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330
330화
* * *
보고가 끝나고 한밤중.
다들 쉬는 시간이지만, 이스마일 반데스에게는 예외였다. 게리소님 왕국이 발족한 지 반년이 지나도록 그는 하루 세 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었고, 마법 수련도 거의 하지 못했다.
그에게 주어진 업무는 단 하나. 서류! 서류와 서류. 그리고 종이와 종이. 보고와 보고가 이스마일 반데스의 삶을 지배했다.
사각사각!
그것은 마탄 영지에 와서도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구 게리소님, 현 반데스 영지에서 마탄 까지 날아오느라 허비한 업무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늦게 잠들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젊은 사람도 이렇게 일에 미치면 1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몸이 망가진다. 구순을 훌쩍 넘은 이스마일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세상 참 야속하게도 그는 건강해지고 싶지 않아도 건강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고리에 얽매여있었다.
현재 이스마일 반데스는 건강 유지를 위해 다섯 개가 넘는 보조, 회복 마법을 본인에게 걸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가 입은 옷, 반지, 목걸이와 귀걸이 모두 마나와 신체 회복 능력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걸려있었다.
또한 그는 렉시놈, 악신의 살로 개조한 신체 강화자! 일반인이라면 반병신이 될 상처를 입어도 며칠이면 회복되는, 이종족 이상으로 강건한 육체를 보유했다.
‘아! 어째서 나는 신체 강화 시술을 받아서 이런 꼴에……!’
이스마일 반데스는 지금만큼 악신의 살 신체 강화자라는 사실이 증오스러운 적이 없었다. 차라리 몇 번 코피 흘리고 쓰러지면 아랫것들이 눈치껏 업무분담을 해줄 텐데, 그럴 기미가 없다보니 그가 검토해야 할 일거리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게 현 실정이었다.
왕이 되기 위해 달려왔던 한평생. 왕 되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왕은 오히려 시작이었다. 업무 지옥이라는 문을 여는, 새로운 인생의 시작.
그리고 이번에, 쟈기가 싱싱하고 신선한 지옥을 지에조라는 이종족 혼혈의 소개와 함께 하나 더 가져왔다.
“챠르 섬을 비롯한, 동부 해역 미개척지 항로 개척과 유인도(有人島) 확보 및 복속. 또한 그로 인한 해상권 구축.”
회의 마지막에 이루어진, 지에조를 소개하며 벌인 열띤 주장! 중앙 대륙 동쪽 지역, 바다와 맞닿은 국가가 자기들끼리 대규모 해상전을 벌이다가 쓸려나간 지금지금이 기회다!
어차피 은신 마법진이 범국가적으로 퍼졌다. 이걸 내버려 두면 동쪽 바다에 널려 있는 수많은 유인도, 그에 속한 인적, 물적 자원은 고스란히 중앙 대륙이 먹을 것이다.
그러기 전에 얼른 게리소님이 그들을 복속시켜야 한다. 복속이 안 된다면, 최소한 그들과 연맹이라도 맺어야 했다.
달그락!
그러며 보여 준 초대형 해양 몬스터, 괴물 성게의 갑각과 가시 일부. 반년 넘게 마법사 활동을 강제 휴업한 이스마일은 그 부산물을 보자마자 왕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당장 실험실로 달려가고 싶은 강력한 욕망을 느꼈다.
저걸로 실험한다면, 그리하여 한 단계 높은 마법 발현에 성공하거나 이론으로만 완성했던 수식을 실제로 펼친다면 그의 경지가 얼마나 높아질까.
몸이 달아오른 이스마일이었지만, 겨우 참았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욕망을 참은 그가 쟈기를 달랬다.
“게리소님 왕국이 수립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았다는 걸 쟈기 자작은 아는가?”
이스마일 반데스는 이렇게 돌려 말하며, 쟈기의 주장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지에조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음은 두말할 것 없었다.
400년을 산 인류의 역사서가 실망한 것에는 이스마일 반데스도 가슴이 아팠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게리소님 왕국은 태어난 지 이제 겨우 반년이 지난 신생국가다. 집안의 일거리가 차고 넘쳐서 왕인 이스마일조차 쉬지도 못한다. 여기서 불안요소를 늘리는 건 자살선언이나 마찬가지다.
냉정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건 오늘 처음 들어본 바다 한가운데의 섬에 사는 사람들이 아닌 왕국의 주민들이다. 지에조 등을 위해 국민에게 써야 할 인력과 물자를 외부로 뺄 순 없었다.
그런데도 영토를 늘리고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쟈기는 그에게 있어서 충실한 신하가 아닌 고대 악마의 환생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참으로 열받는 건, 이어진 쟈기의 반론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그의 머리통이다.
쟈기는 이렇게 포문을 열었다.
“정신없는 지금이 오히려 적기입니다. 나중이 국가가 안정되면 국가 체계도, 귀족 계층도 견고해져서 외부 인사가 치고 들어갈 틈이 없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게리소님에 소외감만 느끼고, 지역감정 때문에 내부 다툼이 발생하겠죠.”
불안한 예상을 먼저 입에 담아서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한다. 쉰둘이 읽은 책, ‘말싸움에서 이기는 치사한 100가지 방법’이란 지구의 지식은 쟈기를 통해 이세계까지 발을 뻗쳤다.
“애초에 문화적으로도, 지역적으로도 잘 섞이지 않는 남쪽 대륙과 동부 해역 유인도의 사람들입니다. 이 흔들리는 틈을 타서 지도자 계층을 게리소님 안으로 집어넣어 이후에 있을 분란을 최소화하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이 적기라고 저는 감히 주장합니다.”
말이나 못하면 밉지는 않지. 이 개새끼가. 이스마일은 쟈기의 혓바닥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그의 설득에 넘어가는 고위 귀족들의 고막도 몽땅 다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러지 못하는 게 인생의 한이다. 이스마일은 다른 의미의 욕망을 극한의 인내심으로 참으며 합의점을 찾았다.
어쨌든, 일단은 거래라도 하자. 열띤 토론 끝에 이렇게 결정이 났다.
게리소님은 태생부터가 마법사가 권력의 최상층에 있는 국가다. 그런 그들이 챠르 섬에 잠들어있는 보물의 산, 성게의 부산물을 그냥 놀릴 순 없다.
해서, 다른 복잡한 일거리는 둘째 치고 그 성게 부산물의 거래가 끝날 때까지만 이라도 해상 함대를 조직하여 연합을 합시다. 이 빌어먹을 지에조 양반.
챠르 섬까지는 알테어만큼 먼 거리를 가지 않는다. 그 덕분에 챠르 섬에 가는 배는 에레스발다의 무역선이 아닌 게리소님에서 자체 제작한 무역선을 쓰기로 했다.
그렇게 쟈기가 원했던 복속, 영토 확장은 뒤로 미뤄졌지만, 지에조가 원했던 원자재 수입은 이루어졌다. 지에조는 내일부터 마탄 항구 관할청에 들러 성게의 가치를 측정하고, 그에 맞는 수준으로 거래를 시작할 것이다.
팔락!
골치 아픈 회의 내용의 검토를 끝낸 이스마일이 다음 서류를 집다가 멈칫했다. 그는 늘 참신한 일거리와 지옥을 가져오는 쟈기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스마일 반데스는 쟈기의 처우를 고민했다. 그가 반골이고, 성격이 이상해서가 아니다.
‘이놈은 너무 성실해. 그리고 어떤 일을 맡기든지 평균 이상은 간단 말이야. 감찰관 때처럼.’
과거, 쟈기가 알테어 왕국으로 떠나기 직전. 그는 3개월간 파견 감찰관으로 일한 적이 있다. ‘대체 어떤 일에 파견해서 뭘 감찰하라는 거야!’라고 쟈기가 그토록 투덜거리던 그 일거리.
이스마일이 쟈기에게 그 일을 맡긴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그는 쟈기가 저 정체 모를 감찰관 일을 제대로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소처럼 일만 했는데, 적당한 감투 하나 쓰고 왕국 여행이나 느긋하게 다녀 봐라!’
그게 쟈기에게 감찰관이라는 직책을 준 가장 큰 이유다. 명분도 몇 개나 있었다.
우선, 왕국을 돌아다니며 그가 이룬 성과를 확인하라는 거다. 그러면서 자긍심을 챙기고, 국가에 소속감을 느끼라는 거다.
또한 본인은 극구 사양했던 영지 수여 후보지를 찾으라는 의미도 있었다. 말로는 싫다고 해도 주인 없는 빈 땅을 수십 개를 방문하다 보면 욕심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은가. 복귀해서 욕심나는 영지를 슬쩍 귀띔하면, 어디든지야 줄 의향이 있었다.
그렇게, 왕인 이스마일도 쉬지 못하고 하루 25시간을 일하는데 그는 쟈기에게 천금 같은 휴식을 주었다. 20대 초반에 익스퍼트 중급, 마법으로도 중위 마법사에 다다른 쟈기에게 가장 필요한 건 성숙의 시간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넓은 땅을 돌아다니며 웅지를 키우고, 본인의 검술과 마법을 느긋하게 점검해라. 기왕이면 영지도 좀 받고.
하지만 감찰관이 된 쟈기의 행보는 이스마일에게도 파격 그 자체였다. 본래가 성실한 쟈기는 이유야 어떻든 감찰관이라는 직위를 받았으니, 속으로는 오만가지 쌍욕을 하면서도 업무를 충실하게 실행했다.
초장거리 이동 마법진으로 짧게는 십여 킬로미터, 길게는 수십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영지를 하루걸러 방문하는 건 기본이요. 마법은 물론 초능력까지 적극 써가면서 배임, 횡령, 배신행위를 코털만큼도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아직 왕국 초창기. 주인 없는 빈 땅을 다스리기 위해 구 권력자의 복귀를 장려한 탓에 곳곳에 중앙 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넘쳐난다. 쟈기는 그들을 말 그대로 먼지 하나까지 죄다 털어 혹시 모를 분란을 초창기에 진압했다.
그가 알테어로 떠나기 전에 적은, 200페이지짜리 보고서는 어떤가. 누가 보면 몇 년 전부터 자기만의 세력을 키워서 그들을 감시했다고 착각할 만큼 꼼꼼하고, 정확한 보고서였다.
실제로 이스마일은 초장거리 비행 마법진 설치와 영지 안정화를 위한 마법사, 기사 및 병력의 파견 우선순위를 절반 가까이 쟈기의 보고서에 의존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쟈기 혼자서 조사한 내용과 수백, 수천 명의 전문인력이 조사한 내용이 실질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지녔다는 소리였다.
‘이쯤 가면 평균 이상이 아니지. 너무 잘해서 문제야.’
쟈기의 몸은 하나인데 그가 할 수 있는, 그리고 그의 도움이 필요한 일거리는 너무나도 많았다.
당장 검술만 해도 그렇다.
이번에 특사로 보낸 내용을 들으니 본인의 경지가 익스퍼트 상급이란다. 심지어 소드 마스터인 해피 국왕과도 거하게 한판 붙었다고 한다.
이십대 중반에 익스퍼트 상급. 이 수준이면 소드 마스터는 예약된 수순이다. 남쪽 대륙에 소드 마스터라니! 검사면 검사답게 뭔 일이 생길 때까지 은거해서 얌전히 수련만 시키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전에 점령지 병사 훈련 사령관 때 보인 능력이 심상치 않던데. 그 능력을 기사 수련에 쓴다면 국가 전투력 상승이 얼마나 이루어질까.
아니지, 그 이전에 쟈기는 마법사 아닌가. 천국의 계단 5대 마법을 개량할 정도로 재능이 있는 놈.
게리소님의 실체가 무엇인가. 금선탈각한 흑마법사 집단, 렉시놈이다. 검사고 기사고 다 필요 없다. 안으로 데려와서 함께 마법의 극의를 추구하면 거기서 떨어지는 떡고물이…….
‘또 감찰관 일을 시키는 것도 괜찮겠지.’
감찰관 일도 기가 막히게 하지 않았나. 마법하고 검술이 중요하냐?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왕국이 흔들리게 생겼는데, 당장 치국(治國)부터 챙겨야지.
안정화가 될 때까지 한 10년간 감찰관 일을 시키면서 왕국을 뺑뺑이 돌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이놈 성격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게 마음에 걸려. 성실한 것도 좋고, 능력이 있는 것도 좋은데 성격이 너무… 사람들을 다루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전 흑마법사가 모인 집단인 게리소님에서도 쟈기의 성질머리는 특히나 이질적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쉘리 반데스마저도 쟈기를 통제할 수단은 정이 최선책이라 말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런 그에게 고민거리는 하나였다. 과여 쟈기를 계속 써먹어도 되는가.
그의 딸 소니아 반데스가 아무리 쟈기를 중히 여긴다지만, 결혼에는 관심도 없고 독고다이로 활동하길 좋아하는 쟈기에게 권력을 집중시켜도 괜찮을까? 이스마일은 결코 괜찮지 않다 여겼다.
인간 개개인은 밑을 수 있지만, 집단이 되면 어리석다. 흑마법사의 가르침을 짙게 받은 이스마일은 집단이 얼마나 말도 안 되고 멍청한 결론을 내리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만약 이런 식으로 쟈기에게 계속 일거리를 몰아주다가, 수십 년이 지나 쟈기가 그조차 건드리기 힘든 권력을 얻게 된다면? 그런 상황이 왔는데도 이 정신 나간 놈은 여전히 혼자 활동하길 좋아한다면?
그때가 되면 쟈기가 아무리 좋든 싫든 간에 그에게 달라붙는 이들이 생길 것이다. 쟈기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를 추종하는 무리가 만들어지고, 쟈기의 추종자와 렉시놈 연관자 사이에서 분란의 씨앗이 탄생하겠지.
그것이 권력자, 왕 이스마일 반데스의 추측이었다. 그리고 그의 추측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때문에, 권력자의 감각은 주장한다. 쟈기는 반드시 내 가족으로 끌어들여야 하고, 그렇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이는 게 더 낫다고.
‘그렇다고 쟈기를 멀리 두는 건 상책이 아니란 직감이 든단 말이야.’
하지만 이스마일 반데스는 왕 이전에 마법사. 행정관 이전에 위를 추구하는 자. 드높은 경지를 목표로 하염없이 달리는 추구자의 감각은 다른 말은 한다.
쟈기는 게리소님 왕국에 별다른 욕심이 없고, 그 사상은 수십 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것이라고. 괜히 권력욕 때문에 쟈기를 견제할 필요가 없다고.
만약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리고 이스마일이 쟈기를 따로 불러서 저 사태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한다면 쟈기는 망설이지 않고 권력을 걷어차고 이스마일의 옆에 찰싹 붙어 다닐 것이다.
딸칵!
펜촉을 내려놓고, 권력자와 마법사의 본질 사이에서 깊은 고민을 하던 이스마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일 잘하면 되는 거지.”
왕도 명칭만 조금 삐까번쩍할 뿐, 결국은 관리자의 일종. 남들을 부리는 위치에 있다 보면 보는 시각도 바뀌기 마련이다. 이스마일은 그 변화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쟈기가 성격이 어떻고, 나중에 부하들이 배신이 어쩌고 하면서 쟈기를 음해하던 말던 뭔 상관인가. 일단 지금은 자기만 한 인재가 없다. 나중 일은 나중으로 미루고, 써먹을 수 있다면 개똥이라도 약에 써서 써먹어야 했다.
미래의 일은 미래의 이스마일이 또는 미래의 소니아가 해결해주겠지. 그렇게 결정을 내린 이스마일은 다시 펜촉을 들었다. 1분이라도 빨리 자려면 손가락이 쉬는 일이 있어선 안 됐다.
사각사각!
불이 꺼지지 않는 왕의 집무실. 이스마일 반데스는 쟈기에 대한 걱정을 내려두고 그에게 주어진 일거리를 하나씩 결재하며 쟈기를 어디에 써먹을지 고민했다.
어떻게 보면 쟈기는 운이 좋았다.
아니, 그 입장에서는 운이 나쁠 수도 있었다. 일이 수틀리면 다 버리고 한적한 곳으로 떠나서 본인이 원하는 수련에만 매진할 수 있었을 테니까.
은근히 속정이 깊은 쟈기는 게리소님에서 귀찮은 일이 발생하고 그것이 그의 수련을 방해하더라도, 이스마일이 쟈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그가 먼저 게리소님을 떠나진 않을 것이다.
쟈기가 마탄 항구에 왔을 때 ‘집에 왔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그가 얼마나 게리소님을 친근하게 생각하는지가 드러났다. 이스마일의 걱정은 한편으로는 지당하지만, 한편으로는 괜한 걱정이었다.
팔락!
그리고 이스마일은 쟈기보다 우선해서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만큼 있었다. 쟈기의 처우를 고민하느라 흐른 시간, 이스마일의 수면 시간은 오늘도 최저치를 갱신했다.
* * *
그 시각. 쟈기는 마탄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인적 없는 공터로 소니아에게 끌려왔다.
알테어에서 소드 마스터와 대련했다고 하니 몸이 근질근질해진 그녀가 회의를 끝내고 떠나려는 쟈기를 붙잡은 것이다.
“누나. 저 진짜 피곤한데요.”
소니아는 쟈기의 누나 발언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칼을 빼든 그녀가 쟈기에게 말했다.
“네 전력을 보여줘.”
전력, 실전을 상정한 위험한 대련을 부탁한 것이다.
그녀는 늘 실전에 목말라했다.
과거에는 정체를 숨기고 렉시놈을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위험한 일도 많이 겪었고, 여자로서 입에 담지 못할 험한 꼴도 많이 당했었다. 웨일과 르데앙과 만나 함께했던 모험은 그녀가 겪었던 수많은 ‘위험한 일’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경험으로도 채우지 못하는 게 있었으니, 바로 익스퍼트 간의 대련이다. 복잡한 간합과 수 싸움, 영역의 다툼, 오러의 고절한 기술을 교환하는 고수의 싸움!
소니아는 그 경험이 극단적으로 적다. 그 때문에 소니아는 검사로서 대련 경험이 부족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발전에 발목을 잡았다.
본인의 재능과 긴 수명, 악신의 살 신체 개조자라는 이점 덕분에 여든 살이 되기 전에 익스퍼트 상급에 오른 소니아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절망과도 같은 벽이 나타났으니,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다.
익스퍼트 최상급은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친족들은 죄다 마법사지. 기사들은 잘해봐야 익스퍼트 중급, 심지어 소니아에게 감히 상처라도 생길까 전력을 다하지도 못한다.
그랬던 그녀였기에 익스퍼트 상급 이후로는 늘 칠흑과도 같은 암흑 속을 걷는 암담함만이 가득했다. 부족한 게 뭔지도 모르겠고, 자신이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그렇게 암흑만이 가득했던 검사 생활에 한 줄기 빛이 나타났다. 셀트리번 산의 분화를 시도한 빛의 수호자 일원 중 익스퍼트 최상급이었던 멸화의 검을 쓴 대머리와의 생사투였다.
대머리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녀에게 등대가 되어주었다. 물론 쟈기의 남모를 도움도 있었다. 그는 소니아의 부상이 회복될 무렵, 간간히 힌트를 줌으로써 소니아가 다음 경지를 수월하게 개척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대머리와의 싸움 이후 약 7개월. 소니아는 그녀 나름대로 그날의 전투를 분석해서 익스퍼트 최상급으로 가는 길을 개척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보았다고 자신했다.
이제 이 성과를 실전이나 그에 준하는 대련으로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 그녀였기에 소드 마스터와 대련했다고 말한 쟈기의 발언에 눈이 돌아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물론, 쟈기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저 화장도 못 지웠어요.”
“괜찮아. 예뻐.”
“아니, 그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옷도 못 갈아입었고, 이거 옷 버리면 재단사가 엄청 화낼 텐데.”
“내가 가서 말 할 게.”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타인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 했던가. 쟈기는 션과 웨일의 불통(不通)에 고통받았을 과거의 인연이 느낀 고통을, 소니아를 보고는 구구절절이 이해했다.
“괜찮은 거지? 그럼 갈 게. 조심해.”
그래. 대답 없는 걸 허락으로 오해하는 것도 딱 예전의 나 같네. 이래서 인생을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예전의 내가 한 업보를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이자까지 톡톡히 내서 갚아야 하는 쟈기였다.
수십 년 동안 불어난 이자는 얼마나 될까. 엉뚱한 고민에 사로잡힌 쟈기 앞으로, 소니아의 적갈색 오러가 치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