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255
여름방학이라고 가만히 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온 은하는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3일간 빈둥거리다가 마음을 다잡았다.
휴식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해 처음으로 맞은 여름방학을 헛되이 쓸 수 없었다.
누나는 오늘도 밖에 나갔나 보네.
점심을 먹으러 거실로 나간 그는 비어 있는 자리를 세 개나 발견하고 대충 어림짐작했다.
이 시간에 아버지는 직장에 일하러 나갔을 것이고, 진파랑은 보나마나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은아는 동네친구를 만나러 점심도 먹기 전에 나간 모양이었다.
어째 아카데미에서 마주칠 때보다 집에서 마주치는 일이 더 힘든 것 같았다.
“엄마, 밥 먹고 잠깐 나갔다 올게.”
“친구들이랑 놀러가려고 그러니?”
“아니야. 위층에 가 있을 거야.”
기숙사 식당의 식사도 맛있었지만 역시나 어머니의 솜씨에 비할 바는 못 됐다.
그는 숟가락으로 참치가 듬뿍 담긴 김치찌개를 퍼서 밥 위에 얹었다. 매콤한 국물이 밥 알갱이 사이사이 스며드는 모습에 군침이 흘렀다.
옆에서 할머니가 천천히 먹으라며 밥 위에 얹어준 계란말이는 얼마나 맛있던지.
“오빠! 이것도 먹어! 자, 아~!”
할머니가 반찬을 얹어주는 행동을 따라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은애가 큼지막한 소시지를 건넸다.
손수 먹여주겠다며 입을 벌리라고 아 소리를 내는 여동생.
은하는 이제 8살 밖에 되지 않은 여동생이 사랑스러워 입을 열었다.
은애가 눈꼬리를 곱게 휘었다.
꼭 재미라도 붙였는지 그의 입에 반찬을 넣어주기 시작했다.
“은애야, 오빠 밥 먹여주지 말고 너도 어서 먹어야지.” “안 돼, 이따가! 우리 오빠 맘마 먹여준 다음에 먹을게!”
“그러면서 편식하지 말고.” “…아닌데….”
“그거 얼른 먹으렴.” “으…, 엄마 미워.”
그의 입에 자신이 싫어하는 버섯을 넣어주려던 은애가 뜨끔했다.
은하는 눈에 힘을 주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눈길을 슬그머니 피하는 여동생을 보고는 작게 웃었다.
며칠 전에 듣자하니 자신과 은아가 아카데미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이, 은애는 학교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장난기가 많아졌다고 한다.
은하에게는 예쁜 여동생이었지만, 어머니에게는 이제 미운 딸내미가 따로 없다며.
그리 말하면서도 어머니는 여전히 은애를 사랑했다.
자신과 은아가 아카데미에서 생활하고 있는 만큼, 주지 못한 사랑을 은애에게 쏟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렇게 눈싸움을 벌이는 모습마저 정답게 보일 정도였으니.
“올라가서 니어 엄마랑 서방, 너무 귀찮게 굴지는 마렴.”
“네, 그럴게요.”
자고로 딸과 손녀의 싸움에는 끼면 안 되는 법이라고.
오붓하게 다투는 두 사람을 무시한 할머니는 컵에 물을 따르면서 말을 꺼냈다.
그때 은애가 불쑥 끼어들었다.
“오빠! 나도 어베니어 보러 갈래! 나랑 같이 가!”
“은애야, 아직 당근 안 먹었잖니. 당근도 먹고 가야지.” “나는 몰라, 몰라!”
“은애야, 어디 가니!”
자리에서 일어난 은애가 눈을 감고 고개를 이리저리 저었다.
그러면서 은하가 있을 곳을 더듬어 그의 옷을 꾹 잡고 등을 떠밀었다.
뭐야, 은애 얘가 언제 이렇게 힘이 세진 거지?
모르는 사이 은애가 불쑥 커졌다. 그녀가 끄는 힘에 잠시 기우뚱거린 은하는 새삼 여동생의 성장을 깨달았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계속 옆에서 지켜볼 수가 있었는데 올해부터는 그렇지 못했으니 아쉬움이 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더 이상 평화로이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은하는 어머니로부터 도망치고자 그의 손을 잡아끄는 은애의 손길에 발걸음을 움직였다.
“학교생활은 재미있어?” “응! 엄청 재미있어! 다음에 내가 친구들 소개시켜줄게! 친구들이 다 오빠 보고 싶어 해!”
“응, 집에 데리고 오면 맛있는 거 사줄게. 힘든 거는 없지?”
“힘든 거? 음….”
3층 계단을 오르던 중이었다.
해맑은 얼굴로 웃고 있던 은애는 은하가 마지막에 물은 말에 대답을 망설였다.
오빠로서 알 수 있었다.
저건 고민을 하는 얼굴이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은하는 얼굴을 고치며 물었다.
은애가 저렇게 고민을 하는 거라면 필시 문제가 있는 것이리라.
오빠로서 두고 볼 수 없었다.
만약 은애를 괴롭히는 놈이 있다면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되는 공포를 심어줄 작정이었다.
“아니야! 그런 거 없어!”
“그럼 다행이고….”
다행히 은애가 금세 해맑은 얼굴로 그의 불안을 종식시켜주었다.
이내 은하는 줄리에타의 집 앞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쉬려 했는데.
“요새 준이가 자꾸 뽀뽀하려 해서 귀찮게 구는 것 빼고는….”
좋아, 공포를 심어주자.
은하는 화풀이하듯 분노의 노크를 시작했다.
☆
“우와─!! 은하 형 왔다!!”
어린아이의 성장이 가장 빠른 건 은애가 아니라 어베니어였다.
은하는 줄리에타에 집에 들어서자 현관문에서 덥석 뛰어든 어베니어 때문에 넘어질 뻔했다.
얘는 진짜 장난이 아니네.
5살이라고 믿기지 않는 크기.
은애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 어베니어는 은하의 다리에 얼굴을 이리저리 비볐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초록색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꼭 머리를 쓰다듬어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잠깐 안 본 사이에 체내 마나가 또 늘었어?”
“응? 왜 그래, 형아?”
은하는 혀를 내둘렀다.
자신은 어렸을 적부터 주구장창 마나를 모으면서도 체내 마나의 변화가 거의 없었는데, 어베니어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체내 마나가 늘어나고 있었다.
이전 삶에서 을 공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기여했다는 플레이어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그래도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작 그에게 관심을 받은 어베니어는 헤실헤실 거리고 있었지만.
이만한 체내 마나를 지닌 꼬마가 미래에 딜러가 된다니.
그때가 되면 분명 어베니어에게 대항할 수 있는 적수는 대한민국에서 아무도 없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그러한 미래를 상상한 은하는 얼떨떨해하면서도 어베니어가 무사히 자라주기를 빌었다.
“챠오, 은하 보스! 무슨 일이기에 문을 그렇게 쾅쾅 두드린 거야?”
“…아, 그건 미안해요, 누나.”
가까스로 어베니어를 여동생에게 보낸 은하는 금발과 조화를 이루는 원피스를 입고 있던 줄리에타에게 사과했다.
차마 은애의 반에 있다는 빌어먹을 남자애가 툭하면 은애에게 뽀뽀를 시도하려 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꺼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색한 웃음으로 대화를 얼버무렸다.
다행히도 그녀는 별 말이 없었다. 대신 손뼉을 쳐서는 은애에게 안긴 어베니어를 불렀다.
“엄마, 왜애?” “니어야, 엄마가 전에 가르쳐준 거 기억나니?” “응?” “그거 있잖아, 그거.”
“응!”
“은하 보스한테 보여주렴.”
“알았어!”
어베니어의 귀에 무언가를 속닥인 줄리에타가 킥킥 웃었다.
돌아선 어베니어도 웃고 있었고.
뭐지? 어째 좀 불안한데….
은하는 똑같은 얼굴로 실실 웃는 두 사람을 보고 멈칫했다.
플레이어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어서 이 자리에서 도망치라고.
아니면 못 들은 척하라고.
하지만 이미 늦었다.
“…….”
어베니어가 난데없이 무릎을 꿇고, 살이 토실토실 오른 두 손을 모으며 부복한 것이다.
“인사 올립니다. 저는 은하 보스의 전속이 되고 싶은 노 어베니어라고 합니다.”
“…….”
“어때? 형아 나 잘했지!?”
“…하하….”
국어책을 읽는 듯한 웃음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과연 이 아이는 전속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나 하는 것일까.
특히 돈으로 고용된 관계가 아니라 충성심을 바탕으로 이뤄진 관계를.
아마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저리도 해맑은 소리를 내며 칭찬해달라고 웃고 있는 것이리라.
“줄리에타 누나, 마음만은 고맙게 받겠다고 했잖아요.”
“그래, 나도 은하 보스 말 기억해. 그런데 니어의 의지가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어베니어의 의지가 아니라 누나가 그렇게 만들고 있으면서….”
은하는 툴툴거렸다.
어베니어가 탐이 나는 인재이지만 아직 어린 그를 끌어들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구상하는 미래에는 어베니어의 역할이 없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그저 이대로 성인이 될 때까지만 줄리에타 부부의 도움을 받는 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가 은하 보스를 따르고 싶어 따르는 거야. 너무 부담 가지지 마. 니어도 은하 보스가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 “…알았어요.”
줄리에타는 이런 분위기가 될 때면 꼭 어른스럽게 말하고는 했다.
은하는 일단 여기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조금 전부터 은애가 유심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진지하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오빠, 어베니어는 아직 5살이야. 어베니어 괴롭히면 안 돼.”
“…괴롭히는 거 아니야.”
“맞아, 은애야. 니어가 은하 보스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렇지?” “응! 형아도 누나도 너무 좋아!” “은하 보스는 나랑 얘기할 게 있는 것 같으니, 은애가 니어 좀 돌봐주지 않을래?”
언젠가는 삶을 즉흥적으로 살았던 줄리에타.
그런 그녀는 어베니어를 낳고, 어머니가 되면서 어른스러워졌다.
어색하기 않게 분위기를 전환하고, 은애에게 어베니어를 맡긴 그녀는 은하를 안방으로 안내했다.
“브루노 아저씨는요?” “잠깐 밖에 나갔는데. 불러올까?” “아니요, 괜찮아요. 어차피 누나한테 부탁하려던 일이었으니까요.”
아이들의 기척이 멀어진 걸 확인한 은하는 주머니에서 똑같은 형태의 반지를 한 움큼 꺼냈다.
마나합금이 섞여 있는 은색 반지, 아티펙트였다.
“…꽤 많네. 구하느라 고생했겠다.” “그다지 고생하지는 않았어요.”
시리우스그룹의 후원을 이용해서 벽해수에게 부탁한 아티펙트였다.
벽해수는 아무 세공도 되지 않은 반지를 몇 개나 만들어달라는 의뢰에 어리둥절해했지만, 그가 부탁한 대로 아티펙트를 만들어주었다.
아직 아무 섭리도 담겨 있지 않은 아티펙트는 주입하는 섭리에 따라서 효과도 달라질 터였다.
“여기에 누나 기프트를 부여하고 싶어요.”
“내 기프트를 부여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닌데…, 웬만한 아티펙트로 기프트를 담는 건 힘들어.”
은하가 이 아티펙트에 담고 싶은 섭리는 줄리에타의 기프트 .
중에서도 능력을 눈에 띄게 강화시켜주는 그녀의 기프트는 아주 귀하고, 유용했다.
전에 행당역에 있던 적색던전에서 아티펙트의 힘을 빌려 그녀의 기프트를 조금이나마 사용했을 때에도 여러 모로 도움이 되었으니.
은 앞으로도 계속 필요하게 될 거야.
쓰러뜨려야할 게 많았다.
당장 지금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미래에도 계속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은하는 가능한 한 많은 아티펙트에 줄리에타의 기프트를 담아내고 싶었다.
문제는 기프트는 가장 담기 어려운 섭리라는 거지만….
정확히 말하면 기프트를 담는 것도 다른 사람의 기프트를 빌리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생물은 저마다 성질이 다른 마나를 품고 있었고, 체내 마나는 생물체에 귀속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나가 들어가 있는 아티펙트를 다른 사람이 사용하게 되면 효율이 떨어지거나, 아예 발동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아티펙트에 기프트를 담아내더라도 기프트의 발동 조건에 따라 타인은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예를 들어, 체내 마나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진 다음에야 발동하는 그의 이름 모를 기프트는 다른 사람이 아티펙트로는
사용할 수 없는 힘이었다.
하지만 줄리에타의 기프트는 아니었다.
그녀의 기프트는 발현되는 순간에 효과를 지니기 때문에.
더군다나 그녀의 기프트는 아무런 부작용도 없었다.
자신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그녀의 기프트만한 것이 없었다.
“…잘 안 되네. 아티펙트가 견디지 못하네.”
한창 반지에 마나를 불어넣고 있던 줄리에타는 손 안에서 으스러진 반지를 보여주었다.
다른 반지들도 처참히 으스러졌다.
아티펙트가 섭리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진 것이다.
“이걸로도 안 되나….”
은하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처럼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기프트는 강력했다.
지난번에 부탁했었던 아티펙트도 얼마 안 되는 능력을 품은 것만으로 한계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것보다 못한 아티펙트였으니 이런 결과가 일어날 만도 했다.
아카데미에서 판매하는 마나합금의 품질은 제한되어 있었고, 마석은 그가 지난번에 적색던전에서 모아둔 것과 아카데미에서 볼품없는 것을 구한 게 전부였다.
“줄리에타 누나. 몇 년 전에, 제가 사용했던 누나 결혼반지는 어떻게 만들어진 거예요?” “그거는 지중해의 마나합금으로 만들어진 거라 여기서는 구할 수 없어.”
몇 년 전, 은하가 처음으로 사용한 그녀의 기프트가 담긴 아티펙트는 거의 완벽하게 그녀의 힘을 끌어냈다.
지중해의 마나합금으로 만들어진 아티펙트만한 성능은 기대하지 않아도, 거기에 비빌 만한 아티펙트를 제작하고 싶었다.
재료가 문제네, 재료가….
은하는 생각에 빠졌다.
아지트로 삼고 있는 적색던전에서 구할 수 있는 마석으로는 부족했다.
던전의 마석이 품질이 제일 좋으니 다른 던전을 탐색해볼까 생각했지만 현재 그가 이용할 수 있는 던전이 거의 없었다.
“아카데미 던전을 사용할 수만 있으면 좋을 텐데….”
아카데미 지하에 있는 적색던전은 마석을 구하기 용이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중등아카데미 1학년 학생은 아카데미의 적색던전을 이용할 수 없었다.
적어도 내년을 기약해야 했다.
마나합금은 지하시장에서 구입해도 괜찮지만…, 마석은 내가 구해야 해.
자신이 사용할 아티펙트였다.
길을 들여놓은 마석을 사용해야, 아티펙트를 사용할 때에도 그나마 효력이 상승했다.
그러니 직접 구해야 했다.
“…어디 마땅한 던전이 없으려나.”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은하는 곧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텔레비전에서 청계천의 환경오염이 매년 심각해지고 있다는 뉴스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나가 있기는 했네.
마땅한 던전이 하나 있었다.
어쩌면 질이 좋은 마석을 발견할 수 있는 던전이.
리라이프 플레이어 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