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54
신필천하(神筆天下) 54화
진양은 또 주윤문이 직접 쓴 글씨를 보여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는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저렇게도 기쁜 듯 말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자작시를 보여주려는 것이리라.
한데 주윤문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더니 이내 대청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 아닌가. 진양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의아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글씨를 보여주시려는 거라면 구태여 밖으로 나갈 필요가 있겠는가? 오늘 저하께서 유독 들떠 계신 걸 보면 필시 다른 무언가가 있으리라.’
진양은 한참 주윤문의 뒤를 따라가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하, 어딜 급히 가십니까?”
“하하, 양 소협은 그저 날 따라오면 자연히 알게 될 거요.”
한참 후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어느 건물 앞이었다. 내정의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겉모습이 화려하지 않고 크기도 작았다.
진양이 문 앞에 서서 물었다.
“저하, 여기가 어디입니까?”
“내 사고(私庫)라오. 한번 들어가 보시겠소?”
주윤문이 뿌듯한 표정으로 말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진양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가니 과연 실내에는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들 중 어느 것 하나 평범해 보이는 것이 없었다. 세공으로 다듬어진 온갖 조각상부터 시작해서 고귀한 비단과 화려한 폐물이 가득 쌓여 있었다.
진양이 넋을 놓고 둘러보다가 실내 안쪽에 놓인 탁자를 보고 우뚝 멈췄다. 탁자 위에는 갖가지 종류의 병기구가 나열되어 있었다.
주윤문이 진양의 눈치를 흘깃 살피더니 말했다.
“어떻소? 여기 있는 물건들은 생일이 될 때마다 여러 사람에게 받은 선물들이오.”
“과연 진귀한 물품들이 많습니다.”
진양이 감탄하며 말했다.
한데 그러면서도 이런 것들을 왜 자신에게 보여주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자신을 상대로 고작 생일 선물을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지 않겠나.
진양이 조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주윤문이 빙그레 웃으며 탁자를 가리켜 말했다.
“하나 골라보시오, 양 소협.”
“예?”
“저 탁자 위에는 선물로 받은 것들 중에서 특별히 병기구만 골라보았소. 저것들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하나 골라보시오.”
“저하, 어째서…….”
“일전에 양 소협은 병기포에 갔었다고 하지 않았소? 보아하니 그 뒤로 병기구를 아직 장만하지 못한 것 같은데 양 소협이 괜찮다면 그대에게 선물로 주고 싶소.”
진양이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저하, 어찌 제가 감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양 소협은 사양하지 마시오. 그동안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울 수 있었소. 이건 내 마음이니 사양치 마시구려.”
진양은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내심 주윤문에게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진양이 가만 보니 주윤문이 뜻을 굽힐 것 같지 않았다. 해서 그는 탁자 앞으로 걸어가서 찬찬히 병기구들을 살펴보았다.
탁자에는 도, 검, 봉, 활 등 다양한 병기구가 놓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광채를 풍기고 있었다. 확실히 병기포에서 보았던 싸구려 용호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기품이 풍겨 나왔다.
병기구를 찬찬히 둘러보던 진양은 탁자 한쪽에 놓인 두 자루의 병기를 바라보았다. 한 자루는 스님들이나 도가의 수행자들이 주로 들고 다니는 불진(拂塵)처럼 생긴 커다란 붓이었고, 다른 하나는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판관필(判官筆)이었다.
진양은 제일 먼저 불진처럼 생긴 커다란 붓을 들어보았다. 척 보아도 글씨를 쓰기 위해 만든 붓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붓의 자루는 쇠몽둥이처럼 탄탄했는데 상당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두 자 정도 길이의 자루 가운데에는 수호필(守護筆)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었다.
‘참 이상한 물건이다. 이 붓은 붓털이 매우 곱고 섬세하지만 글을 적기에는 너무 무겁다. 그렇다고 불진처럼 무기로 사용하기에도 좀 무겁지 않은가? 옆에 놓인 판관필은 흔히 보는 것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지만 금빛으로 빛나고 있어 실용성은 없겠구나.’
진양은 붓을 내려놓으려다가 천천히 기를 불어넣어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붓털이 사르르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물론 기가 강한 사람은 풀잎을 들고도 검처럼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진양은 이때껏 이렇게 기감에 민감하게 움직이는 무언가를 본 적이 없었다. 진양이 내공을 조절하자 붓털은 그에 따라 이리저리 휘며 사르륵사르륵 소리를 냈다. 마치 신체의 일부인 듯 느껴질 정도였다.
뒤에서 지켜보던 주윤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양 소협은 내공이 상당하구려. 이 수호필의 붓털은 은잠사로 만들어진 것인데, 공력을 주입하면 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특징이오.”
“정말 신기한 물건입니다.”
“하하, 마음에 든다면 그것을 가지시오.”
“하지만 제가 어찌 저하의 물건을 탐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지 말고 그 수호필을 가지도록 하시오. 사실 양 소협이라면 처음부터 그걸 가장 마음에 들어할 것이라고 짐작했소. 내 추측이 맞았구려.”
진양은 몇 번을 더 사양하다가 붓을 들고 가만히 보았다. 사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해서 집어 들었을 뿐인데,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공력을 주입해 붓털을 뾰족하게 세우면 상대의 요혈을 짚을 때 요긴할 것 같았고, 털을 얇고 넓게 펼치면 도처럼 상대의 살을 베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검법과 도법을 이 수호필에 적용시켜 펼쳐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진양은 주윤문을 향해 깊이 읍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주윤문은 진양이 자신의 선물을 받아주자 크게 기뻐하며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은 후원의 정자에 올라서 간단히 다과를 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양은 차를 마시다가 문득 오늘 궁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는 것이 떠올라 물었다.
“저하, 오늘 분위기가 평소와 달리 어둡던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
그러자 주윤문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오늘 할바마마의 심기가 불편하여 대전에서 신하 한 명을 크게 나무라셨소.”
그제야 진양도 어찌 된 영문인지 짐작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 시절의 주원장은 한창 공포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황제는 이따금씩 대전에서 신하에게 매질을 하기도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인 것이다. 이런 날이면 신하들은 그저 체면불구하고 매질을 당해야 했고, 궁정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진양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본 주윤문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할바마마께서는 날이 갈수록 대신들을 의심하고 경계만 하시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오.”
사실 진양 역시 주원장의 의심병에 의한 희생자이기도 했다. 십삼 년 전 호유용 사건으로 인해 가문이 멸문당했으니 주원장의 그런 모습이 곱게 보일 까닭이 없었다.
진양이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의 지나친 처사로 인해 행여 민심이 흉흉해질까 봐 염려됩니다.”
“사실 내 생각도 그렇소. 해서 얼마 전에는 직접 할바마마께 그리 말씀을 올린 적도 있소.”
“어찌 되었는지요?”
“다음 날 할바마마께서는 내게 가시나무 가지를 한 자루 주시면서 잡아보라고 하셨소. 나는 가시에 찔릴 것 같아 선뜻 잡지 못했는데, 그때 할바마마께서 그러셨소. ‘내가 이 가시들을 모두 제거한 뒤에 너에게 주면 될 일이 아니겠느냐?’라고 말이오.”
그 말을 들은 진양은 가히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황제는 개국공신들을 주인을 해칠 가시에 비유한단 말인가? 그토록 공신들을 의심하다간 훗날 누가 황제를 위해 싸울 자가 있겠는가?’
여기에 생각이 미친 진양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 나서 말했다.
“하지만 가시를 모두 뽑아 버리고 나면 누구나 그 가지를 손에 쥘 수 있지 않겠습니까? 때에 따라서는 그 가시가 오히려 주인을 지키는 든든한 무기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진양으로서는 나름 뼈가 있는 말을 던진 것이었지만 아직 나이 어린 주윤문으로서는 그 의미를 미처 깨우치진 못했다.
그는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그 나뭇가지를 쥐려고 하겠소? 이미 그 나뭇가지는 할바마마께서 내게 주시기로 한 것인데…….”
진양은 조금 다르게 생각했지만 더 이상 반박은 하지 않았다. 진양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해 왔다.
하니 황권이라는 것도 별다를 것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가시나무 가지를 바로 황권에 비유하고 말한 것이었는데, 주윤문은 진양의 걱정이 쓸데없는 것이라고 단순히 치부하고 만 것이다.
‘가시가 모두 뽑힌 가시나무의 가지는 결국 제 주인을 지키기는 힘들 것이다. 만약 황제가 정말 그 가시를 모두 뽑아 버릴 생각이라면 이는 황태손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줄 거야.’
진양은 자신의 생각을 속으로만 삼키며 차를 들었다.
그날도 진양은 주윤문과 함께 서예에 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눈 뒤 금룡표국으로 돌아왔다.
2. 연서를 미행하다
금룡표국은 조만간 있을 연회를 준비하느라 몹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진양 역시 그 틈에 섞여 일을 하느라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주윤문에게도 특별히 사정을 설명하고 궁을 찾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런 중에도 진양은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유설에게 서신을 적어 보내곤 했다.
표국 내에서 진양과 가장 사이가 좋은 사람은 바로 도장옥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진양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던 터라 진양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에는 진양이 황궁에 자주 드나들자 도장옥이 미소를 지으며 물어왔다.
“요즘 자주 궁을 찾던데 황태손 마마께서 양 소협을 좋게 보신 모양이오. 주로 무슨 이야기를 하시오?”
“하하, 별것 아닙니다. 저하와 제가 나이가 엇비슷하니 서로 뜻이 잘 맞아서 그렇겠지요. 그저 서예에 관한 잡담을 주고받을 뿐입니다.”
“서예라? 그럼 양 소협께서는 서예에도 조예가 있으시오?”
“어려서 잠시 익힌 적이 있습니다.”
“오! 그거 마침 잘됐소.”
도장옥이 반색하며 말하자 진양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이번에 무림 각지에 초청장을 보내야 하는데, 글을 쓸 일이 내심 걱정이었다오. 아시다시피 내가 요즘 맡은 일이 워낙 많은지라 여유가 없소. 혹시 양 소협께서 괜찮다면 날 좀 도와주실 수 있겠소?”
“이를 말씀입니까? 표국의 일이 곧 제 일이고 도 표두님의 일 역시 저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마침 제가 맡은 일이 그리 많지 않으니 성심껏 돕겠습니다. 한데 무슨 일을 하면 될는지요?”
“별일 아니오. 양 소협께서 서예를 익히셨다니 초청장을 시간이 되는 대로 써주시기만 하면 되오. 나 역시 틈틈이 그 일을 맡아 하겠지만, 아무래도 혼자서는 시간이 부족할 듯해서 도움 받을 사람을 찾는 중이었다오.”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맡겨주십시오.”
진양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자 도장옥이 감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그럼 내가 오늘 저녁에 사람을 시켜 초청장을 받을 명부를 전해 드리겠소.”
그날 밤 도장옥은 사람을 시켜서 진양에게 명부를 전해주었다. 진양이 명부를 펼쳐 보자 초청장을 받을 사람의 이름과 함께 간단한 신상명세가 기록되어 있었다. 신상명세에는 소속된 문파와 직위, 그리고 별호 등이 기재되어 있어 초청장을 쓰면서 참고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진양은 명부를 받은 김에 그날 밤을 새워 초청장을 적어나갔다. 각 초청장마다 그 내용을 달리해서 정성을 들여 초청장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오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도록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