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15
15. 그럴게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주말이 지난 뒤, 흥복 저수지의 벚꽃이 만개했다. 저수지 둘레길을 따라 하얀 터널이 생긴 것처럼 꽃이 피었다. 햇살을 받으면 반짝거리는 연둣빛 잎들도 싹을 틔웠다. 산 사이사이 진달래가 피었고 담벼락을 따라 노란 개나리도 흐드러졌다.
하늘이 파랗고 햇살이 맑은 날, 수연은 엄마와 이불을 털었다. 이불커버를 벗겨 세탁기에 돌리고, 홑청에 싸인 목화솜은 햇볕에 널어 방망이로 두들겼다.
“완전 봄이다. 그치?”
마지막 이불을 털고 나서 정자가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전부터 봄이었는데?”
수연의 시큰둥한 대답에 정자가 수연을 툭 치며 말했다.
“봄인 듯 봄 아닌 봄 말고, 진짜 봄 말이야. 날 풀리는가 싶어 얇은 외투 입으면 기절하게 추워서 코트 꺼내 입어야 하는 그런 봄 말고. 겨울옷 다 집어넣고 봄옷 입는 봄.”
하긴. 3월 말에도 눈이 내렸다. 추위를 많이 타는 수연은 감히 코트와 패딩을 집어넣을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검은색 일색인 옷들이 지겹다며 화사한 봄잠바를 꺼낸 엄마는 입고 나섰다가 콧물을 훌쩍이며 벗었었다.
“날씨 참 좋네. 수연아, 하늘 좀 봐봐. 점심엔 상큼하게 달래랑 오이랑 무쳐야겠다. 주꾸미도 볶고, 미나리 받아 온 것도 부쳐서 미나리전 해야지. 가만있어 봐, 부침 가루가 남았나?”
정자가 가든으로 들어간다. 수연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햇볕을 쬐었다. 눈을 들면, 붓을 들어 군데군데 하얀 물감을 콕콕 찍어 놓은 것 같은 꽃나무와 꽃나무를 품은 산이 보였다. 산 아래엔 깊은 물이, 물가에는 장태산이.
딩동.
메시지가 들어오는 소리에 수연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손 흔들어 줄까?]수연의 입가에 소리 없이 미소가 걸렸다. 백일몽 같았던 주말이 지난 후, 태산과는 이렇게 지내고 있다.
두 사람만이 아는 비밀 장소에 그날의 기억을 감쪽같이 묻어 놓은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서. 그러다가 한 번씩은 비밀스러운 눈빛을 교환하면서. 봄인 듯 아닌 듯, 진짜 봄은 아닌 상태로.
[ㅇㅇ]수연의 답장에 태산이 저 멀리 산 아래에서 손을 들었다. 아빠와 세호는 밭에 비닐을 씌우러 갔고, 엄마는 식당에 있으니 마당엔 아무도 없는데 수연은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슬렁거리며 집 앞을 돌던 진돌이가 태산이 손 흔드는 것을 보았는지, 몸을 쭉 늘이며 하품을 쩍 하다 말고 꼬리를 흔들었다. 태산 쪽을 바라보며 웡, 크게 짖자 산이 우렁 울렸다.
[커피?]태산에게서 새로운 메시지가 왔다.
커피라고? 방금 전까지 별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뜨겁고 진한 커피가 마시고 싶어진다. 한 모금 마시면 전신으로 카페인이 쭈욱 퍼지는 것 같은 독하고 진한 커피가 간절해지는 건, 태산이 부린 마법일까.
이번에도 ‘ㅇㅇ’ 두 글자를 보내려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사다 달라 할 염치는 없으니 귀찮지만 차를 끌고 내려가 볼까. 고민을 하는데 한 번 더 메시지가 왔다.
수연은 몸을 일으켰다. 마당을 가로질러 끝부분에 서자, 산 아래에 있는 태산이 조금 더 잘 보인다. 수연은 핸드폰을 잡고 메시지를 보냈다.
[줄임말 별로.] [헐.] [커피는 좋음.] [헐.]산 아래 태산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어이가 없다는 제스처를 하는 태산을 보면서 피식 웃다가 수연은 뒤를 돌았다.
햇볕이 좋은 날이다. 들어가서 빨래나 개야지, 생각을 하는데 아래에서 태산의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웬 커피를 사 왔대.”
정자가 양념이 묻은 손을 씻고는 홀로 나왔다. 태산은 카운터에 두 잔의 커피가 든 캐리어를 내려놓았다.
“김 반장님이 커피 없음 일 못 한다 하셔서요. 하루에 한 번씩은 다녀와야 합니다.”
태산은 대답하며 가든을 둘러보았다. 수연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 것까지 안 챙겨도 되는데.”
“비싼 것도 아닌데요.”
“잘 먹을게요.”
정자가 젖은 손을 앞치마에 쓱쓱 문질러 닦으며 캐리어를 살폈다.
“이게 라떼고, 이쪽이 아메리카노요.”
“이건 우리 수연이 줘야겠네. 우리 집에서 아메리카노 마시는 사람은 수연이밖에 없어요. 전부 믹스 마시는데 혼자서 서울물이 들어선, 무슨 사약을 마시듯 커피를 먹어. 그러니까 속을 다 버리지.”
정자의 말에 태산은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은 커피를 지나치게 많이 마시긴 했다. 그것도 뜨겁고 독한 걸로.
“애가 까칠해선 장 팀장한테 아는 척도 잘 안 하죠?”
태산이 대답 없이 씩 웃기만 하자 정자가 한마디를 더했다.
“음식도 가리고 사람도 가리고. 고집은 또 얼마나 센지. 나는 성격이 급해서 후딱후딱 해치워야 하는데, 쟤는 뭐든 지 속도에 맞아야 하고. 한번 맘먹으면 누가 뭐래도 말을 안 듣고.”
태산은 짧게 짧게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의 더딘 마음을 기다리고 있는 입장으로써 매우 동감이 가는 말이었다.
“장 팀장님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대학도 그래. 솔직히 우리는 서울 안 갔으면 했거든요. 코앞에 교원대 있으니까. 거기 나와서 선생님 하길 바랐어요. 멀리 가서 고생하지 말고 집에서 편히 다녔으면 했지. 우리 형편에 사립대는 못 보내니까 가려면 한국대 합격하라고 일부러 세게 말도 하고.”
새삼 기억이 난다는 표정으로 말을 하더니 정자가 부엌으로 들어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알아요? 아직 수능도 안 봤으니까 아무 말 하지 말래. 성적 나오고 얘기해도 안 늦는다고. 그러더니 기어코 가더라고요.”
투덜거리는 목소리와는 달리 표정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부엌에서 나온 정자가 태산에게 낱개로 포장된 초콜릿을 건넸다.
“내 정신 좀 봐. 수연이한테 커피 가져다주기 전에 먼저 불부터 줄여야지.”
정자가 캐리어에 있는 컵을 집으려다가 말고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태산은 아메리카노가 든 컵을 집어 들며 말했다.
“제가 나가는 길에 전해 줄게요.”
“그래 줄래요? 나 지금 한창 저녁 준비 중이어서.”
“커피 주면서 친한 척 좀 해 볼까 봐요.”
태산의 말에 정자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부탁 좀 할게요. 커피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저녁에 뵙겠습니다.”
태산은 가볍게 인사를 하며 식당을 나왔다. 정자에게 받은 초콜릿 포장을 벗겨 입에 넣었다. 초콜릿이 혀끝에서 달콤하게 녹는다.
“고마워.”
커피 컵을 받으면서 수연이 말했다. 태산은 커피 컵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컵이 태산의 손에서 빠지질 않자 수연이 고개를 들었다. 태산은 눈썹을 쓱 올리며 말했다.
“동그라미 두 개도 모자라서 물음표만 보내는 분께서, 줄임말이 별로시다?”
그게 왜? 수연은 눈을 크게 뜨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놓고, 커피는 좋다고?”
태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얄미워서 커피를 주기 싫다는 표정이다. 수연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주기 싫음 말고.”
“이것 봐. 내가 너 커피 사 주려고…….”
태산이 손가락을 꼽아 보더니 말했다.
“무려 일곱 잔을 사서 돌렸는데, 주기 싫음 말라니.”
그럼 뭘 기대하는 건데. 수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태산이 말했다.
“산책 가자. 꽃이 예뻐.”
“지금?”
“지금.”
태산이 답했다.
“이렇게 갑자기?”
“농어촌공사에 잠깐 볼일이 있거든.”
“출장 가는 길에 동행을 해 달라는 거지?”
“응.”
“왜?”
너와 나가려면 핑계를 대고 몰래 나가야 하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내가 왜. 수연의 질문에 태산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꽃이 예쁘니까.”
“꽃은 여기서도 잘 보이거든?”
“너도 예쁘고.”
뭐야. 뜬금없이. 그런 말 좀 아무렇지 않게 하지 말라고. 수연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같이 보고 싶어서.”
꽃을 수연과 함께 보고 싶다는 것인지, 꽃과 수연을 같이 보고 싶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요점은 같이 가자는 거다.
그나저나 누가 장태산에게 부끄러움에 대하여 알려 주었으면. 수연은 오글거리는 손을 꽉 쥐었다.
서점에 가고 싶다는 핑계로 외출 준비를 했다. 마침 출장이 있다며 시내까지만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태산은 정말이지 자연스럽게도 했다. 엄마는 또 도랑에 빠지지 말고 태산의 차를 얻어 타라고 했고, 본인이 태워다 주겠다고 그랬을 아빠는 마침 자리에 없었다. 그렇게 쉽게 수연은 커피를 들고 조수석에 앉았다.
“정말 전부 피었네.”
꽃으로 된 터널을 지나는 것 같다. 아래 지방에서는 벌써부터 벚꽃이 만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물가라 기온이 서늘해서 그런지, 산그늘에 가려 있어서 그런지 저수지의 벚꽃은 조금 늦게 피는 편이었다.
“예쁘지?”
“응. 예쁘다.”
굽이굽이 내려가는 길, 양쪽으로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보였다. 따뜻한 햇볕이 차창으로 들어와 몸을 데워 준다. 수연은 미지근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한동안 말없이 풍경을 바라보았다.
“수연아.”
저수지를 거의 벗어날 때쯤, 태산이 수연을 불렀다. 수연이 고개를 돌려 태산을 보았다. 태산이 수연을 쓱 보고는 다시 앞을 본다. 조치원으로 가는 쭉 뻗은 길을 바라보면서 태산이 말했다.
“충분히 망설이고.”
누가 들으면 무슨 말인가 싶을 소리를 하는 태산이었다. 수연은 물끄러미 태산을 보았다. 여전히 앞을 본 채로 태산이 말을 잇는다.
“오래 고민해.”
태산의 말이 하나씩 가슴 밑바닥으로 고여 든다. 두 사람의 마음이 같은 방향으로 기울었다 해도 수연의 앞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는 걸 태산은 알고 있었나 보다.
“기다릴 테니까.”
나는 아주 오래전에 그 선을 넘었거든. 태산의 마음은 언제나 너무 쉽게 읽힌다. 수연은 가만히 대답을 했다.
“그럴게.”
서점 앞에서 태산은 수연을 내려 주었다. 농어촌공사에 들렀다가 다시 서점으로 돌아와 수연을 태웠다.
벨트를 하는 수연을 보다 태산은 손을 쑥 뻗었다. 수연의 목덜미를 그러쥐듯 잡고서 쓱 몸을 기울여 입을 맞추었다. 차 안이라지만 대로변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뭐지, 이건?”
황당해하는 수연에게 태산이 대답했다.
“뽀뽀.”
“기다린다며?”
수연이 어이가 없어 말하자 태산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리고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뽀뽀 정도는 하자.”
하 참. 수연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웃자 태산이 수연의 손을 잡았다.
“뭐야.”
“뭐가?”
“뭐냐구.”
손을 내려다보며 수연이 말했다. 태산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깍지를 끼며 대답했다.
“별거 아냐. 모른 척해.”
웃으면 안 되는데 실웃음이 새듯이 나온다. 수연은 차창에 이마를 대고 웃음을 눌렀다. 태산의 손이 따뜻해서 잠시 그대로 있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