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222
112화
대기실은 넓고 기다란 대리석 복도처럼 구성되어 있었다.
양쪽에는 대칭적으로 마주 선 신전 기둥이 끝없이 늘어져 있었고, 어디를 보아도 하얀 사방.
그게 다였다.
얼마나 광대한 공간인지 시야가 닿지 않는 곳은 뿌옇게 안개가 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몇 년에 한 번씩은 꼭 올림픽처럼 열렸었던 번쩍번쩍한 S급 선발전 대기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
그리고, 대기실에 먼저 입장한 사람은 이겸이었다.
불길 같이 솟구치는 샛노란 섬광이 잦아들자 모습을 나타낸 첫 번째 랭킹 1위.
이겸은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한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버석한 눈으로 바로 옆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하던 일도 멈추고 숨죽인 채 채널 화면을 바라보던 일말의 시청자들은 ‘좀 걸어봐라’, ‘아니 처음 입장했으면 맵 살피는 것 정도는 기본 아니냐’ 등등의 원성을 쏟아냈지만, 상대는 그런 게 통하는 인간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겸은 그 상태로 굳어 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종종 얼굴을 크게 잡아주는 카메라로 눈을 깜빡이거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죽은 거 아니냐는 말이 분명 새어 나왔을 것이다.
물론.
[HOT][실시간 겸제님 와꾸.jpg] (+9999) [자유][ㅃ ㅈㄴ잘생긴건 맞지않냐] (+9999) [자유][이과뭐해 이겸 복제 아직임?] (7021) [자유][우리 아가씨는 언제오실까♡] (5448)…….
…….
아직 완벽히 복구되지 않아 느려터진 통신망으로도 사람들은 환호해댔다.
첫 SSS등급 선발전.
그것도 이겸이 참전하는.
그것만으로도 분위기는 술렁거렸으나, 이제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샅샅이 긁어줄 유일한 희망은 또 다른 랭킹 1위 후보.
이모아 뿐이었다.
하지만.
“뭐야, 아직도 안 왔어?”
“그러니까요.”
해가 사라진 바깥이 어두워지고, 텅 빈 거리 위에서 자판기를 털어먹던 사람들이 중얼거렸다.
이건 비단 그 사람들만의 어리둥절함이 아니었다.
간신히 피해 구역을 벗어나 집에 머무르는 사람들도, 돌아갈 곳이 무너져 임시 보호소인 학교에 모여 있는 사람들도, 하물며.
“포기한 건가?”
막사에 모여 어수선한 마음으로 채널 창을 띄우고 있는 화랑 길드원들도.
권해이의 툭 뱉은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와다닥 시계로 향했다.
선발전이 예정된 시간은 오후 8시.
현재 시각은 7시 55분.
채 5분도 남지 않은 시간에 남은 사람들의 다리가 제각기 다른 이유로 덜덜 떨렸다.
“모아가 그럴 리가 없는데.”
주서윤이 근심 어린 얼굴로 속삭이면.
“왜들 그러세요? 저는 이대로 없던 일로 끝났으면 좋겠구만.”
구서복이 어딘가 억울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길드장님이랑 아가씨가 싸우는데 보는 우리라고 마음이 편하겠냐구요. 하늘도 참 그래. 집안 내에서 1짱, 2짱을 가르는 게 어디 있어? 그것도 그냥 이가네 서열 싸움이야? 무려 코리아 서버 랭킹 싸움이라구요, 이거!”
“또, 또 흥분했네, 저 아저씨. 뭐 우린 좋아서 잠자코 있는 줄 알아? 저 미친 남매 둘이 하겠다는데 어쩔 거야?”
“아가씨를 무조건 뜯어말렸어야 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아오, 가만히 좀 있어! 안 그래도 무산될 판에 정신 사납게 진짜.”
“아악! 아파 아파, 아파!!”
복잡한 건 딱 질색인 권해이가 정신 사납게 막사 안을 뱅글뱅글 도는 구서복의 팔다리를 묶어 암바 자세를 취했다.
한차례 소란이 이는 그들의 움직임을 그치게 한 건.
“이겸도 지금 모아 나이 때 랭킹 1위가 됐어요.”
서윤의 고저 없는 낮은 목소리였다.
바닥에서 연신 탭을 치고 있던 서복이 고개만 빼꼼 쳐들어 서윤을 쳐다봤다.
“그 뒤로도 계속 랭킹 1위였고, 살아남았죠.”
“…….”
“걱정되는 건 알지만 그 애한테 필요한 건 과보호가 아니라는 소리예요.”
“……아니, 부길드장님, 그래도오…….”
“모아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을 더 두려워해요.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봐 온 모아가 선발전을 포기할 거라고 생각해요?”
입을 딱 다문 채 시선을 마주치던 서복과 해이는 결국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서윤의 눈이 점점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시계와 여전히 밀랍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채널창의 이겸만 번갈아 노려보고 있었다.
‘모아야.’
어느 순간부터 서윤은 그 아이가 훌쩍 왔다 훌쩍 떠나갈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그렇게 비밀이 많은지, 척척 세상을 뒤집을 계획을 세워놓고 모두가 불가능하다 말하는 가능성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항상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순간에는 혼자 피투성이가 되어 성공해왔다.
이겸이나 이모아나 제대로 설명할 생각이 없는 이 집 인간들 때문에 속이 터지는 건 주변인들이었지만, 둘은 확연히 결이 달랐다.
무뚝뚝히 전장에 나서는 겸의 등을 바라보면 ‘이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겠구나’ 믿음이 드는 것과 반면.
「“다녀올게요.”」
꼬박꼬박 말하고 돌아서는 모아의 등은 왜 이렇게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날벼락처럼 선발전 등록을 선고한 뒤 혼자 온이헌의 저주 의식을 감행한 아이는, 이것저것 할 일이 있다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막사를 나섰다.
그 손목을 붙잡은 건 서윤이었다.
무슨 일이냐는 것처럼 동그랗게 치뜬 눈을 바라보며 할 수 있는 건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는 일뿐이었다.
「“……홧김에 등록한 건 아니지.”」
차라리 그랬기를 바라는 것 같은 표정에 모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조곤조곤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해가 안 가죠? 그냥 오빠의 감시 아래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춘기 중딩 같고 그러려나.”」
서윤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실제로 길드 내부에서도 이 상황에 꼭 선발전을 벌여야겠냐.
등급도 그렇고 1위나 2위나 별 차이도 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냥 오빠를 이겨 먹고 싶다는 게 아니냐는 여론이 종종 새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겸과 모아를 아는 화랑 길드원들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외부는 어떻겠는지.
하지만, 그런 것을 전부 알고 있다는 듯이 아이는 속삭였다.
「“언니. 내가 바라는 건 사실 이겸을 이기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뭐…….
묻기도 전에 눈가를 곱게 접어 미소 짓곤 말했다.
「“1등 자리.”」
「“그 자리가 주는 사람들의 편견.”」
그리고…….
「“내 행동에 이유가 되어주는 힘.”」
1등이 이겸이 아니었어도 나는 차지하려고 했었을 걸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떠난 아이는 또 저 멀리 앞으로 걸어가 있는 것 같았다.
서윤이 붙잡을 수 없을 만큼 아주 멀리, 멀리.
‘모아에게는 다음 계획이 있다.’
그게 뭔지 알 수 없어도 서윤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건 모아의 계획 중 무언가가 틀어졌다는 뜻이고, 어떤 상황에 처했다는 뜻과도 같았다.
째깍.
분침이 한 칸 더 넘어갔다.
이제는 정말로.
‘1분.’
【차원 개최 1분 전입니다.】
전체 알림이 울렸다.
슬그머니 싸우던 자세를 푼 권해이와 구서복 역시 초조한 얼굴로 시계를 살피기 시작했다.
화면 속 이겸은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복이 내내 여론을 살피던 커뮤니티는 폭발하는 통신량에 터진 것처럼 흰 창만을 띄웠다.
바짝 마른 침이 깔깔한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가는 소리마저 들렸을 때.
“오.”
마이.
갓.
없는 걸 알면서도 신을 찾는 구서복이 주르륵 미끄러져 쓰러졌다.
『“우와, 씨, 늦는 줄, 알았네.”』
뭘 하다 왔는지 산발이 된 머리.
진창 망가져 있는 옷매무새.
헉헉대는 숨으로 등장한 이모아가 엉거주춤하게 이겸의 앞에 서 있었다.
그 순간, 간신히 서버를 뚫은 글 하나가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자유][이거 소리도 켜져 있는 거였냐?]***
【각성자 ‘이모아’의 입장이 완료되었습니다.】
【곧 차원 개최가 시작됩니다.】
알림창이 뜨자마자 가장 먼저 내가 한 일은 숨 고르기 바쁘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는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어두침침하던 골목과 다르게 죄다 새하얀 공간.
채널 창을 열어보고 있긴 했었지만, 피부에 와 닿는 휑하고 으스스한 대기실은 전에 겪어봤던 ‘와글와글 미친놈들의 집합소 C급 대기실’과 180도 느낌이 달랐다.
‘차갑고 묵직하다고 할까.’
공기만으로도 사람을 짓누르는 오오라에 쌀쌀한 팔을 마구 비볐다.
여긴 바깥도 아닌데 왜 이렇게 추워? 중얼거리며,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는 인영을 눈치챘을 때.
‘얘 때문인가?’
멋쩍게 생각했다.
정신없이 입장하느라 잠시 찾는 걸 잊었던 이겸은 느릿한 몸짓으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봤자 5분 전쯤 대기실에 도착해서 준비를 하지 않을까, 싶었던 그는 예상과 다르게 1시간 전부터 내내 이곳에 못 박힌 듯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날 기다리나 싶어 마음이 불편했는데, 명상하듯 한 곳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눈빛과 가끔 계산하듯 무릎을 두드리는 손가락을 바라보며 생각을 갈아 치운 지 오래였다.
‘분명 대비하고 있다.’
내게 ‘최선을 다하겠다’ 말했던 것처럼 이겸은 계획을 짜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의 머릿속에 몇십 번의 시뮬레이션이 굴러가고, 또 몇백 번의 전투가 벌어졌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그냥 나타나진 않을 거거든.’
버저비터 농구공처럼 대기실에 입장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나는 두 뺨 정도 거리에 선 이겸을 응시하기 위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눈빛은 이모아의 가족으로서의 이겸이 아니라, 랭킹 1위.
“왔구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전사 이겸의 것이었다.
그리고.
【SSS등급 선발전-1 이 개최되었습니다!】
【필드를 조정하는 중입니다…… 】
뿌우우우―.
시작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텅 빈 장내를 울렸다.
그의 등 뒤로 도트처럼 조각난 배경들이 뒤집혀 다른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침내, 연회장같이 금빛 조명이 화려하고 거대한 붉은 융단길이 나타났을 때.
“원래 가족끼리는 뒤끝 없는 거 알지.”
소리치며 지면을 박찼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