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77
77화 접선장소
“크으. 경치 죽이네.”
대인은 별장 맨 위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탁 트인 시야에 엘프의 숲이 한 눈에 들어왔다.
경치를 감상하며 엘프족 장인이 제작한 의자에 등을 기대자, 마치 구름이 등을 받쳐주는 것만 같았다.
씨익.
대인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는 테이블로 손을 뻗어 포도 한 송이를 가져와 먹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내 버킷리스트 하나가 채워지네.”
은혜를 갚겠다고 나선 수많은 엘프들이 도와준 덕분에, 며칠 만에 별장이 완성되었다.
엘프족 특유의 양식으로 만들어진 별장은 3층 높이에, 재료는 무려 죽은 신목의 가지가 사용되었다.
듣기로는 여섯 가문의 가주들 집에서나 사용되는 재료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은은한 향이 별장 전체에 흐르고 있었다.
대인은 아직은 좀 휑한 별장 내부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다음에 올 땐 안에 인테리어도 꾸미고, 놀 것도 잔뜩 가져와야지.”
이제 막 별장이 완성됐지만, 아쉽게도 이곳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었다.
이미 예정보다 엘프의 숲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 여기서 나간 후에도 이것저것 할 일이 많은데 말이다.
대인은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이미 한 달 안에 돌아가긴 틀린 것 같고···. 모드레아. 음료수 좀 채워줘.”
대인이 빈 잔을 가리키자, 뒤편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던 모드레아가 주전자를 들어 잔에 음료를 채웠다.
모드레아는 긴 흑발을 뒤로 넘겨서 하나로 묶은 모습이었다. 의상은 검은색 셔츠와 바지. 무표정한 얼굴에서 나오는 차가운 분위기가 의상과 퍽 어울렸다
“······.”
할 일을 끝낸 인형은 다시 주인의 뒤로 물러나서 대기했다.
처음에는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좀 부담스러웠지만, 이제는 이 ‘만능인형’ 이 없으면 안 될 정도로 편했다.
‘아직은 명령어 입력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학습능력이 있는 최고급 마법인형이니,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
그때 별장 아래에서 대인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얼굴과 손에 검정 페인트를 잔뜩 묻힌 릴리가 아래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색칠 다 했어!”
소녀는 건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통통했던 볼은 조금 야위었지만, 얼굴은 며칠 전보다 훨씬 더 밝아졌다.
지저분한 릴리의 얼굴을 본 대인이 혀를 찼다.
“으휴.”
퇴원하고 심심해하는 것 같아서 작은 임무를 하나 맡겼더니, 꼭 저렇게 티를 낸다.
“다했으면 얼굴이나 씻고 와! 그러고 갈 거야?”
“얼굴? 앗, 이거 뭐야!”
거울로 얼굴을 확인한 릴리가 샘이 있는 곳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하여튼 칠칠맞기는.”
대인은 일어나서 창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창가에서 휙 뛰어내리자 모드레아도 뒤따라 뛰어내렸다.
탓.
가뿐하게 바닥에 착지한 대인은 강철마차가 있는 곳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강철마차는 형태가 바뀌어 있었다. 화려했던 외향은 평범하게 바뀌었고, 마차 전체를 검은색으로 도색했다.
마찬가지로 철마-아이언 골렘-도 거대한 흑마로 변해 있었다.
대인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렇게 보니까 완전히 몰라보겠네.”
방금 전까지 릴리가 하던 일이 바로 마차와 철마를 검게 페인트칠한 것이었다.
철마에 붙어서 마무리 칠을 하던 장영신이 대인을 발견하고 말했다.
“···릴리는요? 아까 아저씨 찾으러 갔는데.”
“꼬맹이는 얼굴 씻으러 갔다. 너도 그만하고 출발하기 전에 좀 씻고 와.”
릴리만큼은 아니지만, 장영신의 얼굴에도 꽤나 검댕이 많이 묻어 있었다.
장영신이 작업복 외투를 벗으며 물었다.
“어디로 갔는데요?”
대인은 손가락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아마 정화의 샘으로 갔을 거다.”
대답도 않고 쪼르르 달려가는 장영신의 뒷모습을 보며, 대인은 피식 웃었다.
“저렇게 좋을까.”
오늘은 대인 일행이 엘프의 숲을 떠나는 날이었다.
그래서 마차의 형태도 바꾸고 색도 검게 칠했다. 강철마차는 힉스 왕국에서 너무 노출됐기 때문이었다.
그때 다른 한쪽에서는,
“더 싣게!”
아침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 대인 일행이 오늘 떠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벌어진 일이었다.
“아직 더 실을 수 있다! 더 높게 쌓아서 꽉 묶으면 돼!”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은 이제는 중년의 기사가 된 레너드였다. 그는 이미 용량을 초과한 짐마차에 어떻게든 물건을 더 실으려 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그쪽으로 하면 기웁니다! 수학적으로 접근해야···.”
그 옆에서는 호킨이 잔소리를 해가며 짐을 탑처럼 쌓고 있었다.
“차라리 마차를 한 대 더 구하는게 낫지 않을까?”
앨리나 공주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이미 짐마차보다 더 높아진 짐을 올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을 대장로와 엘프들이 오가며 선물을 계속 가져오고 있었다.
“이건 말린 과일입니다.”
“가문의 전통주입니다.”
“정령석을 좀 챙겨왔습니다.”
“제가 가장 아끼는 예쁜 돌을 가져 왔습니다!”
짐마차에 엘프들이 가져온 선물이 한도 끝도 없이 쌓여가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대인이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이걸 다 어떻게 가져가란 거야?”
아무리 공짜를 좋아하고 선물을 좋아해도 정도가 있었다.
강철마차에도 모자라서, 두 대나 되는 짐마차에 이렇게 선물을 가득 싣고 여행을 할 수는 없었다.
대인이 한숨을 내쉬며 엘프들을 둘러봤다.
그들은 은인이자 친구인 대인에게 주려고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있었다.
대인은 황당해서 헛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이런 인심 좋은 엘프들을 봤나.’
“여러분. 선물은 고맙지만 다 갖고 가기엔 너무 많네요. 적당히 덜어내고, 나머지는 다음에 와서 받아갈게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엘프들을 뒤로하고, 대인은 짐마차의 짐을 반으로 덜어냈다. 사실 그것도 많았다.
잠시 후, 온갖 선물을 실은 짐마차 2대를 흑색마차 뒤에 연결해서 3단 마차로 만들었다.
겨우 떠날 준비를 마친 대인이 마부석에 올라탔다.
“휴우. 이제야 겨우 떠날 수 있겠네.”
공주 일행이 그들을 산맥 아래까지 배웅했다.
레너드는 대인의 손을 꼭 잡으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고,
“꼭 다시 만나세. 그땐 반드시 오늘 입은 은혜를 갚고 말테니.”
이유는 도통 모르겠지만, 호킨은 눈물을 글썽이며 다짐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뵐 땐 더 훌륭한 마법사가 되어 있겠습니다!”
앨리나는 릴리와 장영신을 한번 씩 꼭 안아주고는, 잠시 릴리와 귓속말을 나누었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대인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1년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 잊지 말기를 바라오.”
앨리나의 말투가 조금 바뀌었지만, 대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오글거리는 닭살을 열심히 긁어댈 뿐이었다.
“하여튼 셋 다 끝까지 진지하긴. 별것도 아닌 걸로.”
마지막으로 대장로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언제라도 다시 찾아와 주시길. 당신은 우리의 친구니까요.”
별장까지 지어줬는데 당연히 다시 올 생각이었다. 다음에는 더 오래 머물면서, 느긋하게 놀다가 갈 계획이었다.
대인이 씩 웃으며 말했다.
“고마웠어. 여러모로.”
“그리고 이 여행의 끝에서···.”
대장로는 전날 대인에게 해준 말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꼭 그를 만나 원하는 답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아브락사스.
대장로는 여행의 끝에서 그가 대인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어느새 마차는 중앙산맥을 다 내려왔다.
“그럼 갈게. 들어들 가.”
대인은 짧은 인사를 했다. 낯간지러운 작별인사는 성격상 못하겠고, 딱히 더 할 말도 없었다.
앨리나. 레너드. 호킨.
세 사람의 얼굴을 슥 둘러본 대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고생들 했어. 나중에 다시 보자고. 이랴아!”
선물을 잔뜩 실은 흑색마차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빠이바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아이들이 손을 흔들었다. 그 자리에 남은 세 사람은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흑색마차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다가, 이내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세 사람은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야 앨리나가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자.”
훗날 새로운 힉스 왕국의 전설이 될 기사와 마법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
*
*
중앙산맥에서 내려온 흑색마차는 테루 왕국의 국경으로 향했다.
테루 왕국의 국경초소.
초소를 지키던 병사들은 멀리서 다가오는 흑색마차를 발견하고 시선을 교환했다.
“저거 상인마차 같지?”
“척보면 척이지.”
겨우 말 한 마리가 이끄는-말이 좀 비정상적으로 크긴 하지만-3단 마차였다. 형태는 평범했고, 색깔은 칙칙한 검은색이었다.
상인. 그것도 별 볼일 없는 상인의 마차가 분명했다.
병사들이 앞으로 나서며 거만하게 외쳤다.
“정지-!”
흑색마차가 속도를 줄이며 다가왔다. 병사들은 말을 몰아 마차로 접근했다.
마부는 평범한 옷을 입은, 금발머리의 젊은 사내였다.
그 순간 짧게 눈빛을 교환한 병사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그들은 오늘밤에는 술 한 잔 찐하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병사들이 마부에게 다가갔다.
“어디서 오는 마차야? 통행증은 가지고 있냐?”
“젠장. 무슨 짐이 이렇게 많아? 수색하는데 사흘은 걸리겠네.”
병사들은 처음부터 강하게 나갔다. 인상을 쓰고, 목소리를 깔고, 짐을 수색해야겠다고 을러댔다.
보통은 이렇게 적당히 겁을 주면, 상대가 알아서 잘 봐달라고 얼마라도 돈을 내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 금발머리 마부 녀석은 돈은커녕 겁도 먹지 않은 모습이었다.
대신 품에서 뭔가를 꺼내 병사들에게 내밀었다.
“자, 여기 통행증.”
‘새끼가 건방지게···.’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병사들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그 태도가 워낙 당당해 통행증을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골칸 백작.
그 이름을 감당하기에는 두 병사는 간이 너무 작았다.
병사들이 동시에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외쳤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바로 통과하시면 됩니다!”
대인은 두 병사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려주고 지나쳤다.
그렇게 가뿐히 국경을 통과한 흑색마차는 국경초소를 지나 테루 왕국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날 밤.
흑색마차는 도시 피렌자에 도착했다.
대인은 마차를 도시에서 가장 크고 비싼 호텔로 말을 몰았다.
라고 쓰인 마법간판이 밤중에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마중 나온 로비보이에게 마차와 말을 맡기고, 일행은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호텔 안을 오가는 이들은 대부분 부유한 상인이나 기사, 마법사 같은 준 귀족이었다.
이미 꽤 늦은 시간.
로비에 있던 손님들은 새로 입장한 대인 일행을 힐끔거렸다.
별 볼 일 없는 차림새의 청년, 소년과 소녀, 흑발의 엘프라는 특이한 조합은 그 자체만으로도 시선을 끌었다.
그 중 일부는 대인 일행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뭐야 저 지저분한 것들은.”
“여기가 하룻밤에 얼만지나 알고 온 거야?”
“누가 외로워서 엘프를 부른 거 아냐? 저 년은 꽤 비싸 보이는데?”
피식거리며 비웃는 사람들. 그러나 대인은 태연하게 로비를 가로질렀다.
쩔그렁.
대인이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카운터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제일 비싼 방으로 2개 줘.”
그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대인은 이제 다르게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주변 반응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대인이 도시에서 제일 비싼 호텔을 잡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은 돈이 많으니까. 가장 좋은 서비스를 누리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하나 더.
“여기 지하에서 도박장이 열린다며? 이따가 안내 좀 해줄 수 있나?”
도시 최대의 도박장이 바로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대인은 금발로 염색한 머리를 매만지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통신용 수정구 하나가 필요한데. 여기서만 파는 걸로.”
이곳은, 레드 고블린이 알려준 접선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