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101
101화
숭례문 앞, 오거리 도로.
어슬렁어슬렁 정해진 구역을 걸어 다니는 각성자들 사이로, 유일히 중심을 지키고 서 있는 갑옷 하나.
화랑의 부길드마스터, 주서윤.
단 한 번의 불필요한 움직임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굳건히 선 그녀는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남대문 일대를 눈에 담았다.
평소라면 통행하는 차들이나, 꺼지지 못한 고층빌딩 불빛들로 화려해야 했을 거리가 정전이라도 난 것처럼 새까맸다.
그 낯섦이 모든 광경을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싸늘한 바람이 머리칼을 스쳤다.
‘반드시 여기에 있으라고 했지.’
서윤은 겸이 신화 차원으로 떠나기 전 남기고 간 말들을 다시 복기했다.
포탈이 시작될 때에는 절대 내가 지정한 자리에서 벗어나지 마라.
SS급 이상 각성자들은 한 곳에 몰려 있지 말고 남대문 일대로 띄엄띄엄 분산시켜라.
그리고…….
「‘모아가 어디 있는지 계속 파악해.’」
밤샌 회의로 피곤함을 얼굴에 덕지덕지 매달아 놓고도, 그 말을 할 때만큼은 겸의 눈이 또렷했다.
서윤은 힐금 눈을 돌려 서복을 배치한 쪽을 확인했다.
성벽에 기대 앉아 있는 그의 옆으로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마스크를 낀 모아가 서 있었다.
길드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그렇게, 그렇게 날도 춥고 힘드니까 오지 마라.
괜찮다 말했는데도 이태원 포탈에 있었던 건 나라며.
한 명의 각성자라도 힘을 보태야 한다며 조곤조곤 설득하기에 결국 그러라고 했다.
평소 같으면 죽어라 뜯어말렸을 서복이 조용한 것도 이상했고.
어련히 겸과 이야기를 끝냈겠거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1분 남았습니다.”
누군가의 외침.
순식간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지루한 기다림 속에서 딴짓을 하던 각성자들도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바짝 감각을 돋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많은 포탈들을 상대해 왔지만, 이번은 분명히 막아내야 할 예정된 재난.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화랑의 명예 실추는 물론이고.
‘이겸을 볼 낯이 없지.’
서윤이 오랜 시간 함께 전장을 누볐던 자신의 서리보주를 거머쥐었다.
30초, 20초, 10초…….
그리고.
두우웅―.
대기를 울리는 거대한 충격파가 몸에 부딪혔다.
파라라락! 흩날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상공으로 솟구쳤다.
어둑한 하늘 아래.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
싱크홀처럼 뚫린 균열 앞으로 서윤이 뛰어올랐다.
남대문, S급 예언 포탈.
시작이었다.
***
【중구 세종대로 2나길, 남대문로4가 17-14 S-S급 포탈 신호 감지. 위험 지역에서 즉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반경 3km 이내 민간인의 이동이 제한됩니다.】
【대피 경보 발령/ 중구, 종로구, 서대문구, 마포구, 용산구, 성동구 주민 여러분들은 대피, 외출 자제 등 안전에 주의 바랍니다.】
“와, 이걸 지금에서야 보내네.”
그래. 지들이 아무리 날뛰어도 하늘에 뚫린 포탈을 없는 걸로 만들 순 없겠지.
못 말린다는 것처럼 킥킥 웃은 이태환이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남대문에서 조금 떨어진 어느 건물 옥상 위.
그는 폭죽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번쩍거리는 광경을 지루한 표정으로 잠시 지켜보다가, 난간 끄트머리에 서 자유로이 바람을 맞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코를 훌쩍대며 물었다.
“재미있지 않으세요?”
“어떤 것이?”
남자가 휘날린 머리칼을 귀 뒤로 꽂아 넘겼다.
“본인이 파놓은 덫에 스스로 빠지고 있는 것도 모르는 멍청이들을 구경하는 게.”
그 개구진 소리에 남자는 아스라이 웃었다.
“재미있을 리가요. 오히려…… 슬프다면 슬퍼 보이겠죠.”
“예?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요?”
이태환이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얼굴을 와그작 구겼다.
난간에서 가볍게 내려온 남자가 먼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의 선택을 받은 아이들이 무지에 눈이 가려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자매들에게 칼을 겨누는 모습이 슬플 수밖에.”
남자의 옆얼굴이 형형색색의 빛으로 점멸했다.
그 모습이 진실로 슬프게 보이는 탓에 이태환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진짜 허락해주신 거 맞죠? 저 이제 갑니다?”
“그래요.”
“진짜, 진짜죠?”
“네.”
몇 번이고 허락을 맡는 그를 아이 보듯 쳐다보던 남자가 미소 지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처럼 등을 돌려 다시금 포탈이 터진 곳을 바라보는 모습에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흥분감에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드디어.
옥상 문고리를 붙잡은 이태환이 잠시 뒤를 돌았다.
“왜 지금이에요?”
남자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곁눈질을 하자, 이태환이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그동안 그렇게 걔 죽이러 가고 싶다고 했는데 말리셨잖아요.”
기회는 아주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태환이 이모아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는,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남자는 평온한 어조로 답했다.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태도였다.
“자신의 선택을 지독히 후회할 순간에 무너뜨려야…….”
그 모습을 아주 오래오래 구경할 수 있을 테니까.
휘파람 같은 웃음이 뺨을 스쳤다.
***
“공략 종료!”
주서윤의 선언과 함께 열쇠석을 던져 넣은 포탈이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전투를 마친 각성자들이 하나, 둘 땅 밑으로 착지해 가쁜 숨을 돌렸다.
그 밑에서 전투 장면이 아닌, 손목시계만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이해운 총장은 마지막으로 완전히 포탈이 닫힌 뒤에야 내려온 주서윤의 앞에 섰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주서윤 부길드마스터님.”
“감사합니다, 총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S급 포탈 공략까지 23분 40초경…… 전보다 더 실력이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한 결과고, 저는 아직 정진해야 할 길이 멀죠.”
상투적인 인사.
그 사이에 낀 가식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적당히 선을 긋고 물러선 서윤은 여전히 너그러운 얼굴로 웃고 있는 이해운 총장의 시선을 받아 넘겼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것을 신경 쓸 때는 아니었다.
이겸은 이태원에서 보고 받았던 것처럼 이 다음 포탈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주서윤은 그저 타이밍이 나빴을 뿐이라고.
다중 포탈이 또 터진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확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그의 직감을 믿고 따른 지 수년.
‘대비해서 나쁠 것 없지.’
“경계 태세 유지해.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지 마라.”
수신기를 낀 귀에 손을 올리고 속삭였다.
채본의 각성자들 역시 그다음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는지 자리에서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초조하게 입술을 사리물던 주서윤은 번뜩 생각난 이모아의 안위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애애애앵―!!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강북 번동 256, 한천로 105길, S-S급 포탈 신호 감지. 위험 지역에서 즉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반경 3km 이내 민간인의 이동이 제한됩니다.】
【양천 목3동 318-260, 중앙남로16길, S-A+급 포탈 신호 감지. 위험 지역에서 즉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반경 3km 이내 민간인의 이동이 제한됩니다.】
【서초구 양재동 6-23, 바우뫼로 41길, S-S 포탈 출현. 인근 주민 여러분들은 안전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반경 1km 이내 민간인의 이동이 제한됩니다.】
…….
…….
‘진짜.’
진짜다.
예언된 포탈 뒤 여진이 몰아닥치듯 다중 포탈들이 생성되고 있었다.
각오했음에도 침을 삼켜내는 목구멍이 깔깔했다.
이태원 때보다 더 등급이 높은 포탈을 막아냈기 때문인지, 후에 생성되는 포탈들도 그보다 급이 높았다.
기본 A. 그리고 그 이상.
잠시 이해운 총장을 살피자, 그녀 역시 채본의 팀원들을 불러 모아 어떤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게 보였다.
서윤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침착히 화랑이 해결해야 할 구(區)의 포탈들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즉시 수신기를 쥐고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금호 근처 7팀, 즉시 포탈 확인 후 현장으로 움직여라. 충정로 부근에는 배치된 팀이 없으니 우리가 직접 간다. 답십리 13팀은…….”
지시를 내리면서도 멈춰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행인 것은 길드원들을 여기저기에 배분해놓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시간으로 최대한의 피해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것.
가볍게 땅을 박차 상공으로 뛰어오른 주서윤은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리고 언제나, 이겸의 뒤를 따르는 건 옳은 일이었다는 것을.
***
탁, 탁, 탁, 탁!
인적이 사라진 골목을 내달리는 발소리가 다급했다.
그녀가 막아내기 위해 움직이는 A급 포탈은 숭례문과 시청역 사이.
뛰어간다면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그 주변에도 분명 길드에서 배치한 각성자들은 존재할 테지만, 이번에 우선시 되는 그들의 역할은 결코 ‘포탈 공략’이 아니었다.
‘시민 대피를 최우선으로.’
그리고 그것은 모든 길드가 공통적으로 가진 목표일 것이었다.
그들을 움직이게 만든, 단 한 사람 덕분에.
그러니.
‘빨리 가야 해.’
아무리 시민들을 대피시킨다 하더라도, 빠르게 포탈을 닫지 않으면 불리한 건 인간들의 쪽이었다.
이태원과 같은 심장의 아릿함.
무릎 뒤가 팽팽하게 당겨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지도 앱을 살피며 가장 지름길로 보이는 골목길 안으로 몸을 틀었다.
그 순간.
파앗!
누군가 얼굴 위로 칼을 내질러왔다.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피한 공격.
그러나 달리던 몸이 중심을 잃고 기울었다.
찰나를 놓치지 않은 칼날이 정확히 심장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잘 가라, 꼬맹아.”
괴한의 습격을 받은 몸이 힘없이 앞으로 꺾였다.
찔꺽.
박힌 칼을 빼내자, 몸 안에서 온갖 체액과 살덩이가 떠밀려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곧 풍겨올 피비린내를 상상하며 코를 틀어쥐었다.
그런데.
“……뭐지, 이 냄새?”
킁킁.
어둠 속에서 칼끝에 묻은 액체의 냄새를 맡던 남자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손으로 더듬어보면, 그 점액의 정도가 피와 비슷하긴 한데 아무리 냄새를 맡아도 달랐다.
뭔가, 석유를 뭉쳐놓은 것 같은 쓴 냄새와, 희미하게 느껴지는 종이의 냄새가…….
그 순간.
퍼엉!
물풍선 같은 것이 터지는 소리가 나며 쓰러져 있던 아이의 시체가 사라졌다.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정수리 위로 들렸다.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니 응당 이와같이 관할지어다.”
어둠 속으로 번진 먹이 그녀의 붓끝 위로 뭉쳐 들었다.
“세상을 구하겠다고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를 습격하다니…… 정말 질이 나쁘시네요.”
후드를 벗어젖힌 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