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31
제130화
지친 해가 서산으로 기울며 하늘 끝자락을 빨갛게 물들였다.
진천은 청와옥을 나와 지하연무장으로 향했다. 출입구에서 마침 계단을 올라오고 있던 하수린과 마주쳤다.
“너무나 공사다망하셔서 이제야 존안을 뵙는군요.”
하수린이 불만을 에둘러 표현했다. 진천은 그저 쓰게 웃었다.
“자하검선과는 돈독한 친분을 쌓았나요? 하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라서 방해가 될까봐 조용히 나왔어요.”
진천도 알고 있었다. 한 시진 전 청와옥에 들어왔던 하수린은 다연실 앞에서 몸을 돌려 도로 나갔다. 진천은 일부러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그의 세심한 배려로 의형과 팽하연 사이에 미묘한 교감이 이루어지던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자하검선도 세평회의 일원이 되기로 했소.”
하수린의 아미가 갈매기를 만들었다. 진천은 다양한 감정을 그려내는 그녀의 눈썹을 볼 때마다 속으로 감탄하곤 했다.
“잘 된 일이군요. 하지만 왠지 분하네요. 어엿한 창립공신인데 나만 외톨이가 된 기분이에요. 팔정포에서 오양 거사를 들었을 때 얼마나 속상했는지 알아요? 나도 거기 있었어야 했는데.”
진천은 하수린을 달랬다.
“앞으로도 기회는 많소.”
하수린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별로 낙관적이지는 않네요. 할아버지를 비롯한 문파의 어른들이 어찌나 완강하게 반대하는지. 차라리 나도 대 공자처럼 파문이라도 당하면 좋겠어요. 하지만 나에겐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죠. 이러다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방관자로만 남을까봐 걱정이에요. 소중한 사람들이지만 그만큼이나 짐이기도 해요. 왜 왕국시대의 장수들이 전장에 나가기에 앞서 식솔들을 정리했는지 알 것 같아요.”
진천은 하수린의 심경을 이해했다.
“방법이 있을 거요.”
진천의 말에 하수린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바로 그거예요. 당신과 섬전도의 비무를 보러 간다는 핑계로 올라오긴 했지만 주된 목적은 당신의 두뇌를 빌리기 위해서였어요. 내 머리로는 아무리 쥐어짜 봐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지만 당신은 분명 묘책을 떠올릴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진천이 쓴웃음을 짓자 하수린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후원으로 가요. 나한테 그 정도 시간은 내 줄 수 있겠죠?”
진천은 하수린의 힘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갔다.
오솔길을 걸으며 진천이 말했다.
“창인에서 내 친인들을 도와줘서 고맙소. 큰 은혜를 입었소.”
“은혜랄 것도 없어요. 그분들이 미로에서 활개를 치던 자들이 독인들이라는 정보를 줘서 별 어려움 없이 제압할 수 있었어요. 무공은 대단치 않더군요.”
하수린의 기준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일류무사인 성씨와 배씨 형제 등이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것으로 보아 마련의 첩인들은 절정에 가까운 고수들이었을 터였다.
“그런데 창인에 가보고 많이 놀랐어요. 황무지 아래 음습한 지하 동굴만 가득한 오지인 줄 알았는데 번듯한 저자까지 있어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유령의 마을 같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번화한 곳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규모로 보아 인구도 수천 명은 족히 될 테죠? 다들 밀림으로 피난 갔다던데.”
“오천 명이 넘소.”
“그렇군요. 허 노야란 분을 만났어요. 당신의 코흘리개 시절부터 창인을 떠나기 전까지의 삶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계시더군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어요.”
하수린이 마음 속 스승으로 삼았던 이를 거론하자 진천은 아득한 그리움에 젖었다. 그의 심사를 읽은 하수린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분을 생각하고 있군요. 내가 없는 동안 나는 그립지 않았나요?”
“……보고 싶었소.”
“목소리에 한줌의 열의도 담겨있지 않네요. 나는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어요. 몸은 팔정포에 있지만 마음은 여기에 있었다고요.”
“…….”
갑자기 발을 멈춘 하수린이 옆구리에 손을 얹었다.
“여자가 고백을 하면 감동받은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고 싶지만 쉬운 일이 아니오.”
진천의 답변에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던 하수린이 깔깔 웃었다.
“참 당신다운 말이네요. 서운하긴 하지만 빈말보단 솔직한 게 나으니까 용서해 주죠.”
“고맙소.”
“고맙다면 보답을 해야죠.”
“어떻게 말이오?”
“입 맞춰 줘요.”
“……싫소.”
“나쁜 사람.”
어느덧 천년노송에 이르렀다.
“미현이하고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예쁜 얼굴이 내내 굳어있던데. 섬전도는 왜 따라간 거죠? 설마 두 사람이 연인 사이가 되었다든가 그런 건 아니죠?”
“나도 모르오.”
“당신이 모르는 게 어디 있어요? 모른 척 해도 다 알면서. 그러지 말고 털어나 봐요. 아까 당신은 권왕 어르신과 가고 자하검선은 태극마선과 독대를 원하는 듯해서 할 수 없이 백와옥에 들어갔더니 공기가 무거우면서도 야릇하더라고요. 미현이가 기절한 섬전도 옆에 딱 붙어서 애를 태우고 있는데 강가의 무인들은 그녀를 내쫓기는커녕 오히려 자리를 비켜주더군요. 섬전도는 어제 저녁에 주안에 도착한 걸로 아는데 하룻밤 새 미현이하고 정분이 싹 텄다는 건가요?”
“실은 석 달 전 하 소저가 팔정포로 떠난 날 오후에 강가에서 섬전도와 절환도가 찾아왔소. 그때 그들이 노 소저와 차 소저, 그리고 고 형을 정맹으로 초대했소. 고 형은 먼저 돌아오고 두 사람은 정맹에 머물다 이번에 섬전도 일행과 함께 왔소.”
하수린의 눈썹이 갈매기를 그렸다.
“세상에! 그랬군요. 석 달이면 연분을 맺고도 남을 시간이니 미현이과 섬전도와 연인이 되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네요.”
납득을 한 듯 했지만 하수린은 이마의 갈매기를 풀지 않고 있었다.
“이건 순전히 직감인데 예감이 좋지 않아요. 미현이가 정파 무림의 기린아와 짝이 되었다면 축하해주어야 마땅한 일이지만 왠지 뒷맛이 찝찔해요. 섬전도가 어떤 사내인지 모르지만 미현이하고 어울릴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게다가 미현이의 눈빛은 비무에서 부상을 당한 낭군을 걱정한다기보다는 자기고민에 빠진 느낌이었어요.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미현이는 잘못된 선택을……, 아니에요. 남의 사정을 두고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건 무례한 짓이니까 이쯤 하죠.”
그쯤 한다고 해놓고 하수린이 말을 이었다.
“이왕 직감 얘기가 나왔으니, 절환도 있잖아요. 다른 강가의 도객들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황망한 낯짝들이던데 그 사람만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어요. 물론 겉으로는 오만상을 쓰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이 보지 않을 때 히죽거리는 모습을 두 번이나 봤어요. 그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있나요? 내가 오해한 건가요?”
진천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사촌아우에게 주눅이 들어 시종처럼 굴었던 강정은 그의 굴욕적인 패배가 사뭇 고소했을 터였다. 경박한 성품인지라 하수린에게 쉬이 본심을 들켰으리라.
“어디에나 잘 나가는 사촌에게 배가 아픈 부류가 있는 법이오.”
“아!”
진천의 명쾌한 해석에 하수린은 바로 이해가 되었다. 진천이 덧붙이진 않았지만 질시하던 사촌이 망하면 배앓이도 사라지는 법이었다.
“생긴 대로 속이 좁은 위인이었군요. 불쾌한 자였어요. 어찌나 힐끔거리던지.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
진천의 고소를 본 하수린이 화제를 바꾸었다.
“쓸데없이 남들 얘기만 했군요. 이제 우리 얘기를 해요. 아까 내가 부탁했던 거 기억하죠? 내 난제를 해결할 묘안을 알려줘요. 하루 빨리 그 문제를 정리하고 당신과 함께 탕마멸사(蕩魔滅邪)의 대업에 나서고 싶어요.”
기대감에 찬 하수린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진천이 입을 열었다.
진천에게서 ‘묘안’을 받아든 하수린은 그날로 삼보장을 떠났다.
팽하연은 이틀 더 삼보장에 머무르며 세평회 인사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팽하연이 돌아올 것을 기약하며 작별을 고한 날 진천은 노덕도 내보냈다. 전날 고량과 차소영이 노미현과 함께 원주 강가로 떠났기에 삼보장에는 진천과 여상구, 그리고 가린과 대웅만이 남았다.
진천이 강민과 비무를 치른 지 열하루가 지난 날 자시(子時) 무렵 세 개의 그림자가 삼보장을 담장처럼 둘러싼 죽림에 접근했다. 자갈이 깔려있어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도 크게 들릴 야심한 시각이었지만 삼인은 미세한 소음조차 내지 않고 대나무 숲에 이르렀다.
비대한 덩치의 인영이 탄탄한 체격의 그림자에게 전음으로 지시했다.
‘네가 가서 동정을 살피고 오너라.’
넓은 어깨의 그림자는 응답 없이 신형을 날렸다. 일각 후 돌아온 그가 보고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소.’
커다란 공 같은 체형의 그림자는 하마터면 음성을 발할 뻔했다.
‘뭣이! 어제까지 그놈들이 여기 있음을 확인했는데 어째서 사라졌단 말이냐?’
탄탄한 윤곽의 인영이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비대한 자의 퉁퉁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말본새하고는. 되바라진 놈.’
분기를 참은 구체인(球體人)이 길쭉한 그림자에게 다시 명령을 내렸다.
‘네가 갔다 와 봐라.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존명(尊命)!’
앞선 자와 달리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명을 받든 길쭉한 그림자가 청죽이 빽빽이 솟은 숲을 바람처럼 비집고 들어갔다. 그는 반각 만에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다.
‘와옥들이나 별채들에는 인기척이 없습니다, 장왕. 하지만 삼보장 지하에 있다는 연무장에서 몇 개의 기운이 감지되었습니다. 너무 가까이 붙었다가 발각될 수도 있기에 정확한 수를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잡아낸 기운은 셋이었습니다.’
비대한 그림자, 장왕이 탄탄한 인영을 면박했다.
‘쓸모없는 놈. 화염장(火焰掌)이 하는 걸 왜 못해? 그렇게 부실해서야 어디에 써 먹겠느냐?’
탄탄한 인영, 소중걸의 면상이 일그러졌다.
행여나 그가 소리 내어 대들까 봐 장왕이 바로 거구를 공중으로 띄웠다.
‘따라들 와라.’
잠시 후 지하연무장 입구에 세 개의 그림자가 깃털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모두 네 마리다. 하나가 빠졌군. 하남신룡이 아니어야 할 텐데. 나 혼자 들어갈 테니 너희는 여기서 대기해라. 이곳을 지키고 있다가 혹시라도 달아나는 벌레가 있으면 놓치지 말고 잡아 죽여라.’
응답은 한 명에게서만 나왔다.
‘존명!’
대답 없는 소중걸을 노려본 장왕이 계단에 발을 디디지 않고 구름처럼 둥둥 떠서 지하연무장으로 향하는 통로를 내려갔다. 꽤 깊었다.
이윽고 족히 이삼백 개는 될 법한 계단이 끝나고 또 다른 입구가 나오자 장왕은 안쪽의 동태를 살폈다. 두 사람이 차(茶)를 소재 삼아 한가로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나는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전날 골치를 썩게 했던 하남신룡임에 분명했다.
장왕은 손이 근질거렸다.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벌레들을 한꺼번에 짓이기고 싶었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끝내서는 재미가 없었다. 벌레들은 뒈지기 전에 극한의 공포를 맛보아야 했다. 사전에 입수한 삼보장의 도면에 의하면 지하연무장의 출입구는 하나밖에 없다고 했으니 벌레들은 독안에 든 쥐새끼들이나 진배없었다. 어이없는 실수만 하지 않으면 모조리 때려잡을 수 있을 터였다.
장심에 공력을 불어넣으며 장왕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벌레들은 염왕이 지척에 와있음을 꿈에도 모를 터였다.
장왕은 그가 등장하는 순간 벌레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공포로 얼어붙을까. 아니면 이판사판이라며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덤벼들까. 그도 아니면 불빛을 본 바퀴벌레들 마냥 뿔뿔이 흩어져 달아날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벌레들은 이승에서 가졌던 형체를 조금도 남기지 못하고 한 무더기의 육편으로 화해 저승으로 떠나게 될 것이었다.
자신의 결론에 만족한 장왕이 삼천 평의 넓이를 자랑하는 지하광장으로 들어섰다. 야명주의 미광을 받은 그의 동체가 울퉁불퉁한 흙바닥에 인간의 형상으로는 만들기 어려운 불룩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네 쌍의 눈이 일제히 기괴한 인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