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4
4. 한 달
흥복 저수지가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 위치한 수연 가든에는 세 개의 건물이 있었다. 가운데 단층의 긴 건물이 민물 매운탕을 파는 식당, 왼쪽의 건물은 식구들 지내는 2층 가정집, 오른쪽에는 두 개의 단독 공간으로 지어 놓은 황토방 별채. 동만은 태산을 별채로 안내하며 말했다.
“어때요, 이만허면 지낼 만하겠죠? 안을 보면 알겠지만 처음부터 민박용으로 지은 것은 아니고, 우리 마나님하고 공주님 뜨끈뜨끈 등 지지라고 황토방으로 공들여 지은 것인데……. 우리 따님이 요양하느라 잠깐 내려와서 쓰는 중이요.”
동만이 별채의 방문에 열쇠를 꽂으며 말했다. 열쇠를 넣어 돌리니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산은 공주님, 이라는 말에 잠깐 안채로 시선을 두었다가 거두었다. 동만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쪽에 펼쳐진 담요를 보고는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엊저녁에 쌀쌀하길래 몸 녹이라고 불 때 줬더니 요 자리에서 책 읽으며 귤 까먹었나 보네.”
동만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나는 것을 보며, 태산은 허리를 살짝 굽혀 낮은 문의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아랫목으로 보이는 곳에 짙은 자주색의 담요가 놓여 있다. 담요 위에는 분홍색으로 커다란 꽃이 피어 있고, 그 옆에 놓인 함지박에 주황색의 귤껍질이 담겨 있었다. 펼쳐서 엎어 놓은 책 한 권과 자그마한 블루투스 스피커가 수연의 지난밤을 말해 주었다.
태산은 고개를 숙여 안으로 들어갔다. 동만이 얼른 담요를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책과 스피커를 주워 들며 말했다.
“네 분이라 하셨으니 두 분이 이쪽 쓰시고, 두 분은 옆방을 쓰시면은 딱 좋겠는데. 어때요, 마음에 드시남?”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며 동만이 물었다. 태산은 방 안을 휘 둘러보았다. 황토 특유의 주황색 벽돌을 그대로 살린 방은 출입문이 낮았지만 아늑하니 깨끗했다. TV도 있고 이불과 옷을 수납할 수 있는 커다란 장도 있었다.
“예, 좋은데요. 방마다 따로 화장실도 있어서 편하겠어요.”
옆방 끝에 보이던 화장실을 떠올리며 태산이 말하자 동만이 박수를 짝하고 쳤다.
“아, 그게 내가 우리 마나님 반대를 무릅쓰고 화장실도 하나씩 넣었거든. 손님들 쓰기도 편하고, 나중에 우리 공주님이 결혼해서 토깽이 같은 손주 델꼬 친정에 내려오면 여기서 편히 지내라고. 어때, 옆방도 보여 드릴까?”
이수연의 별명은 공주님이며, 아파서 요양차 본가에 내려왔고, 남자친구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아직은 미혼이라는 것을 수연 가든에 들어온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수연이 안다면…….
태산은 미소를 지었다. 정색하며 싫어할 수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차분한 목소리로 ‘아버지, 그만요.’ 하고 말할지도 모르지. 이렇게 술술 불어 주는 아버지가 계신 줄 알았으면 그 옛날 수연이 궁금했던 시절에 한번 찾아와 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아뇨, 옆방은 안 봐도 괜찮습니다.”
“마음에 안 차는가?”
“아닙니다. 훌륭합니다.”
태산의 흔쾌한 대답에 동만이 마음 놓았다는 듯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태산은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수연이 아니었어도 머물고 싶은 곳이다.
창문 너머 내려다보이는 저수지 풍경이 아름다웠고, 저수지를 둘러싼 산의 푸르름도 눈을 시원하게 했다. 물이 새는 제방 현장과도 가깝고 장비를 실은 트럭들이 차를 돌릴 수 있을 만큼 마당도 널찍했다. 모텔이나 여관에 비하면 손이 타지 않은 방도 마음에 들었다.
“식대와 숙박비는 보름치는 선불, 나머지는 후불로 정산하려 하는데, 괜찮으세요?”
“우리야 좋지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여기 명함 한 장 드릴게요. 급한 일은 이쪽으로 연락 주십시오.”
명함 한 장을 받아 든 동만이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태산이 마음에 든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태산은 잠시 뜸을 들이다 동만에게 물었다.
“혹시 수연 가든의 수연이 따님 이름일까요?”
“그렇소만?”
“그럼 혹시 따님께서 한국대 행정학과…….”
태산의 말에 동만의 눈이 커다래졌다.
“우리 수연이를 아는겨?”
“학교 동문입니다. 아까 올라오다 잠깐 봤는데 아무래도 같은 사람 같아서요.”
태산의 설명에 동만이 태산의 두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아이구, 여기서 수연이 대학 동창을 다 만나다니. 그냥 장 팀장님인 줄 알았더니 한국대 나온 장 팀장님이셨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나온 사람을 몰라보고. 어쩐지 훤칠허니 시원시원하다 했소.”
“칭찬 감사합니다.”
“아이구야, 우리 공주님 동창이라는데 이럴 게 아니라 내 고기 반찬이라도 한 점 올려 달라 해야겠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은 동만이 급하게 신발을 신었다. 가든 쪽으로 올라가며 크게 외친다.
“수연아, 수연아! 잠깐 나와 봐라.”
수연을 부르는 동만의 목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태산은 빙그레 웃으며 창문틀을 손으로 짚었다. 허리를 조금 굽혀 창문 너머 풍경을 바라보았다.
“경치 좋다.”
태산은 아래로 보이는 저수지를 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저수지를 둘러보던 태산의 눈길이 ‘수연 가든’이라는 입간판에 머물렀다. 입구에서 수연 가든이라는 네 글자를 봤을 때만 해도 설마 했는데.
이수연이라니.
챙이 넓은 모자를 푹 내려쓰고는 안채로 쏙 들어가 버린 수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엉덩이 방석을 달고 현란한 꽃무늬 몸빼바지를 입고선 황당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었다. 이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하면 수연은 어떤 표정으로 그를 볼지, 내심 기대가 된다.
“장 팀장, 건너와요. 점심부터 먹읍시다.”
마당 너머에서 동만이 손짓을 했다. 태산은 허리를 펴고 크게 대답했다.
“예, 건너가겠습니다.”
수연에게는 언제쯤 인사를 건넬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예, 건너가겠습니다.”
태산의 목소리가 우렁차다.
수연은 아직도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고 나갈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었다. 공무원 생활 8년차, 어지간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는 수연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10년 만에 마주친 태산에게 엉덩이 의자와 꽃무늬 바지를 보인 것도 그렇지만, 더 후회되는 건 고개 푹 숙이고 도망치듯 숨어 버린 일이다.
그냥 그 자리에서 모자 벗으며 인사를 할걸. 담담하게 여기는 어쩐 일이냐고 말을 할걸. 뭐가 그렇게 부끄럽고 민망하다고 고개 숙여 도망쳤을까.
고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을까, 그냥 나갈까, 옷을 갈아입으면 뭘 입어야 하나. 눌린 머리는 어떡하지.
결국 모자도 벗고 바지도 갈아입고 머리도 다시 빗었지만 수연은 쉽사리 현관문을 열지 못했다.
“후우…….”
깊게 숨을 쉬어 보지만 막막한 건 여전하다. 차가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그냥 집에서 나가지 말까 고민을 하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수연아!”
“깜짝이야.”
동만이 화들짝 놀란 수연을 보더니 금세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많이 놀란겨? 아부지가 너무 크게 불렀지? 얼굴이 왜 이리 하얗게 질렸어? 우리 공주님 청심환 먹어야 되는 거 아녀?”
수연이 딸꾹질만 해도 응급실을 찾는 동만이었다. 어릴 때 수연이 뇌수막염을 앓는 줄 모르고 해열제만 먹였던 일을 동만은 두고두고 자책을 했다. 고열로 경기를 일으키며 까무룩 넘어가는 수연을 동만이 맨발로 업고 달린 이야기는 동네에도 유명했다.
아버지의 유난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수연은 자라며 오히려 침착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재채기만 해도 독감일까 안절부절못하는 아버지를 둔 사람이라면 아마 이해할 것이다.
“막 나가려던 참인데 열리니까 조금 놀란 거야. 청심환까지는 아니야.”
“손님 왔는데 하도 안 건너오기에 무슨 일 있나 했지.”
“무슨 일은. 옷 갈아입느라 그랬지.”
“그래? 아, 글쎄. 수연아.”
동만이 무슨 말을 하려 추임새를 넣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을 하는 수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동만에게 말했다.
“손님이 나를 알지?”
“너도 아는겨? 네 동창이라는데 내가 깜짝 놀라 버렸네. 어찌 아는 이야? 많이 친했던겨? 성격 시원시원하니 좋던데.”
아버지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 어렸다. 남자친구를 데려오는 것은 고사하고, 연애를 해 본 적은 있는지, 마음에 담아 둔 사람이 있는지조차도 절대 내색하지 않는 수연이기에 더 궁금한 듯했다.
수연은 유난스럽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저 얼굴과 이름 정도 아는 사람이라는 듯 조금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냥. 교양 수업 한 번 같이 들었어. 과제 한 번 같이했고.”
여상한 목소리로 설명을 하며 제일 낡은 슬리퍼를 꺾어 신었다. 그리고 문을 먼저 열고 아버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안 나가?”
“그러고 인사하게?”
동만의 눈이 수연의 아래위를 훑었다. 집에서 입는 편한 니트 티와 그 위에 걸쳐 입는 얇은 누비 조끼, 무릎이 튀어나온 낡은 청바지가 수연의 복장이었다.
“그럼 따로 차려입나?”
무심하게 말하며 앞장서는 수연을 보며 동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은 예쁘게 꾸미고 조금은 화사하게 입어도 좋으련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내미는 언제 어디서고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아, 같이 가.”
뒤를 쫓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수연은 고개를 들었다. 태산이 마당에 서서 다가오는 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훤칠한 키, 넓은 어깨, 짙은 머리카락. 단단한 눈빛과 보기 좋은 미소. 수연은 잠시 10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이네.”
수연이 먼저 말을 건넸다. 담담하게 건네는 인사에 태산이 답했다.
“그러게. 오랜만이다.”
악수라도 청할 듯 손을 내밀려다, 주먹을 꾹 쥐고는 태산이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정말로 우연히 만난 옛 동창처럼 묻는다.
“잘 지냈어?”
“응. 너도 잘 지냈지?”
“응. 잠깐만.”
태산이 재킷의 안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내고는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사실은 어색하기 그지없는 인사가 아버지 동만의 눈에는 평범해 보이기를 바라며, 수연은 명함을 받았다.
“난 지금 가진 명함이 없는데.”
“나중에 줘.”
“그래. 배고프겠다. 식사하러 들어가 봐.”
수연이 패딩 조끼의 주머니 안에 명함을 넣으며 태산에게 말했다.
“시간 되면 이따 커피나 한잔하자.”
태산이 선선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하는 말일 것이다. 수연도 그냥 하는 대답을 했다.
“그래.”
“수연이 너는 같이 먹지 않고? 엄마가 밥상 봐 놨던데.”
돌아서려는 수연에게 동만이 물었다.
“이따 편하게 먹을래요.”
밥을 같이 먹을 정도로 편한 사이는 아니라는 의미를 담은 말을 하며 수연은 태산을 흘끔 보았다. 태산이 수연을 보고 있었다. 슬쩍 웃는 것 같은 표정이다.
우리가 편한 사이는 아니잖아.
수연은 눈으로 말을 하며 태산을 보았다. 태산의 한쪽 눈썹이 살짝 들렸다가 내려왔다. 입을 다물고 있는데도 그런가? 라고 되묻는 태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럼 먼저 먹겠습니다. 곧 작업팀이 도착할 시간이라서요.”
“그려, 얼른 먹고 가 봐야지. 어서 들어요.”
동만의 말에 태산이 큰 걸음으로 가든 안으로 들어갔다. 동만이 수연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작게 속삭였다.
“불편하면 받지 말까? 홍관네로 가라고 해도 되는데.”
수연은 순간 ‘응.’ 하고 대답을 할 뻔했다. 일주일짜리 구남친을 10년 만에 만나 불편하고 어색하니 제발 그래 달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구남친의 구, 자만 꺼내도 아버지는 뒤로 넘어가시겠지. 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불편할 것도 없어. 그냥 편한 게 아니라 그렇지.”
마주하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내쫓기엔 오랜만에 맞은 숙박 손님이다. 어쨌든 공사를 하러 왔다니 일주일 정도는 머물 터. 비수기인 지금, 부모님에겐 반가운 손님이었다.
“그리고 뭐, 며칠이나 있겠어.”
수연이 조끼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돌아서는데 동만이 중얼거렸다.
“그치. 길어야 한 달이지, 뭐.”
동만의 말에 수연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 * *
무슨 밥을 이렇게 오래 먹어.
툇마루에 앉은 수연은 가든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밥을 다 먹었겠지 싶어 방에서 나왔는데, 태산은 여전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저수지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든 가든의 통유리창은 태산의 밥 먹는 모습을 생중계하는 창이 되었다. 특유의 시원시원한 동작으로 엄마가 건네주는 숭늉 그릇을 받아 마시고 있다.
참 달게도 먹는다.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어 수연은 피식 웃었다. 예전에도 그랬었지. 하도 밥을 맛있게 먹어서, 멍하니 바라보았던 적이 있었다. 학생 식당의 이 떡진 밥이 그렇게 맛있었나, 의아함을 품고서 다시 맛을 볼 만큼 태산은 밥을 달게 먹었다.
덕분에 늘 배가 고픈 고학생인 줄 알았지.
물어보지도 않고 지레짐작으로 그렇게 오해를 했었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은 방학 내내 시멘트 포대를 지고 날라서 그런 거라기에 자신보다 더 힘들고 가난한 고학생인 줄만 알았다. 부모님이 보내 주시는 용돈과 생활비가 빠듯해서 아르바이트를 달고 사는 줄 알았다.
‘괜찮으면 복숭아 좀 가져갈래?’
어느 집 아들인지 까맣게 모르고 건넸던 말.
저렇게 잘 먹는 애가 집에 가면 뭐 먹을 게 있긴 할까. 혼자서 과일은 챙겨 먹긴 할까 싶어서 충동적으로 말을 했었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까만 비닐봉지에 군데군데 상처 난 복숭아를 가득 담아 주었던 그날을 생각하면 괜히 부끄럽다.
후. 어쨌든 그건 이제 다 지난 일이고.
수연은 깊게 숨을 쉬며 떠오르는 기억을 떨쳤다. 지금 중요한 건 저 장태산을 홍관 아저씨네로 보내는 거였다. 한 달이나 머무는 줄 알았으면 잠깐 얘기부터 하자고 했을 텐데, 또다시 제멋대로 착각을 해 버렸다. 길어 봤자 일주일이라는 생각은 대체 무슨 근거로 들었던 걸까.
수연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사이 태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하는 건지 무어라 말을 하며 빈 그릇을 엄마에게로 날라 준다. 그릇을 받는 엄마 얼굴에 웃음이 함박 담겨 있다. 좀처럼 활짝 웃는 법이 없는 엄마인데, 대체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태산이 나오면 뭐라고 말을 할까. 일단 차를 마시자고 해 봐야겠지. 엄마 아빠 앞에서 너 나가라고 말을 할 순 없으니까.
‘커피 한잔할까?’
‘커피 한잔할래?’
‘차 마실까?’
‘차 한잔해.’
어떤 대사가 조금이나마 담백해 보일까 고민을 하며 수연은 툇마루에서 일어섰다. 진돌이를 보러 나온 것이 마치 목적인 것처럼 우선 별채 옆 마당 한편에 있는 진돌이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웡!”
산책이라도 가는 줄 알았는지 바닥에 누워 있던 진돌이가 벌떡 일어났다. 펄쩍펄쩍 뛰자 앞발이 가슴께까지 올라왔다.
“아니야. 누나 산책 가는 거 아니야.”
“웡!”
“조금 있다 가자. 이따가 누나 점심 먹고.”
말귀를 잘 알아듣는 진돌이가 이제는 누워 배를 보였다. 쓰다듬어 달라는 듯 끙끙거리며 본다. 수연은 쪼그려 앉아 진돌이를 쓰다듬으며 곁눈질로 흘끔흘끔 태산을 보았다. 태산이 드디어 가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커피 한잔할까.’
머릿속으로 대사 연습을 한 뒤 수연은 무릎을 털며 일어섰다. 밖으로 나온 태산이 수연을 보고는 싱긋 웃는다. 아직 좀 멀어. 조금 더 가까이 오면 말하자. 5미터, 4미터, 3미터. 이제 조금만 더. 수연이 막 입을 열려고 숨을 쉬었을 때였다.
빠바바밤 빠바바밤.
어디선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커다랗게 울려 퍼지고, 태산이 빠른 동작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예, 차장님. 예, 방금 확인했습니다. 일단 관을 묻어서 물 빠지는 양을 좀 봐야겠고요, 예. 아무래도 왼쪽 산기슭 쪽이 의심되는데. 예, 제일 김 사장님 곧 도착하시고 시멘트도 도착합니다. 예, 지금 출발하려고요.”
통화를 하며 태산이 수연을 본다. 눈을 맞추고 빙긋 웃더니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는 성큼 지나쳐 갔다.
“아뇨, 바로 가겠습니다. 예, 잠깐 철물점 들러서 주문해 놓고 바로 가겠습니다.”
삐비빅 차의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산이 훌쩍 차에 타더니 금세 부르릉 떠나 버린다. 수연은 그렇게 태산이 멀어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봐야 했다.
저수지 제방 위로 커다란 기계들이 트럭에 실려 올라왔다. 시멘트 포대를 가득 실은 트럭들도 차례로 도착했고, 굵은 쇠파이프 같은 것들도 저수지의 제방에 잔뜩 놓였다. 작업복을 입은 남자들이 분주히 제방 위를 오가고, 양복을 입은 공무원들도 여럿이 오갔다.
오후 내내 마당의 평상에 앉아 아래 저수지를 내려다보던 수연은 결심했다는 듯 신발을 고쳐 신었다. 가슴줄을 들고 진돌이에게로 다가가자 산책을 가는 줄 아는지 반갑게 짖는다.
“가 보자, 진돌아.”
저 사람들이 수연 가든으로 올라와 짐을 풀어 버리면 늦는다. 진돌이와 산책을 하는 척 저수지를 돌다가 우연인 듯 말을 하는 거다. 커피 한잔할래, 라고.
아니다. 커피를 마시러 나갈 처지가 아니겠지. 그냥 잠깐 보자고 해야겠다. 그리고 바로 용건을 건네자. 수연은 진돌이의 몸에 하네스를 채우며 계획을 세웠다.
“어어, 그쪽 아니고, 진돌아! 진돌아!”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수연은 숨을 헐떡이며 진돌이에게 끌려갔다. 오만 나무의 냄새를 다 맡으며 땅을 파 버릴 기세로 킁킁거리던 진돌이 제방 아래에 서 있는 동만을 발견하고는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쪽 아니라 저쪽. 진돌아, 진돌아아!”
태산이 있는 쪽으로 가슴줄을 끌어당겨 보지만, 이미 아버지를 본 진돌이가 순식간에 제방 옆의 흙길을 타고 내려간다. 힘이 어찌나 센지, 수연은 어어어 소리를 내며 딸려 갈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 진돌이 산책 나온겨?”
반갑게 인사를 하는 동만의 곁에는 이장님 이하 동네 아저씨들이 잔뜩 서 있었다. 양복을 입은 모르는 사람도 여럿 끼어 있었다. 모두가 시선을 모아 숨을 헐떡이는 수연을 무슨 일인가 하고 바라보고 있다. 수연은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하네스의 줄을 꽉 잡았다.
“운동도 할 겸 나와 봤어요. 안녕하세요.”
숨찬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수연아, 인사 안 드렸지? 이쪽은 농어촌공사 충남지부 본부장님. 인사드려.”
“안녕하세요. 이수연입니다.”
“아, 그 사무관 따님? 아이구 자랑스럽겠습니다.”
동만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수연이가 어릴 적부터 똘똘해서 동네에서 유명했죠. 아 글쎄 그 흔한 과외 한 번 안 받고 한국대를 떡 하니 붙어서는! 돼지 한 마리 잡아서 잔치 벌인 것도 성에 안 찼는지 아니,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떡 하고 행정고시를 붙어 부러! 그때 기냥 이 사람이 얼마나 좋았던지 소 한 마리를 잡아 부렀지요! 연서면의 자랑 아닙니까. 하하하하!”
수연을 자랑하는 이장님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그 옆에 서서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만과 하도 들어서 이제는 그만 듣고 싶다는 표정의 동네 아저씨들 앞에서 수연은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땅굴을 파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 이럴 게 아니라 모두 우리 집으로 올라가십시다! 이것도 인연인데 조촐하게 한 상 차려서 막걸리 한잔하시죠.”
동만이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수연은 그 말에 눈에 힘을 주어 동만을 바라보았다. 아빠, 그러지 말아요. 일 벌이지 말아요. 간절한 자신의 마음이 텔레파시로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왜, 수연이 아부지한테 할 말 있는겨?”
눈치 없는 동만이 크게도 물어보았다. 수연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대답을 했다.
“아니요, 이제 들어가 보려고요.”
“그려. 날이 쌀쌀해. 얼른 들어가.”
“네.”
사람들 앞이라 존댓말을 하면서, 수연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속으로는 돌아가는 길에 태산에게 인사를 할 수 있을까 가늠해 보았지만 무리일 것 같다. 일부러 저 위에까지 돌아가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일단은 후퇴다.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올 때를 노려보아야겠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진돌아, 가자.”
진돌이에게 질질 끌려 올라가는데, 저수지 위에서 태산이 손을 흔든다. 저 태평한 인사라니. 너는 내가 불편하지도 않니. 수연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을 때, 부르릉 들려오는 트럭 소리에 누워서 핸드폰을 보던 수연은 벌떡 일어났다.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커피……!’
빠르게 창문의 블라인드를 들춰 밖을 보는데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커다란 5톤 트럭이 빙그르르 마당을 돌고 있었다. 바퀴를 따라 흙먼지가 일면서 앞이 뿌예진다. 손님에게 익숙해져 어지간해서는 짖지 않는 진돌이도 놀랐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웡웡 짖었다.
마당 한편에 트럭이 멈추고, 운전석의 문이 열리더니 시멘트가 군데군데 묻은 작업복을 입은 태산이 가볍게 뛰어내렸다.
지금이다. 기회는 지금뿐이야.
수연은 현관으로 빠르게 달려가 신발을 신었다. 뿌연 흙먼지를 헤치며 태산에게 다가갔다. 작업복을 툭툭 털던 태산이 수연을 보고는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커피, 장태산, 나랑 커피…….”
마음이 급한 수연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조수석의 문이 열렸다. 60대의 아저씨 한 분과 젊은 남자 한 명이 차례로 내렸다. 아저씨가 먼저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며 말했다.
“장 팀장, 여기여? 깨끗하니 좋네.”
“예, 김 사장님은 성 기사님이랑 오른쪽 방 쓰시고요, 박 대리가 나랑 같이 쓰지?”
태산이 대답하며 눈으로는 수연을 본다. 그리고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묻는다.
“커피?”
늦었어. 늦었다고.
수연은 신음을 삼키며 태산을 보았다. 영문 모르는 표정으로 태산이 마주 본다. 수연은 시선을 돌려 태산의 동료들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양말을 벗고 가방을 풀고 세면도구를 꺼내고 있었다.
“지금?”
태산이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수연에게 물었다. 그 말에 수연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좀 힘든데.”
태산의 난감한 표정에 자괴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10년 만에 만나 어떻게든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어 안달복달 난 여자처럼 보였을까. 아아, 망했다.
“아니. 지금은 무슨. 나중에 시간 되면. 그냥 할 말이 있어서.”
수연은 지금 당장의 체면을 위해 둘러댔다. 나중에 할 말이 뭐냐고 물으면 아무 말이나 둘러대야지.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걸. 헐떡거리면서 뛰어와 더듬거리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괴로워진다. 장태산이랑 커피 같은 건 마실 생각도 없었는데. 대체 뭐라고 둘러댄담.
수연이 후회하며 돌아서는데 줄줄이 마당으로 차가 들어왔다. 트럭도 있고, SUV도 있고, 승용차도 있다. 그 차들에서 아버지가 내리고, 이장님이 내리고, 아까 보았던 농어촌공사의 본부장님과 직원도 내렸다. 순식간에 마당이 북적북적해진다. 동만이 짝짝 박수를 쳐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 후 크게 말했다.
“자아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데, 오늘은 제가 한턱 쏘겠습니다. 다들 안으로 드시지요. 어이, 장 팀장도 얼른 씻고 건너와요.”
“예, 금방 가겠습니다.”
동만의 부름에 태산이 넙죽 대답을 했다.
“수연 엄마, 매운탕 대짜로 네 개는 놔야겠어. 이제부텀은 우리 집이 본부여, 흥복 저수지 그라우팅 공사 대책 관리 본부.”
장태산도 모자라 대책 관리 본부라니. 복직을 앞당기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동만의 흥에 겨운 목소리를 들으며 수연은 터덜터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