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38
38화 친구의 친구
놀란 요정들이 짧은 팔을 파닥거리며 동굴 안을 날아다녔다.
게다가 시끄럽기까지 했다.
[밧줄을 풀었닷! 밧줄을 풀었닷!] [화나 보인닷! 우릴 죽일 거닷!] [도망쳐야 한닷! 빨리 도망쳐랏!]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안 그래도 방금 깨어나서 머리 아픈데, 이것들 때문에 정신 사나워 죽겠다.
“···안 죽일 테니까 가만히들 좀 있어라.”
[[으아아아앗! 또 말했닷!]]잠시 후, 벽 뒤편에 숨은 요정들은 고개만 빼꼼 내밀어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 중에 어쩌다 대표로 선정된 건지, 유독 통통한 요정 하나가 내게로 조심조심 날아왔다.
녀석은 “왁!” 하고 소리치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 소심한 녀석들에게 당해 이곳으로 끌려오다니.
내 자신이 한심해서 살짝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아. 안 죽인다니까.”
내가 두 손바닥을 펼쳐 앞으로 내밀자, 통통한 요정이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지, 진짜냣?!]“그래. 날 동굴 안으로 끌고 온건 괘씸하긴 하지만···.”
[그, 그건 미안하닷! 침입자인 줄 알고 그랬닷!]통통한 요정은 짧은 팔을 열심히 파닥거리며 말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 녀석들은 노스탤 대륙에 사는 요정이다.
노스탤 대륙은 동화대륙이라고도 불리는데, 요정과 신비한 동식물, 아름다운 대자연이 어우러진 말 그대로 동화 같은 세계였다.
게이트 여행이 보편화된 이후에는, 여행지로도 많이들 놀러가는 곳이었다.
나는 예전에 그곳에서 가이드 겸 보디가드 일을 몇 달 한 적이 있었다. 보수는 짜도 위험한 일은 딱히 없어서 편했는데···.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니들 이름이···. 눈눈이, 맞지?”
지구의 발음으로 말하면 웃기긴 하지만, 노스탤 대륙어로는 ‘신성한 물방울’이라는 뜻이다. 이 녀석들은 주로 깨끗한 호수나 강에 사는 요정이었다.
기본적으로 착하고 순진한 종족이다.
[우리를 아낫?!]통통한 눈눈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질문이 쏟아졌다.
[노스탤 대륙 출신인갓! 내 말은 어떻게 알아듣는 거냣!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냣!]“그쪽 출신은 아니야. 난 이쪽 차원 출신이고, 너네 말은 돈 벌려고···. 잠깐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내가 무슨 죄 지었냐? 이것들이 사람을 납치해놓고 취조를 하고 있네.”
내가 노려보자 통통한 눈눈이는 기가 죽어서 목을 움츠렸다.
“알면 됐고.”
이제 대화의 주도권은 내게로 넘어왔다.
나는 동굴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니들이야말로 왜 이곳에 있는 거야?”
과거에 이곳에서 요정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알았다면 당연히 미리 대비하고 왔을 것이다.
내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통통한 눈눈이가 울먹이며 자신들의 기구한 사연을 쏟아냈다.
[우, 우리는···!]그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면,
퍼스트 게이트 때 발생한 차원왜곡이 노스탤 대륙에 있던 호수를 통째로 이곳으로 옮겼고, 그때 호수에 살던 이 녀석들도 함께 넘어왔다.
그 후 여러 차원이 열리고 겹치면서 나타난 몬스터들이 호수에서 살던 동족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눈눈이들에겐 재앙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날들이었고…
[우리는 계속 도망치다가 결국 이곳에 숨었닷···.]통통한 눈눈이는 뒤쪽에 있는 동족들을 돌아봤다.
10명도 안 되는 눈눈이들이 하나같이 훌쩍거리고 있었다.
통통한 눈눈이가 작은 주먹을 말아 쥐며 외쳤다.
[여기 있는 동족들 말고는 전부 잡아 먹혔닷! 그 문어 괴물이 가장 많이 우릴 잡아 먹었닷! 언젠가 꼭 복수할 거닷!]문어 괴물이라는 걸 보니, 아마도 백창수가 때려잡은 크라켄을 말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 밖에서 큰 마나 반응이 있었닷! 무슨 일인지 궁금했는데 동굴 밖으로 나가는 건 너무 무서웠닷···.]너 방금 전에 복수한다고 하지 않았냐.
[그래서 이렇게 친구 집에서 숨어서 살고 있닷···.]“그래. 힘들었겠네.”
나는 계속되는 통통한 눈눈이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동굴 내부를 둘러봤다.
동굴 곳곳에서 마법으로 가공된 힘이 느껴졌다. 동굴 입구가 보이지 않는걸 보니, 어딘가 중간쯤으로 데려온 듯했다.
···혼자서 나가는 건 어렵겠는데.
어디인지도 모를 곳에서 출구를 찾는다는 건 미로를 헤매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이곳에 사는 ‘괴물’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답도 없고 말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통통한 눈눈이를 바라봤다. 녀석은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신세한탄을 하는 중이었다.
[우린 이제 미래가 없닷···. 햇볕을 못 쬐서 점점 약해진닷···. 결국 다 죽을 거닷···.]“흐음.”
대충 알 것 같았다.
이 녀석들은 얼마 못 가서 모두 죽었을 것이고, 시기상 초인들이 이곳을 찾은 건 그 이후였을 것이다.
아니면 초인들이 이 녀석들을 몬스터라고 생각하고 그냥 죽였을 수도 있다.
나처럼 말이 통하는 게 아니니까.
어느 쪽이든, 이 요정들은 내가 아는 역사에는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녀석들의 은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문어괴물은 죽었어.”
내 말에, 벽 뒤에 숨어서 우릴 훔쳐보던 눈눈이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나는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의심스러우면 확인해 보던가.
이 요정들에겐 거짓말을 판별하는 능력이 있었다.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상대가 마음을 열면 그 말의 진위여부를 가릴 수 있었다.
통통한 눈눈이가 다가와서 내 손바닥 위에 꼬리를 살포시 올렸다.
[다시 말해랏!]나는 다시 말했다.
“문어 괴물은 죽었어. 내가 녀석을 죽이려고 계획을 짰는데, 아까 죽었지.”
난 정확히 사실만을 말했다. 내가 죽였다고는 안했으니까.
당연히 요정꼬리 거짓말 탐지기에 걸릴 이유가 없었다.
잠시 후 통통한 눈눈이의 파란색 꼬리가 초록색으로 빛났다.
해석하면 이런 뜻이었다.
[[진짜다앗-!!]]벽 뒤에 숨어 있던 눈눈이들이 전부 내게로 날아오더니, 나를 가운데 두고 빙글빙글 날아다니며 춤을 췄다.
[고맙닷! 고맙닷!] [우리의 원수를 갚아줬닷!] [이제부터 우린 친구닷!] [[친구닷-!!]]그렇게 난 요정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통통한 눈눈이의 표정은 금세 다시 어두워졌다.
[하지만 밖에는 문어 외에도 괴물이 많닷. 나가면 잡아 먹히는 건 똑같닷···.]일동 시무룩해지는 눈눈이들. 감정기복이 무슨 롤러코스터 수준이었다.
내게는 이 상황이 나쁠 것 없지만 말이다.
“내가 지켜줄게. 나랑 함께 여기서 나가자.”
내 말에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눈눈이들.
통통한 녀석이 대표로 물었다.
[어, 어째섯?]“그야···.”
나는 순진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는 요정들을 한번 둘러봤다.
에메랄드 빛 호수 위를 날아다니는 작고 귀여운 요정들.
그 모습을 떠올리자 그림이 나왔다.
꿈과 희망, 호수와 요정, 관광객과 돈이 모이는 장소.
눈눈이 테마파크라는 그림이.
몇 년 만 지나면 이거 대박이다.
“···친구잖아?”
내 한마디에 눈눈이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친구닷-!!]]그리고 다시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였다.
나는 다시 아파올 것만 같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친구들. 정신 사나우니까 그만 좀 돌지?”
*
*
*
나는 친구가 된 통통한 눈눈이와 함께 동굴 안을 걷고 있었다.
통통한 눈눈이는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대인! 정말 고맙닷! 이제 다시 햇볕을 쬐러 나갈 수 있닷! 네 덕분이닷!]“친구끼리 뭘 그런 걸 가지고.”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동굴 안의 지형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동굴 밖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마 저녁 먹을 시간은 훨씬 지났을 것이다.
지금쯤 배고픈 꼬맹이가 잔뜩 신경질을 부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만 서두르자.”
[알았닷!]내 원래 목적은 이 동굴에 있는 ‘이계의 힘’을 얻는 것이었다.
이곳에 있는 이계의 힘을 얻어야, 첫 번째 재앙에 대처하기가 훨씬 수월해질 테니까.
하지만 이계의 힘 곁에는 그것을 지키는 강력한 가디언이 있고, 나 혼자서 그걸 상대하는 건 버거웠다.
그래서 오늘은 위치만 확인하고 돌아가려고 했던 건데···.
[저긴 함정이닷! 밟지 마랏!]나는 눈눈이가 말해준 곳을 훌쩍 뛰어넘었다. 돌아서서 그곳에 돌을 던지자, 바닥에서 쇠꼬챙이 수십 개가 튀어나왔다.
···혼자 왔으면 고생 꽤나 할 뻔했네.
통통한 눈눈이가 신이 난 얼굴로 외쳤다.
[이제 거의 다 왔닷!]일단 오늘은 눈눈이들이랑 같이 돌아가고, 이곳엔 며칠 후에 다시 올 생각이었다.
눈으로 지형이나 좀 익혀두고 말이다.
그때 통통한 눈눈이가 말했다.
[잠깐 친구에게 인사만 하고 갈 거닷!]“친구? 친구가 또 있어?”
[그렇닷! 우리를 이곳에서 살게 해준 고마운 친구닷! 다른 동족들은 먼저 인사하러 가 있닷!]그러고 보니 이 녀석. 아까부터 친구가 어쩌고 했었다.
친구 만드는 거 진짜 좋아하나보네.
통통한 눈눈이가 친구자랑을 늘어놨다.
[친구는 엄청 크고! 강하고! 착하다! 문어괴물도 친구 때문에 여기는 못 쳐들어 온 거닷!]···어째 들을수록 스멀스멀 불안한 기운이 올라오는 설명이었다.
나는 설마 하는 생각에 말했다.
“그 친구 혹시 이렇게 생겼냐? 키는 내 두 배 정도 되고···.”
내가 아는 괴물의 모습을 설명해주자, 통통한 눈눈이가 짧은 두 팔을 힘차게 파닥거렸다.
[맞닷! 우리 친구닷!]“······.”
이 녀석들이 말하는 ‘친구’는 아무래도 이 동굴을 지키는 가디언인 모양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해도, 친구의 친구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은 제발 좀 그냥 집에 가자.
“작별인사는 니들끼리 하고 와. 난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통통한 눈눈이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왔는뎃?!]그 순간 내 옆의 벽이 좌우로 갈라졌다.
쿠구구구구궁!
드러난 넓은 공간 안에는, 먼저 간 눈눈이들이 거대한 ‘친구’의 몸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놀고 있었다.
[우리 왔닷!]그 친구라는 녀석이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봤다.
거대한 기계 몸에 어울리지 않게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녀석에게서 딱딱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침입자 발견. 시련 구역 봉쇄.]쿵쿵쿵쿵쿵!
내 등 뒤로 벽이 내려오면서 퇴로가 봉쇄됐다.
가디언은 대략 4미터 규격의 아이언 골렘으로,
상당히 수준 높은 기술로 만들어진 녀석이었다.
20년 후에 만들어진 로봇도 본 적 있는 내 기준으로도 말이다.
골렘의 눈이 빨간 빛으로 빛났다. 나를 스캔하는 모양이었다.
[유형 분석 완료. 제거 대상임을 확인.]동시에 골렘의 형태가 변화했다.
철컥! 철컥철컥철컥!
밋밋하던 주먹이 철퇴처럼 변하고, 팔다리가 길어지고, 등이 열리고 날개형태의 추진기가 펼쳐졌다.
이마에는 선명한 뿔이 자라났다.
[제거, 시작.]나는 달려오는 골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착한 친구 좋아하네. 생긴 건 악마구만.”
나는 오른손으로 왼손의 시계를 조작했다.
촤르르르륵!
시계의 금속이 위아래로 펼쳐지며, 왼손을 팔꿈치까지 감싸는 건틀릿 형태로 변화했다.
웬만하면 아직 안 쓰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비상상황이니까.”
벌써 골렘의 주먹이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나는 피하지 않고 주먹을 마주 휘둘렀다.
-콰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