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ver Temptation of the Iceworld RAW novel - Chapter 21
20장. 크레바스
현수는 의무실에서 나오다 복도를 빠르게 지나치는 태훈을 바라보았다. 순간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음을 지었지만 그는 그대로 그녀를 지나쳤다. 무슨 대단히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본관 문을 박차고 나가는 폼이 꽤 다급해 보였다.
‘무슨 일이지?’
그가 사라진 문을 멍하니 쳐다보던 현수는 몸을 돌려 식당으로 향했다.
“언니. 무슨 일 있어요?”
현수는 조리실 안에서 급한 손놀림으로 뒷정리를 하는 영숙을 바라보았다. 영숙의 표정 또한 무척 굳어 있었다.
“어. 윤 선생.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무슨 일이 생겼나봐.”
“무슨 일요?”
“모르겠어. 조금 전, 장 박사가 태훈일 호출했어. 긴급으로.”
긴급? 그를? 무슨 긴급? 어제 저녁을 끝으로 나흘 내내 불어대던 블리자드도 물러갔다. 이제 곧 남극에도 봄이 온다. 봄이 되어 하계대원들도 입남극하면 남극은 다시 활기차게 변할 것이다. 지난밤 불었던 블리자드도 어쩌면 겨울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바람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무슨? 어디가 심각하게 망가졌나? 블리자드가 지나간 자리는 항상 무엇이 부서지거나 망가져 있었다. 하지만 올겨울 들어서도 여러 번째 찾아온 블리자드가 특별히 긴급사항은 아니었다. 게다가 오늘 아침 회의 때만 해도 이번 블리자드는 예상외로 그의 피해를 남기지 않았다며 모두들 기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뭐가 긴급이란 말인가?
“오늘 아침 회의 때만 해도 별 말씀 없었잖아요?”
“그래. 그랬지. 그런데…”
딩동댕.
영숙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머리 위의 스피커에서 유원호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수는 갑자기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으로 영숙을 바라보았다. 영숙 또한 무엇을 느꼈는지 현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요?”
“글쎄. 원호의 목소리로 봐서는 보통 일은 아닌가 보네. 우선 가보자.”
현수는 젖은 손을 쓱쓱 닦고 앞치마를 벗는 영숙을 걱정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긴급’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강태훈, 그가 떠올랐다. 여기 세종기지에서는 ‘긴급’과 ‘위기’, ‘위험’ 이라는 단어들은 모두 강태훈, 그와 연관이 있었다. 그 모든 일에 그가 나선다. 거친 파도의 바다로 나가야한다거나, 유빙이 가득 들어찬 바다를 고무보트, 하나로 헤치고 나가야 할 때도, 그 모든일에 강태훈, 그가 앞장선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볼 때 이번에 발생한 그 ‘긴급’한 사건에도 그가 나설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현수는 식당을 나서는 영숙의 뒤를 급히 따라나섰다. 전 대원 호출이라면 분명 아주 큰 일이 발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 지점입니다.”
유원호가 회의실의 한쪽 벽에 걸려있는 지도의 한 지점을 짚었다. 지도에는 맥스웰 만을 끼고 양쪽으로 킹조지 섬과, 넬슨 섬의 세세한 부분까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각 국의 기지 위치가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통신대원 유원호가 짚은 부분은 마리안 소만을 사이에 두고 세종기지 반대편에 위치한 위버반도 쪽이었다.
조난….이승규 연구원과 박용호 연구원이 지금 저 위버반도의 하얀 설원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전 칠레기지에서 헬기가 떴지만 기상악화로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칠레기지에서는 오늘내로 다시 헬기가 뜨는 것에 대해 거의 비관적입니다.”
회의실에 모은 사람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문 채 숨소리조차 편히 내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장 박사의 입에서 화난 음성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대형 사고는 일반 대원들에게도 큰일이지만 기지의 대장인 장 박사가 느끼는 심정은 그 누구에게도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아무리 크레바스로 위험한 마리안 소만이라도 빙원의 중앙으로만 가면 크레바스에 빠질 위험이 거의 없다. 몇 년 전에 안전한 빙원 루트를 확인했고, 그 지점을 깃발로 표시하고 GPS 포인트로 찍어놓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들이 있는 곳의 위치로 봐서는 안전루트에서 얼마간 떨어진 것 같습니다. 아마 조금 더 빠르게 복귀하려고 해안 쪽을 경유한 것 같습니다.”
이젠 장 박사와 함께 다른 대원들의 얼굴에도 안타까움이 가득 흘렀다. 가깝다고 죽음의 길을 택하다니….하지만 이제와서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질책은 나중에 하면 된다. 그들이 살아난 후에.
“현재 상황은?”
강 박사의 조용한 질문에 유원호 통신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함께 출발했던 우루과이 대원들 중 한 명이 크레바스에 빠져 실종 상태고, 우리 대원 두 명과 우루과이 대원 두 명이 현재, 조난 상태 입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었던 원호는 다시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야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칠레기지로부터 자세한 사고보고를 받은 자신이 결국 해야 할 일이었다.
“이승규 연구원이 부상을 당한 상태입니다.”
유원호 통신원의 말에 장 박사와 강 박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얼마나?”
“다리를 다친 것 같은데 정확한 상태는 알 수 없습니다. 칠레기지에서는 의사도 함께 가는 게 낫다고….”
원호는 태훈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의 인상이 더없이 험악했다.
“우루과이 기지에서는 다른 연락이 없는 건가?”
“그들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먼 거리고 현재 그쪽은 기상이 더욱 악화된 실정입니다. 사고지점에서는 저희가 가장 가깝고, 구조를 한다하더라도 우리 기지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헬기만 뜰 수 있다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기상악화로 헬기는 뜰 수 없었다. 지금으로써는 육로이동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강 박사 생각은 어때?”
장 박사의 조용한 물음에 태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라는 것인가. 이미 답은 나와 있는데. 대답 없는 태훈의 모습에 장 박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렇게 탁상공론만 할 때가 아니었다.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움직여야한다.
장영진 박사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모두들 알다시피 지금 바닷길은 우리가 가진 고무보트로는 이동할 수가 없어. 아예 완전히 얼었다면 다른 운송수단을 이용해서라도 바다를 가로지르면 되겠지만 바다가 완전히 언 상태도 아니야. 그리고 고무보트가 저 많은 유빙들과 살짝 얼어있는 얼음덩이를 헤치고 지날 만큼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없이 마리안 소만을 둘러가야 한다.”
장 박사의 설명에 대원들 모두가 심각한 표정으로 경청하고 있었다. 그때 현수가 입을 열었다.
“거긴 크레바스 때문에 위험한 건가요?”
장 박사의 눈길이 그녀를 향했다.
“눈에 보이는 크레바스라면 문제가 되지 않지. 보고 피해가면 되는 거니까. 그리고 어제 저녁까지 불었던 블리자드만 없었다면 덜 위험해. 하지만 지금 마리안 소만은 온통 함정투성이야. 지난밤까지 내렸던 눈이 크레바스란 크레바스를 모두 숨겨놓았지. 그저 평범한 눈밭이라고 생각하고 발을 디디는 순간….”
더 이상 장 박사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 다음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마리안 소만은 거대한 빙하 덩어리였고 그 거대한 빙하 속의 깊은 균열이 생긴 것이 크레바스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갈라져 그 깊은 틈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 끝없는 추락이었다. 빙하 속 깊은 곳에 영원히 갇히게 되는 것이었다. 장 박사의 말대로 그런 균열이 눈에 보인다면 피해가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 틈 위로 눈이 쌓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른 보통의 단단한 땅과 똑같이 눈밭으로 보일 테고 직접 발을 디뎌 무게를 싣지 않는 이상은 그것이 지옥으로 가는 얼음무덤임을 알 수 없었다.
생각만 해도 끔직했다. 끝없이 깊은 틈으로 떨어져 설사 살아난다 해도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지옥 같은 어둠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그런 위험한 곳을 현수, 그녀가 가야했다. 부상을 당했다는 이승규의 상태를 진단할 의사가 필요하다. 게다가 만약 다시 돌아오지 못해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려야할 상황이 된다면 이승규 대원을 보살필 의사가 꼭 필요했다.
“가서 승규를 들것에 실어오겠습니다.”
태훈의 말 속에는 무언가 빠져있었다. 장 박사나 다른 모든 대원들은 알아차렸다. 태훈은 지금 윤현수를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응급치료가 필요한 상태야. 의사의 진단 없이 잘못 움직였다간 상태가 더 악화될 수 있어.”
태훈의 말을 냉정하게 끊고 장 박사는 현수를 바라보았다. 장 박사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이승규 연구원의 부상정도를 알기 전에는 섣부른 움직임은 오히려 상태만 악화시킬 수 있었다.
“윤 선생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거칠게 내뱉는 태훈에게 장 박사의 흔들리는 시선이 향했다.
“강 박사도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번 월동대의 대장으로서 강 박사와 윤 선생에게 명령을 내리는 일이다. 이후로 발생하는 모든 불상사는 내 책임이며 내 죄가 될 것이다. 강태훈 박사. 윤현수 선생과 대원 세 명을 데리고 출발해. 이건 명령이다.”
장 박사의 명령이 떨어졌다. 길은 하나뿐임을 알지만 인정할 수는 없는 강 박사를 대신해 장 박사가 총대를 메겠다는 선언이었다. 만약 최악의 일이 생긴다 해도 그 모든 책임과 죄책감은 장 박사의 몫이 될 것이다.
태훈은 현수를 바라보았다. 다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만이 보였다. 저 위험한 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가야한다. 자신이 없었다. 그녀 없이 간다면 안전지대를 표시한 깃발이든, GPS 든 뭐든 살피며, 크레바스가 없는 곳을 밟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있다면….두려웠다. 그녀를 이끌고 죽음의 늪으로 가는 것일지도 모를 길을 가야한다. 그의 판단 하나에 대원들의 목숨이 달려있다. 그녀의 목숨이 달려있었다.
현수는 자신에게 눈길을 고정시킨 그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그대로 맞받았다.
“네. 가겠습니다. 강태훈 박사님을 믿어요.”
태훈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녀는 그를 믿을 것이다. 그것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신은, 그는 자신을 믿을 수 있을까?
휘이이잉.
세종기지가 있는 바톤 반도와 마리안 소만의 경계에는 한 대의 설상차와 두 대의 스노모빌이 세워져 있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눈부시게 하얀 눈밭에 서있는 다섯 명의 대원과 장 박사, 김수한 반장의 표정은 모두 굳어 있었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크레바스 지역으로 다섯 명의 대원이 목숨을 걸고 들어가야 한다. 장 박사는 비장한 각오로 표정을 굳힌 태훈을 바라보았다. 조난지점으로 가기 위해서는 바톤 반도를 가로질러 마리안 소만을 빙 둘러가야 했다. 그리고 구조를 기다리는 지점인 위버 반도로 들어가야 한다.
몇 년 전 크레바스가 없는 안전한 지역을 점검해 깃발을 세우고, GPS 를 찍었던 장본인 중 한 명이 태훈이다. 그러니 그라면 안전한 길을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었다. GPS 를 찍었던 것도 이미 몇 년이 흐른 후다. 그동안 크레바스가 어떤 식으로 변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새로운 크레바스가 생성되었다면 강태훈조차도 알 도리가 없었다.
장 박사는 다시 눈길을 돌려 GPS 를 담당할 유원호 통신원과 설상차를 운전할 전남일 대원, 그리고 허기태 대원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도 비장함이 흘렀다. 최악의 경우, 이 길이 자신들의 마지막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장 박사는 그들에게서 다시 눈을 돌려 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돌아와야 한다. 두 명의 조난자를 구하자고 대원 다섯을 잃을 수는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 산술계산으로나, 사고의 규모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라도 장 박사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저 눈밭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 했던 동료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지만 만약의 순간에 그들에게서 등을 돌려야 한다면 지금처럼 쉽게 수긍하지는 못하리라.
다섯 명의 대원들이 설상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얼마 후 하얀 눈가루를 날리며 끝없이 펼쳐진 눈밭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간절한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동료들을 남겨둔 채.
기태는 전남일 대원을 힐끗 쳐다보았다. 조금 전부터 이상했다. 설상차를 운전하고 있는 남일이 눈에 띄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고, 자꾸만 주변을 훑어보는 것이 무언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 기태는 고개를 돌려 유원호와 GPS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강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얌전히 앉아있는 윤 선생을 바라보았다. 몹시 긴장되는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태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남일을 바라보았다.
“무슨 문제 있어?”
조용히 속삭이듯 들려오는 허기태의 질문에 남일이 힐끗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기태의 걱정스러운 눈을 보고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화이트 아웃이야.”
기태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화이트 아웃….눈의 난반사 때문에 주변이 온통 하얗게 보이는 현상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고저는 물론이고 방향과 거리감까지 상실하는 심각한 현상이다. 당연했다. 온통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얀 눈뿐이다. 그러니 운전을 하느라 앞만 보고 달린 전남일에게 ‘화이트 아웃’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보고해.”
기태의 충고에 남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전히 전방을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강 박사님.”
태훈은 문득 들려오는 남일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태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유원호와 그 옆에 앉아있던 현수까지 운전석에 앉은 전남일 대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잘 운행되던 설상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태훈은 뒤를 돌아보는 전남일과 허기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태가 입을 열었다.
“전남일에게 화이트 아웃 현상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태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어쩌면 미처 그런 예상을 하지 못했던 자신의 잘못이 더 큰 것인지도 몰랐다. 그나마 남일이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보고를 해준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화이트 아웃 현상이 발생하면 자신이 얼마나 왔는지, 어디를 가고 있는 것인지조차 모르게 된다. 그러니 잘못 했다간 최악의 경우, 크레바스 지역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원호.”
“네. 부대장님.”
태훈은 원호를 바라보았다.
“전남일 대원의 옆으로 가. 그리고 함께 운전해.”
“네?”
원호는 선뜻 강 박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운전대는 하난데 같이 운전을 하라니….순간, 원호의 입술이 작은 호를 그렸다.
“아, 네. 알겠습니다.”
원호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남일의 옆으로 갔다. 그리고 허기태는 뒤로 물러서 앉았다. 유원호 통신원이 전남일 대원에게 GPS 화면을 보여주며 위치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하자 그제야 다른 대원들도 강 박사의 뜻을 알아차렸다. 운전은 전남일 대원이 하되, 유원호 통신원이 GPS를 이용해 위치를 확인시켜주며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면 화이트 아웃에 대해 불안하지 않아도 되고,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며 이동할 수 있었다.
현수는 단번에 상황을 해결하는 태훈을 바라보았다. 기지를 출발한 이후 그는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있었다.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그는 의식적으로 그녀를 무시하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지?”
원호에게 다가간 태훈은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곧 마리안 소만을 벗어나 위버반도로 들어갑니다.”
그때였다!
콰당!
설상차가 심하게 요동쳤다. 마치 하늘로 붕 떠올랐다가 다시 땅으로 떨어진 것처럼 차량 안에 있던 대원들 모두 쿠당탕 하고 바닥으로 굴렀다. 급하게 설상차를 세운 전남일 대원도 그 옆에서 GPS를 꼭 붙잡고 앉아있던 유원호도, 미처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채 서있던 태훈도 차량 벽에 심하게 어깨를 부딪치며 겨우 중심을 잡았다.
태훈의 시선이 재빨리 현수를 향했다. 다행이 앉아있으며 손잡이를 잡아서인지 그녀는 놀란 얼굴 외에는 별다른 충격은 없어보였다.
정적이 흘렀다. 모두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해 의문을 갖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높은 둔덕을 넘기라도 한 듯 차량의 요동은 심했다. 바위모양을 한 얼음덩이를 지났나? 가장 그럴싸한 추론이었다. 포장이 잘 된 도로를 속력을 높여 지나다가 갑자기 과속방지턱(차량의 주행속도를 강제로 낮추기 위하여 노면에 설치하는 턱)을 넘으면 차가 붕 떠오르는 것과 가장 흡사한 현상이었다.
태훈은 겉옷의 지퍼를 끌어올리고 모자를 뒤집어썼다.
“나가 보시게요?”
유원호 통신원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래야지.”
그러자 허기태 대원과 유원호 통신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설상차의 문이 열리고 태훈의 뒤로 허기태와 유원호가 차에서 뛰어내렸다.
현수는 창으로 보이는 바깥의 정경을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이 눈바람을 헤치며 지나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얼마 되지 않은 거리였다. 충격과 거의 동시에 차를 세웠으니 몇 발자국만 가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현수의 짐작이 맞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설상차에 탑승을 하지 않고 하얀 설원 위에서 무언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심각한 건가?”
그때까지도 묵묵히 앉아 있던 남일이 현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설상차가 멈춘 틈에 화이트 아웃 현상에서 벗어난 남일은 이제 다른 걱정으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우리도 나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현수는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단순히 얼음덩이를 지나온 거라면 아무 것도 아닌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가던 길을 가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현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곧장 출구로 향했다.
다섯 명의 대원은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김이 새어나오는 칼바람 속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진퇴양난.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현수는 충격과 망연자실,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현실감마저 희미해지고 있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자신들이 크레바스를 지나쳤다니….현수는 다시 한 번 자신들이 지나쳐온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다. 차마, 도저히 무서워서 저쪽 근처도 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확인을 하고 온 유원호 씨의 말을 빌자면 균열이 꽤 길게 나있다고 한다. 비록 그 폭이 넓지는 않지만 점점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천만다행인 것은 그들이 정말 운 좋게도 그 넓지 않은 폭을 직선으로 건넜다는 것이다. 빠르게 달리던 앞바퀴는 속도감으로 크레바스로 건너고 뒷바퀴는 크레바스를 건너면서 공중에 잠깐 떴다가 땅에 착지하는 순간 설상차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현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태훈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다른 대원들도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망연히 그 자리에 서있기만 할 뿐이었다. GPS로 확인한 결과 위치는 벗어나지 않았다. 그 말은 몇 년 전 찍어두었다던 크레바스 안전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새로운 크레바스다. 이것 하나뿐일까? 누가 장담할 것인가? 새로운 크레바스가 발견되었다면 그들이 앞으로 갈 길에도 또 다른 크레바스가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그들이 지나왔던 길에도 얼마나 많은 크레바스를 피해왔는지 모르는 일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던가? 모를 때는 그저 날씨만을 신경쓰고, 안전지역을 벗어나지 않는 것에만 집중했는데, 이제는 자신들이 여기까지 무사히 왔다는 것도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에 엄청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현수는 슬며시 고개를 내려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여긴 안전한가? 혹시 여기, 내가 지금 서있는 곳도 하얀 눈으로 가려진 크레바스가 아닐까?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점점 이 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휘잉 불어와 하얀 눈가루가 하늘로 흩날리고 있었다.
“정확히 얼마나 남았지?”
드디어 태훈이 입을 열었다.
“아주 조금입니다. 현재 계산으로는 30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칠레기지로부터 조난지점의 좌표를 찍어온 유원호 통신원이 30분이라고 말하자 모든 대원들의 표정에 안도감과 동시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짧은 30분 동안만 이 상황을 이겨내면 되지만 동시에 그 30분 안에 크레바스를 만난다면….그리고 그것이 조금 전 지나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큰 것이라면….
분위기는 숙연했다. 조난자들이 있는 곳에도 크레바스가 존재한다. 이미 한 명이 크레바스에 빠져 실종되었다지 않는가? 그러니 그들이 있는 곳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네 사람의 시선이 강태훈 박사만을 향하고 있었다.
태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제일 먼저 그녀를 향했다. 하지만 곧 대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해져야 한다.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다시 기지로 돌아가는 것.”
대원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기지로 돌아간다는 것은 조금 전 지나온 크레바스를 다시 지나야 한다는 것이고 동시에 조난당한 동료들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 계속 전진하는 겁니다.”
대원들의 표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두 번째 방법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거리상으로 보면 두 번째 방법이 더 나을지도….하지만 그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지나온 길을 그대로 더듬어 돌아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저 폭이 좁은 크레바스를 지나고, 왔던 길 그대로 되짚어 돌아간다면 무사히 기지에 도착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갈 10분간의 걸리는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었다.
“다른 의견 있습니까?”
태훈이 대원들을 훑어보았다. 누구도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현수는 대원들을 훑어보고 다시 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돌아가면 저들은 죽어요.”
모든 대원의 눈길이 현수를 향했다. 현수는 비장한 각오로 다시 입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에 볼은 꽁꽁 얼었고, 입술도 텄다. 하지만 그녀는 저기 눈 속에서 간절히 구조를 기다리는 동료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추위를 피할 천막조차 없어요. 이대로 밤을 보낸다면 얼어 죽을 거예요…. 계속 가야 해요.”
현수의 얼굴에도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나중에, 아마도 살아서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그때는 정말 지금의 이 두려움을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윤 선생, 말이 옳습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어요. 그러니 계속 가야 합니다.”
허기태 대원이 나섰다. 그러자 잠자코 의견을 듣고 있던 태훈이 마침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전남일 대원과 유원호 통신원, 둘 다 이견이 없는 겁니까?”
두 사람의 고개도 천천히 끄덕여졌다. 전원 동의. 태훈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전진합니다. 앞으로 지난 30분은 우리 생애 최고의 30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이승규 대원과 박용호 대원에게도.”
그리고 설상차는 다시 시동이 켜졌다. 최대한 천천히, 눈에 보이는 크레바스라도 확인하기 위해 그들은 그들 인생의 가장 위험한 30분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잠깐만!”
“세워!”
설상차의 탄 모든 대원들의 눈이 하얀 설원 위를 집중하고 있었다. 한두 사람의 눈보다 여러 사람이 함께 살피면 더 빨리, 정확히 이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대원들은 설상차가 전진하는 방향으로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얼마쯤 갔을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원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기태와 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들이 소리치는 순간, 설상차가 멈춰 섰다.
모두의 눈이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죽음의 입구, 시커먼 입을 벌린 채, 누군가 자연의 제물이 되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고요하게 침묵하고 있는 것은….크레바스였다. 이렇게 눈앞에 그 깊은 속을 드러낸 크레바스는 드물었다. 분명 마리안 소만보다 위버반도에 내린 눈이 더 적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여기 크레바스는 눈으로 그 무서운 정체를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늘이 내린 행운이었다.
또 하나, 다행인 것은 설상차의 앞에 놓인 크레바스가 가로로 길게 늘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로로 길게 늘어진 크레바스였다면 또다시 진퇴양난이었다. 얼마 전 지나온 크레바스처럼 그 폭이 좁은 것도 아니었고, 둘러가기에도 그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이번 크레바스는 설상차가 서있는 곳에서 약 40도 방향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그나마도 설상차 앞에서 깊은 굴곡을 그리며 대각선 방향, 저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전남일 대원이 태훈을 바라보았다.
“전진할까요?”
설상차의 방향을 조금 틀어 좌로 우회하면 전진하는 것에 큰 문제가 없었다. 모두 남일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또다시 전진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강태훈은 달랐다.
“아니.”
네 명의 대원의 시선이 태훈을 향했다. 태훈의 시선이 저 멀리 하얀 설원 위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야 합니다.”
나직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내뱉는 그의 말투에는 긴장이 어려 있었다. 현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가면 조난지역이다. 그런데 뭐? 걸어서 가자고? 크레바스를 건너가야 할 상황도 아니었고 핸들을 조금만 꺽어 둘러 가면 되는데 뭐하러….
“크레바스 지역입니까?”
현수가 이제 막 이해되지 않는다며 태훈을 향해 입을 떼려는 순간, 허기태의 목소리가 침울하게 들려왔다. 현수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태훈의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지고 있었다.
“저것이 시작일지, 끝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 눈앞에서 방향을 틀어 저기로 사라지고 있지만 어떤 곁가지를 쳤을지는 하느님만이 아시겠지.”
곁가지….현수의 시선이 다시 크레바스로 향했다. 우리 눈앞에서 방향을 틀어 저 멀리로 진행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는 가지를 쳐놓고 갔다면? 현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만약 눈앞에 보이는 눈밭이 그냥 눈밭이 아니라 크레바스를 숨긴 함정이라면…..두려웠다. 현수는 또다시 엄습해오는 두려움에 손끝이 떨려왔다.
그녀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눈치 챘는지 그가 그녀의 손을 조용히 움켜쥐었다. 현수는 눈길을 올려 그를 보았다. 그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곧 그의 눈이 대원들을 향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갑니다. 캠프장비와 구급약품을 챙겨요.”
모두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들이 걸어갈 빙산 위가 죽음의 계곡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설상차는 너무 무거웠다. 혹시 크레바스에 빠진다면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한꺼번에 추락한다. 그러니 무게를 나누어야했고, 또, 혹시 추락하더라도 남아있는 사람들이 손을 쓸 수 잇게는 해야 했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 설상차를 버리는 것은 지극히 현명한 판단이었다.
“두 명과 세 명, 짝을 지어 로프로 연결해요. 나와 허기태 씨가 먼저 앞서고, 전남일, 유원호, 윤현수가 뒤를 따릅니다. 원호는 우리가 지는 길을 정확히 GPS에 찍어. 전남일 씨는 빨간 깃대로 표시를 하며 이동하세요.”
현수는 굳은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조난지역으로만 가면 헬기를 기다릴 예정이었으니 돌아오는 길은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악조건에 대한 방비를 하고 있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 헬기로 구조를 받지 못할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태훈의 지시대로 대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낭을 메고 서로의 몸에 로프를 묶었다. 현수는 태훈이 자신의 몸에 로프를 묶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몸에 맨 로프의 끝이 허기태의 발밑에 놓여있었다.
“윤 선생님은 제 뒤에 매겠습니다. 아무래도 저희보다는 훈련이 안되셨으니 저와 전남일 대원의 사이에….”
현수는 유원호의 말이 이어지고 있는 도중에 몸을 홱 돌렸다. 그녀의 행동에 놀라는 유원호 통신원을 남겨두고 현수는 곧장 기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제 막 로프의 끝을 잡고 허리에 두루려는 기태의 팔을 잡았다.
“윤 선생님….”
“제가 먼저 멜게요.”
태훈의 고개가 홱 돌려지며 사나운 눈빛이 현수를 향했다. 하지만 현수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가 강 박사님 뒤에 가겠어요.”
“윤현수!”
화난 그의 음성이 곧장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남극의 겨울바람보다 더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움찔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렇게 하게 해줘요.”
“당장 자리로 돌아가!”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그는 그녀의 말을 묵살했다. 하지만 그녀는 허기태의 손에 든 로프를 홱 빼앗아 자신의 몸에 묶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먼 일 같지만, 세종기지에 봄 햇살로 반짝이던 그때, 그와 싸우면 그와 함께 위기대처 훈련을 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로프를 묶는 방법도 배웠고, 조디악에서 떨어지지 않는 방법도 배웠었다. 그때는 그렇게 하기 싫었던 훈련이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써먹는 날이 오다니….
성큼 다가온 그가 그녀의 손에서 로프를 홱 뺏어들었다.
“당장 자리로 돌아가라고 했어.”
조용했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악문 이사이로 현수의 행동을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뜻을 확고하게 보이고 있었다.
현수는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과 연결되지 않으면 난 안 가요.”
“…….”
그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현수는 더이상 다른 대원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와 그녀를 지켜보는 세 명의 대원들이 있었지만 현수는 강태훈, 이 남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신 뒤에서 당신과 연결되어야만 갈 수 있어요.”
“어림도 없는 소리 마.”
태훈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이 구조대의 대장이었다. 길을 터야했고, 시야를 확보해야 했으며 모든 결정을 내려야했다. 하지만 자신의 위험한 길에 그녀를 끌고 갈 수는 없었다. 맨 앞에서 전진하겠다는 것은 어쩌면 죽음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강을 먼저 건넌다는 것과 같았다. 만약 그들이 향할 저 길에 크레바스가 존재한다면 태훈이 가장 먼저 빠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훈이 먼저 앞장을 서는 것이다. 그런데 뭐?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윤현수를 데리고 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길을 걸을 수는 없었다.
“당신이 맨 앞에 걷는다면 난 그 뒤를 걸을 거예요. 당신도 날 말릴 수 없어요.절대!”
현수는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어느 순간 그가 눈앞에 보이지 않게 될까봐 무섭고 두려웠다. 그가 팀의 대장으로서 맨 앞에 서야한다면 자신은 그의 뒤에, 그와 연결되어 걸을 것이다.
태훈은 그녀의 고집스러운 표정을 응시했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그녀의 얼굴이 굳게 얼어있었다. 그녀의 의로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자신이 그녀를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그런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날 설득하려하지 말아요. 내가 위험에 빠지면 당신이 구해줄 것을 믿어요. 당신만 믿어요.”
그녀의 눈이 진심으로 빛났다. 하지만…내가 빠지면? 태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이 추락하면 그녀도 위험해진다. 태훈의 눈길이 허기태를 향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태훈은 다시 현수를 바라보았다.
“좋아. 그럼 허기태 씨의 뒤에 와. 아니! 더 이상, 네 고집은 피울 수 없어. 이건 명령이야. 내 뒤에 허기태 대원, 그리고 윤현수. 이상! 더 이상 이견은 받을 수 없어!”
그리고 그가 로프의 끝을 기태에게 휙 던졌다.
“내가 잘못되면 나와 연결된 로프를 잘라요.”
현수의 눈에 사나운 불꽃이 튀었다. 자신과 연결된 줄을 자르라고 저렇듯 냉정하게 말하다니….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절대로 그와 연결된 줄을 자르지 않을 것을.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상황 봐서요.”
심각하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허기태는 굳은 웃음을 지었다. 누가 봐도 공정하지 않은 지시였다. 자신과 연결된 줄을 자르라고 명령하면서 윤 선생과 연결된 줄은 자르지 말라는 뜻이 명확했다. 아마도 윤 선생이 떨어지면 줄 꼭 잡으라고, 놓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할 사람이 바로 강 박사일 것이다. 게다가 강 박사의 줄을 끊어버리면 허기태, 자신은 평생 윤현수 앞에서 죄인으로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복수도 가지가지로 한다더니….기태는 강 박사가 자신에게 복수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여자를 건드리려했던 그 죄를 묻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현수도 더 이상 고집을 피워봤자 어쩔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그와 같은 줄에 연결되기는 했으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행진이 이어졌다. 쉼 없는 행진에 거친 호흡이 새어나오고 곤두선 신경은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살을 에는 칼바람이 두꺼운 방한복 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불평은 없었다. 태훈은 가끔씩 뒤를 보며 현수를 확인하고는 것 외에는 한걸음, 한걸음에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에 그 자신의 목숨과 다른 대원들의 목숨까지도 달려있었다. 다른 것은 생각할 시간도, 여력도 없었다.
“너무 빨라도 안 되고 너무 느려도 안 돼.”
갑자기 바람이 강해지고 있었다. 두 팀으로 나뉘어 한걸음, 한걸음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매순간 걸음을 옮길 때마다 혹시 이 발 아래 천 길 낭떠러지가 숨어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으로 떨어야했다. 대원들 모두 일부러라도 그 무서운 상상을 떨치려 노력하며 계속해서 전진하고 있었다.
현수는 다른 대원들보다 조금 더 힘든 상황이었다. 대원들보다 훨씬 몸무게가 가벼운 탓에, 불어오는 칼바람에 자꾸만 뒤로 밀리고 있었다. 두어 걸음 겨우 움직였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또다시 뒤로 한 발짝 밀리는 바람에 그녀는 도저히 대원들을 따라잡기가 힘이 들었다. 그녀의 뒤로 움직이고 있던 유원호와 전남일 대원의 걸음마저 늦어지고 있었다. 바람의 강도는 점점 세지고 있었다. 날도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젯밤 지나간 블리자드로 당분간은 블리자드가 오지 않을 것이라 했지만 그 누구도 남극의 날씨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현수는 얼어붙을 것 같은 코끝이 아제 아예 감각조차 없어진 듯 느껴졌다. 마스크를 했지만 걷다보니 코밑으로 흘러내렸고 그녀는 손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이 들만큼 지쳐있었다.
현수는 힘겹게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여전히 세차게 부는 남극의 바람이 바닥에 깔린 눈을 휘익 휩쓸며 눈보라를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현수는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그녀의 뺨을 후려치는 세찬 바람에 또다시 뒤로 밀렸다. 현수는 겨우 걸어온 거리를 또다시 바람에 의해 밀리기 싫어 이를 악물고 버텼다. 또다시 뒤로 밀려 맨 앞에서 움직이는 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분명 그녀가 걱정되어 자꾸만 뒤를 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현수의 몸이 휘청 흔들렸다. 정면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다. 그녀가 채 준비를 하기도 전에 몸이 오른쪽으로 휙 꺾였다. 눈 깜짝할 새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대열에서 벗어나 오른쪽으로 한껏 밀려났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세찬 바람에 눈을 뜨기도 힘이 들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뒤꿈치를 얼음 위에 박고 힘껏 버텨보려 했지만 그녀의 힘으로는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을 이길 수가 없었다.
바람에 저항하며 온몸에 힘을 주었지만 현수는 어느새 눈밭을 구르고 있었다. 마치 공중을 붕 날랐다가 패대기쳐지기라도 한 듯 그녀는 어깨에 커다란 충격을 느꼈다. 다행이 눈 위라 그런지 그 충격이 덜했지만 아픈 것은 마찬가지였다.
현수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바로 잡으며 어깨를 움켜쥐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시커먼 멍이 들고도 남을 만큼 세게 부딪친 것이 분명했다. 현수는 고개를 들었다. 점점 시야가 분명해지고 있었다. 갑자기 불기 시작했던 바람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그녀의 허리에 묶여있던 로프도 팽팽하게 당겨져 자신이 대원들에게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현수는 아픈 어깨를 꼭 쥔 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눈앞에 보이는 것에 현수는 입을 쩍 벌렸다. 하얀 눈밭이 여기저기 움푹 파여, 마치 폐허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 허리케인이라도 지나간 듯 그녀가 서있는 눈밭은 엉망으로 파헤쳐져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멍하게 굳어버렸다. 그리고 대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깨달은 것은 겨우 십여 초 후였다.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고글에 얼음가루가 잔뜩 묻어 뿌옇게 시야를 흐리고 있었다. 그녀가 장갑 낀 손을 들어 올려 고글의 앞면을 쓱쓱 문지르자 조금 전보다 더욱 더 선명하게 모든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장 먼저 자신의 허리에 매져있는 로프로 눈길을 내렸다. 여전히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로프가 향하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와 연결된 로프가 아래로 향하더니 눈밭에 파묻혀 있었다. 그녀는 줄을 휙 들어 올려 로프를 묻었던 눈을 털어냈다. 그러자 로프가 다시 팽 하고 당겨졌다. 그리고 로프가 향하는 방향에서 대원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얼마나 세찬 돌풍이 지났는지 여기저기 눈으로 작은 언덕이 만들어져 있었고, 그 너머로 대원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대열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분명 순간적으로 몰아친 상승기류 때문일 것이다. 간혹 넬슨 섬에서 몰아친 상승기류가 필데스 반도며, 위버 반도까지 덮치는 경우가 있었다. 현수는 남극에서 흔히 보는 상승기류일 것이라 쉽게 짐작했다. 어차피 국지성 변화라 몇 분 지나지 않아 그치는 이런 현상을 다른 것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현수는 갑자기 오른쪽에 나타난 그를 보며 눈을 빛냈다. 거리가 있어 그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지금 얼마나 인상을 험악하게 찡그리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순간적으로 그녀가 보이지 않아 십년감수가 아니라 수백 년은 감수한 기분일 것이다.
그녀는 어깨에서 손을 떼고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몰아친 상승기류로 대열은 이미 흐트러졌고 그녀와 연결된 허기태와 맨 앞에서 걷던 강태훈이 기역자 모양으로 꺾여있었다. 현수는 점점 가까워지는 태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성크성큼 다가오는 그의 걸음걸이가 몹시 화가 난 듯 거칠어 보였다. 그녀를 향한 화는 아닐 것이다. 이 모든 상황에 미칠 것 같은 걱정으로 자연스럽게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왼쪽에서 허기태가 손을 흔들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덩당아 그녀의 허리에 매져있던 로프가 느슨하게 풀어지고 있었다. 현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태훈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제 그녀와의 사이에 스무 걸음 정도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미소를 지었다. 순간이었지만 그가 느꼈을 걱정과 두려움을 알기에 그녀는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현수는 그를 향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모든 것이 채 1분도 되지 않은 시간 동안에 벌어졌다.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채 두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그녀가 선 발밑이 흔들렸다. 그녀의 몸이 휘청 공기를 가르며 흔들렸다. 현수는 반사적으로 태훈을 바라보았다. 그가 쓴 고글 너머로 그의 눈동자가 공포로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니, 본 것 같았다. 시간이 멈추었다. 그와 그녀의 사이로 바람마저 멈추었다. 흩날리던 하얀 눈보라가 공기 중에 멈춰서고 그들이 선 위버 반도의 하늘은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태훈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고 그의 모든 동작이 정지했다.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단 몇 초의 시간이 멈추었다. 그의 동공이 공포를 머금고 커다랗게 열렸다. 그의 입술이 열렸지만 그 어떤 소리도 나오지는 않았다. 그의 목숨보다 귀한 여자가 서있는 발밑이 균열되고 있었다.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며 어두운 죽음의 늪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마치 이제 곧 목표한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잔인한 괴수의 입처럼 그것은 소리 없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그의 눈이 살짝 감겼다가 다시 떠지는 그 0.1초 후에 그녀가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안 돼!”
태훈은 바닥에 바싹 엎드린 채 로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이제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두려웠다. 방한복을 뚫고 스며드는 한기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장갑 낀 손바닥을 파고드는 굵은 로프의 압박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태훈은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그녀를 잃을 수는 없었다. 절대로 그녀를 잃지 않을 것이다.
태훈은 자신이 본 것이 뇌에 도착하기도 전에 본능이 먼저 움직였다. 손에 쥔 밧줄을 자신의 몸에 한 바퀴 휙 둘렀다. 그순간 그의 몸도 휘청하며 앞으로 쏠렸다. 태훈은 재빨리 몸에 힘을 주고 바닥에 엎드렸다. 밧줄을 쥔 장갑 낀 손에도 열기가 느껴졌다. 팽팽하게 당긴 밧줄 끝에 그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허기태가 있었다. 그녀가 크레바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허기태의 몸도 순식간에 눈밭을 뒹굴며 현수가 사라진 크레바스의 끝에 겨우 매달렸다. 하지만 그도 얼마 되지 않아 허기태가 붙잡고 있던 크레바스의 벽이 힘없이 허물어지며 기태 또한 크레바스 속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이제 현수의 목숨은 허기태의 손에 달려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목숨은 모두 태훈의 손에 달려있었다.
태훈은 가까스로 눈길만 돌려 전남일 대원과 유원호를 바라보았다. 그들도 움직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한동안 굳어있던 그들도 자신들의 앞에 놓인 크레바스를 건너 태훈에게 오기 위해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모든 것이 혼란 속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갑자기 몰아친 상승기류로 대원들은 흩어졌고, 현수는 크레바스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현수가 떨어진 크레바스를 사이에 두고 태훈과 원호, 남일이 갈라지고 말았다.
태훈은 다시 지옥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순간 그의 손에서 로파가 한 뼘 가량 빠져나갔다. 태훈은 흠칫 숨을 몰아쉬며 로프를 힘껏 잡아당겼다. 하지만 한번 빠져나간 로프는 다시 그의 손아귀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죽을힘을 다한다하더라도 역부족이었다. 그가 잡아끄는 로프에는 70킬로그램이상 나가는 성인남자와 50킬로그램이 채 못 되지만, 성인여자가 매달려있었다. 그 둘을 동시에 끌어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태훈은 손아귀에 힘을 꽉 준채 고개를 돌렸다. 남일과 원호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어딘가로 급하게 뛰고 있었다. 길을 찾은 것인가? 만약 그들이 안전하게 이쪽으로 건너온다면 살 수 있다. 세 사람, 모두 살 수 있었다. 태훈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이 줄에 끌려 저 지옥 속으로 자신마저 빨려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그는 이 줄을 놓지 않을 결심이었다. 이 줄의 끝에 매달려있는 목숨보다 소중한 여자를 어둠속에 묻어버리고 자신은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다.
태훈은 이미 감각마저 얼어버린 팔과 손에 초인적인 힘을 가하고 있었다. 그의 핏발 선 눈이 지옥의 끝을 향하고 있었다.
“허기태….”
억눌린 신음소리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남극, 위버 반도의 하늘을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태훈은 또다시 반 뼘 정도 빠져나가는 로프를 부여잡으며 소리를 힘껏 질렀다.
“허기태 대원!”
그의 간절한 목소리가 지축을 울리고 있었다. 지옥의 크레바스를 지나 남일과 원호에게도 들렸다. 남일과 원호는 순간적으로 멈춰섰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이 태훈임을 알고 다시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게 더 이상의 두려움은 없었다. 다만 저 앞에 우뚝 선 커다란 얼음 빙산만이 보였다. 태훈에게 건너가기 위한 다리라도 되는 듯 얼음 빙산은 크레바스의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얼음 빙산을 타고 크레바스를 건너 태훈에게 간다면 허기태와 윤 선생을 지옥의 틈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남일과 원호에게는 지금 이 순간 그것만이 유일한 목표였다. 부디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라고 바랄 수밖에 없었다.
기태는 무언가 잡으려 애를 썼다. 아무리 강태훈 박사지만 성인 남녀, 두 사람의 무게를 언제까지 견딜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이 도와야했다. 무엇이든 잡아 태훈에게 힘을 보태야했다. 기태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매끈한 얼음벽이었다. 어딘가 돌출된 부분이 있기라도 한다면….
기태는 아래로 눈을 주었다. 어둠 속에 희끗희끗 하얀 줄이 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는 그녀가 있었다. 줄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기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분명 그녀는 정신을 잃은것이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런 움직임도 덦는 것이 그것 외에는 어떤 설명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잃은 것 외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은….기태는 황급히 눈을 들어올렸다.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살아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상은 꿈에서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향해 눈길을 준 여자라 하더라도 기태는 여전히 윤 선생을 향한 마음을 접을 수 없었다. 바라지 않는 사랑 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기태는 이제야 깨달았다. 이 세상에는 바라지 않고도 마음이 향할 수 있다는 것을.
기태는 순간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했다. 하지만 곧바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는 바로 강태훈 박사의 것이었다.
허기태 대원….
소리가 바람을 타고 크레바스의 얼음벽에 부딪치며 기태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기태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네! 강 박사님! 여깁니다!”
메아리처럼 울리던 기태의 목소리가 또다시 공기를 타고 위로, 위로 향해 울려 퍼졌다. 한동안 조용하던 얼음벽에 또다시 강태훈 박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절….시오…줄….탁….”
처음에는 그가 한 말의 일부분만이 들렸다. 얼음벽에 부딪치며 문장이 마디가 되고, 마디가 음절로 쪼개지며 기태의 귓가를 윙윙거렷다. 하지만 그 단어, 하나하나가 모여 기태의 머릿속에서 문장을 이루고 있었다.
‘절대로 줄을 놓지 마시오, 줄을 놓치면 안 돼. 부탁이요.’
앞뒤 순서가 뒤바뀐 것인지도 몰랐다. 부탁이란 단어가 맨 먼저 왔는지, 줄을 놓지 말라는 것이 먼저인지 기태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었다. 기태 또한 할수 있는 상상이었다. 이대로라면 세 사람 모두 죽는다. 하지만 기태가 혼자만 살고자 한다면 그녀와의 줄을 끊어버리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태와 강태훈 박사가 살 확률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아니, 아니다. 기태는 흘깃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만약 그녀와의 줄을 잘라버린다면 과연 강태훈 박사가 자신을 살려둘까? 기태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현재, 그의 가장 소중한 여자를 기태, 자신이 버렸다고 느끼는 순간, 강태훈 박사는 자신과 연결된 줄을 망설임 없이 단칼에 잘라버릴 것이다.
기태는 허무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얼음벽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는 그녀와 연결된 줄을 자를 생각이 전혀, 단 0.1퍼센트도 없었으므로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강태훈 박사를 도와 무게를 덜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태훈은 갑자기 줄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도 팽팽하게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완강하게 버티던 줄이 조금씩 그 고집스러운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 태훈의 손끝에 느껴졌다. 크레바스로 조금씩 끌려가던 자신의 몸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태훈은 얼굴이 하얗게 얼었다. 남극의 저 냉혹한 빙하보다 더 차갑게 굳어버렸다.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설마 허기태가….설마 그가 줄을….
단지, 그 낮은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태훈의 몸이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
“허….”
태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설마 그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킬 수 가 없었다. 그때였다. 어느새 크레바스 저쪽에 있던 남일과 원호가 태훈에게 다가와 있었다. 남일이 태훈을 잡았다. 그리고 원호는 태훈이 잡고 있는 줄을 잡았다. 그리고 원호의 눈이 태훈을 향했다.
“부대장님.”
태훈의 눈은 여전히 크레바스를 향하고 있었다. 원호는 순간적으로 무언가 일이 잘못 되었음을 느꼈다. 원호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강태훈 박사님!”
그제야 태훈의 눈길이 원호를 향했다. 태훈은 원호를 발견하는 순간 원호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이 목숨처럼 잡고 있던 로프 위에 올려놓았다.
“잡아.”
그리고 태훈은 자신의 몸에서 로프를 풀어 원호의 몸에 감았다. 그리고 남은 끝을 다시 남일의 몸에 감았다.
“이 생명줄, 놓지면 둘 다 죽여 버리겠어.”
그리고 태훈은 원호와 남일이 채 말리기도 전에 기기 시작했다. 낮은 포복 자세로 원호와 크레바스 아래로 연결된 로프를 잡으며 빠른 속도로 크레바스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순간 태훈의 동작이 멈추었다. 그 깊은 지옥의 낭떠러지 위로 사람의 손이 보였다. 순간적인 놀라움에서 벗어난 태훈이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드디어 벼랑 끝에 도다란 그는 죽을힘을 다해 얼음벽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손가락의 주인을 발견했다. 지옥보다 더 깊은 어둠 속을 내려다보는 순간 태훈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아니…울 뻔했다. 제기랄. 그래. 울고 싶었다.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마음껏 울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허기태가 있었다. 윤현수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그가 벼랑 끝에 한손으로 매달린 채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태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허기태의 손을 붙잡았다. 그가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두 남자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두 사람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살았다는 안도감,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충만감, 두 사람 모두가 사랑하는 한 여자를 잃지 않았다는 기쁨이 그 순간 두 남자의 가슴에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박용호는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승규를 끌어안았다. 다리가 부러진 것이 분명했다. 다친 부위가 심하게 부어올랐고, 색깔마저 푸르슴하게 변하고 있었다. 거기다 휑하게 뚫린 사방으로 인해 추위를 피할 곳도 없었다. 그저 스노모빌을 세워두고 네 사람이 꼭 붙어있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거의 정신을 잃은 듯 쓰러져 누운 승규를 바라보며 용호는 더욱 힘을 주어 그를 끌어안았다. 이대로 구조를 받지 못하고 밤이 찾아온다면 그들 모두 살아서 아침을 맞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먼저 목숨의 끈을 놓을 사람은 부상을 당한 승규가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무언가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용호는 자신이 깜박 졸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극심한 추위와 싸우느라 체력소모를 너무 많이 해서인지 승규를 끌어안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잠이 들었던 것이다. 용호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우루과이 대원들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용호는 그들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하얀 눈뿐이었다. 그런데 아주 희미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언뜻 보면 사람의 그림자 같은데….
용호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저건 분명히…..갑자기 우루과이 대원들이 손을 높이 들고 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무언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자기네 나라말로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용호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더욱 눈을 가늘게 뜨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을 노려보았다.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어렴풋이 형상이 보이고 있었다. 하얀 눈가루를 헤치고 눈밭을 걸어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씩 분명한 형상으로 눈에 들어왔다. 너무나도 익숙한 형체…..사람들이었다. 그것도 붉은색 파카! 대한민국 세종기지의 공식 방한복을 입은 구조대가 온 것이다!
“어때요?”
현수는 다시 한 번 부상당한 부위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곧장 이승규 대원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든 대원들의 눈길이 두 사람을 향했다. 현수의 얼굴이 슬며시 굳어졌다.
“심각한가?”
현수는 가까이 다가온 태훈을 올려다보았다.
“부러진 것 같아요. 엑스레이를 찍어봐야 확실한 것을 알 수 있겠지만 지금 제 소견으로는 부러진 것이 확실해요.”
태훈의 얼굴도 굳어졌다. 현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부러졌을 경우를 대비해서 응급처치 할 기구들을 가져왔어요. 우선 그것들로 응급처치라도 해야죠.”
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통을 참으려 용을 쓰고 있는 승규를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참아. 조만간 헬기가 뜰 거야. 천막도 넉넉하게 가져왔고, 모포도 가져왔으니 오늘밤을 보내는 데 문제는 없어. 그러니 마음 푹 놓고 쉬어. 알았어?”
태훈의 말에 승규의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강태훈 선배의 얼굴이 이렇듯 반가울 수가 없었다. 고통과 추위로 지친 그가 눈을 떴을 때 태훈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살았구나’였다. 그만큼 승규는 그를 믿었다.
“네. 선배님.”
태훈은 승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현수를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게 해줘. 지금 천막을 치고 있으니 천막 안으로 옮겨야해.”
“알았어요.”
그의 눈길이 잠시 그녀를 응시했다. 하얗게 언 그녀의 얼굴과 손을 보는 그의 눈길이 걱정으로 잠시 가라앉았다. 그녀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크레바스에서 끌어올린 그녀는 한동안 의식을 잃었었고, 어깨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잘 견뎌주고 있었다. 조난지역으로 오는 순간까지는 태훈의 등에 업혀서 왔지만 부상의 정도가 심한 승규를 발견하는 순간, 그녀는 그 누구보다 책임감 강한 의사로 돌아왔다. 비록 자신의 몸도 성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현재 환자를 보살피는 의사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써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은 살아서 다시 기지로 돌아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불러.”
그의 손이 잠시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녀의 입술에 잠시 미소가 머물렀다. 하지만 그가 일어사자 그녀는 다시 분주해졌다. 그녀는 기지에서 가져온 부목과 붕대 등을 챙겨 이승규 대원의 부러진 다리를 고정시키는데 온전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팡, 팡, 파닥, 파닥.
천막이 지금이라도 당장 무너질 듯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밖에서 불어대는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천막은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흔들렸다. 천막은 두 군데로 나뉘었다. 자신들이 서있는 곳이 크레바스 위일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무게를 나누기 위해 천막도 두 곳에 나누어 세웠다. 조금 떨어진 곳에 우루과이 대원들과 허기태, 전남일 대원이 함께 천막을 세웠고 현수는 태훈과 승규, 박용호 대원, 유원호 통신원과 함께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용호는 우선 쉬어. 나하고 원호가 먼저 번갈아가면서 번을 설 테니까.”
“알겠습니다.”
태훈의 말에 현수는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았다. 왜 자신은 번을 세우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현실을 인정했다. 지신이 없었다. 혼자 저 밖에 나가 주변을 살피며 깨어있을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여자인 것에 오히려 감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저 외면하고 있지만 크레바스에 빠지던 그 순간의 충격으로 그녀는 이미 많은 용기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현수는 다시 승규의 상태를 살피며 그들의 대화를 못들은 척,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침낭에 들어가기 전에 담요를 돌돌 말고 들어가.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니까.”
작게 속삭이고 밖으로 나가는 그를 보며 그녀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자신도 그를 따라 나가고 싶었다. 그가 먼저 번을 선다면 잠시라도 함께 있고 싶었다. 이승규 대원이 잠든 것을 확인한 현수는 파카를 입고 모자를 푹 뒤집어 쓴 채 천막의 지퍼를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태훈은 문득 들려오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짙은 눈썹이 휙 휘었다.
“왜?”
현수는 못마땅하다는 듯 묻는 그를 무시하고 곧장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천막 앞에 걸린 랜턴의 조명 빛이 하얀 눈에 반사되어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자.”
현수는 그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만.”
그리고 그가 바람을 피하려 세워놓은 스노모빌 앞에 턱하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추워. 들어가서 편하게 자.”
그러면서도 현수의 뒤로 바싹 다가앉는 태훈을 보며 현수는 더욱 깊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닌데 잠 좀 안 자면 어때요? 야영은 처음이에요.”
“처음?”
“응.”
현수는 새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상상했던 것처럼 즐겁기만 한 야영은 아니었지만…..날씨가 흐려 별들도 자취를 감추고 오직 흑색 밤바다만이 존재했다.
“별도 없네.”
태훈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훗. 지금 별 감상을 하고 싶어?”
그가 그녀를 뒤에서 살며시 끌어안았다. 어깨에 걸쳤던 모포로 그녀를 통째로 감싸고 그녀를 바싹 끌어당겼다.
“우와. 이러니까 진짜 야영하는 것 같네. 따뜻하고.”
현수는 그의 가슴 깊숙이 몸을 기댔다. 언젠가 고층대기관측동에서 그와 단둘이 첫 데이트를 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들의 공식적인 첫 데이트였다.
현수는 한동안 거친 바람소리와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숨결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입을 열었다.
“승규 씨, 말이에요…….빨리 수술 받지 못하면 불구가 될 수도 있어요.”
그의 몸이 움찔 경련했다. 현수는 평화로운 이 순간을 깨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해야 할 말은 해야 했다.
“부러졌다면…..전 부러졌다고 확신해요. 빨리 수술을 받지 못하면…..”
이미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다. 환자인 이승규 대원의 고통도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다. 현수는 또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헬기가 착륙할 수 있을까요?”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슴 앞에서 모아진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그의 팔에도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그래야지.”
모두의 희망사항. 제발 내일은 날씨가 좋아져 구조헬기가 무사히 착륙할 수 있기를……
두 사람은 한동안, 별도 없는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현수는 갑자기 자신의 몸을 감고 있는 그의 팔에 지그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후 그의 얼굴이 그녀의 어깨 위로 살며시 내려앉았다. 그녀의 귓가에 그의 숨결이 포근하게 스며들었다.
“……결혼하자.”
현수는 흠칫 몸을 굳혔다. 그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녀를 안은 그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가 여의치가 않았다. 그리고 또다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그녀의 눈에는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널 잃을 수도 있었어……사랑해, 현수야.”
아아. 현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차가운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이 남자도 무서웠던 거야. 이 남자도 그녀가 두려웠던 것 이상으로 두려웠던 거야. 현수는 그의 두려움을, 그의…..사랑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였다.
현수는 누군가 자신을 세차게 흔드는 것을 느끼며 무거운 눈꺼풀을 움찔거렸다. 침낭에 몸을 묻기는 했지만 도저히 잠이 들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천막이 찢어지기라도 할 듯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 탓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또 잠시 잠이 들었어도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크레바스 속으로 한없이 추락하는 꿈은 깨고 나서도 몸서리치도록 무서웠다.
결국 잠을 포기하고 한국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눈밖에 없는 이 설원 위에서 머나먼 한국의 집을 떠올리자 핑 하니 눈물이 났다. 그러다 결국 잠이 들었나보다. 이번에는 조금은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엄마, 아빠를 만나고 오빠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한 웃음을 짓는 꿈속에서 그녀는 깨고 싶지 않았다.
“윤현수. 일어나봐. 어서.”
현수는 귀찮은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싱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턱에 거뭇거뭇 수염이 솟아나고 있어 꽤 지저분 해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멋있어보였다. 잘생긴 산적인가?
그가 그녀를 침낭과 함께 통째로 들어올렸다.
“엄마야!”
그녀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이젠 깼어?”
“알았어요. 일어날게요. 내려줘요.”
“오케이.”
그가 그녀를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천막 속에서 그와 그녀, 단 둘 뿐이었다. 현수는 침낭에서 빠져나오며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은요?”
“밖에. 지금 아주 역사적인 현상을 감상하느라 정신없어. 우리도 빨리 나가자고.”
현수는 무슨 소린가하는 표정으로 그가 이끄는 대로 천막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아직도 까만 밤하늘에 초록빛 불길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천막을 나온 현수는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 입을 딱 벌렸다. 마치 살아 움직이기라도 하는 듯 거대한 불길은 춤을 추고 있었다. 아주 멀리 보이는 불꽃이지만 하늘로 솟아오를 듯, 마치 거대한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한 광경이었다. 빛의 폭발…… 그래, 녹색 빛이 폭발하면서 하늘로 솟아오르는 그런 느낌이었다.
“오로라야.”
현수는 그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그 단어를 되뇌었다. 오로라…..언젠가, 아주 어릴 적, 그녀의 동화 속 공주님의 이름도 오로라였다. 얼음성에 갇힌 공주님에게 오로라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꽤 긴 시간 동안 만족해했던 기억이 있었다.
“세종기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지. 세종기지는 오로라 현상이 나타나는 위치와 너무 떨어져있거든. 여기서도 마찬가진데….”
그렇게 보기 힘든 광경이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모두들 밖으로 나와 저 마술 같은 빛의 향연을 감상하고 있었다. 우루과이 대원들도 연신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고, 박용호 대원도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모두들 처음 보는 이 웅장한 광경에 넋을 빼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나, 오늘은 꼭 날씨가 좋기를 바라는 마음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크레바스에 대한 두려움도……
“헬기가 뜰 거야.”
현수는 힘 있게 확신하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래요?”
“그래. 오로라는 구름이 많은 흐린 날에는 보이지 않아. 곧 헬기가 뜰 거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더욱 가벼워진 마음으로 오로라를 감상했다. 하늘 위로 퍼져나가는 거 신비한 빛이 그들이 무사귀환 할 반가운 징조라니 더욱 그 자태가 아름다워 보였다.
“어때요?”
현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승규의 상태를 살폈다. 고통을 참기 위해 얼마나 입술을 깨물었는지 온통 멍 자국이 난 승규를 바라보며 현수는 더욱 표정을 굳혔다.
“아직은….”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모두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아프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헬기가 안 되면 너하고 나, 둘이 설상차라도 먼저 타고 떠나면 돼.”
태훈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가 이승규 대원을 향해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저 미소의 의미 뒤에 숨은 뜻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그가 다시 크레바스 지역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반대할 수 없었다. 이대로 자꾸 시간을 끌면 이승규 대원은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 평생 다리를 절게 될 수도 있었다.
정확한 사태파악을 못하는 승규가 태훈의 말에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전 선배님이라면 어디든 함께 갈 겁니다. 걱정 안 해요.”
그녀는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이 말 한마디만 들어도 이승규 대원이 강태훈 박사를 얼마나 믿고 의지하는지 알 수 있었다.
“먹을 걸 좀 가져올 테니….”
자리에서 일어서던 태훈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현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천막 입구를 바라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아니,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순간 그가 갑자기 천막을 뛰쳐나갔다. 현수는 곧장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
“제가 나가볼게요.”
걱정스러운 표정의 이승규 대원을 남겨두고 현수는 곧바로 천막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무슨 일….”
천막을 나오며 입을 떼던 그녀는 순간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그녀의 귀에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이 소리는…..타타타타타타타…. 하늘을 울리는 프로펠러 소리였다. 아직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이 소리는 분명히 헬기의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헬기였다. 헬기가 뜬 것이다!
“승규, 옮길 수 있도록 준비해.”
그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이어지고 여기저기서 환호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들 하늘 높이 손을 올려 흔들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드디어 그 형체가 드러났다. 현수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에 얼어버린 코끝에 따뜻한 기운이 일시에 몰리며, 두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녀는 앞으로 오랜 세월동안 헬기만 봐도 눈물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들려오는 저 시끄러운 프로펠러 소리와 헬기는 그녀의 인생에 가장 의미 있는 것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