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46
제45화
달빛이 호젓했다.
진천은 봄꽃이 만발한 화원을 따라 걸었다.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는 데는 산보만큼 좋은 게 없었다.
솔숲과 죽림을 지나 연못까지 간 진천은 두 갈래 길에서 천년노송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소나무 옆의 너럭바위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거리가 상당했지만 진천은 한눈에 그 인영이 노미현임을 알아보았다.
진천은 잠시 갈등했다. 정자로 가는 샛길로 빠지면 그녀와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노미현이 삼보장에 온 이후 지난 칠 일 동안 한 번도 말을 섞은 적이 없었기에 그녀와의 대면은 사뭇 어색할 터였다.
촌각의 고민 끝에 진천은 경로를 수정하지 않고 너럭바위로 걸어갔다. 그의 발소리를 들은 노미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진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지척에 이른 진천이 먼저 인사했다.
“오랜만이오, 노 소저.”
노미현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미소조차 본 적이 없었던 진천은 당혹스러웠다.
“사흘 전에 봤는데 오랜만이라니. 나하고는 시간 감각이 너무 다르군요.”
진천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렇구려. 실언했소.”
기실 사흘 전에 본 건 본 게 아니었다. 내원(內院)을 나오던 노미현을 먼발치에서 본 것뿐이었다. 그나마도 그녀는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진천은 굳이 따지지 않고 넘어갔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오?”
“나는 여기 오면 안 되나요?”
노미현의 반문에 진천은 말문이 막혔다. 길을 돌아가지 않았던 걸 후회하는 진천에게 노미현이 착석을 권했다.
“앉을래요?”
처진 눈을 치떴다 내린 진천이 엉덩이를 바위에 붙였다. 열여덟 살? 동갑내기 남녀는 나란히 앉아 천공의 만월을 감상했다. 그러다 노미현이 뜬금없이 물었다.
“왜 내게 묻지 않죠?”
“뭘 말이오?”
“알면서.”
“…….”
“모두들 당신이 엄청난 무공뿐만이 아니라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라고 하더군요. 그런가요?”
“전혀 그렇지 않소.”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당신은 정심한 기품에 후덕한 인품까지 겸비했다니까 겸양지덕쯤이야 기본이겠죠.”
“…….”
“이렇게 과묵한 사람인지는 몰랐군요. 듣던 바와는 다른데요?”
진천은 고개를 돌려 노미현을 보았다. 이마에서 코와 입술을 거쳐 턱까지 이어진 선은 직선과 곡선의 완벽한 조화를 자랑했다. 실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내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사내는 처음이에요.”
진천은 다시 시선을 천공으로 올렸다.
“어째서 삼보장으로 돌아왔는지 듣고 싶소.”
“두 가지 계기가 있었어요. 뭔지 알겠죠?”
“모르겠소.”
“당신은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남의 마음을 헤아리고 어루만지는 재주도 있다고 하던데. 나한테는 관심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관심을 줄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건가요?”
“…….”
“나는 당신이 그 계기들을 짐작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해요. 틀려도 좋으니까 말해 줄래요?”
“…….”
“부탁해요.”
“정말 모르겠소. 하지만 꼭 말하라면……, 일단 하나는 고 형과 관련이 있을 것 같소만.”
“내가 고 오라버니의 설득에 넘어갔을 거라는 말인가요?”
“그건 아니오. 나는 고 형의 손가락을 얘기한 거요.”
“아!”
“기형적일 정도는 아니지만 고 형은 검지의 길이가 중지와 비슷하오. 노 소저도 똑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소? 외관상 두 사람이 닮은 점은 그것뿐이지만 무시하기 어려운 유사성이 아닐 수 없소. 노 소저는 그날 여 형님의 장원에 찾아온 고 형의 손가락을 유심히 살피고는 노 대인의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있으리라 판단하지 않았소?”
“……좋아요. 하나는 맞았어요. 그럼, 다른 하나는 뭐죠?”
“내 과거사일 듯싶소.”
“아…….”
진천은 구체적인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고, 노미현도 요구하지 않았다.
잠시 후 노미현이 두 사람이 공유하던 침묵을 깼다.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느낌이 이상했어요. 눈빛이 여느 사내들과는 너무 달랐거든요. 나에게 홀리거나 반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것은 더더욱 아니고. 나는 그날 청로의 장원에서 당신의 모친 얘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깨달았어요. 당신이 내게 보인 눈빛의 의미를.”
노미현이 진천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가여웠던 거죠? 내 아픔을 이해했던 거죠? 그렇지 않나요?”
“창인에서 노 대인의 사연을 들을 때부터 소저에게 동병상련의 심정이 들었소. 철이 들기도 전에 사랑하는 이로부터 원한을 주입받는 고통이 어떤 건지를 아니까.”
노미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머니를 원망하나요? 당신에게 혈육에 대한 원한을 심어 놓고 당신의 목전에서 목숨을 끊어서.”
진천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이 없지는 않았소. 그렇게 떠난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으로 심혼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했소.”
진천에게 감정 이입이 된 듯 노미현의 봉목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진천은 손을 뻗어 그녀의 복숭앗빛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지금은 괜찮소. 노 소저도 그렇게 되리라 믿소.”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심장이 녹는 것 같아요. 슬픔과 미움과 미안함 등이 범벅이 되어…….”
진천이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노미현을 다독거렸다.
“사람들의 말마따나 세월이 약일 듯싶소. 시간의 치유와 더불어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할 터이고.”
“어떤 노력이요?”
“용서 말이오. 나는 소저가 모친과 노 대인을 용서하길 바라오. 삼보장에 왔다는 건 이미 그러기로 결심했다는 뜻으로 보았소만.”
“마음은 그렇게 먹었지만 쉽지 않네요. 아직도 ‘아버지’를 보면 주체하기 어려운 분기가 솟구쳐요.”
“나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데 이 년이 넘게 걸렸소. 부디 소저는 그보다 짧기를 바라오.”
진천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행동을 대화를 마치려는 의사 표시로 받아들인 노미현이 서운함에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정문에서 소란이 벌어진 것 같소.”
오해를 푼 노미현이 너럭바위에서 일어나며 진천이 원하는 말을 뱉었다.
“같이 가 봐요.”
* * *
쿵.
철곤을 꺼내 땅을 찍으며 대웅이 윽박질렀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지? 나를 다시 보게 되면 국물도 없을 줄 알라고? 내 말이 우스워?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기어들어 와? 내 몽둥이맛을 보고 싶다 이거지?”
대웅의 기세에 눌린 지찬주는 악동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소동처럼 몸을 웅크렸다.
옆에 있던 고량은 고소를 지었다. 대웅이 주안표국의 주인에게 화를 내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대웅은 지찬주가 언제 삼보장을 찾아와 먹었던 재산을 토해 내고 전날의 냉대를 사과할지를 두고 진천과 내기를 했다.
그저께로 짚었던 대웅의 예측은 이미 빗나갔다. 반면 대웅의 고집에 못 이겨 내기에 응하며 대충 오늘 밤쯤 지찬주가 올 거라 했던 진천은 제대로 적중한 셈이었다.
“오려면 더 일찍 왔어야지? 뭐 하느라고 뭉개고 있다 이제 나타나? 뒈지고 싶어?”
까딱하면 지찬주가 무릎을 꿇을 참인지라 고량이 대웅을 말렸다.
“진정해라, 대웅.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오, 지 국주?”
고량이 알면서도 물었다.
전날 삼등분한 삼보장의 재산 중 둘을 도화각과 백도방이 취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를 다시 반으로 나눠 주안표국과 북운상단이 각각 하나씩 가져갔다. 삼보장주 노덕의 오랜 경쟁자였던 북운상단(北雲商團)의 오재승은 대세를 읽고서 이미 나흘 전에 재산 반환의 뜻을 알려 왔다. 지찬주는 한 발이 아니라 두세 발쯤 늦은 것이었다. 고량은 진천이 어떻게 지찬주가 장고할 것을 알았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지찬주가 대답할 틈도 없이 대웅이 느물거렸다.
“들으나 마나 아뇨, 고 형.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욕심을 부리다간 배탈이 날 것 같으니까 일 년 전에 옳다구나 하고 삼킨 땅과 건물들과 보물들을 도로 뱉어 내러 왔겠지. 그런데 그거 알아, 노인네? 삼보장의 이자는 비싸. 하지만 안면도 있고 하니 특별히 깎아 주지. 딱 가져간 원금만큼만 내.”
지찬주의 홍안이 파랗게 질렸다. 대웅의 요구의 수용은 주안표국의 파산을 의미했다.
“제발, 봐주게나. 내가 잘못했네.”
바닥에 엎드린 지찬주는 씨도 먹히지 않을 대웅 대신 고량에게 빌었다. 선친과도 친분이 두터웠고 코흘리개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인지라 고량은 차마 지찬주를 땅바닥에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 문제는 의숙이 결정할 일이오. 잠시 후면 돌아오실 터이니 그동안 청와옥에서 기다리구려.”
지찬주를 일으키며 고량이 말했다. 지찬주는 기사회생한 기분이었다.
“고맙네. 그렇게 함세.”
행여나 대웅에게 뒷덜미를 잡힐세라 지찬주가 와옥으로 도망치듯 달려갔다.
대웅이 투덜거렸다.
“쳇, 천이 닮아 가는 거요, 고 형? 저런 작자는 좀 더 굴렸어야 하는데. 앞으로는 내 행사에 끼어들지 말고…… 엉?”
말을 하다 말고 대웅이 왕방울 눈을 멀뚱거렸다. 고량이 그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막 후원을 빠져나오는 진천과 노미현이 보였다.
“왜 둘이 같이 나오지? 물과 기름처럼 굴더니.”
대웅의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고량이 진천에게 마주 걸어갔다. 멍하니 섰던 대웅이 부랴부랴 고량을 쫓았다.
* * *
“결정을 내렸느냐?”
고량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직 생각 중이오.”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다른 대안은 없지 않으냐?”
진천은 답을 하지 못했다.
“누가 왔었나요?”
노미현이 진천과 고량 사이의 침묵을 비집고 들어왔다. 대웅이 냉큼 대답했다.
“주안표국의 지 국주가 왔소, 노 소저. 전날 삼보장에게서 가져간 재물들을 돌려주겠다는 뜻을 밝히러 온 모양이오. 방금 청와옥에 들어갔소. 노인네, 아니 노 대인을 기다린다며.”
“그랬군요. 못 뵌 지 오래됐는데 가서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노미현이 와옥으로 갈 태세이자 대웅이 안절부절못했다.
“혹시 지 국주와 친하오, 노 소저?”
“그런 편이죠. 왜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소. 나도 같이 갑시다. 안면은 텄지만 소저에게 제대로 소개받고 친교를 맺고 싶구려.”
고량은 지찬주의 고자질을 막으려는 대웅의 수작이 가소로웠다. 하지만 그가 관여할 일이 아니었기에 신경을 껐다. 진천과 훨씬 중차대한 사안에 대해 의논하고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진천에게 후원으로 가자고 청하려던 고량이 굵은 눈썹을 찡그렸다. 진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진천이 삼보장의 담장 역할을 하는 대나무 숲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에 서린 경계심을 인지한 이남일녀는 덩달아 긴장했다.
“나와라, 가린.”
진천의 입술에서 이해 난망의 말이 흘러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시커먼 그림자가 수림에서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진천을 향해 쇄도했다.
대웅과 고량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며 방어 태세를 갖췄다. 노미현은 반응할 새도 없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진천이 내공이 담긴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잠깐, 가린. 기다려. 우리가 합의한 규칙을 잊은 건 아니겠지?”
저돌적으로 달려들던 괴인이 거짓말처럼 진천의 십 보 앞에서 뚝 멈춰 섰다. 달빛에 드러난 그의 형상을 본 삼인은 침을 삼켰다.
거대한 체구였다. 꼽추처럼 구부정한 자세였음에도 칠 척이 넘어 보였다. 짧은 반바지 아래 보이는 종아리는 어지간한 장정의 몸통보다 굵었고 어깨의 알통은 수박만 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솥뚜껑 같은 크기의 손에는 맹수의 발톱처럼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달려 있었다. 돌출된 입 부분도 눈길을 끌었다. 입을 벌리면 커다란 송곳니가 보일 것만 같았다.
짐승인지 사람인지 분간하기 힘든 괴인이 발산하는 흉포한 기세에 평온하던 밤공기가 진저리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