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239
제238화
진천의 표정을 살핀 문중석이 반쯤 센 눈썹을 이마 위로 추켰다.
“보아하니 진 공자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구려.”
진천이 부인했다.
“아닙니다. 막연한 불안을 느꼈을 뿐 무황이 구체적으로 어떤 수를 준비했을 지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방금 내가 말한 괴물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단 말이오?”
“……천마(天魔)를 가리킨다고 이해했습니다만.”
문중석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허어. 알면서도 그리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다니. 혹시 진 공자는 천마가 나오더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자신하는 게요? 아니면 천마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게 아니오?”
진천은 쓰게 웃었다. 겉으로는 담담한 신색을 유지했으나 속은 쇳덩이를 얹은 듯 무거웠다. 다만 문중석에게 했던 말과는 달리 어느 정도 예상을 했었기에 충격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진천은 문중석이 던진 두 가지 질문에 역순으로 대답했다.
“천마에 관해서는 흔히 알려진 사실 이상으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제가 그를 대적할 수 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만약 대대로 전해지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는 저로서는 역불급인 존재일 것입니다.”
문중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오로지 영세제일인으로 일컬어지는 천무대제만이 그 괴물을 대적할 수 있을 거외다.”
“천마의 무위가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 전에 천마에 관해 진 공자가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 듣고 싶소만.”
문중석의 요구에 진천은 머릿속에 든 정보를 풀어놓았다.
천마 양비(梁悲)!
양비는 삼백 년 전 초인시대의 종말을 알렸던 대마두였다. 당시 삼대천왕(三大天王)이라 불렸던 정사마의 지존들은 그의 십초지적도 되지 못했다. 다들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진 않지만 그에게 일방적으로 꺾인 삼대천왕이 공히 절대지경에 이른 무존(武尊)들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천마의 무력은 천무대제와 마찬가지로 초월지경에 이르렀다고 해도 무방할 터였다.
양비가 천마로서 활동한 기간은 두 달 남짓에 불과했다. 그는 그 짧은 기간 동안 무려 삼백만 이상의 인명을 학살하는 전무후무한 만행을 저질렀다. 정파의 오대세가 중 세 곳이 멸문지화를 당했고 사파칠문에서도 네 군데나 멸망의 참화를 입었다. 마도연맹(魔道聯盟)은 아예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천마는 중원을 일통한 무림사의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그것도 혼자의 힘으로. 만약 그의 치세가 일 년만 더 지속되었어도 대륙은 피의 바다에 잠겼으리라는 게 중론이었다.
천만다행히도 하늘은 악마만이 아니라 그를 처단할 구세의 영웅도 함께 내려 보냈다. 천마와 동시대인이자 그보다 한 발 앞서 무림을 평정하고 강호를 떠났던 천무대제는 북방의 오지까지 불어온 피바람을 접하고는 은거를 깨고 중원에 되돌아왔다. 그러고는 무용평에서 천마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 그를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다. 그 일전으로 천무대제에겐 무신(武神)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진천이 정리한 내용을 들은 문중석이 관리를 하지 않아 잡초처럼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흠, 잘 알고 있구려. 그럼 진 공자의 궁금증에 답을 주겠소. 어디까지나 추정이라는 것을 전제로 들어주길 바라오. 천마는 전날 마황(魔皇) 고형, 무제(武帝) 문우상, 그리고 사존(邪尊) 조휘를 차례로 꺾었소. 기록에 따르면 마황을 무릎 꿇리는 데는 팔초가 걸렸고 무제의 단전을 깨뜨려 폐인으로 만든 건 삼초 만이었다고 하오. 사존의 경우는 단 일초였소. 목숨을 건졌던 앞선 두 무존들과는 달리 사존은 머리가 터져 즉사했소.
삼대천왕 간에는 무력 차이가 극미했다는 게 정설이오. 그럼에도 마황이 팔초를 버틴 반면 사존은 일초 만에 무너진 건 상성이라기보다는 천마의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오. 그는 마음만 먹었다면 마황이나 무제도 단박에 저승으로 보내버릴 수 있었을 게요.
객관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삼백 년 전 초인시대를 열었던 삼대천왕의 무위는 오늘날의 팔대무왕보다 한 치라도 높다는 게 내 판단이오. 만약 일대일로 겨룬다면 팔대무왕 중 누구도 삼대천왕의 적수가 되지 못했을 거라 확신하오. 사파 무림의 맹호들이 득시글거리는 가운데 장왕의 사지를 자른 진 공자라면 어떨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 삼대천왕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기는 어려울 듯싶소. 물론 내가 틀렸을 수도 있소. 특히 진 공자는 하루가 다르게 무위가 상승하고 있으니 보름쯤 후에 보았다면 예측불가라고 답했을 거외다. 그렇더라도 천마와 비견하기엔 무리가 있소.”
“혹시 팔대무왕이 힘을 합친다면 어떨까요? 천마를 막는 데 몇 명의 무왕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미리 생각해두었다는 듯이 문중석의 입에서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일단 둘은 무조건 안 될 거고 셋도 어려울 것 같소. 넷이면 대등하지는 못하더라도 버틸 수는 있을 성 싶고 다섯이 뭉치면 한 번 해 볼만 하지 않을까 싶소. 물론 순전히 개인적인 예상일뿐이오. 억측이라 해도 할 말이 없소. 확실한 근거를 대라면 입을 다물어야 하니.”
진천은 암울했다.
만약 무황이 천마의 무력을 지니고 나온다면 그를 막을 방도가 없다는 뜻이었다. 구(舊) 사왕은 전원이 참전에 문제가 있었다. 검왕은 절대로 합공에 참여하지 않을 터이고 무황의 부활에 일정한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을 독후 역시 그를 저지하는 일에 나설 리 만무했다. 폐인이 된 장왕과 무력의 대부분을 상실한 권왕은 아예 논외였다.
그렇다면 사패의 주인들이 힘을 모아야 할 터인데 현실적으로 기대난망이었다. 무엇보다 남천도왕이 동참할 확률은 일 할에도 미치지 못할 거라 보아야 했다. 무황이 곽건의 몸을 갖고 돌아올 터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곽건의 혼백이 천마에게 깃들어있다면 남천도왕은 필히 그의 편에 설 것이었다.
설령 어찌어찌 남천도왕을 끌어들인다고 해도 난제 첩첩이었다. 서로 원수나 다름없는 네 무왕을 어떻게 합심하도록 한단 말인가. 문중석의 판단이 맞는다면 사왕(四王)이 총력을 쏟아도 천마의 무위를 지닌 무황에겐 밀릴 터였다. 형세가 조금만 불리하게 돌아가도 남천도왕은 발을 빼고 본인의 안위를 돌보려 할 게 뻔했다. 그리 되면 무황과의 대전은 해보나 마나였다.
진천이 숙고하는 기색이자 조용히 지켜보던 문중석이 입을 열었다.
“내 추측대로 무황이 천마를 품고서 나타난다고 해도 절망적인 국면이 아닐 듯싶소만. 지금은 삼백 년 전과는 조건이 다르잖소. 남천도왕이야 제 손자의 탈을 쓰고 올 무황에게 붙을지 모르나 나는 나머지 무왕들만으로도 충분히 무황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 보오. 마왕을 설득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진 공자가 그의 체면을 세워주고 향후 마련과의 화평을 약속하면 구워삶을 수 있을 게요. 설사 그가 협조를 거부하더라도 비관적인 형국은 아니리라 믿소. 권왕과 검왕, 그리고 진 공자의 외조부이신 본 맹의 맹주와 월교의 검후가 건재하니 말이오. 더욱이 이 편엔 무왕들을 능가하는 진 공자가 있잖소?”
진천은 쓰게 웃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틀린 분석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중석은 권왕의 부상과 검왕의 이탈에 관해서는 알지 못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사정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진천의 안색이 풀리지 않자 문중석이 넘겨짚었다.
“진 공자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겠소. 마왕과 북천도왕이 무황을 막으려들기는커녕 그의 휘하에 들까봐 염려하는 게 아니오? 나도 심각한 사안이라고 생각하오. 이에 대해서는…….”
진천은 문중석이 불필요한 형세판단을 이어가지 않도록 끼어들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
진천은 의아해하는 문중석에게 권왕이 전투불능의 상태임을 털어놓았다. 검왕이 합세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말을 덧붙이자 문중석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허어, 크나큰 전력의 손실이구려.”
진천은 망설였다. 그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문중석은 그와 동일한 절망감에 빠질 터였다. 요컨대 무황이 천마가 되어 돌아온다면 사실상 대책이 전무했다.
진천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무황이 설혹 천마가 되어 돌아온다고 해도 삼백 년 전의 살겁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문중석이 진천의 기대감을 뭉개버렸다.
“내가 보기엔 그럴 가능성은 터럭만큼도 없소. 천마 양비는 한때 북천의 천무대제와 쌍벽을 이루는 남방의 절세기재로 명성을 떨친 자였소. 사파칠문에 속해있던 삼검문(三劍門) 출신임에도 정파적 기질이 강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지오. 최강의 후기지수를 가리는 대결에서 천무대제에게 패한 이후 그는 무림에서 종적을 감추었소. 그로부터 몇 년 후 느닷없이 재등장해서는 물경 삼백이십 만에 달하는 인명을 학살하는 혈겁을 저질렀던 거요. 천마가 되기 전의 그라면 그랬을 리 만무하오.”
“…….”
“천마가 어떻게 나온 지 아시오?”
“모릅니다. 제 식견을 넓혀주시길 바랍니다.”
“천마는 중원의 산물이 아니오. 우리가 서역이라 부르는 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이역(異域)이 낳은 괴물이외다. 중원 못지않게 드넓은 땅과 오랜 역사를 가진 그 대륙엔 그곳의 민중이 ‘후아브나르’라고 부르는 대악마가 두 번 인세에 출현했다고 하오. 한 번은 이천오백 년 전이고 다른 한 번은 삼백 년 전이오.”
“그렇다면 두 번째 악마는 중원의 천마와 동시대에 나왔다는 말이군요?”
“그렇소. 정확한 순서를 따지면 저쪽이 먼저였소. 어느 날 갑자기 지상에 떨어진 악마는 닥치는 대로 살겁을 저지르고 다녔다고 하오. 서역엔 기이한 술법을 구사하는 이인(異人)들이 있는데 아무도 그 악마를 막지 못했다는구려. 참고로 그 이인들은 중원의 무인들이 무시해도 좋을 만큼 허술한 자들이 아니라오. 일부는 초절정의 고수들도 버거워 할 사술을 구사한다고 하오. 그 이역엔 소위 팔대신물(八大神物)이라는 기물(奇物)이 있는데 그 중 세 개를 취하면 절대지경의 무존과도 능히 자웅을 결할 수 있다고 알려졌소. 실제로 그런 술법사가 나온 적도 있었소. 천백 년 전 그 대륙을 일통했다는 ‘이파’란 이름의 절대흑사(絶對黑師)였소. 아, 흑사는 술사들의 성향을 지칭하는 용어요. 이인들은 백사와 흑사로 나뉘는데 꼭 같지는 않지만 중원 무림의 정파와 사파에 대입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외다.”
“그렇군요.”
“실은 근간에 서역에서 팔대신물 중 금강저(金剛杵)와 철벽운(鐵壁雲)을 지닌 술사들이 나타나 대혼란이 벌어졌다고 하오. 전자는 흑사고 후자는 백사였는데 창과 방패의 대결에서 철벽운을 부린 이가 이긴 모양이오. 금강저의 흑사를 무찌르긴 했지만 철벽운의 주인도 아주 무사하지는 못했다고 전해졌소. 그들의 격돌이 팔월 말경에 있었다니 불과 석 달여 전의 일이오.”
“…….”
“팔대신물에는 방금 말한 두 기물 외에도 여의주(如意珠), 환상환(幻像環), 광구(光球), 천라망(天羅網), 화염봉(火焰棒), 그리고 풍운선(風雲扇)이 있소. 각각의 기물은 독특한 효능을 지니고 있는데…….”
진천은 지식을 자랑하려는 문중석의 장광설을 끊어야만 했다. 흥미로운 이야기였으나 지금은 줄기를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그보다 천마에 관해 더 듣고 싶습니다. 양비란 자는 어떻게 이역의 괴물과 인연을 맺었고 그의 힘을 취하게 되었는지요? 그리고 무엇이 그의 성정을 뒤바꾸었는지요?”
진천이 말을 자르자 불쾌한지 문중석이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감히 팔대신물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진천의 요청에 순응했다.
“양비가 악마와 결합해 미증유의 마력을 얻을 수 있었던 구체적인 비결은 나도 알지 못하오. 하지만 협객이라 불러도 무방할 행적을 보였던 그가 악귀로 탈바꿈한 연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짐작이 가오. 그것은 악마의 정체가 수만, 수십만의 원령(怨靈)이 뭉친 악령(惡靈)이기 때문이었소. 그 악령의 존재이유는 살아있는 모든 것의 몰살에 있었소. 그러니 무황이 전날의 양비처럼 그 악령을 품었다면 본령의 명을 거역할 수 없을 터이고 살겁은 필연지사가 될 거외다.”
문중석의 확언에 진천은 암담해졌다. 그로서는 목전의 노책사가 틀리기를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