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3
3. 수연 가든
“어이구.”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경사면을 보고 태산이 말했다. 눈으로 봐도 심상치 않게 많은 양이다. 물이 고인 밭고랑이 물컹거렸다. 태산은 물컹거리는 땅을 짚고 앉아서 물길을 가늠해 보았다.
그 곁에 선 마을 이장님과 최초 발견자이자 제보자인 이동만 씨와 이동만 씨의 절친이라는 박홍관 씨가 그것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일이 아닌데요?”
주변의 토사도 무너진 것이 보였다. 흙을 무너트리며 흐르는 물이 이 넓은 제방 어디쯤에서 새고 있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내가 딱 봐도 그렇더라니까. 어딜 봐서 이게 땅에서 솟는 물인겨. 저수지가 커서 티가 안 나 그렇지 가만 재 보면 수위도 내려갔을겨. 봐봐, 나무 밑동이 요만침만 보였는데 저만침 내려갔다니까?”
동만이 엄지와 검지를 벌리며 말했다. 손짓에 이장이 고개를 들어 저수지 쪽을 바라보았다. 제방의 경사면보다 저수지의 지대가 높아서 수위가 저만침 더 내려간 나무는 보이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수지 물이 새고 있었다. 그것도 하루에 몇 백 톤씩.
“농어촌공사에서 나오신 거여?”
홍관이 태산에게 물었다. 태산은 손을 툭툭 털고 일어서며 대답했다.
“아니요. 농어촌공사에선 오후에 나올 거고요, 저는 장현 종합 건설에서 나왔습니다.”
“그래 어때 보이는겨, 이렇게 세게 흘러나오는데 막을 수 있는 건가 싶어.”
이장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했다. 그라우팅 현장을 많이 돌아보았지만, 이렇게 물이 거세게 흘러나오는 현장은 태산도 처음이다. 박 대리가 이 현장을 봤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핵노답’이라고 했겠지만, 태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막습니다.”
“진짜루?”
“저희 사장님이 전국 제일의 그라우팅 전문가시거든요. 농어촌공사에도 오래 계셨고, 저수지 그라우팅 경력만 30년.”
손가락 세 개를 활짝 펴며 태산이 말했다. 동만은 서울에서 내려왔다며 자신을 소개한 장태산 팀장을 바라보았다. 면사무소에서는 분명 오후에나 시공팀이 출동을 한다고 했었는데, 웬 청년이 혼자서 훌쩍 나타나 이장을 찾아왔다. 곧바로 현장부터 찾는 체격 좋은 이 청년은 어쩐지 얼굴까지도 믿음이 가는 남자다운 얼굴이다.
“아니, 근데 농어촌공사랑 담당 공무원은 왜 안 나오는겨.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면 당장 뛰어와서 손가락으로라도 틀어막아야 하는 거 아녀?”
동만의 옆에 있던 박홍관 씨가 하늘에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태산은 홍관에게 말했다.
“지금은 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아 그럼 그짝이 틀어막고 있든가.”
“그럴까요.”
태산이 성큼 걸었다. 짙은 남색의 작업 점퍼의 팔을 걷어붙이며 물이 세게 흐르는 도랑 위에 서서 몸을 굽혔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말 물길 안으로 손을 넣을 것 같아 홍관은 손을 휘저으며 말렸다. 태산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싱긋 웃었다. 찰칵, 찰칵 주변의 사진을 찍으며 말했다.
“책임지고 막겠습니다. 점심쯤에 장비 도착하니까요, 도착하는 대로 현장 준비부터 하겠습니다.”
“참말로 막을 수 있는 거쥬?”
동만은 괜히 한번 어깃장을 놓았다. 태산이 둑 위에서 내려오며 선뜻 대답했다.
“까짓 안 되면 제가 틀어막고 앉아 있던가요.”
넉살 좋은 대답에 동만과 이장은 동시에 피식 웃었다.
“허 참, 이 사람. 시원시원하네.”
“예. 그런 소리 자주 듣습니다.”
봄볕에 등이 따가웠는지 태산이 입고 있던 점퍼를 벗으며 대답했다. 넓은 어깨와 단단한 팔뚝. 여름이 아닌데도 그을린 피부.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일을 하는 몸이 햇살 아래서 빛났다.
“자네 이름이 뭐랬지?”
“태산입니다. 장태산.”
울림 좋은 굵은 목소리로 태산이 대답했다.
“아따, 이름 한번 잘 지었네.”
홍관이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동만도 왠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저 사람이라면 왠지 저 세찬 물길도 한 손으로 틀어막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동만은 태산의 옆에 은근히 다가갔다.
“그래, 자네 숙소는 정했는가?”
“이제 정해야죠.”
“대충 어디쯤에 묵을 계획도 없고?”
“시내 모텔이나 여관을 알아볼 생각이긴 한데요, 생각보다 현장이랑 거리가 좀 있네요. 네댓 명 지낼 만한 곳으로 이장님께서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태산의 말에 동만과 홍관의 눈이 동시에 반짝 빛났다.
태산은 차에 앉아 동만과 홍관이 옥신각신 다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벌써 5분째, 동만과 홍관은 서로 자기 집이 왜 숙소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장에게 목소리 높여 어필하는 중이었다.
“최초 발견을 누가 했느냐 이 말이여.”
“아,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우리 집이 여기서 더 가까운데.”
“차 타고 1, 2분 더 걸리는 게 뭔 대수라고. 우리 집엔 황토방도 있는데?”
“우리 집에는 없나?”
“일단 장 팀장한테 우리 집을 먼저 보여 주면 될 거 아녀. 우리 집을 먼저 보고 영 마음에 안 든다 하면은 그때 가서 자네 집으로 가든가. 방송국에 누가 제보를 했게. 저치들이 누구 덕분에 내려왔는가, 그걸 잘 생각해 보란 말이여.”
한 달 혹은 그 이상 상주하며 머물 인부가 최소 네 명. 숙박비와 식대만 해도 백만 원은 훌쩍 넘는다. 비수기인 민박집에서는 뜻밖의 귀한 손님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집에는 학교도 안 마친 자석이 둘이여. 둘.”
“아 그려? 나는 셋이여.”
“자네 애들은 학교 다 마쳤잖어?”
“학교를 마치면 뭐햐? 시집 장가를 안 갔잖어! 이장님, 이장님 생각은 어때요?”
“흠. 그것이. 음. 그러니까……. 아무래도 동만네 먼저 가야지.”
이장이 슬그머니 동만의 편을 들어주었다. 동만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장 팀장님, 갑시다. 바로 죠기여 죠기.”
하얀 트럭이 힘차게 시동을 걸었다. 태산도 뒤를 따라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 * *
안채 툇마루에 앉은 수연은 몸을 굽혀 댓돌 위로 운동화를 올렸다. 구겨진 운동화 뒤축을 손가락을 깊이 넣어 정돈한 뒤, 옆에 두었던 챙이 넓은 꽃무늬 모자를 썼다.
보일러실을 겸한 창고의 문을 열고서 초록색 플라스틱 바구니도 챙겼다. 빈둥거리는 것도 지겨워서 쑥이나 뜯어 볼 생각으로 슬슬 걸어가는데 뒷마당을 돌아 나오던 정자와 딱 마주쳤다.
된장을 소복이 담은, 정자가 시집올 때 혼수로 해 왔다는 오래된 스테인리스 그릇이 햇볕에 반짝 하고 빛났다.
“뭐 하려고?”
챙 넓은 모자에 몸빼바지. 영락없는 작업용 복장에 정자의 눈이 못마땅한지 가늘어졌다.
“쑥 뜯게. 그냥 손으로 툭툭 끊으면 되는 거지?”
수연은 바구니를 옆에 끼며 정자에게 물었다.
“누워 더 자다가 이따 점심이나 먹어. 책이나 보든지.”
정자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수연에게 잔소리를 시작하려 했다.
“책도 지겨워.”
수연은 대답하며 한쪽 구석에 놓인 작업 방석을 들었다. 오래 앉아서 따다 보면 허리가 아팠던 것이 기억나, 일명 엉덩이 의자라고 불리는 동그란 쿠션 같은 의자를 엉덩이에 찼다. 대롱대롱 엉덩이에 잘 매달린 쿠션을 확인하고는 씩 웃으며 정자에게 물어보았다.
“잘 어울리지?”
“퍽이나 잘 어울린다. 엉덩이라고는 살이 하나도 없어선. 이것 좀 먹어 봐.”
정자가 된장을 콕 찍어 수연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수연은 된장의 맛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수연의 입에는 그 된장이 저 된장이고, 저 된장이 그 된장이지만 무조건 맛있다고 하는 편이 여러모로 좋으니까.
“맛있네.”
“작년에 담은 건데 잘된 것 같지? 점심에 도다리 넣어서 쑥국 끓여 줄게.”
도다리 쑥국? 수연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살짝 찡그렸다. 물에 빠진 생선은 아무래도 맛을 모르겠다.
“봄에 먹는 도다리가 보약이야. 된장 살살 풀어서 쑥 넣고 끓이면 죽은 소도 벌떡 일어난다잖아.”
죽은 소가 벌떡 일어날 리가. 그리고 소 살리는 건 낙지 아니었나. 수연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뭘 그런 걸 따지냐는 듯 정자가 손을 휘 흔들었다.
“나는 그거 있잖아, 엄마. 쑥개떡. 참기름 바른 거.”
“쑥개떡?”
“응. 그거 먹고 싶어.”
좀처럼 먹고 싶은 것을 말하지 않는 수연이기에 정자는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수연에게 말했다.
“하여튼 입맛 유별나. 어찌 그리 할머니 입맛을 닮았을까. 시어머니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내가 이렇게 시집살이를 해요.”
“아무튼 개떡 해 먹자. 내가 쑥 많이 뜯어올게.”
정자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는 흘리며 수연은 슬렁슬렁 걸었다.
마당 옆으로 뒷산으로 올라가는 야트막한 오르막길이 있었다. 오르막길 옆, 뒷마당에서 한 단 정도 올라간 자그마한 땅 한쪽에는 식당에서 쓰는 야채를 키우는 텃밭이 있고, 한쪽에는 닭장이 있었다.
그 경사면으로 더 올라가면 쑥과 머위가 지천으로 돋아난 땅이 있었다. 수연이 느릿하게 흙길을 오르는데 뒤에서 정자가 큰 목소리로 물었다.
“돼지고기도 한 덩이만 삶을까?”
“아니이-.”
“고기를 먹어야 힘을 쓰지!”
“됐습니다아-.”
대답을 하고 수연은 평평한 곳을 골라 쪼그려 앉았다. 연한 쑥을 골라 한참을 뜯는데 진돌이가 웡웡 짖었다. 그 소리에 답이라도 하듯 언덕 아래서 크르릉 크르릉 거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길 아래를 굽어보자 저 아래 진입로로 들어오는 동만의 하얀색 1톤 트럭이 보였다.
[수연 가든]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로 크게 써서 세워 놓은 입간판 앞에서 트럭이 잠시 멈춰 섰다. 원래는 저수지의 이름을 따서 흥복 가든이었는데, 수연이 태어난 뒤 아버지가 간판을 바꿔 달았다고 들었다.
트럭의 창문이 끝까지 내려가고, 그 안에서 동만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수연 가든이라는 직설적이고도 낯 뜨거운 이름을 지은 장본인인 동만은 간판 앞에서 뿌듯한 표정이었다. 길 아래의 동만이 수연을 올려다보며 크게 외쳤다.
“우리 공주님, 쑥 뜯는겨? 좀 더 자지 않고.”
수연 가든만큼, 아니 그보다 더 낯부끄러운 호칭이지만 그러려니 한다. 적어도 지금은 다른 사람 앞은 아니니까. 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운동 겸 잠깐 나왔어. 아빠 늦었네? 아침에 올 줄 알았는데.”
수연도 소리를 높여 대답을 했다.
“손님 데리고 오느라고. 이따 또 나가 봐야지.”
동만이 크게 대답을 하고 다시 부르릉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아버지의 트럭이 힘차게 수연 가든을 향해 오르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리다 진입로로 들어오는 짙은 회색의 SUV를 바라보았다.
점심 손님인가.
“수연 엄마, 별채 전부 내줘야겠어. 저수지 공사하러 왔다는데 식사도 같이할겨.”
트럭에서 내리며 동만이 크게 말했다.
“손니임? 식사도 같이한다고? 얼마나 있다 가는데?”
정자가 국자를 든 채로 부엌 쪽문을 열고 나왔다. 수연은 잡풀 사이를 헤쳐 넓게 퍼진 쑥의 뿌리 쪽 줄기를 찾아 똑똑 꺾었다. 막내가 없는 날이니 올라오는 손님이 점심을 먹는다면 얼른 뜯고 내려가 엄마를 도와야 했다.
빠르게 몇 번을 더 꺾은 뒤 수연은 허리를 폈다. 아직 바구니가 차려면 한참 멀었지만 수연은 손을 털었다. 개떡에 쓸 쑥은 나중에 뜯어도 될 테니, 일단은 이 정도만 하고 내려가 엄마를 도울 생각이었다.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샛길 진입로로 들어온 짙은 잿빛의 SUV가 수연 가든의 입간판 앞에서 아예 멈추어 서는 것이 보였다. 동만의 트럭이 멈춰 섰던 자리에 똑같이 멈춰 서서는 뭘 하는지 가만히 서 있었다.
확인차 간판이라도 읽는 건가.
곧 움직이겠거니 생각하며 수연은 터덜터덜 걸었다. 그런데 간판을 읽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지만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차가 고장 난 건가.
의아해진 수연은 고개를 돌려 SUV를 내려다보았다. 길게 내려온 꽃무늬 모자의 챙을 들추고 미간을 모아 차를 바라보는데, 햇빛을 반사하던 운전석의 창문이 지이잉 아래로 내려간다.
창문이 내려간 자리에 한 남자가 보였다. 체격이 좋고 머리카락이 짙다.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바라보던 수연의 눈이 커다래졌다.
장태산?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조차도 당황스럽다. 어쩌면 이렇게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지.
수연이 황망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는데, 차 안의 태산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너털웃음을 웃고 있었다. 때마침 수연의 엉덩이에 걸려 있던 작업 의자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10년 만의 재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