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8
“젠장.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지.”
시트 등받이를 한계까지 뒤로 넘긴 현철이 투덜거렸다.
“하하, 그러게요.”
운전석에서 핸들을 붙잡고 있던 신입이 장단을 맞춰주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질문에 기계처럼 똑같은 소리만 늘어놓는 중이었다.
“하아.”
황금연휴에 이게 웬 꼴이냐. 나도 쉬고 싶어 죽겠는데.
현철은 올해 5월 연휴가 일주일이나 된다는 사실을 듣고, 내심 휴일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차 내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 중이었다.
남들은 다 쉰다는 황금연휴가 완전히 물 건너간 것이다.
“하아, 십이좌 괜히 한다고 했어. 차라리 그냥 플레이어로 살걸. 할 일이 뭐 이리 많냐고.”
이 모든 일이 십이좌 때문이었다.
한때는 대한민국 최고의 플레이어로 거론되는 자리라는 이름에 혹해 덜컥 지원했던 그였다. 또 십이좌로 발탁되면 강한 사람들과 마음껏 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상은 과도한 업무만 이어지는 나날이었다.
싸우지 못해 몸이 근질거릴 정도로.
이번 일도 그랬다. 서울에 코쿤이 전개되면서 몬스터의 출몰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코쿤은 현재 강북지역만을 둘러싸고 있을 뿐이었다. 코쿤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지역에서는 여전히 몬스터가 들끓고 있었다.
그래서 임가을은 연초부터 전국을 순회하며 코쿤을 설치하는 작업에 매진하는 중이었다.
십이좌들은 그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일정에 동행해야 했다.
하지만 이후, 전국 곳곳에서는 몬스터가 도사리고 있었다. 비교적 서울은 수도로서의 기능을 회복하면서 몬스터 수가 줄어든 편이었으나, 서울 바깥은 몬스터를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니 코쿤을 설치하는 작업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코쿤을 설치하기 이전에 도로를 점령하고 있는 몬스터를 토벌하는 일이 우선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사람들은 가정의 달이라는 이름 아래 민족 대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후, 웬만해서는 서울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줄줄이 줄을 이으며 이동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모두 코쿤과 십이좌, 선녀가 해결해주리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선녀정부에서는 민족 대이동을 선언하는 여론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부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해 지지율을 올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였다.
결국 선녀정부에서는 민족 대이동을 허가하고 말았다. 이들을 지킬 플레이어들을 대거 고용하면서.
“왜 이리 길이 막혀. 아까부터 나아가지 않는 것 같던데.”
“민족 대이동이잖아요. 서울 주변 도로는 전부 이런 상태라는데요.”
“정말 짜증난다. 확 집에 가서 발이나 닦고 자고 싶다.”
“그보다 저는 9월이 걱정이에요. 5월이 이 정도면, 추석은 또 어떻겠어요.”
“내가 진짜 그날에도 근무 서면 십이좌 관두고 만다.
젠장.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지.”
“…하하, 그러게요.”
마나는 모든 생명체에 깃들어 있다.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이동을 시작하면 그만큼 마나가 이동한다.
이러니 마나가 편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몬스터는 편재 속에서 태어나는 법이고.
그러지 않아도 몬스터로 들끓는 도로에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으니 몬스터의 출몰이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주요도로에는 언제나 플레이어가 상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마나관리기구에서는 이동량이 늘어나는 시기에는 플레이어의 수를 늘려 사람들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왔다. 특히 올해는 선녀정부의 정책 발표로 인해 플레이어들을 대거 고용하기까지 했다.
스케일이 커지니 플레이어들을 통제할 수 있는 역할이 필요했다.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정부측 인사로는 십이좌가 유일했다. 결국 현철은 황금연휴를 반납하고 한강 다리 관리 작업에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이가 많았어도 이러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젠장.
억울한 것은 제법 나이가 있는 십이좌들은 본부에서 꿀을 빨고, 나이가 어린 십이좌들만 현장 관리에 투입되었다는 것이었다.
“정말 추석이라도 되면 미어터지겠네요. 그때 안에 코쿤 설치가 모두 끝나면 나아질 수도 있겠지만.”
“5월도 이런데 추석이 되면 죽겠네, 아주.
시발, 내가 강한 녀석들이랑 싸우려고 십이좌를 했지, 민간인들이나 호위하려고 십이좌를 한 줄 아나.”
“하하….”
이번에도 신입은 영혼 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푸념도 몇 시간이고 어울려주니 정신노동이 따로 없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현철의 이미지를 보고 블레이즈(Blaze) 클랜에 들어왔다가, 괜히 연휴 내내 푸념만 들어주게 생길 노릇이었다.
“이 놈의 늙은이들. 나랑 나이 차이가 몇이나 난다고 진짜….”
황금연휴 기간 내내 현장을 관리하는 십이좌는 모두 다섯 명.
다섯 명 모두 십이좌 내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축에 속했다.
더군다나 그를 비롯해 다른 두 명은 20대초에 플레이어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아 십이좌로 발탁된 사람들이었다.
생각할수록 선발방식이 불만이었다.
하지만 그는 을 몸소 겪은 나머지 십이좌들에 비해서는 명성도 실력도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플레이어의 세계는 능력과 실력으로 평가하는 세계.
십이좌라고 해도 다를 바 없었다.
선발방식이 공평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그들보다 약한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그가 한강이나 내다보며 투덜거리는 이유에는 나이만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보다도 강한 실력자라는 이유도 있었다.
“하, 따분해 죽겠다. 뭐 사건 안 터지나. 아침부터 차 안에서만 살아서 몸이 뻐근할 지경이다.”
“하하….”
사건이 터지지 않는 게 좋은 겁니다.
신입은 튀어나오려는 말을 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현철이 이리도 투덜거리는 이유가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차량이 빼곡히 들어차 있으니 이동도 더디고, 도로에서 정체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실력은 진짜니까.
신호가 바뀌었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뗀 신입은 앞차와의 간격을 유지하는 동시에 백미러로 차량 뒷좌석을 흘깃 쳐다보았다.
이마가 훤히 드러나도록 뒤로 올린 헤어스타일.
라는 이명에 어울리게 머리칼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맹수처럼 사납게 생긴 눈매와 투박하게 귀에 걸린 피어싱은 전체적으로 불량해 보이는 이미지를 더하고 있었다.
다만 겉보기와 다르게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열 두 명의 플레이어 중 한 명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진짜배기였다.
물론, 실력과 인성은 비례하지 않지만.
오히려 인성과 이미지가 비례하는 것 같지만.
“안 되겠다. 라디오라도 들어야지. 뭐라도 듣지 않고 있다가는 이대로 미쳐버리겠어.”
점심에 하도 자서 잠이 오지도 않았다.
차내에서 이리저리 몸부림을 치던 현철은 결국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라디오라도 들으려 했다.
그때였다.
“─어?”
라디오를 틀기 위해 뻗었던 손이 바로 앞에서 멈췄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감지망에 걸리지 않았던 마나.
조그마한 점에 불과했던 마나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하면서 감지망을 펼치지 않아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커지고 있었다.
“시발?”
절로 욕이 튀어나오는 크기였다.
눈살을 찌푸린 그는 재빨리 한강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녹조류가 넘실거리는 강물이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운전을 하고 있던 신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조금도 쉬지 않고 투덜거리던 클랜로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마에 힘을 주는 모습에 사뭇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그런 신입을, 현철은 못마땅한 어조로 나무랐다.
“이게 안 느껴져? 너 어떻게 블레이즈에 입단한 거야? 누구 낙하산이야?”
“블레이즈에 낙하산도 있습니까? 상대란 상대는 모두 때려눕히니까 되던데요?”
“하아, 그래. 강한 놈이 장땡이지 뭐.”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차주고 싶었지만 강한 사람이 최고라는 비전을 내세운 클랜을 만든 이가 현철이었으니 그러지도 못했다.
“대체 뭐가….”
의아함을 느낀 신입은 차량을 중심으로 감지망을 퍼뜨렸다. 그러고는 현철이 그러는 것처럼 한강으로 시선을 향했다.
“이건….”
어째서 눈치 채지 못한 거지.
이토록 강렬한 기운이 바로 근처에 있었는데.
신입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그 역시 감지망에 걸려든 마나 하나가 급격한 속도로 증가하는 폭을 깨닫고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그래도 왕바보는 아니라 다행이네.”
현철이 뒤늦게 현 상황을 파악한 신입을 향해 혀를 찼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요.”
“나도 알아 임마.”
편재된 마나가 확대된 지점은 현재 위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편재된 마나가 퍼뜨리는 기운은 예사롭지 않았고, 다년간 닦아온 플레이어로서의 직감이 강하게 울리고 있었다.
“헐….”
순간 철교가 흔들렸다. 편재된 마나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한강이 요동쳤다.
철교까지 솟아오른 강물이 차량을 강타할 정도로.
상대가 이 정도로 노골적인 반응을 드러내고 있으니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리가 없었다.
전화가 울렸다.
그는 상대가 누구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느꼈지?”
[네.]이 상황에서 전화를 거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십이좌, 박혜림의 심각한 어조가 휴대전화 너머로도 느껴졌다.
“위계는?”
[…정보에 따르면 제3위계에 해당하는 크라켄이라고 해요. 과거에 성수대교를 붕괴시켰던 몬스터에요.]“제3위계라….”
반면에 현철의 목소리는 즐거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루해 죽겠다며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맹수처럼 험악한 눈만이 사냥에 나서는 사자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느 다리에서 나타난 거야? 거기 있는 녀석들끼리 대응할 수 있대? 피해규모는?”
[성산대교에 출몰했다고 해요. 아시겠지만 현장에 있는 플레이어로는 대응할 수 없어요.피해규모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현장은 지금 아비규환이라고 해요.]
“호오….”
아마 성산대교는 난리가 났을 것이다.
굳이 보지 않더라도 지옥이 그 다리 위에서 연출되고 있으리라.
그런데도 현철은 즐거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말 싸움광이네.
백미러로 입꼬리를 끌어올린 현철의 얼굴을 곁눈질한 신입은 혀를 내둘렀다.
하기야. 그래야말로 강현철이 아니겠는가.
자신 역시도 그런 그를 보고 클랜에 입단하지 않았던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는 신입이었다.
사람들이 이 광경을 봤다가는 크게 화를 내리라.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십이좌의 일원이 사람들의 안위는 신경 쓰지 않고 몬스터를 때려잡는 일에나 흥분해 있으니.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플레이어의 천명.
플레이어의 존재 이유는 몬스터를 멸하는 것이었다.
십이좌라 해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십이좌이기에 몬스터를 죽이는 데에는 강렬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성산대교라…. 여기서 얼마나 걸리지?”
“여기가 원효대교 근처니까… 빨라도 10분은… 아, 그보다 더 걸리겠는데요.”
정체된 도로를 내다보며 신입이 말을 수정했다. 도중에 길을 이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줄지은 차들이 빠져나가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하아, 됐다. 그냥 나 혼자 가지 뭐.”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현철은 한숨을 쉬고는 망설이지도 않고 차에서 내렸다.
“클랜로드!? 지금 뭐하시려는….”
“뭐긴 뭐야. 뛰어서 가려는 거지. 이쪽이 더 빨라. 30분이면 되겠네.”
“뛰어서 간다니요!? 걸어서 2시간이나 되는 거리입니다만!?”
“아아, 몰라. 시끄러워. 내가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거야. 너는 어서 차나 몰고, 손이 남아도는 플레이어들이나 현장으로 보내줘.”
[잠깐만요! 지금 뛰어서 가겠다는 거예요!? 미쳤어요? 그럴 필요도 없이….]“아아, 몰라, 몰라!”
머리 굴리기는 태어날 때부터 포기했다.
더 이상 잔소리는 듣기도 싫었던 현철은 휴대전화를 차량에 던져 넣었다.
이어서 가볍게 몸을 푼 그는 트렁크에서 그가 애용하는 바스타드 소드를 꺼냈다.
“스트렝스.”
주문과 함께 체외로 흘러나와 몸을 휘감는 마나.
“저, 클랜로드
…?”
뒤늦게나마 신입이 붙잡으려 했을 때에는 마나를 휘감은 현철이 저만치 사라진 뒤였다.
“하아, 연휴에 뭐하는 짓이냐.”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차량 안에서 신입이 한숨을 쉬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