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112
하지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바로 합성인간 중에서 성자 르데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대중이란 어리석죠. 일반 평민들 입장에선 합성인간이니 뭐니 떠들어봤자 그게 뭔지 파악할 지식도 없습니다. 그건 길,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성자 르데앙이라는 휘광도 있으니 합성인간이라는 브랜드는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
“성자 르데앙 덕분에 무지(無知)가 득(得)으로 작용한 겁니다. 하지만 그건 합성인간의 제작법과 연관 지식이, 사악한 흑마법이 저희의 탄생에 주효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을 때에만 유효합니다.”
“그래서… 그 자료를 탈취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고?”
사실, 전혀 아니다. 내 개인적인 호기심을 만족하기 위해서 떠난 거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내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할 수 있으면 거짓말 따위야 얼마든지 해주마.
“그렇죠. 합성인간의 제작법과 연관지식은 누구도 알지 못하게 어둠속으로 사라져야 합니다. 당신들에게 준 자료도 그와 관련된 지식은 하나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럼 흑마법사를 제외하면 누구에게 있지?”
“제 머릿속, 그리고 겨울 하늘을 떠다니는 잿가루에 있죠.”
“…….”
툭!
“웨일. 이건 뭐냐.”
아본이 내게 가죽 포대를 하나 던졌다. 그 안에는 형제들의 피부에 그려진 생명력 흡수 마법진을 도려낸 피부가죽 180매가 진공포장되어 담겨있었다.
나는 포대에서 피부 가죽을 꺼내 문신이 그려진 부분을 가리켰다.
“흑마법의 유산입니다. 정상적인 삶을 살려는 데, 혹시 모를 위험성을 남겨둬선 안 되는 법이죠.”
“그래서 밤을 틈타 그들의 숙소에 방문했다? 그 삼엄한 감시를 뚫고?”
“뭐 어려울 거 있습니까? 뭐든지 궁지에 몰리면 통하기 마련입니다.”
“끙……!”
아본이 두터운 손바닥을 들어 안면을 덮었다. 나는 그를 달래듯이 말했다.
“쉽게 생각해 보시죠. 당신들은 인간을 믿습니까? 저는 아닙니다.”
“엉뚱한 소리를 하는군. 우리는 지금 인간성을 가지고 토론하자고 모인 게 아니야.”
“아뇨. 맞습니다. 왜냐하면, 성자 르데앙이 합성인간이니까요. 마법사들이 과연 그 제작법을 흑마법이 아닌 일반 마법으로도 가능하게 고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습니까? 성공하기만 하면 성자가 탄생하는데?”
“…….”
“수백 수천 명이 인체실험으로 희생당하고, 수만 명의 태아가 태어나지도 못하고 ‘실패’라는 딱지를 달고 쓰레기통에 버려진다면? 그리고 그 대가가 단 한 명의 성자의 탄생이라 하신다면… 정말로 권력자들이 합성인간 제작법을 가만히 내버려둘 것 같습니까?”
“……!!”
물론 그 짓거리를 해도 르데앙의 탄생은 불가능하다. 인조생명체는 세대를 계속하며 이어진 영혼의 역사가 끊기기에 마나 친화력이 극도로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걸 보완하기 위해서 악신의 신체 부위가 필요하다. 거기에 초능력자이자 성자인 션의 세포도 들어갔기에 우리와 같이 잠재능력이 뛰어난 실험체가 탄생한 거다.
하지만 거지같은 르암인의 기술 수준으로 그 지식을 알 리가 없고, 그들은 ‘어쨌든 불가능하다’라는 결과 값이 나올 때까지 수만, 수십만이 넘는 생명체를 만들고 죽이겠지.
“하지만 이제 그게 불가능해졌습니다. 논문도 불타 사라지고, 고급 지식을 보유한 장로 급 흑마법사도 몽땅 죽었죠. 합성인간 제작법을 아는 건 이 세상에서 저 하나뿐입니다.”
“허, 너, 너는 대체…….”
길이 더듬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을 압박하며 단호히 말했다.
“아시겠습니까? 당신들이 뭐라고 하던 알바 아닙니다. 저는 제 목적을 달성했고, 그로 인해 앞으로 허망하게 태어나고 죽을 수십 만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저는 그 사실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뚜벅뚜벅!
나는 길의 앞으로 걸어갔다. 길은 멍한 표정을 지은 채, 내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툭!
비키시죠! 라며 길의 가슴을 밀었다. 길은 허수아비처럼 옆으로 밀려났다. 나는 그들을 뒤로하고 감옥을 떠났다.
아본이 감옥을 떠나려는 나를 말렸다.
“웨일, 기다리게.”
“어째서요.”
“맨몸으로 서이바람 숲까지 도보로 여행하는 것은 힘들어. 봄이 오면 서이바람 숲과 가까운 항구로 배가 가니, 그때까지 여기에 머물러주게나.”
“흠…….”
나는 어물거리는 길과 아본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툭 내뱉었다.
“저 똥같은 감옥에서요?”
길이 말했다.
“감옥이 ‘어쩔 수 없는 일’로 무너졌군. 수리를 해야겠어.”
“기왕 할 거 침대나 좀 좋은 걸로 놔주시죠.”
“세끼 고기도 배불리 먹여주지.”
“묶겠습니다.”
나는 표면상으로는 감옥에 갇혀서, 실제로는 길 아본의 보호를 받으며 4개월을 지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슈타펜드에도 봄이 왔다. 나는 서이바람 숲을 목전에 둔, 틴탑이라는 항구도시로 향하는 배를 탔다.
* * *
뿌아앙!
배의 종류는 모른다. 그들은 ‘투암쿠아레 급’이라고 부르는데 투암쿠아레가 뭔지 내가 알 게 뭐야. 일단 겉모습은 역사책에서 지긋지긋하게 본, 중세시대의 뚱뚱한 배와 비슷했다.
사실 에레스발다의 ‘선박’은 내가 아는 지구의 잣대를 들이밀기가 뭐하다.
그 이유는, 에레스발다의 배는 프로펠러로 추진력을 얻지 않는다. 그들은 배의 밑바닥에 프로펠러가 아니라 원뿔형의 마법도구를 달았다. 그 원뿔형의 마법도구 밑변은 스피커처럼 미세한 구멍이 뽕뽕 뚫려있었다.
‘푸셔’라고 이름 붙여진 마법도구는 ‘밀어내는’ 마법회로가 그려져 있다. 미는 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소음도 없고, 에너지 효율도 가스 터빈보다 월등하다.
은근히 원시적인 주제에 마법의 힘을 이용하니 어떤 부분에선 구인류보다 뛰어난 부분이 있었다.
스크류는 회전하는 소음이 몬스터를 자극할 수 있어서 지구의 방식으로는 항해하지 못한다. 이곳 인간 나름대로 피와 시체로 산을 쌓아서 그들만의 고유한 선박기술을 만들어냈다.
그 탓에 에레스발다의 선박 제조기술과 그에 들어가는 고유한 마법 회로는 최고 기밀에 붙여져 있다. 물론, 나에겐 승천자의 감각이 있었다.
저벅저벅.
산책하듯이 갑판을 걸으며 배를 꾸준히 탐사하는 것만으로도 최고급 마법 지식을 공짜로 빼먹을 수 있다. 그렇게 마법 회로를 모조리 빼 먹은 뒤에, 배꼬리로 가서 푸셔를 구경했다.
“오!”
나는 푸셔에 익숙한 금속의 기운이 느껴지자 입을 오므려 놀라움을 표했다. 무려, 승천자 삼사드가 본 적이 있는 금속이다.
‘선씨늄이군.’
승천자의 발음은 다르지만 대충 지구식으로 아마추어 직역을 하면 위의 단어가 나온다. 선씨(sunsea), 말 그대로 태양과 바다의 금속.
심해저 사면에서 얻는 망간 기반 마법금속을 빛으로 제련하여 만든 1차 합성금속이다. 1차 합성금속답게 물처럼 마구 쓰이는 금속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에레스발다 입장에서 선씨늄은 고급 마법금속이다. 특히 심해저는 에레스발다조차 얼씬도 할 수 없는 초거대 괴수가 득시글거렸기에 대륙붕 근처에서만 자잘하게 채취하는 게 고작이었다.
에레스발다는 그 귀한 선씨늄으로 푸셔를 제작했다. 비록 통짜 선씨늄이 아니라 합금이지만, 저걸 만든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나는 에레스발다의 기술력을 느끼곤 감탄에 잠겼다. 항해를 시작한 지 3일째. 대강의 지식을 빼먹은 나는 갑판 끄트머리에 기대 푸른 바다를 구경했다.
휘이잉!
봄철에 들어선 선선한 바람, 탁 트인 경관, 그리고 새로운 지식을 아무런 위험부담 없이 몰래 빼먹는 개이득인 상황까지!
이게 바로 인생의…….
“우웁!”
후다닥!
인생의…….
“우웨엑!!”
후드득!
인생의 낙이 아닐…….
“꾸에엑!”
철퍽! 철퍽!
“아, 쫌! 모처럼 사람이 평화로운 분위기에 잠겨있는데!”
나는 내 옆에 기대 맹렬하게 토하는 가이노스에게 화를 냈다. 가이노스가 눈물을 글썽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게 뭐라 답할 힘도 없이, 내 윗도리로 입에 묻은 토사물을 닦기만 했다.
“웨, 웨일… 살려줘…….”
가이노스가 질질 짜며 내게 매달렸다. 한평생을 연구소에서만 살아온 순수 무균실 실험체에게 뱃멀미는 참기 힘든 고통의 연속이었다.
“어휴……!”
나는 한숨을 내쉬며 가이노스에게 남몰래 성력을 전해줬다. 가이노스가 그나마 말할 힘이 생겼는지 나를 붙잡고 애원했다.
“배… 배 쓰다듬어줘…….”
가이노스가 갑판 위에 쓰러지고 내게 배를 내밀었다. 연구소에 있을 때, 슬프거나 질질 짤 일이 있으면 나나 르데앙한테 자주 부탁하던 태도다.
하지만 그건 연구소고, 지금은 너도나도 사회인이잖니. 저거 봐, 사람들이 ‘어머!’ 소리를 내며 다들 구경하잖아.
“웨이일…,”
내가 고민하자 가이노스가 죽는소리를 냈다. 나는 배꼽을 칼을 쑤실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이리 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이러할까. 나는 성모가 된 심정으로 쓰러진 가이노스를 무릎 위에 눕히곤 상냥하게 배를 쓰다듬어 주었다.
가이노스가 안색이 조금 좋아졌나 싶더니만…….
“꾸웩!”
이 씨발 년이 내 얼굴에다 토를 해? 나는 가이노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차라리 기절해라. 그러면 너나 나나 좀 편해지겠지. 나는 가이노스가 기절할 때까지 목과 입을 막았다.
버둥버둥!
가이노스가 잠시 발버둥치더니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나는 쓰러진 그녀를 쓰레기 버리듯이 옆으로 치웠다. 그리곤 윗도리를 벗어 토사물을 털어냈다.
“꿰에엑!”
가이노스가 조용하니 르데앙이 지랄이다. 르데앙이 비틀거리며 내 옆으로 걸어와 바다로 뛰어들 듯이 갑판에 몸을 뉘이곤 엄청난 기세로 토사물을 쏟아냈다.
그런 뒤,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풀썩! 쓰러져서 마지막 인사말을 하듯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웨일… 나, 나 죽는 거야?”
“안 죽어. 그냥 뱃멀미야. 약 먹고 참으면 익숙해져.”
“왜, 왜 너는 멀쩡한 거야…….”
신체강화에 텔레파스 능력자라면 감각기관을 올바른 상태로 유지하는 게 기본이다. 그리고 굳이 초능력자가 아니라도 익스퍼트 이상의 고수라면 그와 비슷한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니 르데앙도 가이노스도, 경험 부족 때문에 뱃멀미에 시달리는 것이다. 나는 그에 관한 긴 설명을 하려다가 밀려 들어오는 피로감을 참지 못하고 안면을 감싸 쥐었다.
“너흰 대체 왜 따라온 거야…….”
가이노스는 신체에 엘프의 특성이 짙게 나타났다. 그래서 서이바람 숲으로 가는 김에 데려다 달라며 짐덩이를 넘겼다. 그러니 가이노스까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르데앙은 대체 왜?
“나, 나는…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고, 결정을 내리기 전에 세상의 넓음을 알고 싶어서…….”
오, 사회경험. 좋은 말이지. 하지만 굳이 나를 따라다니면서 고생할 필요 없이 에레스발다가 깔아준 편한 길을 밟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꼭 인생은 고생해야 얻는 게 더 많다고 생각하는 머저리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 르데앙도 그런 머저리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하니 앞날이 더욱 깜깜해졌다.
나는 먼바다를 바라보며 애수에 잠겼다. 앞으로 한두 시간이면 틴탑 항구에 도착한다. 그러면 이 고통의 시간도 끝이 나겠지.
“끄으응……!”
끝이 날 거야. 분명히.
* * *
틴탑(thintop).
직역이니 의역이니 할 것도 없이, 말 그대로 얇은 꼭대기란 뜻이다.
틴탑 항구는 감시자들이 모인 마을이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몬스터, 땅에서 몰려오는 몬스터를 감시하기 위해 높은 탑을 쌓고, 그 위에서 마법사들이 감시한 게 틴탑 항구의 시작이었다.
마법사들이 많은 덕분에 항구도시의 발전은 꽤나 독특했다. 일반 상업적인 항구가 아니라 마법사가 주를 이루고, 에레스발다와 본격적인 교역을 시작하며 그 과정은 더욱 가속되었다.
그 탓에 틴탑 항구는 마법사들이 많다. 그들은 수백 년에 걸쳐 감시마법을 발전시키고, 나중에는 등대의 역할까지 대신하게 됐다.
그만큼 빛과 파장, 빛에너지와 열에너지와의 상관관계, 빛―열―물질의 상호작용에 관해 높은 이해도를 보인다.
대양의 자유마법사. 그것이 틴탑 항구에 똬리를 튼 마법사들의 이명(異名)이었다.
그 뜻은…….
“틴탑 항구의 마법사들은 흑마법사와 연관이 깊다는 뜻이지.”
물과 멀미약을 챙겨온 마법사, 자낙스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그는 히드라 크라켄 퇴치 조에 나와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이번 항해에 함께하게 됐다.
나는 물과 멀미약을 가이노스와 르데앙에게 먹여주며 틴탑 항구를 떠올렸다.
“이번도 순탄치만은 않겠네요.”
대양의 자유 마법사. 정보보관소를 털며 얻은 정보에서 나온 이름이다. 솔은 흑마법사들과 한 다리 걸친 집단을 열거하다가 그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솔이 알 정도이고, 그 정보는 모조리 에레스발다에게 건네주었으니 에레스발다도 모를 리가 없었다. 즉, 이번 방문도 순수하게 교류나 거래를 목적으로 한 게 아니다.
에레스발다는 나를 비롯하여 자낙스, 수십 명의 고급 전투병으로 틴탑 항구를 좀먹는 흑마법사 협력자들을 은밀히 색출하고, 혹시 모를 폭력 사태를 막으려 했다.
‘한 번 바늘에 걸리니 아주 뼛속까지 고아 먹는 군.’
나는 에레스발다의 앙큼한 속셈을 눈치 채고 고소를 지었다.
연원이 없는 익스퍼트 급 고수, 거기에 서이바람 숲으로 향한다고 하니 냉큼 나를 적임자로 써먹는 그들의 행동은 참 뭐라 말하기가 모호했다.
어차피 가야할 1,000km의 고행길, 빨리 가서 고맙긴 한데 그 대가가 흑마법사와의 싸움이라… 나는 떠오른 게 있어서 자낙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흑마법사 판별 마법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게 있으면 일이 더 편하게 풀릴 텐데요.”
“1개월 전에 전서구를 통해 흑마법사 판별 마법을 보냈지. 지금은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구먼.”
“1개월 전이요?”
정보보관소를 습격한 일이 벌써 4개월 전이다. 그러면 3개월 동안 이놈들은 뭔 헛짓거리를 한 거지? 내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자낙스를 바라보자 그가 변명했다.
“설마 연원을 알 수 없는 마법을 인체에 무작정 쓰라는 말인가? 우리도 나름대로 유해성을 검증할 시간이 필요했네. 사실 3개월도 짧아. 흑마법사의 처치가 최우선이 아니었으면 그 몇 년은 족히 걸렸을 거야.”
“…….”
그래. 신약 개발도 몇 년이 걸리는데 회복 계열의 마법을 퍼트리는 데 3개월이 짧다고 우는소리를 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마법 통신은요? 틴탑의 반응은 어땠죠?”
“마법 통신도 만능은 아니야.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데 그게 그리 쉽게 되겠나?”
“그래도 아예 안 하진 않았을 겁니까.”
자낙스가 곤란한 얼굴을 하며 코를 긁었다. 나는 그의 반응이 심히 불길하여 자낙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그가 먼바다로 고개를 돌리며 작게 말했다.
“사실 저저번주 까지는 평범했는데… 갑자기 저번 주부터 연락이 끊겼어.”
“…그 ‘연락이 끊긴, 흑마법사가 암약하고 있는 항구’에 대놓고 배를 보낸다고요? 무슨 함정이 있을 줄 알고?”
이럴 땐 에레스발다나 르암인이나 참 한결같다는 생각이 깊게 든다.
에레스발다가 웬 정신으로 틴탑 항구로 자신만만하게 배를 보냈을까. 이 정신 나간 상남자 종족의 사고방식이 훤히 보였다.
고수도 배에 탔고, 어차피 봄이 시작되어 본격적인 무역도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 괜히 사정을 알아보겠다고 꾸물거리며 시간 낭비 할 것 없이 쾌도난마로 최고 고수를 보내 후딱 끝내자!
항해가 하루 미뤄지면 손해가 얼만데! 어차피 적도 같은 이종족이 아니라 흑마법사잖아! 그냥 가서 다 죽여!
이런 심정이겠지.
“그래서 당신이 있는 겁니까?”
나는 커다란 체구와 그에 못지않은 무식한 소드 스피어를 든 근육질 여성, 베노브란도를 흘겨보았다.
“비슷하다.”
내 옆에 다가와서 뱃멀미에 고생하는 르데앙과 가이노스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베노브란도. 그녀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그런 그녀가 못 미더웠지만, 그 기색을 대놓고 드러낼 수 없었다.
길, 아본, 베노브란도. 이 셋은 내가 아는 것 이상으로 거물이었다. 저 셋은 에레스발다의 대외를 지키는 영광스러운 세 개의 창이라는 직책을 받은 용사들이었다.
에레스발다의 대외를 지키는 세 개의 창. 익스퍼트 상급 이상에 다다른 대전사장에게 주어지는 칭호.
첫 만남에서 아본이 자기 이름을 말할 때 ‘뒤에 뭔가 길게 붙긴 하지만 자기도 다 기억을 못 한다. 그냥 아본이라 불러달라.’ 고 말한 걸 기억하는가?
그 ‘기억나지 않는 긴 이름들’이 세 개의 창을 거쳤던 용사들의 이름이다. 무려 수백 년이 넘게 계속된 칭호다. 아본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 것도 당연했다.
그 수백 년의 세월만큼이나 세 개의 창의 명성과 권한도 높게 쌓였다. 때문에 이 셋은 물밑에서라면, 그리고 본인이 그럴 의지만 있다면 웬만한 소국의 왕만큼이나 높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중, 길은 항구 도시 슈타펜드를 지키고 아본은 활발한 대외활동을 하며 소소한 논쟁거리를 해결한다.
마지막으로 베노브란도는… 전투원이었다. 에레스발다의 안전을 어지럽힌 적을 처단하는 섬멸자. 그것이 베노브란도의 역할이었다.
그 베노브란도가 이 배에 탔다는 것부터가 틴탑 항구로 가는 목적을 훤히 드러낸다.
에레스발다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얌전히 쥐새끼 흑마법사 잡아내고, 공손하게 모가지를 바쳐라. 그러면 용서해주고 아니면 섬멸자가 의심되는 놈을 애새끼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쳐 죽이겠다.’
내가 팔짱을 낀 베노브란도를 혀로 쿡쿡 찔렀다.
“그리고 저는 무료로 에레스발다가 흘릴 피를 대신 흘리는 역할이고요.”
“흠!”
베노브란도가 흐뭇하게 웃으며 흠! 하는 콧소리를 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왜 흐뭇한지 이유를 몰랐는데, 자낙스에게 남몰래 물어보니 뭍사람이 뱃멀미를 하지 않는 게 대견스러워서 그렇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