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346
346화 (외전) 두 번은 안 봐줘!
“더 이상은 무리야···.”
지친 목소리로 안나가 중얼거렸다. 소녀는 초췌해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끄으윽!”
“추, 추워···.”
치료마법에 상태가 호전되어 가던 환자들이 다시 발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증세가 심한 이들은 고통에 못 이겨 피부를 긁어댔다. 피와 고름이 사방으로 튀었다.
설상가상으로 벙커 밖에는 괴물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캬아아아아!
-콰콰콰콰쾅!
괴물들의 괴성과 폭탄이 연달아 터지는 듯한 폭발음.
건물이 흔들리고 먼지가 쏟아질 때마다, 패닉에 빠진 환자들은 비명을 질러대며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들 중에는 릴리 일행을 탓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전부 저 사람들 때문이야! 저 사람들이 괴물들을 불러온 거라고!”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안나를 손가락질했다.
“책임져! 너희 때문에 우리까지 다 죽게 생겼잖아!”
사내는 이 모든 불행이 릴리 일행 탓이라고, 그들만 사라지면 우린 괜찮아질 거라고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다들 잘 들어! 저 인간들을 쫓아내야 우리가 살 수 있어! 바깥에 있는 몬스터를 데리고 떠나게 해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환자들의 귀에, 선동가의 말이 달콤하게 들리기 시작할 때였다.
-빠악!
무언가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내는 그대로 기절해 바닥에 쓰러졌다.
“또 자고 싶은 사람 있어요?”
릴리가 벙커 바깥에서 구해온 새로운 환자들을 데리고 들어오고 있었다. 소녀의 손에는 작은 돌멩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
“······.”
소녀의 과감한 행동에 불만을 터트리던 환자들은 일제히 침묵했다.
새삼 깨달은 것이다.
자신들을 도와주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환자를 그렇게 때려도 되는 거야? 안 그래도 다들 무서워하고 있는데···.”
안나가 릴리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물었다.
릴리는 확신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잘해주면 호구처럼 보일 수 있거든. 착한 사람일수록 세 보여야 돼. 착한 일은 기선제압이야!”
“······.”
뭔가 괴상한 논리였지만, 자신만의 분명한 신념을 가진 듯한 릴리의 말에 안나는 묘하게 믿음이 갔다.
하지만 그 믿음과 관계없이 그들이 처한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아우우, 아우, 아우우우-!
벙커 바깥에서 소신한이 하울링을 몇 번에 끊어서 했다.
새로운 환자들을 발견했다는 신호.
릴리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다시 벙커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또 다녀올게! 증상이 심한 사람들부터 돌봐 줘!”
“하지만 마나가···.”
마나가 거의 바닥났다는 말을 하기 위해 릴리를 따라나서던 안나는, 벙커 밖에서 싸우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모두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단 하나의 괴물도 벙커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기 위해, 동료들은 사방에 흩어져서 괴물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힘들다고 투정을 부릴 때가 아니야.’
입술을 질끈 깨문 안나는 릴리의 등을 향해 외쳤다.
“다녀와! 환자들은 내가 어떻게든 진정시켜 볼게!”
“응! 고마워!”
돌아선 안나는 주변에서 마나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마나가 부족해지면 채우면 된다.
그 과정을 평소보다 몇 배, 아니 몇십 배 빠르게 해내면 된다!
-스르르륵···!
간절한 의지에 따라 주변의 마나가 안나에게 모여들었다. 급박해진 환경이 소녀의 재능을 더욱 빠르게 개화시켰다.
“흑흑···.”
“아파아···.”
안나는 환자들 중 울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걸어갔다.
자신보다 어린 아이들이, 온몸에 종기가 피어난 모습으로 엉엉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은 판데모니움에서 죽어간 친구들을 떠올리게 했다.
‘내가 구할 거야!’
몸 안에 스며든 마력을 자신의 것으로 치환하고, 그것을 다시 치료마법으로 변환한다.
마음먹은 순간 그 과정이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파아아앗-!
안나의 손에서 뻗어나간 빛이 아이들을 어루만졌다.
잠시 후, 고통이 한결 가신 아이들은 멍한 표정으로 안나를 바라봤다.
“아···.”
“고맙습니다···.”
“······.”
안나는 겁에 질린 아이들을 진정시킬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머릿속에 릴리가 방금 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
‘착한 사람은 세 보여야 한다고 했지. 착한 일은 기선제압이라고. 그렇다면···.’
“어이.”
뭔가를 결심한 안나는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 불량스럽게 미간을 구기고, 한껏 건들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니들 죽고 싶어? 자꾸 징징대면 콱 괴물들한테 던져 버린다?”
“히끅!”
“죄, 죄송합니다!”
기선제압이 통한 것을 확인한 안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릴리 말이 맞았어!’
···배운 것을 심각하게 잘못 응용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걸 지적해줄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어쨌거나 아이들은 울음을 뚝 그쳤고, 다른 환자들도 놀라서 얌전해졌다.
자신감을 얻은 안나의 목소리가 더 걸걸해졌다.
“크크크. 다들 죽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줄 서서 내게 얌전히 치료나 받으라고!”
소녀는 악당처럼 웃으며 파랗게 질린 환자들을 정성스레 치료하기 시작했다.
***
털썩.
바닥에 드러누운 소신한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온몸은 찢기고 베인 상처로 가득했다.
“하아··· 하아···. 바깥에 있던 환자들은···. 어떻게든 다 구한 것 같아···.”
전투력은 일행 중에서 가장 떨어지는 소신한이지만, 개성 를 사용해 뛰어난 기동력과 후각으로 환자들을 구출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괴물들은 여전히 벙커를 포위한 상태로 물러나 있습니다. 당장 들이닥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바깥을 정찰하고 온 게롤드가 말했다.
그 역시 소신한 만큼이나 여기저기 긁히고 쓸린 모습이었다.
게롤드가 특유의 무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대규모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대형을 짜려 듯 보입니다. 놈들의 움직임이 점점 체계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마치 지능이 생긴 것처럼···.”
“그런···.”
일행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괴물들을 침입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후우···. 아직 버틸 만해요.”
특히 웬디의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더 창백했다.
벙커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광범위하게 얼음 장벽을 두르고 유지한 탓이었다.
“아무리 죽여도 몬스터가 계속 나와.”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벅차.”
“환자들을 수용할 공간도 점점 줄어들고 있고···.”
바깥에서 적들이 대형을 갖추는 동안, 일행은 잠깐 짬을 내서 회의를 계속했다.
“놈들을 더 효과적으로 상대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시간제한이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몬스터가 무제한으로 쏟아진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분명 공략법이 있을 텐데···.”
하지만 전부 비관적인 전망뿐.
적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고, 돌봐야 할 환자는 계속 늘어만 간다.
심지어 벙커에 환자들을 수용할 공간마저 부족해져 가는 상황.
“······.”
다들 각자의 의견을 이야기할 때, 릴리는 벙커 바깥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릴리가 입을 열었다.
“혹시 나 없어도 버틸 수 있겠어?”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일행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웬디가 대표로 물었다.
“너 없이? 혼자서 뭘 하려고?”
“저기.”
릴리는 손가락을 들어 한 지점을 가리켰다.
짙은 안개 너머로 보이는 뾰족한 탑.
벙커로 오기 전에 다녀온, 이 전염병의 원인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장소였다.
“저기에 괴물들을 모두 없앨 방법이 있을 거야. 하지만···.”
릴리는 말끝을 흐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벙커 안을 가득 채운 환자들.
이 사람들을 데리고 탑으로 갈 수는 없었다.
즉, 누군가는 이곳에 남아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
릴리는 차마 동료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없었다.
“아니면···. 내가 혼자서 여길 지킬 테니까 넷이서 저기 다녀올래?”
차라리 효율이 떨어지더라도, 자신이 더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낫다고 릴리는 생각했다.
“······.”
릴리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일행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웬디였다.
한숨을 내쉰 웬디가 릴리에게 걸어왔다.
-따악!
“아얏!”
릴리의 이마에 꿀밤을 먹인 웬디가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우릴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너 하나 없다고 여기 하나 못 지킬 것 같아?”
“그게 아니구···.”
그 옆에서는 안나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환자들은 이제 나 없으면 안 되거든? 넌 치료마법도 못 쓰잖아.”
“그건 그렇지만···.”
두 소녀의 뒤에서 게롤드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곳은 저희만으로 충분합니다.”
마지막으로, 소신한이 다가와 릴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우린 그렇게 약하지 않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사람들을 지키고 있을게.”
“제일 약한 주제에···. 아저씨가 제일 걱정이거든요?”
“···크흠흠!”
묵직한 팩트 폭행에 소신한은 헛기침을 했다. 두 소녀가 그 모습을 보고 킥킥 웃었다.
“···크흠. 어쨌든 우리 중 누군가가 저 탑을 조사하러 가야 한다면 그건 릴리 너야. 가장 강하기도 하고, 이해는 안 되지만 가장 경험도 많은 것 같으니까. 그리고···.”
소신한은 고개를 돌려 모두와 시선을 맞췄다.
언제 봐도 괴상한 조합이지만, 이제는 서로가 더없이 믿음직스러운 동료였다.
그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한번 마음먹은 이상, 우린 절대 이곳을 포기하지 않아.”
소곤소곤.
“저 아저씨 느끼한 말 엄청 잘하지 않아?”
“누가 보면 엄청 강한 줄 알겠어. 말만 들으면 아주 임대인이야.”
“아저씨는 저런 느끼한 말 싫어해.”
“크흐음! 분위기 잡는데 초치지 좀 마라!”
그러나 세 소녀는 소신한을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얼굴이 새빨개진 소신한은 정찰이나 하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덕분에 릴리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모두 고마워! 그럼 금방 다녀올게요!”
곧바로 벙커 밖으로 나온 릴리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배경이 휙휙 뒤로 밀려났다.
-크르르르르!
-크워어어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괴물들이 소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놈들이 뻗은 손은 허공만을 건드렸다.
-퍼억! 퍽!
릴리는 괴물들의 머리를 밟아 터트리며 주변 건물로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인근에서 가장 높은 빌딩의 옥상까지 올라간 후, 릴리는 그곳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촤르르르륵!
추락하던 소녀의 등에서 나비 모양의 불꽃 날개가 펼쳐졌다.
날개를 활짝 편 릴리는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목적지인 탑을 향해 날아갔다.
‘저 탑 안에 도시를 구할 방법이 있을 거야!’
등 뒤에서는 이미 괴물들이 벙커를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릴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저곳에 남아 있는 친구들을 믿었으니까.
잠시 후, 안개가 걷히고 탑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전진이 막혔다.
[접근 불가 구역입니다. 선행 조건을 달성한 후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똑같은 메시지···.”
릴리는 손에 닿는 투명한 결계를 더듬으며 그 강도를 가늠해 보았다.
선행조건?
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두 번은 안 봐줘! 천마권법 오의(奧義)···.”
-콰콰콰콰콰콰콰!
릴리의 몸을 중심으로 몰아치는 막대한 내공.
작은 주먹에 무시무시한 힘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순간, 마치 릴리의 공격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투명한 막이 더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키이이이이잉!
당황한 릴리의 눈동자가 확 커졌다.
‘이러면 천마권법으로 못 부술 것 같은데···.’
릴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WHA의 심처에서 대인이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라면을 먹고 있던 대인이 화면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꼬맹이. 너도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좀 알아야 돼. 주먹질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줄 알아?”
“자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크흐흐흐···.”
“···그냥 괴롭히고 싶은 거였군.”
이유야 어쨌든, 대인에겐 릴리가 부술 수 없을 정도로 결계를 강화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가 흔히 자식의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듯, 대인도 릴리의 능력을 전부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순간 릴리는 과거에 누군가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 할애비가 새로 무공을 하나 창안했는데 말이다.
-무공이요?
-클클. 심심풀이로 천마신공에 네 힘을 최대한 실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봤단다. 화염신공의 요결을 섞고, 용제에게도 조언을 구했지. 어떠냐? 한번 배워 볼 테냐?
-네! 배울래요!
-클클. 좋다. 대신 대인이 놈한테는 비밀이다?
-왜요?
-숨겨 뒀다가 나중에 놀라게 해주는 게 더 재미있지 않겠느냐? 클클클!
예전에 천마 할아버지가 아저씨에겐 비밀이라며 알려준 초식!
그걸 떠올린 릴리는 망설이지 않고 주먹에 그 힘을 실었다.
“하아압-!”
화르르르르륵!
막대한 내공이 모여드는 주먹 위로 불꽃이 더해졌다.
불꽃은 천마신공의 내공과 절묘하게 뒤섞이기 시작해, 이내 한 마리의 화룡처럼 꿈틀댔다.
천무극은 이 초식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천마광염무(天魔狂炎舞)!”
파멸적인 힘을 담긴 주먹이, 탑을 보호하던 결계를 일격에 부숴버렸다.
-콰콰콰콰콰콰쾅!
결계가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대인은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