···.”
주양태 회장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무르익는 데에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벌써부터 저 정도라면, 이제는 슬슬 녀석에게 안심하고 맡겨도 될 것 같지 않겠느냐.”
무엇을, 이라는 되물음은 없었다.
구동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일단락 된 건가.”
권준성은 주위를 둘러봤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후.
쑥대밭이 된 주변 일대엔 각종 마족이었던 것들의 파편이 나뒹굴고 있었다.
저것들 중 대부분은 주현우가 만들어낸 결과였고. 협회의 헌터들은 극히 일부만을 거들었다고 해야겠지.
‘활약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꼴에 지치기는 하는군.’
권준성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대지모신의 심장.
아티팩트를 통해 힘을 강화했다곤 하나. 결국 인간인 이상, 마나와 별개로 체력적인 한계가 오기 마련.
“후우···.”
그는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천천히 내뱉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손아귀에 쥔 단검을 뒤로 당겼다.
“···끄루룩.”
주르륵, 녹색 피를 쏟아내며. 심장에 그의 단검이 꽂혀 있던 마족이 지면을 향해 실이 끊긴 꼭두각시 인형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아, 멀쩡합니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현우의 물음에 권준성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늦지 않게 천무그룹의 지원이 도착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덕분에 대원들이 무사히 후퇴할 수 있겠군요.”
“아뇨.”
그런데 현우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우린 후퇴하지 않을 겁니다.’
“그, 그럼···?”
“오히려 그 반대라는 거죠.”
그 한 마디에···.
헌터들의 얼굴이 모두 사색이 되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겨우 이 지옥에서 목숨을 건져줄 동아줄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더 깊은 지옥으로 들어가는 하행선이었다니.
“설마, 천마산 쪽으로 가겠단 겁니까.”
“예, 결국 마족 군단이 쏟아져 나오는 근원을 해결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소모전이 될 뿐이니까요.”
그럼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정면 돌파가 항상 좋은 선택인 것은 아니나. 지금 만큼은 그게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현우에겐 그걸 가능케 할만한 준비가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이는 절대 무리한 도전도 아니었다.
“물론, 제가 협회 분들에게 명령할 권한은 없으니. 이곳에 남고 싶은 분들은 남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선뜻 남겠다는 자는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이곳에 남는 것보다는, 주현우와 함께하는 편이 생존율이 훨씬 높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쪽엔 부상자도 많고 대부분의 헌터가 지쳐있습니다. 돕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이대로라면 저희 대원들이 발목을 잡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고개를 젓는 현우의 선언과 함께.
우우우웅─!
마치 자로 재기라도 한 것처럼. 타이밍 좋게 밝게 빛나는 무언가가 서울 상공에서 이쪽을 향해 접근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