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45
신필천하(神筆天下) 45화
진양과 노인은 계단 중간쯤에서 서로 마주 섰다. 계단 양쪽으로는 돌로 만든 난간이 이어져 있었는데, 대략 허리춤까지 오는 높이였다.
진양이 양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였다.
“불초 후배, 노 선배께 한 수 배워보겠습니다.”
“흥!”
노인은 그저 콧방귀만 뀌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진양이 천천히 자세를 잡으며 난간까지 물러났다. 역시 지둔도법의 기수식이었다.
노인은 허리춤에서 연검(軟劍)을 꺼냈다. 가늘고 예리한 검날이 낭창낭창 휘어졌다. 일순 노인이 검에 공력을 주입하자 연검은 마치 쇠막대기처럼 꼿꼿하게 펴졌다.
진양은 천천히 보법을 밟았다. 역시 느린 움직임 속에서 상대를 궁지로 내모는 지둔도법의 보법이었다.
노인은 한눈에 진양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파악했다.
‘흠, 느린 듯이 보이지만 한 보 한 보가 몹시 치밀하구나. 섣불리 나섰다간 역공을 당할 수도 있겠다.’
노인은 계속해서 계단을 올랐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계단 위쪽에서 아래를 공격하는 것이 쉬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둔도법의 보법이 워낙 정교하고 교묘하여 마냥 유리할 것만은 아니라는 판단이 선 것이다.
‘위에 있으면 하반신을 방어하기가 난감하다. 하지만 밑에 있으면 힘이 부족해진다. 차라리 나란히 서 있는 게 가장 좋겠군.’
노인이 그런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진양이 곧장 도를 뻗어왔다.
쒜에엑!
“헛!”
노인이 깜짝 놀라서 헛바람을 삼키며 껑충 물러났다.
하지만 좁은 계단에서 물러날 공간이라고 해봐야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노인은 난간 위로 두 발을 올려놓았다.
진양은 곧바로 내뻗은 도를 위로 솟구쳐 올렸다. 그 기세가 매우 날카롭고 강맹했다.
노인이 얼른 연검을 후리며 옆으로 몸을 피했다. 연검이 낭창거리는 소리를 내며 진양의 도를 휘어 감았다가 밀어내듯 풀어 버렸다.
노인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놈이 사용하는 도법이 매우 요상하구나. 느린 듯하면서도 순간적인 빠름이 있다.’
아무래도 겉으로 보기에 느리면 무의식중에 마음을 놓게 마련이다.
노인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눈으로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가장 위험한 것은 보이지 않는 이면에 있다는 것을 그는 오랜 세월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타앗!
순간 진양이 다시 도를 앞세우며 쇄도했다. 노인은 얼른 몸을 날려 다시 난간 위로 착지했다.
콰장!
진양의 도가 노인이 있던 바닥을 내려치면서 돌계단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날았다.
바로 철우격산 초식의 위력이었다.
관람자들이 그 무시무시한 힘에 저마다 혀를 내둘렀다.
노인은 그 순간 몸을 훌쩍 날리더니 진양의 어깨를 연검으로 내려쳤다.
찰나 진양의 몸이 계단 아래로 넘어질 듯 뻣뻣하게 선 자세에서 휘청 넘어갔다. 사람들은 진양이 그대로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줄만 알았다.
“앗! 위험……!”
한데 연검이 그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자, 진양은 무릎도 굽히지 않은 채 거짓말처럼 일어났다. 그 모습이 마치 귀신의 움직임을 보는 듯해서 관람자들은 저마다 경탄해마지 않았다.
“정말 대단하군!”
“관절을 굽히지 않고 오로지 내력을 운용해서 피하다니!”
한편 연검을 휘두른 노인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양이 사용하는 이 도법은 도무지 종잡기가 힘들었다. 몹시 느려 보이면서도 어느 순간 정곡을 빠르게 찔러오는가 하면, 동작이 커 보이면서도 쉽사리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진양은 상체를 세우는 것과 동시에 재빨리 도를 가로로 후려쳤다. 노인이 얼른 연검을 거꾸로 세우며 진양의 도를 막았다. 그러자 연검이 휘어지면서 도를 뱀처럼 감아 올라왔다. 자칫하면 진양의 팔꿈치가 그대로 검봉에 찔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진양이 얼른 왼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연검을 튕겨냈다.
따앙!
연검이 다시 휘어지며 감았던 도를 놓았다.
한편 노인은 검날을 타고 전해지는 진양의 공력에 온몸이 찌릿찌릿 울렸다.
그제야 계단 아래에서 서투른 언어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하십시오, 천 형! 놈의 공력이 생각보다 뛰어납니다!”
진양이 흘깃 돌아보니 좀 전에 자신에게 손목이 잘린 낫을 든 무인이었다.
노인은 이미 연검을 통해 진양의 공력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서 잘 알고 있었다.
‘쳇! 진작 알려줄 것이지!’
노인이 몸을 훌쩍 날리더니 진양과 거리를 떨어뜨렸다. 될 수 있는 한 공력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 접근전을 피할 생각이었다.
곧이어 노인이 연검을 후리며 진양에게 쇄도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더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여태까지는 검신에 공력을 주입해서 검날을 주로 꼿꼿하게 세워서 싸웠다면, 지금은 공력을 조절해서 검날이 그의 뜻에 따라 이리저리 마구 휘어졌다.
취리링! 취리링!
노인의 검신이 진양의 도를 살짝살짝 스치면서 날카로운 소리를 울렸다. 어찌 들어보면 마치 뱀의 울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실제로 노인이 사용하는 초식은 바로 구두독사(九頭毒蛇)라는 것이었다. 이 초식을 사용하면 검날이 빠르게 휘청거리면서 여러 가닥으로 보이게 되는데, 이는 마치 머리 아홉 달린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모습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구두독사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정말 뱀의 움직임처럼 검공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구두독사는 결코 검날을 이용해서 공격하지 않는다. 대신 검봉으로만 공격하여 상대의 혈도를 찍는 것이 특징이다. 이때의 움직임을 보면 마치 뱀이 잽싸게 먹이를 무는 것과 닮았다.
취리링! 취리링!
노인의 연검이 정신없이 진양을 내찔렀다.
아홉 개의 뱀 대가리가 여기저기서 요혈을 노리며 찌르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이런 초식을 막기에는 풍우정헐이 제격이었다.
두 사람이 도검을 맞대고 수십 합을 겨루자, 관람자들은 일제히 갈채를 터뜨렸다. 아군이고 적군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두 사람의 무공에 감탄해마지 않았다. 특히 혈사채 무인들은 미덥지 않던 진양이 이 정도로 싸울 줄이야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데 지금 보니 놀라운 실력의 소유자가 아닌가.
진양은 구두독사 초식을 풍우정헐 초식으로 막아내면서 연신 궁리를 거듭했다. 이대로 계속 공방이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방어가 뚫릴 수도 있었다. 풍우정헐은 베어 들어오는 공격을 막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찔러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이제 어쩐다?’
고민을 거듭하던 진양은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조금 전 철우격산 초식을 사용했을 때가 떠오른 것이다.
‘좋아! 다시 한번 해보자!’
만약 지금 풍우정헐 초식을 거두고 철우격산을 사용한다면 진양으로서는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비유하자면 화살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상황 속에서 유일한 방패를 걷어치우고 대포를 준비하는 격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이 난관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그 이외에는 없을 듯했다.
취리링! 취리링!
연검이 연신 뱀 울음을 토하는 가운데 진양이 일순 양손을 활짝 펼치며 풍우정헐 초식을 풀어 버렸다.
오히려 갑작스럽게 대담한 자세를 취하자 필사적으로 몰아붙이던 노인이 주춤거렸다. 혹시나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위험 요소가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진양의 무모함에 가까운 도박일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진양은 찰나지간에 생겨난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곧장 철우격산 초식을 펼쳤다.
슈아아앙! 꽈당!
그가 공력을 담아 내려친 도가 계단에 박히자 사방으로 파편이 튀어 올랐다.
“크웃!”
노인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연검을 휘둘러 파편을 쳐냈다.
탕! 타탕! 탕!
그 순간 노인은 자신의 앞으로 쇄도하는 그림자를 보았다.
슈우욱!
진양이 손바닥으로 일장을 후려쳐 왔다.
너무나 가까웠기에 노인으로서는 결코 피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고스란히 얻어맞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결국 노인은 어쩔 수 없이 장을 뻗어 맞부딪쳐 갔다.
퍼엉!
두 사람의 장이 부딪치면서 폭음에 가까운 소리가 터졌다. 돌가루가 이들 주위를 자욱하게 메우고 있으니, 관람자들은 한동안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먼지가 서서히 걷히고 나자 여전히 장을 맞대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지?”
“누가 이긴 거야?”
관람자들이 수군거리면서 두 사람을 보았다.
진양과 노인은 석상처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큭! 쿨럭!”
노인이 선지피를 왁 토하며 무릎을 털썩 꿇었다.
“우와아!”
혈사채 무인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박수를 쳤다. 진양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경외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반면 흑의인들은 꽤나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진양이 얼른 손을 내뻗어 노인의 혈을 짚었다. 만에 하나라도 기습을 가하거나 달아날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함이었다.
“노 선배의 무공에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후배가 운이 좋았습니다.”
진양이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사실 진양의 내공이 심후하다고는 하나 일평생을 수련한 노인과 비교하면 아주 큰 차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단 일 장을 마주치고도 그가 승세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
얼마 전 진양은 매지향에게 갖은 고초를 당해야 했다. 그녀가 독을 치료하는 대신 몸의 경맥을 침으로 마구 들쑤셔 놓았기 때문이다.
한데 그 지독한 고문이 오히려 몸 전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줄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자양진기의 가장 큰 특징은 몸 전체에 진기가 고루 퍼져서 녹아 있다는 것인데, 이를 몰랐던 매지향은 오히려 진양의 내공을 더욱 두텁게 해주고, 그의 근골을 한층 탄탄하게 만들어준 격이 됐던 것이다.
이런 기막힌 기연은 진양으로서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이번 일장을 통해 내공이 한층 더 두터워졌다는 것을 막연히 느낄 뿐이었다.
한편 노인은 낭패한 기색으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는 몹시 불안한 눈치였다.
진양이 우선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러운 어투로 달랬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노 선배께 더 이상의 무례를 저지를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때 흑의인 중 중년인 한 명이 계단을 저벅저벅 걸어 올라왔다. 두 눈이 움푹 들어가고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온 얼굴이었다. 그의 태도가 워낙 담담했기에 진양도 특별히 경계하지 않았다.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천 형이…… 하면…… 대사를…… 테니…… 미안…….”
진양이 들어 보니 중년인의 탁한 목소리가 매우 희미해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그 목소리가 어쩐지 귀에 익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양이 더욱 귀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예?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지요.”
중년인이 더욱 가까이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천 형, 미안하오.”
순간 중년인이 품에 양손을 집어넣더니 유엽비도를 두 자루씩 꺼내어 쏘아냈다. 그 행동이 번개처럼 민첩하고 빨랐다.
쒜엑! 쒜에엑!
눈 깜짝할 사이에 네 자루의 유엽비도가 그의 손을 떠났다.
“아앗!”
혈사채 무인들이 깜짝 놀라서 비명을 내질렀다.
진양은 얼른 도를 휘둘러 비도 두 자루를 쳐냈다.
따당!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던진 비도였기에 그 공력이 고스란히 도날을 타고 전해졌다. 그 바람에 다른 두 자루는 진양도 미처 막아내지 못했다.
한데 나머지 두 자루가 향한 곳은 진양이 아니었다.
바로 계단에 주저앉아 있던 노인을 노리고 날아간 것이었다.
푸푹!
“커억!”
비도 두 자루가 노인의 가슴에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진양은 물론 혈사채 무인들까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중년인은 진양이 아니라 노인의 목숨을 노린 것이었다.
진양이 다시 고개를 홱 돌려 바라보니, 어느새 중년인이 저만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가자!”
그가 흑의인들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제야 진양은 중년인의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났다. 바로 위사령과 함께 금룡표국을 습격했고, 자신에게는 독침을 쏘아 중독시켰던 그 복면인이었다.
보아하니 그가 흑의인들의 우두머리인 듯했다.
진양이 잔뜩 화가 나서 소리쳤다.
“멈추시오!”
하지만 그 말을 들을 적들이 아니었다. 흑의인들은 마치 썰물이 쓸려 나가듯 빠르게 혈사채를 빠져나갔다. 진양이 그 뒤를 쫓으려고 하자 도장옥이 얼른 말렸다.
“양 소협, 혼자서 저들을 쫓다가 자칫 화를 당할지도 모르오. 그냥 놔둡시다.”
그 말에 진양은 우선 화를 누그러뜨리고 쓰러진 노인에게 다가갔다. 맥을 짚어 보니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진양이 노인의 품을 뒤져 보니 다행히 약병 하나가 나왔다.
진양이 약병을 가지고 올라가자, 혈사채 무인들이 격렬한 박수로 그를 맞아주었다.
한편 도장옥은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아, 저들의 정체에 대해서 잠시 고민해 보았소.”
“알아내신 거라도 있습니까?”
도장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누군지 모르겠소. 다만 저들이 왜 순순히 물러갔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소.”
“왜지요?”
“어차피 우리가 혈사채와 접촉한 이상 입막음은 실패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밤새도록 싸운 저들이 양 소협과 흑 형을 이겨내긴 힘들 거라고 판단했겠지요.”
“그럼 저 노인을 죽인 것은 역시…….”
“마찬가지로 입막음을 하기 위해서일 거요. 저 노인이 혈사채보다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테니 말이오.”
“그렇군요. 참, 이건 저 노인의 품에서 찾은 것입니다. 해독약인지 당장은 알 수 없지만 우선 가지고 돌아가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고맙소, 양 소협.”
“별말씀을요.”
그때 문득 혈사전 앞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채주님! 채주님!”
고개를 돌려 보니 위사령과 긴 흑발의 남자가 채주의 양손을 잡은 채 부르짖고 있었다. 채주는 이미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 간신히 숨만 내쉬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채주의 손을 붙잡은 채 있는 힘껏 공력을 불어넣는 중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역시 밤이 새도록 싸우고 난 후인지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어느 정도 고수의 반열에 오른 자라면 위기의 순간에 두터운 공력만 보충되어도 훌륭한 응급처치가 될 수 있다. 평범한 일반인들조차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얼마나 응급처치를 잘했는지에 따라 삶과 죽음이 갈리는데 무인들이야 오죽하랴.
진양이 다가가자 마침 채주가 힘겹게 시선을 들어 바라보았다.
“식구들을…… 지켜줘서…… 고맙네.”
그러자 위사령이 돌연 몸을 돌리더니 진양에게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