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36
제235화
진천은 급히 명을 진정시켰다.
“괜찮소, 명. 이제 그녀는 명을 해칠 수 없소.”
명의 갑작스러운 발작의 이유를 간파한 진천은 공력을 담아 소리를 질렀다.
“물러나시오.”
검후의 기운이 멀어져갔다. 명은 와옥으로 접근하는 검후의 기척을 알아차리고는 격하게 반응한 것이었다. 기실 아까 명이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자 진천이 서둘러 검후를 밖으로 내보낸 것은 불상사가 벌어질 것을 우려해서였다. 제혼술에서 풀려난 명에게 검후는 공포의 대상이자 복수해야 할 원수였다.
그의 손에 잡힌 명의 어깨의 떨림이 잦아들었지만, 진천은 그녀를 놓아주는 대신 끌어안고 다독였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을 고르던 명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을 꺼냈다.
진천은 쓴웃음이 났다. 막혀있던 기억의 둑이 터져 한꺼번에 아픈 과거를 쏟아냈으니 피곤하기도 할 터였다. 그러나 방금 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따져보면 엉뚱한 반전이 아닐 수 없었다.
검후가 그의 청을 거부하고 방에 들어오려고 했다면 명은 필히 그녀를 공격하려 들었을 것이었다. 그러면 어떤 돌발사태가 벌어졌을지 몰랐다. 와옥 주위에 흩어져있는 금수위들은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좀 더 자구려, 명.”
금세 명의 호흡이 느려졌다. 진천은 의자에 앉은 채 탁자에 기대 잠이 든 그녀를 안아서 다시 침상에 눕혔다. 그러고는 땀에 젖어 이마에 붙은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잠시 명을 지켜보던 진천은 그녀가 당분간은 깨지 않으리라 보고는 방을 나갔다. 해가 벌써 중천에 올라가 있었다. 명의 회상을 두 시진 이상 듣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 자체로 길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같은 내용을 몇 번이고 반복한 탓이 더 컸다.
마당을 나온 진천은 그가 검후와 대결할 때 명을 대기시켰던 느티나무로 걸어갔다. 나무그늘 아래 검후와 그녀의 제자인 모용초, 그리고 금수위의 좌장이라 할 일겸단수 백리소소가 그림 속의 인물들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검후의 표정은 면사에 가려 알 길이 없었으나 진천은 그녀의 회색 동공에 감도는 불쾌감을 어렵지 않게 포착했다. 객들이 안방을 차지하고는 몇 시진이나 주인을 밖에 세워둔 셈이니 심사가 편치는 않을 터였다. 진천은 검후가 이 일을 그녀에 대한 무시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사과와 감사를 연이어 표했다.
“죄송합니다. 명과의 얘기가 예상외로 길어졌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진천의 정중한 언사에 검후의 눈빛이 풀렸다.
“그 아이는?”
검후의 물음에 진천은 쓰게 웃었다. 느티나무는 와옥에서 겨우 십사오 장 떨어져 있었다. 기막을 펼치지 않았기에 명에게 건넨 그의 말을 검후가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구태여 그 점을 지적할 까닭이 없었기에 진천은 순순히 대답했다.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일을 논의할 수 있겠구나.”
진천은 에둘러가지 않는 검후의 화법을 반겼다. 괜한 시간 낭비는 그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해질 무렵 진천은 잠이 깬 명과 장구를 떠났다.
명은 끝내 검후와 대면하지 않았다. 진천도 억지로 권할 생각이 없었다. 당분간은, 아니 앞으로도 오랫동안 두 여인은 마주치지 않는 게 서로에게 이로울 터였다.
명이 잠든 동안 진행했던 검후와의 협상은 치밀한 수읽기의 공방전이었다. 검후는 또 한 번의 전격적인 기습작전에 동참해달라는 진천의 요구에 난색을 표했다. 진천은 그녀의 입장을 이해했다. 가급적 빨리 최대한의 성과를 내고 싶어 하는 그와 달리 검후는 단판에 월교의 명운이 결정될 급전을 꺼렸다. 더욱이 내상 때문에 전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적의 본거지로 쳐들어간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부담스러운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검후에게 원치 않는 결정을 내리도록 압박을 가할 수도 있었으나 진천은 한 발 양보했다. 그 대신 다른 방면에서 실리를 챙겼다. 검후는 월교가 세평회와 동맹을 맺었음을 만천하에 공표하기로 했다. 이는 선언적인 효과 외에도 사벌의 정맹 침공을 억제하는 효력을 발휘할 것이었다.
그 밖에도 검후는 세평회와 정파 무림에 다양한 우호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했다. 월교의 손해를 전제하는 사안들이 아니었기에 이 부분의 타협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검후와의 담판을 마친 후 진천은 모용초의 비무 청을 들어주었다.
검후의 제자였지만 그녀의 검은 이미 스승의 그늘을 벗어나 독자적인 검로(劍路)를 연 수준에 이르러있었다. 무위는 짐작했던 대로 하수린과 엇비슷했다.
모용초와 손을 섞으며 진천은 검이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떤 초식도 구현해낼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일뿐더러 주인의 성정을 가장 잘 반영하는 도구라는 강호의 격언이 사실임을 다시금 실감했다. 모용초의 검은 사나운 정도를 넘어 독랄(毒辣)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검후의 검초와 달리 순후하고 정심했다. 마치 자하검선 팽하연의 검을 보는 것 같았다.
검후와의 협상 시 동석했던 모용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이미 그녀가 혜지와 담백한 품성을 갖춘 여인이라 판단했던 진천은 그녀의 검을 확인하고는 호감이 깊어졌다. 모용초는 장차 세평회의 좋은 벗이 될 것이었다.
훌륭한 후인을 길렀다는 점도 검후에겐 이로운 요소였다. 기실 진천은 왜 자신을 용서하느냐고 거듭 물어오는 그녀에게 끝내 답을 주지 않았다.
이유를 헤아린다면 검후는 더욱 선정에 힘쓸 터였다. 그러지 못하면 그를 의식해서라도 코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을 삼갈 터였다. 어느 쪽이든 진천으로서는 나쁜 결과가 아니었다.
사방 수백 리엔 인가가 없을 테지만 행여나 누가 들을세라 명이 속삭이듯 나지막이 말했다.
진천은 속도를 늦추고 기감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명이 말하는 ‘그 사람’의 기운을 잡아낼 수 없었다. 명의 경이로운 청력에 찬탄한 진천은 다시 속력을 올렸다. 수백 장을 나아가자 비로소 그도 들판 너머의 협곡에서 새어 나오는 기음을 감지했다.
하지만 진천과 명이 골짜기에 들어서기도 전에 풀벌레 소리 같은 미음(微音)이 사그라졌다. 소리를 내던 이가 그들의 접근을 인지했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이 양편에 절벽을 두른 좁은 길을 나아가자 불룩한 공터가 나왔다.
교교한 달빛 아래 ‘그 사람’, 검왕이 석상처럼 우뚝 서있었다. 가슴까지 늘어진 그의 탐스러운 백염만이 바람에 깃발처럼 나부낄 뿐이었다.
속세의 잡사에 대한 무념이 배어있는 선풍도골의 용모였으나 검왕의 표정엔 불청객들이 탐탁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진천은 그를 향해 포권했다.
“진천이 검왕 어르신을 뵙습니다.”
인사를 받는 대신 검왕이 질문을 던졌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느냐?”
진천은 쓰게 웃었다. 대륙은 넓고도 넓었지만 검왕이 갈만 한 곳은 두 군데밖에 없었다. 하나는 그가 물경 사십팔 년이나 머물렀던 장구 인근의 야산이었고 다른 하나는 호야곡이었다.
진천은 후자일 가능성이 높으리라고 추측했다. 외부의 방해를 신경 쓰지 않고 수련에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에 더해 호야곡엔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검왕은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에서 마무리를 짓고 싶었을 터였다.
“어르신께서 가실만 한 데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장구 외곽에 있는 어르신의 거처에 들렀는데 안 계시더군요. 그래서 이리로 왔습니다.”
진천의 답변은 검왕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진천도 알고 있었다. 검왕의 질문에 담긴 진의는 ‘어떻게 알았느냐’가 아니라 ‘왜 왔느냐’에 있었다. 하여 진천은 바로 말을 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그래도 검왕의 미간에 드리운 언짢은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더 짙어졌다.
진천은 축객령이 떨어지기 전에 단도직입했다.
“무황과 관련된 일입니다.”
냉담하던 검왕의 눈빛에 청광이 번득였다. 그의 반응을 본 진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짐작이 들어맞아 우쭐한 마음은 한줌도 없었다. 틀리기를 간절히 바랐던 짐작이었다. 그러지 않았음을 확인했으니 암담할 따름이었다.
검왕이 중얼거렸다.
“그녀가 너에게도 알렸을 줄이야.”
진천은 시치미를 뗐다. ‘그녀’가 독후임은 불문가지였다. 독후는 무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내뱉지 않았었다.
“제게는 모든 걸 다 말씀해주시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르신께 몇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나도 딱히 들은 게 없다. 그가 돌아올 거라는 말 밖에는.”
진천은 실망했다. 검왕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떠나기엔 너무 아쉬웠다.
“독후께서 무황이 언제쯤 올 거라는 언질을 주지 않으셨는지요?”
“없었다.”
“대략적으로라도…….”
“없었다니까.”
진천은 쓴웃음이 났다. 검왕은 대화상대로는 최악이었다. 그러나 허언을 일삼지 않기에 발언의 진위를 두고 저울질 할 필요가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무황의 무력에 관해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까?”
“…….”
“혹은 무황이…….”
“그만해라.”
진천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상태라면 밤을 새워 물은들 한 개의 답도 얻지 못할 터였다.
“더 할 말이 없으면 가 보거라. 다시는 오지 말고.”
갈등하던 진천은 축객령에 응하지 않고 버텼다.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
“독후께서 어르신에게는 그 말씀을 드리지 않은 모양이군요.”
검왕의 안광에 호기심이 묻어났다. 진천은 일부러 뜸을 들였다. 참지 못하고 검왕이 미끼를 물었다.
“무슨 말?”
“부활한 무황을 이기기 위해서는 목을 꺾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심장을 녹여야 한다고.”
“…….”
“아마 무황은 독왕지체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침묵하던 검왕이 질문을 던졌다.
“다른 얘기는 없었더냐?”
진천이 추론을 사실인 양 천연덕스럽게 늘어놓았다.
“무황이 팔대무왕을 훨씬 능가하는 무력을 지녔을 거라고도 하셨습니다.”
검왕의 만면에 언뜻 희열감이 떠올랐다. 진천은 씁쓸했다. 검왕이 어째서 기뻐하는지 넉넉히 짐작하기 때문이었다. 필생의 숙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의 성취감은 커질 것이었다.
검왕이 욕심을 부렸다.
“더 없느냐?”
밑천이 떨어진 진천은 고개를 저었다.
“유감스럽게도 제가 들은 내용은 이게 전부입니다. 저는 독후께서 어르신께는 더 많은 것을 전해주셨을…….”
진천에게서 더 건질 게 없다고 여긴 검왕이 그의 말을 잘랐다.
“없었다니까. 이제 가 보거라.”
거래의 기본 소양을 갖추지 못한 검왕을 속으로 비난하던 진천은 이어진 그의 말에 자신이 성급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그녀에게 들은 건 딱 두 가지다. 첫째, 그가 돌아올 거라는 것. 둘째, 예전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확실히 그라는 것. 그게 다다.”
검왕의 뒷말이 지닌 중대한 의미를 직감한 진천은 처진 눈을 치떴다. 벽력도문에서 대웅을 만난 이후 지난 엿새 간 골머리를 앓았던 문제의 답을 비로소 찾아낸 것이었다. 아직 완벽한 답은 아니었지만 석연치 않았던 조각들을 꿰맞추기엔 충분했다.
심중에 떠오르는 한 가지 가설에 진천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억측일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라도 현실이 된다면 끔찍한 일이었다.
진천의 분위기가 이상하자 내내 조용히 있던 명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실태를 깨달은 진천이 쓰게 웃었다.
“아무 것도 아니오. 잠시 딴 생각을 했을 뿐이오.”
명을 안심시킨 진천이 검왕에게 포권을 취했다.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검왕은 진천의 감사인사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를 쫓아버릴 수 있어 만족한 듯했다. 진천이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어르신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됐다. 여기까지다. 더 이상 아무 말도 듣지 않겠다. 어서 가거라.”
진천의 요설이 이어지기 전에 검왕이 원천봉쇄했다. 진천과 계속 말을 섞다간 그의 수에 말려들 공산이 크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검왕의 음성과 눈빛에 서린 단호함에 진천은 싹싹하게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옥체 보중하십시오.”
검왕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보인 진천이 등을 돌려 몸을 날리자 명이 즉시 그를 따랐다.
진천은 명의 최대속도에 맞춰 경신을 전개했다. 시급히 만나보아야 할 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