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202
202화 마왕성의 새 주인(2)
대인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릴리를 바라봤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는 길에 반성문을 잃어버리셨다?”
밖에서 얼마나 신나게 놀다 왔는지, 릴리는 옷과 신발이 전부 흙투성이가 된 채로 대인 앞에 나타났다.
릴리는 대인의 시선을 피하며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분명히 주머니에 넣어놨는데···. 아까 날아오다가 떨어뜨렸나 봐···.”
대인은 그 시무룩한 정수리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걸 믿으라고? 솔직히 말해. 너 반성문 안 쓰고 놀다가 왔지?”
그 순간 릴리는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대인을 올려다봤다.
“거짓말 아니야! 진짜 썼어! 한 장 가득 다 썼는데! 진짠데!”
“이게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썼어요···. 썼습니다요···.”
대인이 인상을 확 찌푸리자, 릴리는 찔끔해서 목을 움츠렸다. 소녀의 목소리는 개미처럼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놀기만 한 거 아닌데···. 오다가 착한 일도 했단 말이야.”
릴리는 대인에게 감염 환자들을 만나 주다혜에게 데려다준 이야기를 했다.
‘착한 일 했으니까. 반성문 안 써온 거 봐주면 안 돼?’
그 얄팍한 의도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대인은 코웃음을 쳤다.
“어림도 없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벌로 내일까지 반성문 4장 써와.”
“왜 4장이야? 오늘하고 내일 거까지 2장 아니야?”
대인은 이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의 머리에 손을 툭 얹었다.
그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원래 돈도 제때 안 갚으면 이자가 붙는 거야. 안 그럼 누가 제때 갚겠냐?”
릴리는 입을 떡 벌렸다. 잘못한 건 맞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너무해! 아저씨 완전 날강도 아니야?”
“···넌 가끔 보면 이상한 부분에서만 어휘력이 뛰어나더라.”
대체 누구한테 배워서 이러지? 왕구혼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리는 대인이었다.
“진짜 반성문 써왔는데···. 아저씨 잠깐만!”
혹시 모르니까 기다려 보라며, 릴리는 오기 전에 다 뒤져본 주머니를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대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백날 찾아봐라. 잃어버린 반성문이 나오나.’
사실, 대인은 릴리가 진짜로 반성문을 썼다는 말을 믿었다.
어떻게 아냐고?
아까 왕구호가 주워서 자신에게 갖다줬으니까.
‘이렇게 혼이 나 봐야 앞으로 물건을 안 잃어버리지.’
이게 다 교육의 일환이었다.
절대로 꼬맹이가 곤란해하는 모습이 재밌어서가 아니었다.
“에이. 쓴 적도 없는 반성문이 주머니에서 나올 리가 있겠어~?”
“기다려 봐! 여기 있을지도 모르거든!”
약이 잔뜩 오른 릴리는 주머니를 탈탈 털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연히 대인이 가지고 있는 반성문이 나올 리 없었다.
그 대신,
삐죽.
왕구호가 먹으라고 준 비스킷이 주머니 밖으로 튀어나왔다.
“!!”
휘익!
릴리는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으로 비스킷을 주머니 안에 도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대인을 바라봤다.
“······.”
“이거 봐라?”
눈이 마주친 순간 대인의 입가에 번져가는 의미심장한 미소. 릴리의 이마에 식은땀이 한 방울 맺혔다.
“방금 그거 뭐야?”
“뭐, 뭐, 뭐가?”
콧잔등 위로 맺히는 식은땀 한 방울. 릴리는 애써 대인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굴렸다.
대인은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낱개로 포장된 노란색 비닐 안에, 네모나고 납작한 뭔가가 들어있는 게 뭘까?”
“···지우개?”
큭큭. 대인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맺혔다.
이 우매한 꼬맹이. 날 속이려면 100년은 멀었단다.
“그래? 그럼 네 입가에 잔뜩 묻은 과자부스러기는 뭘까?”
“헙!”
릴리는 자기도 모르게 허둥지둥 입가를 닦았다. 그러나 입가에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릴리는 낭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 당했다···.”
“큭큭큭.”
악마보다 더 사악한 표정으로 대인이 걸어왔다. 그의 온몸에서 검은 아우라가-실제로- 뿜어졌다.
“꼬맹이. 각오는 돼 있겠지?”
“히익···!”
*
*
*
“어쭈? 손 내려오지?”
릴리는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던 손을 다시 귀 옆에 바짝 붙였다.
‘어떻게 알았지?’
아저씨는 등 뒤에도 눈이 있는 것 같았다. 분명 안 보고 있었는데, 손이 조금만 내려가면 귀신같이 알았다.
“팔 아픈데···.”
“아프라고 하는 거야. 그러게 누가 몰래 과자 먹으래?”
“잘못했어요···.”
릴리는 대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러나 대인은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들을 살피느라, 릴리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릴리가 팔을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아저씨. 한 시간 넘은 것 같은데···.”
“정확히 8분 지났다. 엄살 피우지 말고 똑바로 들도록.”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인이 말했다. 릴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칫···. 근데 아저씨는 여기서 뭐 해?”
대인은 며칠째 이곳, 마왕성의 대전 안에 혼자 틀어박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출입은 일절 금지.
릴리가 매일 반성문을 내러 오고, 가끔 왕구호나 주다혜만 중요한 사항이 일이 생기면 보고하러 오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도 대인이 정확히 이곳에서 뭘 하는지는 몰랐다.
“전리품 정리하는 중이야. 이제 거의 다 끝나간다.”
대인은 테이블 위에 펼쳐진 물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빨간 쇠말뚝 하나.
새까만 액체가 들어있는 유리병.
뱀 두 마리가 뒤엉켜 있는 지팡이.
커다란 녹색 크리스탈.
테이블 위에는 이렇게 4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대인은 그것들을 하나씩 살폈다.
대인은 우선 테이블 위에 있는 붉은 쇠말뚝을 집어 들었다.
‘일단 토템이 가진 능력은 다 확인했고.’
그것은 으로, 대인이 부산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탐내던 물건이었다.
마왕의 토템은 최상급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는 재료였다.
각각의 마왕이 가진 고유의 권능을 어느 정도 끌어다 사용할 수 있는 데다, 부적처럼 가지고만 다녀도 웬만한 마수들에겐 먼저 공격당할 일이 없었다.
‘발람의 토템으로 아티팩트를 만들면 재생, 독 면역, 정신 마법 면역이 패시브로 붙어. 여기에 추가로 다른 능력도 생길 것 같은데···.’
거기까지는 만들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티팩트를 만드는 것은 제작자의 능력도 중요하니 말이다.
‘근데 양이 좀 애매하단 말이지.’
대인은 말뚝을 들어서 요리조리 살폈다.
방어구나 무기를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장신구를 만들기에는 너무 많은 양.
“단검이나 투척 무기 같은 건 딱히 필요 없는데···.”
잠시 고민하던 대인은 결론을 내렸다.
“일단 영신이한테 가져가 보지 뭐.”
한국 최고의 제작자이니만큼, 장영신이 보면 뭔가 색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인은 말뚝을 내려놓고 두 번째 전리품을 집어 들었다.
“이건 어쩐다···.”
그것은 발람이 사용하던 마법 지팡이였다.
녹색 뱀 2마리가 서로의 몸을 꼬아서 지팡이를 타고 올라가는 형태로, 사용자의 마력을 증폭시키고 마법의 위력도 강화시키는 신기급 아티팩트였다.
마법이 발달한 가이아 대륙이었다면, 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귀한 물건.
하지만 대인에겐 튼튼한 둔기에 불과한 지팡이였다.
‘내 주변에 딱히 마법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 이거 나쁜 놈이 쓰던 지팡이다.”
어느새 대인 옆으로 다가온 릴리가 지팡이를 보며 말했다. 두 팔은 반쯤 내려와 있었다.
“음···?”
대인은 마법 지팡이와 릴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순간 그의 얼굴에 고뇌가 스쳤다.
잠시 후 대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냐. 이건 아니야. 이거까지 들면 리얼 마녀잖아.”
“뭐가?”
대인은 마법 지팡이의 끝으로 릴리의 정수리를 가볍게 때렸다.
딱!
“아얏!”
“손 똑바로 들고 있으라고. 자꾸 슬금슬금 내릴래?”
“너무해···.”
릴리의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다. 대인은 코웃음을 날려주곤 발람의 지팡이를 잘 챙겨 넣었다.
‘이건 일단 킵해 놓자.’
릴리의 능력은 마법과는 조금 달랐다. 마법 지팡이를 든다고 해서, 그 능력이 비약적으로 강해지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대인은 세 번째 물건에 시선을 주었다.
검은 액체가 들어있는 투명한 유리병.
자세히 보면, 유리병 안의 검은 액체가 맹렬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어이. 그 안은 지낼 만해?”
대인이 유리병을 손으로 잡은 순간, 그 안에 갇혀 있는 발람의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끄아아아악아악!]]“다행히 잘 지내는 것 같네.”
장영신이 제작한 유리병 안과 밖에 7개의 초소형 봉마진을 겹쳐서 설치하고, 주다혜의 신성력으로 코팅한 물건.
[[끄아아아아아악!]]이 안에 갇힌 검은 액체는, 릴리의 불꽃으로 발람을 녹이고 녹여서 남은 최후의 액기스 같은 것이었다.
대인은 유리병을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마계로 돌아가고 싶으면, 아는 걸 다 불어야 될 거야.”
사실 대인이 이 안에서 며칠 동안 한 일의 대부분은, 발람에게서 마계의 정보를 캐내는 일이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될 대재앙, 헬게이트에 대비해서 말이다.
[[전부 다 말하겠다! 마계에서 가장 강한 왕의 이름부터 시작해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알려줄 테니, 제발 날 여기서 꺼내···!]]발람은 생각보다 쉽게 항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놈이 말하는 정보 중에는 틀린 것이 적지 않게 섞여 있었다.
즉, 거짓말이란 뜻.
다른 사람이라면 그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가 통할지 모르지만, 마계의 사정을 대충 아는 대인에게는 아니었다.
“이 새끼 이거.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안 되겠다. 일주일 뒤에 보자.”
[[왜, 왜, 어째서···!!]]“또 구라 치면 그땐 한 달 뒤에 보고.”
툭.
대인은 유리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더 이상 비명이 들려오지 않았다.
움찔, 움찔.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병이 좌우로 흔들릴 뿐이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릴리가 대인에게 물었다.
“아저씨. 근데 정말 이 나쁜 놈 나중에 놓아줄 거야?”
대인은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필요한 정보만 다 빼먹고 없애버릴 거야. 나쁜 놈한텐 거짓말해도 돼.”
릴리는 음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저씨라면 그럴 줄 알았어.”
“···너 그거 뉘앙스가 상당히 미묘하다?”
대인은 지팡이로 한 대 더 쥐어박을까 하다가, 너무 쪼잔해 보여서 관두기로 했다.
“그럼 이제 이것만 처리하면 되는데···.”
대인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큼직한 녹색 크리스탈을 바라봤다.
두근.두근.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느리게 맥동하는 녹색 크리스탈.
그 정체는 마왕성의 메인코어였다.
‘이게 가장 아쉽단 말이지. 내가 이걸 다룰 수만 있었으면···.’
마왕성.
마왕에게 강력한 마력을 공급하고, 마왕과 공명하며 그 힘과 권능을 몇 배로 강화시켜주는 마물 병기.
또한 영성을 갖춘 존재여서, 스스로 판단해 전투를 하고, 그 형태를 다양하게 변형할 수도 있었다.
이 마왕성은 소환이 완벽하지 못해 기본형에 머물러 있지만, 성장시켜서 가공할 전략병기로 강화시킬 수도 있었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쩝···.”
대인이 알기로, 마족 외 종족은 마왕성의 주인이 된 적이 없었으니까.
‘천마신공이 있으니 어떻게 되지 않을까 했는데···.’
며칠간 이것저것 실험해봤지만, 딱히 알아낸 것은 없었다.
대인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지. 원래 계획대로 부숴서 재료로 쓰는 수밖에.”
메인코어는 마계에서 가장 귀한 재료 중 하나였다. 아티팩트로 만들어도 최상급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대인이 메인코어를 부수기로 마음먹은 순간,
“아저씨. 얘는 안 죽이면 안 돼?”
“음? 왜?”
릴리가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메인코어를 바라보며 말했다.
“불쌍해. 아까부터 계속 살려달라고 빌고 있는데···.”
순간 대인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 누가 빌어?”
“얘가!”
릴리의 손가락은 정확히 메인코어를 가리켰다.
대인의 눈동자가 커졌다.
“너 설마···. 이게 하는 말이 들려?”
그 순간, 마왕성의 메인코어에 빠르게 점멸했다. 마치 그렇다고 맞장구치는 것 같았다.
“응. 아저씨는 안 들려?”
그게 들리는 사람이 이상한 거거든? 이라고 말하려다가, 대인은 그냥 이렇게 물었다.
“뭐라고 하는데?”
이거 어쩌면···?
대인의 눈동자에 기대감이 어렸다.
“살려만 주면 뭐든지 하겠데. 근데 말이 안 통해서 엄청 답답했다고···. 아, 이거 나만 들리는 거구나!”
릴리는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마족, 그중에서도 마왕급만 교감할 수 있다는 마왕성과 교감한 것이다.
‘이게 마냥 좋은 일인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단, 대인은 눈앞에 찾아온 행운을 먼저 줍기로 했다.
“꼬맹이. 일단 팔 내려.”
“어?”
대인이 릴리의 손을 잡아서 내려줬다. 그리고 소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말 잘 듣는 강아지 쓰다듬듯 쓰다듬었다.
“오늘 착한 일 했으니까. 특별히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줄게.”
“정말?”
“그럼.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반성문을 반으로 줄여줄 수도 있어.”
그 말에 덥석 걸려든 릴리가 눈을 빛냈다.
“뭔데? 무조건 할게!”
“얘한테 내가 하는 말 그대로 전하면 돼.”
대인은 손가락으로 메인코어를 가리켰다.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랑 계약하지 않으면 옆에 있는 마왕이랑 똑같이 만들어 주겠다고.”
잠시 후,
테이블 위로 떠오른 메인코어가 부르르 떨면서 대인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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