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34
133화. 꼭두각시 극장 (7)
바닥난 기운을 채워 줄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떨어진 정신력을 북돋워 줄 달콤한 디저트, 그리고 청명한 가을 날씨를 즐길 수 있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의 휴식 시간은 말로 듣기만 해도 평화로운 조합이다.
거기에 마음이 맞는 친구까지 마주 앉아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인 상태여야 하는데….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심란한 마음에 이마를 꾹꾹 누르고 있으려니까 맞은 편에서 행복한 얼굴로 초콜릿 무스 케이크를 먹어 치우고 있던 하성루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포크를 입에 문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꼴이 왜 그렇게 심각하냐고 묻는 모양새여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네가 해준 비밀 얘기 때문에 이러는데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면 어떡하냐고, 진짜.’
극장의 마수 웨이브가 끝나고 하성루는 비밀 얘기를 하려면 단 것과 따뜻한 것이 필요하다며 일방적으로 지도에 카페 하나를 찍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둘이서만 따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드물게 잠기운 하나 없이 또랑또랑한 눈동자로 주인조차도 없는 카페에서 하성루는 자연스럽게 초콜릿 무스 케이크가 한 판 올라간 테이블 앞에서 나를 맞이했다.
유하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며 내 취향에 딱 맞는 따뜻한 커피 한 잔과 가볍게 먹기 좋은 얇은 샌드위치도 함께.
‘날도 좋고, 음식 맛도 좋고, 분위기도 좋은데 대화가 안 좋아. 장소도 찍어주니까 오긴 했는데 어딘지도 모르겠고.’
온갖 잡다한 생각으로 시끄러운 속을 달래기 위해 적당히 식은 커피를 크게 한 모금 마시고 컵을 양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익숙한 향과 미적지근한 온도에 긴장으로 차게 식은 손끝에 온기가 돌았다.
“그러니까…. 이걸 언제 알았다고?”
“으응, 석 달쯤 전에?”
“그렇게 오래됐다는 게 문제야. 알았으면 바로 얘기를 해줬어야지.”
“그렇지만 바빴어. 너도, 나도.”
꿀을 듬뿍 넣고 시나몬 가루를 솔솔 뿌린 따뜻한 우유를 마신 하성루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저건 나름대로 바쁜 일정을 고려해서 이제 말하는 건데 왜 타박을 들어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뜻이다.
“이 정도로 중요한 일은 바쁜 것과는 관계없이 무조건 먼저 해결했을 거야. 설마 혼자서 해결하려고 했던 건 아니지?”
“혼자선 힘들어. 그 정도는 알아.”
“류지하 선배님하고 강나비한테는 말해봤고?”
“아니.”
딱 잘라 단호하게 답한 하성루가 케이크를 크게 한 입 우물거리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두 사람과도 관련이 있는 일인데 류지하에게 무척이나 약한 하성루가 비밀에 부쳤다는 게 놀라워서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믿지 못하겠다는 표현으로 느껴졌는지 하성루가 새치름하게 나를 노려보면서 부루퉁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안 돼. 끝까지 몰라야 해.”
“몰라야 하는 게 아니라 몰랐으면 좋겠다겠지. 내가 말하기엔 좀 우습긴 한데. 너 과보호다, 그거.”
“그게 뭐가 나빠.”
“나도 내가 좀 과하게 지키는 놈들이 있어서 네 심정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 두 사람은 모른 채로 지나가는 걸 더 싫어할걸. 너도 알잖아.”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다소 쌀쌀맞은 인상인 하성루의 얼굴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게 꼭 비 맞은 강아지처럼 보여서 괜히 내가 못된 인간이 된 기분이 들었지만, 내가 한 말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대신 하성루에게서 건네받은 동그란 구슬 두 개를 테이블 위에서 살살 굴리며 은근슬쩍 화제를 바꿀 기회를 노렸다.
다행히도 매일 꿈속에서 사는 하성루는 하나의 감정에 오래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아니어서 금방 우울을 털어내고 내 손끝에 시선을 줬다.
“이 내용도 부실한 건 아니지만, 더 자세한 걸 알고 싶은데.”
“으음…. 어떤 부분?”
손바닥으로 굴리던 두 개의 구슬을 하나씩 약간 거리를 둔 채로 떨어뜨려 테이블 위에 양손으로 고정했다.
이 구슬은 하성루만이 만들 수 있는 특별한 구슬인데, 정식 명칭은 ‘바람에 실려 온 소문을 모은 구슬’이다. 물론 너무 길어서 다들 소문 구슬이라고 부른다.
용도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하성루가 수집한 정보를 음성 형태로 보관하는 것이다. 하성루가 허락한 자만이 구슬을 쥐고 그 안에 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형식이라 보안에도 뛰어난 물건이다.
“이 두 개는 시간상으로 좀 떨어진 내용이잖냐. 이 사이에 있을 만한 것들이 있을 거 아냐.”
“아, 그거. 있긴 해.”
흔쾌히 긍정한 하성루는 왼손을 튕겨 보관함에서 구슬을 여러 개 꺼냈다. 아이온으로 공중에 구슬을 띄운 하성루가 손가락으로 톡톡 번갈아 두드리다가 일렬로 구슬을 정렬시켰다.
“순서대로. 그런데….”
“반응이 왜 그래. 네가 생각하기에 쓸모없는 내용이었어?”
“으응, 그래도 사람마다 판단은 다르니까.”
내가 무심코 넘어간 것을 너는 잡아낼지도 모르겠다며 하성루가 길게 말을 덧붙였다.
그에 내가 어쩐 일로 오늘은 말을 잘하느냐며 놀리자 하성루가 입술을 빼죽거렸다. 어서 확인이나 하라며 구슬을 밀어주는 하성루가 더 토라지지 않도록 웃음을 꾹 참은 채 얌전히 구슬을 받았다.
내부에 휘몰아치는 바람의 형상이 흐리게 보이는 연녹색의 구슬은 누가 보면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로 작고 귀여워서 중요한 정보가 들어있다고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강나비가 몇 개 가지고 있는 건 봤지만, 내가 써본 건 이번이 처음인데 생각보다 굉장히 좋아, 이거.’
하성루가 첫 번째라고 집어준 구슬을 손에 쥐고 눈을 꾹 감았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기계음 같은 목소리와 세림 그룹 회장으로 추정되는 노인의 대화가 들렸다.
마치 내가 한자리에서 직접 듣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리는 대화에 저절로 정신이 집중됐다.
-신약의 진도가 더딘 듯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걸 알지 않나. 설마 세림을 믿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겠지? 이 땅에 이 임 씨만큼 약을 잘 만드는 곳은 없소.
-그리 성내지 말아. 그저 보스께서 빠르게 결과를 받아보길 원하시기에 운을 띄운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게나. 세림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만들어 보일 테니. 그대나 약속을 잊지 마시게.
-그것이야말로 걱정할 필요가 없어. 신약이 무사히 완성되기만 한다면, 보스께서 친히 그대를 만나러 왕림하실 테니.
지지직. 작은 소음이 잠시 울렸다가 음성이 완전히 끊겼다.
세림의 전신은 제약회사니까 신약을 개발하는 일은 늘 있는 일이고, 원하는 약이 있는 이가 신약을 의뢰하는 것도 어색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의뢰자가 풍월주의 부하로 의심되고, 개발하고 있는 신약이 영 좋지 못한 효과를 지닌 것 같다는 게 문제다.
거기에 풍월주에게 직접 말을 전할 수 있을 정도로 측근인가 본데, 그들이 언제부터 자유롭게 돌아다녔던 걸까.
‘그때 연혜훈이 있던 곳은 재기할 수 없었을 텐데. 하, 설마 그거 털린 걸로는 타격이 없다 이건가?’
거슬렸다. 집에서 바퀴벌레를 봤는데, 그걸 박멸하지 못해서 드는 감정과 비슷한 결의 거슬림이다.
작게 혀를 차면서 소리가 멎은 구슬을 내려놓았다. 그걸 바로 회수하는 하성루에게 두 번째 구슬을 확인하기 전에 질문을 던졌다.
“내가 알기로 너 원래 세림 정보는 신경 안 썼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쪽에 꽂힌 거냐?”
“스승님 부탁. 또….”
먹느라 말끝을 흐린 하성루가 야무지게 케이크를 꿀꺽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삼대 그룹은 늘 감시 중.”
“그걸 다? 보고한 건 없었잖아. 너한테서 받는 보고서에서 삼대 그룹 내용이라고는 가끔 있던 HS 재단 얘기뿐이었는데.”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태연하게 대답한 하성루가 반 정도 남은 우유를 한 번에 쭉 마시고는 컵을 탁 내려놨다.
그리곤 전투적으로 움직이던 포크도 접시에 걸치듯 올려둔 하성루가 본격적으로 설명할 마음이 들었는지 자신의 마석을 실체화시켰다.
갈색이 드문드문 섞인 붉은 아이온이 손등에서 번쩍이더니 이내 하성루와 형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퍽 닮은 또래 소년이 나타났다.
갈색에 가까운 붉은 빛의 눈동자를 가진 소년은 나른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쭉 켜더니 대뜸 입을 열었다.
《이 모습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지? 만나서 반가워. 난 아침의 바람이야. 다섯 글자를 다 부르면 정이 없으니까 그냥 바람이라고 부르면 돼.》
“아, 예. 저는 김요한입니다, 바람.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하하, 봄이 자랑을 그렇게나 하더니만, 정말 착한 아이네. 유하랑은 친하다면서? 우리 루하고도 친하게 지내줘. 애가 맨날 잠만 자니까 친한 애가 손에 꼽을 정도로 없거든.》
꼭 자식의 교우 관계를 신경 쓰는 어버이가 할 법한 말이었다.
우리 또래의 얼굴로 그런 말을 하고 있으니 어지간히도 위화감이 들었지만, 나보다 어린 모습으로 별의별 말을 다 하고 사는 봄을 떠올리니까 금방 괜찮아졌다.
어린 모습으로 애교를 부리는 거나 외견 신경 안 쓰고 노인네 말투를 쓰는 거나 다를 게 뭐가 있나. 아침의 바람처럼 계약자를 어화둥둥 하는 마석이 드문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미 친한 사이입니다.”
“맞아, 친해.”
내 대답을 능숙하게 받아서 하성루도 곧장 친밀함을 강조했다. 그러자 아침의 바람이 나이 어린 동생을 보는 형의 눈빛으로 하성루의 곱슬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건 알지! 두 사람이 친구 사이인 건 멀리서 봐도 알아. 하지만 나는 좀 더 깊이 친해졌으면 좋겠다는 거지. 나랑 봄이도 정말 친하거든. 서로에게 비밀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응. 그래서 불렀어. 비밀 얘기.”
《그런 것도 좋지만 그건 일이잖아. 내가 말하는 비밀은 좀 더 사소한 것들….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취미나 특기는 뭔지, 그런 걸 서로 잘 아는 사이를 말한 거라고.》
하성루의 짧은 말에 답답하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린 아침의 바람이 말을 쏟아내다가 뚝 멈췄다. 그리고는 빤히 하성루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석과 감응자는 서로 마음속으로 대화, 그러니까 일종의 텔레파시가 가능하니까 아마 하성루가 왜 자신의 불렀는지 정확한 설명을 들었을 거다. 그러니 저리 한순간에 진지하게 눈빛을 가라앉히지.
《루는 말을 길게 하는 걸 싫어하니까 내가 대신 얘기해줄게. 어디서부터가 좋아? 삼대 그룹을 왜 감시하는지부터? 아니면 루가 왜 굳이 보고를 안 했는지부터?》
“최대한 자세한 내용을 원합니다. 어째서 감시했는지부터 들을 수 있겠습니까?”
《쉽지! 그 전에 기초 지식부터 확인해봐도 되겠지?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삼대 재벌 그룹은 어디 어디일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거대한 재벌 가문 셋. 망설임 없이 대답을 내어놓았다.
“백호 그룹, 세림 그룹, 그리고 HS 재단입니다.”
《응응, 그렇지. 그렇게 세 곳이지. 그럼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그룹은 어딘지 알아?》
“예, 모를 수가 없습니다. 친구 집이라서 말입니다. 백호 그룹이지 않습니까?”
소설 ‘쌍월의 보석’에서는 한국에는 삼대 그룹이 있다고 명시했으면서 세림과 HS 둘만 언급이 돼서 세 번째 재벌은 존재감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다 실려 있던 설정집에도 이름이 나오지 않은 곳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이끌려온 이 세계에서의 세 번째 재벌은 박호승네 집안인 백호 그룹이 차지했고, 그 집안의 위명은 대단한 상황이다.
《맞아. 그나저나 친구라니 잘 됐다! 그쪽 얘기는 패스해도 되겠어. 그럼 바로 마지막 질문할게. 반대로 역사가 제일 짧은 그룹은 어딜까?》
이 물음 역시 쉬웠다.
“세림입니다.”
그래서 유독 세림 그룹이 자사 기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어떻게든 영향력을 넓혀보겠다고 뒤쪽으로 몰래 주머니를 많이 찼거든. 여러모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