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188
188화 내놔!
릴리는 팔짱을 끼고 안개 너머를 노려보았다.
“왜 안 오지?”
그것으로는 부족한지, 릴리는 짝다리를 짚고 불량스럽게 한쪽 다리를 달달달 떨었다.
마치 불량 어린이의 전형 같은 모습.
대인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대번에 꿀밤이 날아왔겠지만, 대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릴리의 눈이 샐쭉하게 변했다.
“4시간 아까 전에 지났는데.”
소녀는 볼이 퉁퉁 부은 채로 안개 너머를 노려보고, 손목에 차고 있는 노란색 고양이 시계를 들여다보기를 반복했다.
째깍, 째깍.
그사이 고양이의 콧수염 모양으로 생긴 짧은 바늘이 가리키는 숫자가 5번이나 바뀌었다.
그러니까 5시간이나 지났다는 뜻이다!
“빨리 온다고 했으면서.”
릴리의 눈썹이 가운데로 모이고 입술이 불만스레 삐쭉 튀어나왔다.
달달달달.
불량 어린이가 안개를 삐딱하게 노려보며 다리를 떨수록, 불안해지는 것은 어른이었다.
“저기, 릴리야···.”
최성민이 릴리에게 다가오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찌릿.
순간 사방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최성민은 급하게 호칭을 수정했다.
“···리, 릴리 님. 잠깐 저랑 얘기 좀 하실까요?”
그제야 서서히 줄어드는 살기들.
천마신교의 무사들이 최성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특히 혈기수라와 염라귀는 실종자 수색 중에 뭘 하고 왔는지, 검은 무복에 피가 흥건했다.
“왜요?”
릴리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최성민을 돌아봤다.
꿀꺽.
최성민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원래 계획이란 게 마음먹은 대로 안 될 때도 있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조금 늦을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다 왔어요.”
릴리는 손가락으로 다른 사람들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킬 때마다, 천마신교의 무사들은 삼생의 영광이라는 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본 최성민은 미칠 것만 같았다.
‘부대표님! 저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약 5시간 전, 대인은 최성민을 조용히 불러 따로 이렇게 얘기했었다.
“최 대표님. 제가 좀 멀리까지 수색을 갈 수도 있어서요. 좀 늦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꼬맹이가 저 찾으러 가겠다고 하면 못 가게 좀 말려주세요.”
“예.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그때는 몰랐다. 이 일이 목숨까지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그게. 부대표님이 어디 가서 당하실 분도 아니시고, 워낙에 성격이 자유로우신 분이다 보니···.”
“저두 알아요.”
릴리는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릴리도 아저씨가 다쳤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왜 늦는지, 이제는 안 봐도 뻔했다.
“아저씨는 불쌍하고 착한 사람들 도와주느라 늦게 오는 거예요. 항상 그렇거든요.”
“···예?”
최성민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쨌든, 릴리가 안개 속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그렇죠. 하하. 이름처럼 워낙 대인배시니까요. 하하하!”
“하나도 안 웃긴데.”
“하하···. 죄송합니다.”
혼자서 어색하게 웃던 최성민은 입을 꾹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거 농담 좀 했다고, 살기 어린 시선들이 뒤통수에 따라붙었다.
‘부대표님. 빨리 와서 저 좀 살려주십쇼···.’
최성민이 운전석으로 돌아가 주섬주섬 청심환을 찾는 동안, 장영신이 릴리 옆으로 다가왔다.
“···괜찮아?”
릴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장영신은 소녀의 퉁명스런 표정에서 불안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상대의 감정을 항상 궁금해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작은 차이였다.
“···무서워?”
“······.”
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꾹 다물고 안개 너머를 바라볼 뿐이었다.
덜덜덜덜.
이유 모를 불안감에 아까부터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몸이 으스스해서 팔짱을 꼈고, 초조해서 자꾸만 시간을 확인하게 된다.
“저거 기분 나빠.”
릴리는 저 안개 너머에서 느껴지는 사악한 기운에 소름이 돋았다.
왠지 가까이 가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래서 계속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래서 아저씨가 돌아오면, 빨리 집으로 가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릴리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난 절대 저기로 안 들어갈 거야.”
“···그래. 나랑 같이 여기 있자.”
장영신은 릴리의 옆에 섰다. 그게 뭐든 릴리가 싫다고 하면, 장영신도 안 할 생각이었다.
릴리를 위로하는 친구는 장영신 혼자만이 아니었다.
캬아아아!
말랑이가 릴리의 불안한 기분을 느끼고 소녀의 뺨에 먼저 얼굴을 비벼댔고,
우끼끼끼!
금오도 다가와서 소녀의 손을 꼭 잡아주고 긴 꼬리로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다들 고마워.”
친구들의 위로에, 릴리는 불안했던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 모습을, 수색을 마치고 돌아온 천마신교의 무사들이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즈다께서는 언제나 귀여우시군.”
혈기수라는 부지불식간에 본심을 말했다가, 급하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그게 아니라. 언제나 찬란하고 위대하시다, 이 뜻이다.”
“하여튼 사내놈들이란.”
염라귀는 혀를 차며 혈기수라를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려 안개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구원자께서 이토록 늦으시다니.”
“하. 설마 그분께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나?”
혈기수라의 말에 염라귀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런 불경스러운 생각을 할 것 같아?”
그분께서 정말 본인이 주장하는 대로 천마신교의 구원자가 아니라 해도, 그 무공만으로도 대적할 자가 거의 없는 절대고수였다.
“혈기수라. 나는 그분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뭐가 걱정이지?”
“···그분께서 우리가 쓸모없다고 생각하실까, 그것이 걱정이다.”
“······.”
순간 혈기수라도, 그 주변의 다른 무사들도 침묵했다.
염라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태상교주님께서 직접 선별하신 우리가 여태 단 한 명의 실종자도 찾아내지 못했다. 구원자께서 이 사실에 실망하지 않으실까?”
“······.”
아무리 혈기수라와 염라귀가 견원지간이라지만, 결국 그들은 같은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땅에 천마신교를 정착시키고 부흥시키는 것.
때문에, 지구인들에게 빚을 만들어 놓을 수 있는 이번 임무는 반드시 완수해야 할 일이었다.
혈기수라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다.
“···돌아오시기 전에 좀 더 찾아볼까?”
“좋은 생각이다. 이 이후의 임무에 대해서는 따로 명하지 않으셨으니.”
천마신교의 무사들이 조급한 마음에 엉덩이를 들썩일 때였다.
“이상해!”
릴리의 비명 같은 외침에 무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들은 비호처럼 경공을 펼쳐 릴리를 호위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거요···.”
릴리는 왼손에 찬 를 들어 보였다.
우우웅···.
평소와 달리, 팔찌가 발산하는 마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있었다.
“예? 그것이 무엇이기에?”
“아저씨가 준 거예요! 근데 이거, 이러면 안 되는데, 왜 이러지···.”
릴리는 불안한 눈으로 팔찌와 안개 너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팔찌의 힘이 약해졌다는 사실과, 아저씨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함께 마음에 걸렸다.
“어떡하지?”
릴리는 안개 너머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불안했다. 저긴 정말 들어가기 싫었다.
“그치만···.”
만약에 아저씨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많이 다쳤거나, 나쁜 일이 생겼거나, 못 돌아오면···.
결국, 한쪽의 불안감이 다른 한쪽의 불안감을 이겨냈다.
입술을 앙다문 릴리가 말했다.
“아저씨 찾으러 가요!”
누구의 명이라고 거부할 것인가. 혈기수라와 염라귀가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존명!””
뒤에서 듣고 있던 최성민이 깜짝 놀라서 다가왔다.
“예? 잠깐만요. 부대표님이 분명 여기서 기다리라고···.”
찌릿.
날카로운 살기에 최성민은 입을 쏙 다물었다.
‘크윽···. 부대표님. 제 역할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분함에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는 운전기사를 뒤로하고, 혈기수라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즈다시여. 저 안에는 사악한 존재들이 가득합니다. 이대로 저 안에 들어가시면 그들과 마주해야 합니다.”
옆에서 혈기수라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염라귀가 말을 이어받았다.
“신의 불길로 모조리 불사를 수도 있사오나, 그리하시면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것입니다. 또한 숨어있을지 모르는 실종자들이 불길에 다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떡해요?”
릴리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 순간, 두 무인이 잠시 눈빛을 교환하고 말했다.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반드시 그분의 흔적을 찾겠습니다.”
둘에겐 단 한 명의 실종자들도 못 찾은 일을 만회할 기회이기도 했다.
“응! 고마워요!”
그렇게 릴리, 혈기수라, 염라귀 셋이서 대인을 찾으러 가기로 했다.
“당신들은 이곳에서 기다리시오. 구원자께서 돌아오실지도 모르니.”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전투 트럭에서 더 대기하기로 했다.
“···나도···.”
장영신은 릴리와 함께 가고 싶어 했지만, 방해된다는 혈기수라의 한마디에 입을 꾹 다물었다.
우끼끼끼!
대신 금오가 수색조에 합류했다. 무림의 배분으로도 실력으로도 말릴 수 없었기에, 혈기수라와 염라귀는 그 동행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 빨리 데려올게!”
릴리는 남은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후, 곧장 몸을 돌려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불안하고 무서웠지만, 릴리는 대인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
*
*
*
혈기수라와 염라귀의 추종술은 훌륭했다.
비록 지하 대피소 깊은 곳에 숨은 7팀의 흔적은 찾아내지 못했지만, 대인의 흔적은 순식간에 찾아냈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에는, 대인이 남긴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두 조각으로 부서진 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부서졌어···.”
릴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두 조각으로 부러진 팔찌를 바라보았다.
“부서, 졌어···.”
붉은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소녀의 내면에서, 흉포한 무언가가 눈을 뜨려했다.
그 순간,
우끼이이?
캬아아!
옆으로 다가온 금오가 소녀의 손을 잡아주었고, 말랑이가 그 부드러운 몸을 소녀의 얼굴에 열심히 비볐다.
“······.”
눈을 몇 번 깜빡인 릴리가 혈기수라와 염라귀를 바라봤다.
“아저씨는 어디 있어요?”
“흔적이 세 곳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흔적이 가까운 곳부터 가 보기로 결정했다.
가장 먼저 대인이 잠시 머물렀던 빈 집에서 피로 범벅이 된 옷을 발견했고,
“아저씨 많이 다쳤나 봐!”
쿠구구구구구!
그 다음 검은 먹구름에 휩싸여 있는 거대한 마천루로 향했다.
물론 도중에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몬스터들이 있었지만,
퍼엉! 퍼버버벙!
퍼버버버버버벙!
불꽃을 휘두르며 맹위를 떨치는 릴리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저씨! 내가 금방 구해줄게!”
건물의 입구 앞에 도착한 순간, 릴리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불길함을 느꼈다.
다리가 덜덜 떨리고,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졌다.
“으, 기분 나빠···.”
하지만 릴리는 뒤로 물러서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이왕 내친걸음, 힘껏 침식결계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침식결계 내부에서 힘을 회복하고 있던 마왕 발람이, 침입자의 등장에 감았던 눈을 뜨며 포효했다.
[누가 감히 왕의 휴식을 방해하는가!]“나쁜 놈!”
발람의 무시무시한 얼굴을 본 순간, 릴리는 저 괴물이 아저씨를 잡아간 나쁜 놈이라고 확신했다.
“아저씨 내놔! 이 나쁜 놈아-!”
그와 동시에, 소녀의 주위로 피어나는 어마어마한 양의 불꽃들.
화르르륵! 화르르륵! 화르르륵!
화르르륵! 화르르륵! 화르르륵!
화르르륵! 화르르륵! 화르르륵!
화르르륵! 화르르륵! 화르르륵!
[미친···.]그걸 바라보는 발람의 얼굴이 해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