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67
67화 오늘 하루는
두두두두두두!
문을 통과한 강철마차가 장벽 안을 질주했다. 마차 뒤편으로 흙먼지가 길게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마부석에 올라선 대장 고블린 가면, 대인이 일행들에게 외쳤다.
“다들 위치로!”
고블린 가면을 쓰고 마차 밖으로 나온 일행들이 각자 위치를 잡았다.
대인과 릴리는 마차 정면의 마부석에,
앨리나와 호킨은 마차 지붕 위에,
레너드는 검을 빼들고 마차 뒤편을 지켰다.
첫 번째 문을 부수고 벽을 통과했지만, 진짜 난관은 이제부터였다.
2중 구조로 돼 있는 국경 장벽.
그들이 통과한건 국경 안쪽에 있는 내벽뿐이었다.
바깥으로 나가는 외벽까지 거리는 약 1km.
최대한 빠르게 이 공간을 돌파해야했다.
전후좌우에서 동시에 몰려오는, 저 수많은 병력에 포위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막아라-!!”
왼손에 권총을, 오른손에 장검을 뽑아든 대인이 몰려오는 병력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벌써 소문을 들었나. 많기도 해라.”
그들을 막기 위해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기사들은 이제 막 말에 올라타고 있었고, 중간중간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저 미친놈들!”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하나같이 살기가 충천한 모습.
한번이라도 마차가 멈춘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질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
“쉿. 얌전히 있어!”
장벽을 통과 중이던 백성들이 구석으로 물러나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인 얼굴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잘 보고 소문내 달라고.”
대인은 그들을 흘끗 본 후 다시 앞을 바라봤다. 날뛰다가 가면이 떨어지지 않도록, 고블린 가면을 얼굴에 한번 더 밀착시켰다.
“그럼 쇼를 시작해 볼까?”
달려오던 병사들 중 계급이 가장 높은 자가 고함을 질렀다.
“화살을 쏴라!”
슈슈슈슉!
수많은 화살이 하늘을 그물처럼 뒤덮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화살비를 바라보며, 대인과 릴리가 동시에 외쳤다.
““실드!””
두 수호자의 팔찌가 동시에 빛났다. 반투명한 실드가 마차 윗부분을 덮었다.
팅팅팅팅팅!
실드에 튕겨 사방으로 날아가는 화살들. 그러나 저들의 공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캐스팅을 끝낸 장벽의 마법사들이 강철마차를 향해 마법을 퍼부었다.
“윈드 커터!”
“파이어 볼!”
“아이스 스피어!”
마차를 향해 날아오는 형형색색의 마법들.
그 모든 마법을 실드만 가지고 막기에는 무리였다.
힉스 공국의 전 궁정마법사가 실력을 발휘한 것은 그때였다.
“마법은 제가 막겠습니다!”
마차 지붕 위에 선 호킨이 마법지팡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마법 지팡이 머리에 장식된 에메랄드가 눈부신 녹색 빛을 토해냈다.
“리플렉트 실드!”
키이이잉-!
은빛의 방패들이 마차의 전후좌우에 생성됐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방패들이 날아온 마법들을 하늘로 튕겨 올렸다.
퍼엉! 퍼버버벙!
튕겨 날아간 마법들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마치 불꽃놀이처럼 하늘이 화려한 색으로 물들었다.
마법사들이 경악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리플렉트 실드라고?!”
“저건 5써클 마법인데···.”
“도대체 저기 누가 타고 있는 건가!”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호킨의 입에서 쉴 새 없이 주문이 흘러나왔고, 그의 마법 지팡이가 다시 눈부신 빛을 쏟아냈다.
“윈드스톰!”
콰콰콰콰콰콰!
폭풍이 마차의 정면을 휩쓸었다. 달려오던 병사들이 강풍에 휩쓸려 좌우로 날아갔다.
““으아아악-!””
그렇게 열린 길로 강철마차가 빠져나갔다.
대인이 의외라는 얼굴로 호킨을 돌아봤다.
“생각보다 제법인데?”
아직 서른도 안 된 녀석이 5써클이라니. 상당한 재능이었다.
지금껏 잡일꾼으로 취급 받았던 호킨이 그간의 설움이 북받친 듯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저도 어릴 때부터 천재소리를 듣고 자란 몸입니다! 마법지팡이만 진작 있었으면···!”
누가 뭐랬나.
대인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긴장해. 계속 온다.”
병사들이 약간이나마 시간을 번 동안, 말에 올라탄 기사들이 마차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기사들은 영리했다. 그들은 정면에서만 덤벼들지 않았다.
“적에 마법사가 있다. 산개해 공격하라!”
선두에서 달려오는 기사의 외침에, 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국경장벽을 지키는 흑사자기사단.
그들은 힉스 공국 최강의 전력이자, 소드마스터 골칸 백작이 직접 단련시킨 기사들이었다.
그 저력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었다.
대인이 몸을 풀며 말했다.
“정면과 좌우는 내가 맡는다. 꼬맹이랑 호킨은 원거리 공격을 막고, 공주님은 두 사람 보호해. 그리고···.”
대인은 보이지 않는 마차 뒤편을 향해 외쳤다.
“노인장! 혼자서 뒤쪽 맡을 수 있겠어?”
대인의 질문에, 노기사 레너드가 두 눈에서 불꽃을 쏟아내며 외쳤다.
“맡겨주게! 목숨을 걸고 사수할 테니!”
대인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그럴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잠시 후, 흑사자기사단이 강철마차에 들이닥쳤다.
타앙!
싸움의 시작을 알린 것은 천둥 같은 총성이었다. 대인은 제우스의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탕탕탕탕!
총알은 기사들이 아닌 그들이 타고 있는 말을 노렸다.
선두에서 달려오던 말들이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히히히힝!
균형을 잃은 기사들은 낙마하거나 낙마하기 전에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열린 틈으로 또 다시 강철마차가 빠져나갔다.
그러나 대인이 총구를 겨눌 수 있는 위치는 정면과 좌우뿐.
뒤로 돌아서 온 기사들은 온전히 마차 뒤쪽에 달라붙었다.
“마차 바퀴를 부숴라!”
한 기사의 외침에, 몇몇 기사들이 일제히 창검을 들어 마차 뒷바퀴를 노렸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까가강!
기사들의 창을 쳐낸 레너드가 성난 사자처럼 포효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뜻대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레너드 경.
한때는 공국의 영웅으로 불렸던,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까지 도달했던 기사.
비록 지금은 늙고 초라해졌지만, 그 경험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레너드가 모든 마력을 쥐어짜내며 스스로를 윽박질렀다.
“늙은 육신아! 오늘만, 아니 단 몇 분만 버텨라!”
그의 검 위로 불길처럼 거친 오러가 흐르기 시작했다. 쇠약해진 육체에 곧바로 무리가 찾아왔지만, 노기사는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흐라아압!”
까가가가강!
격렬하게 부딪치는 쇳소리.
대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레너드가 무리하고 있음을 눈치 챘다.
“···빨리 가야겠네.”
그 순간, 대인의 오른손에 들린 마검 샬리트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우우우우웅!
그 광경을 목격한 기사들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오러 블레이드!”
“소드마스터다!”
그러나 이미 대처하기에는 늦은 상황.
대인은 마부석에서 달리는 철마의 등 위로 자리를 옮기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검과 검, 검과 창이 부딪칠 때마다 기사들의 무기가 잘려나갔다.
똑같이 무기에 마나를 주입해도, 오러 블레이드와 오러 블레이드가 아닌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흑기사기사단의 베테랑 기사들도 대인의 검을 3합 이상 버티지 못했다.
대인의 왼손에 들린 제우스도 보조무기로 훌륭하게 활약했다.
총구가 천둥을 토해낼 때마다,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말 위에서 고꾸라졌다.
“크아악!”
“빌어먹을!”
그야말로 압도적인 모습.
대인은 양떼에 뛰어든 사자처럼 검을 휘두르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 사이 다른 일행들도 모두 제 몫을 해냈다.
“리플렉트 실드! 윈드스톰!”
호킨은 마법지팡이의 보석에 금이 갈 정도로 마법을 사용했으며,
공주는 호킨의 옆에 서서 그에게 날아오는 화살과 기사들의 공격을 막아냈고,
“흐라아아압!”
레너드는 피를 토하면서도 계속 검을 휘둘렀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화살과 마법도, 흑사자기사단도 강철마차의 질주를 멈추지는 못했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대인이 정면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거의 다 왔다!”
바깥 장벽이 성큼 가까워져 있었다.
안쪽 장벽의 문보다 훨씬 두꺼운 문이 굳게 닫혀 있었지만, 그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저걸 부수려고, 릴리가 아까부터 힘을 모으고 있었으니까.
“꼬맹이. 준비 됐어?”
“쪼금만 더!”
릴리의 두 손안에 주먹보다 조금 더 큰 불꽃이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화르르륵!!!
커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무수히 성장과 압축을 반복한 불꽃은, 붉다 못해 하얗게 백열하고 있었다.
“다 됐어!”
“좋아. 내가 신호하면 문에다 던져.”
이제 잠시 후면, 일행은 장벽을 통과해서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때였다.
“······!!”
대인은 온 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느낌에 위를 올려봤다.
하늘을 세로로 찢어발기며 검은 벼락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대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여기서 막으면 마차가 뒤집어진다.’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대인은 마차를 박차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멈추지 말고 장벽 밖으로 가!”
“아저씨?!”
자신을 소리쳐 부르는 릴리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대인은 하늘로 뛰어오르며 아래에서 위로 검을 휘둘렀다.
―까아아아앙!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대인은 바닥에 처박히다시피 지상에 내리 꽂혔다.
콰앙!
간신히 두 발로 바닥에 서긴 했지만, 발목까지 땅에 박혀들었다.
온 몸의 뼈가 찌르르 울리는 느낌에 대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큭. 무슨 힘이···.”
“놀랍군. 그걸 막고도 멀쩡하다니.”
그의 앞에는, 흑색갑주로 전신을 감싼 거구의 사내가 서 있었다.
2미터에 이르는 거구. 그보다 더 긴 대검.
골칸이 사자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너는 ‘진짜’ 로군.”
그 뜨거운 시선이 대인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크지는 않지만 완벽하게 균형 잡힌 근육, 대충 늘어뜨린 듯 보이지만 빈틈을 찾기 어려운 자세.
무엇보다, 황홀한 빛을 뿜어내는 저 푸른빛의 오러 블레이드.
몸이 달아오른 골칸이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더는 못 참겠군.”
-터엉!
땅을 박찬 골칸이 힘껏 검을 휘둘렀다. 그의 대검에는 흑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길게 자라나 있었다.
반면 대인은 찝찝한 표정으로 검을 들어올렸다.
“젠장.”
그는 전생에서 저런 눈빛을 한 자들을 여럿 보았다
강해 보이는 상대만 보면 눈을 빛내고, 죽어도 좋다는 얼굴로 달려드는 전투광들.
저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만족할 때까지 상대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점과, 싸울 때 목숨을 아끼지 않아서 굉장히 성가시다는 것.
무엇보다, 대부분 굉장히 강했다.
이미 눈앞까지 짓쳐든 대검을 바라보며, 대인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는데.”
까가가가가강!
순식간에 십여 차례의 공방이 오갔다.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부서진 오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흐아아압!”
힘으로는 골칸이 대인을 압도했다. 그러나 속도는 대인이 다소 우위에 있었다.
스스슷-.
대인은 이형환위를 사용해 골칸의 옆으로 이동했다.
동시에 제우스의 총구를 상대의 관자놀이에 겨눴다.
탕탕탕탕탕-!
골칸은 상체의 움직임만으로 총알을 전부 피해냈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대인도 충분히 예상했던 부분. 대인은 상대가 총알을 피하느라 생긴 틈을 노려 검을 찔러 넣었다.
쐐애애액.
마검 샬리트가 요사스러운 기운을 뿜어내며 골칸의 허리를 노렸다.
그러나,
까앙!
대인의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막혔고, 곧바로 골칸의 반격이 이어졌다.
골칸이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얼굴로 소리쳤다.
“크하하! 몬치 그 애송이가 못 당해냈을 만하군! 네 검은 나처럼 실전에서 익힌 검술이구나!”
“······.”
대인은 쏟아지는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오른손으로 왼손의 시계를 쓰다듬었다.
상대는 지난번에 상대했던 몬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실력자.
가진 밑천을 아꼈다간 써보지도 못하고 당할 수도 있었다.
촤르르륵!
시계의 금속이 위아래로 퍼지며 순식간에 어깨까지 감쌌다.
대인은 주먹을 움켜쥐고 출력을 끌어올렸다.
우우우우웅!
출력 25%
치직, 치지직!
여기에 벽력권.
한 번도 대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던 조합이었다.
골칸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대인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또 뭘 보여줄지 기대되는군!”
대인이 씩 웃으며 말했다.
“후회 안할 걸?”
곧게 뻗은 주먹이 골칸을 향해 나아갔다. 동시에 골칸도 마력을 잔뜩 끌어올려 대검을 휘둘렀다.
-까아아아앙!!!
귀청을 찢는 폭음과 함께 마력과 마력이 부딪쳐 폭발했다.
겨우 그 여운이 가신 자리에는, 낭패한 얼굴의 두 사내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
“······.”
대인은 탈골된 왼쪽 어깨를 오른팔로 부여잡았고, 골칸은 갑옷이 넝마가 된 모습으로 부러진 대검을 지팡이 삼아 서 있었다.
스윽.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대충 닦아낸 골칸이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는군.”
대인은 혀를 찼다.
“아쉽네. 죽는 기분도 꽤 괜찮았을 텐데.”
“크흐흐흐.”
나직이 웃음을 터트린 골칸이 부러진 검을 다시 들어올렸다.
“시작을 했으니 끝을 봐야겠지?”
그러나 대인은 조용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냐.’
그는 얻은 것 하나 없이 아프고 힘들기만 한 싸움을 계속하고 싶은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슬슬 내빼자. 지금쯤이면 마차도 장벽 밖으로 나갔을 테고···.’
물론 쉽지는 않아 보였다. 골칸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고, 둘이 싸우는 사이에 흑사자기사단이 그들을 포위한 상태였으니까.
그래도 몸 하나 빼는 거야 어떻게든···.
“아저씨-!!”
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대인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대인이 뒤를 홱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꼬맹이가 하늘을 날아서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순간 대인은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먼저 가라니까 왜 다시 와!”
대인 옆에 내려선 릴리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혼자는 안 갈 껀데!”
대인은 ‘뭐 이런 게 다 있어’ 라는 표정을 지으며, 릴리의 통통한 볼을 쭉 잡아당겼다.
“이 망할 꼬맹이. 말 좀 들어라 좀.”
릴리는 ‘베에!’하고 혀를 내밀었다.
게다가 돌아 온 것은 릴리 혼자가 아니었다.
두두두두두!
“설마···.”
당연히 장벽 밖으로 빠져나갔을 거라고 생각했던 강철마차가 돌아오고 있었다.
대인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아. 기껏 먼저 가라고 시간을 벌어줬더니···.”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만큼 저들이 자신을 동료로 생각한다는···.
릴리가 그의 감동에 찬물을 끼얹었다.
“영신 오빠가 나 따라서 마차 돌렸어!”
“···그러냐. 어쩐지 이상하더라.”
대인은 괜찮으냐고 소리치며 다가오는 공주 일행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휴.”
망했다.
바깥 장벽의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사이 두꺼운 포위망이 다 완성됐다.
이제 여길 빠져나가려면, 한두 명 죽여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한숨을 내쉰 대인이 다가올 싸움에 대비해 온 몸의 마력을 끌어올릴 때였다.
“푸흐흐!”
갑자기 골칸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푸흐흐흐!”
골칸은 대인과 그 옆의 서 있는 릴리, 그리고 돌아오는 강철마차를 번갈아 바라봤다.
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골칸은 겨우 웃음을 멈췄다. 그러나 여전히 입꼬리를 피식거리며 대인에게 물었다.
“옆의 아이는 네 딸인가?”
자세히 대답하기 귀찮았던 대인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뭐, 비슷한 거다.”
릴리가 눈을 흘기며 옆구리를 꾹꾹 찔렀지만, 대인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골칸이 두 번째 질문을 했다.
“왜 아무도 죽이지 않았지?”
강철마차가 문을 부수고 장벽 안을 질주했을 때, 수많은 병력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무기가 부러지거나 다친 자들은 있어도 죽은 자는 없었다.
단 한명도.
골칸은 지금 그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죽이지 않아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대인이 작정하고 살수를 펼쳤다면, 훨씬 더 빠르게 기사들을 베고 바깥 장벽으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대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의뢰인 부탁이라서 말이야.”
“···의뢰인?”
대인은 고개를 돌려 돌아오는 마차를 가리켰다.
“저기 고블린 아가씨 보이지?”
“······.”
다들 얼굴에 고블린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체형으로 누가 여자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저 여자의 정체를 골칸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때 대인이 말을 이었다.
“나중에 다시 자기 백성이 될 거니까 되도록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서 알았다고 했지.”
순간 골칸이 미묘한,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중이라···. 제 아비보다는 배짱이 있군.”
그리고 골칸은 검을 내렸다. 투기가 완전히 사라진 모습이었다.
대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봐. 안 싸울 거야?”
“통행증을 써주겠다.”
그 말에 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잘못 들은 건가?
“갑자기 왜···.”
“그 대신 조건이 있다.”
그럼 그렇지.
대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골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헛소리를 한다면, 곧바로 검을 휘두를 생각이었다.
골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오늘 하루는 여기서 자고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