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52
151화. 고장 난 나침반 (6)
촤르륵. 끝을 모를 천장에서부터 짙은 녹색의 벨벳 커튼이 내려오며 나와 풍월주의 주변을 둥글게 감쌌다.
앉아있던 평범한 의자는 장식이 범상치 않은 고풍스러운 의자로 변했고, 바닥은 흰색과 검은색 사각형이 번갈아 배치된 체커보드가 되었다.
이곳은 풍월주의 공간이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변화하는 곳임을 알았지만, 눈 깜짝할 새에 바뀌는 건 적응하기 힘들었다.
‘균열 주인이라도 이토록 빠르게 균열을 변형시킬 수 없을 텐데, 능력이 대단하기도 하지.’
불현듯 신여월이 이 자리에 없다는 점이 긴장감을 불러일으켜서 무심결에 의자 손잡이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특히 외형. 게임에서는 단 한 번도 다른 모습을 한 적이 없었는데.’
변신에 특화된 감응자나 특별한 주술을 익히지 않았다면, 외형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아예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으로 변하는 게 수월하다지만, 대부분의 감응자가 신상을 가려줄 방법으로 변신이 아니라 가면을 택하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신체를 하나하나 컨트롤할 줄 아는 것부터 시작이랬지? 정말 욕이 나올 정도로 어렵던데.’
몸을 잘 쓰는 걸로 유명한 윤혜아도 변신은 다른 재능의 영역이라서 자신도 하기 힘들다며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도 쓸모가 많은 능력이니까 노력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이것저것 수련할 때 같이 시도해 본 적이 있는데, 영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름대로 힘내봤지만, 변신은 어림도 없었고 대신 맨손 격투 능력은 향상됐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갔었는데….
‘어린 모습이라고 해도 인상이 확 달라지는 걸 보니 무리해서라도 변신 능력을 익힐 걸 그랬나. 풍월주도 익혔는데 나는 못 했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속이 쓰리네.’
풍월주가 타고난 인성에 비해 지나치게 재능이 넘치는 자라서 일명 ‘사기캐’ 소리를 듣던 자인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눈앞에서 싱글벙글 웃는 낯을 하는 저 인간을 죽이겠답시고 수십, 수백 번 게임을 반복했는데 그걸 모를까.
하지만 역시 손에 꼽을 정도의 엄청난 저주술 실력에 양을 가늠할 수 없는 아이온, 자유자재로 신체까지 조절할 수 있는 건 과하다.
이기라고 만든 캐릭터가 맞기는 해? 소설을 읽을 때부터 느꼈던 ‘지나치게 강한 악당’에 절로 의구심이 들었지만, 금방 털어냈다.
‘영양가 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지금 집중해야 하는 건 신여월과 진예신의 행방이야.’
방만해지지 않도록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똑바르게 풍월주를 응시했다. 나와는 반대로 의자에 파묻히듯이 기대고서 발을 까딱까딱 흔들던 풍월주가 중앙 테이블에 손을 펼치며 은근하게 말했다.
“그래, 내가 이 모습을 하는 건 몹시도 오랜만인데, 어떤가?”
“어떤 대답을 원하십니까.”
“그야 솔직한 대답이라네! 하지만 기왕이면 마음이 편해졌다는 말이 듣고 싶기는 하지.”
얼씨구. 이런 공간에서, 그것도 진예신을 인질로 잡고 있다고 대놓고 말한 주제에 긴장을 풀 수 있겠냐고.
굳이 말로 하지 않고 그냥 눈을 부라렸더니 풍월주가 자그맣게 웃음을 터트렸다.
흔히들 표현하는 옥구슬이 굴러가는 소리가 어떤 느낌의 웃음인지 여실히 느껴질 정도로 맑고 깨끗한 소리라서 기분이 나빴다.
“내가 선택을 잘못했나 보아. 사람은 자신보다 어리거나 또래일 때 친근감을 더 느끼니 이런 모습이라면 긴장을 좀 푸려나 싶었더니만.”
“당신 앞에서 풀어지는 자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대에게서 듣고 싶은 말은 아니로구나.”
풍월주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테이블을 똑똑 두 번 두드렸다. 아래서부터 훅 보라색 불꽃이 일어나더니 테이블을 집어삼켰고, 이내 정중앙이 도넛처럼 뻥 뚫린 커다란 테이블로 변했다.
테이블 위에는 유리처럼 매끄러운 재질의 판이 덮여있었고, 그 위를 굉장히 투명한 격자무늬 천이 한 겹 더 덮었다.
풍월주는 잠시 천을 손끝으로 문질러보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짝짝 손뼉을 부딪쳤다.
달그락 소리가 나면서 천 중앙에 동전처럼 생긴 말이 우수수 쌓였다.
“이건….”
“내가 먼저 내기를 하자 하였으니 판은 제대로 깔아야 하지 않겠느냐. 후후, 오랜만이라 걱정했는데 제대로 되어서 다행이야.”
흐리지만 어둡고 밝은 부분은 충분히 구별되는 천과 동그랗고 납작한 말.
체커.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이지만 할 줄 아는 게임이었다.
확실한 게임을 위해서 풍월주의 설명은 필요했지만, 어쩐지 그녀가 말하는 내기가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 건지는 감이 잡혔다.
풍월주는 알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파랑새가 새겨진 은색 동전을 공중으로 솜씨 좋게 높이 튕겼다.
팅! 경쾌하게 올라가는 동전을 보며 풍월주는 선심을 쓰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먼저 선택하게나. 앞? 뒤?”
“뒤로 하겠습니다.”
거절할 필요는 없었기에 냉큼 선택했다. 휘리릭- 맹렬하게 공기를 가르며 내려온 동전은 테이블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세로로 부딪쳤다가 잠시 도르륵 구른 동전은 곧 땡그랑 소리를 내며 움직임을 멈췄다. 파란 새가 아닌, 가위표가 새겨진 면. 운 좋게도 뒷면이었다.
“선을 뺏기는 것도 오랜만이로다. 이러다가 내가 질지도 모르겠어.”
동전을 회수하며 넉살 좋게 웃은 풍월주는 연이어 검은 말 12개를 내 쪽으로, 흰 말 12개를 자신 쪽으로 옮겼다.
둥실둥실 떠오른 말들은 한 줄에 4개씩 3줄로 천의 어두운 부분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착착 자리를 잡았다.
서로의 말을 물끄러미 보다가 먼저 물었다.
“무엇을 하실 생각입니까.”
“알면서 묻는 건가? 나쁜 취향이로구나. 당연히 체커라네. 마음 같아서는 체스를 두고 싶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걸만한 패도, 거기에 사용할 수 있는 말도 한정되어 있지 않나. 그럴 땐 쉽고 간편한 룰이 가장 최고인 법이지.”
전략 게임에서 인적 자원을 장기 혹은 체스 말로 표현하는 건 흔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이고, 그 속의 자원은 허구이기 때문에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풍월주처럼 현실에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태연히 말이라고 지칭하는 건 아무래도 역겨웠다.
그런 사람이 풍월주만이 아니라지만, 눈앞의 무해한 척 웃고 있는 최종 보스는 정말로 목숨을 가지고 노는 인간말종이라 더 불쾌한 걸지도.
“물론 그대가 나와 더 어울려 준다면 당장이라도 미흡하지만, 판을 키워볼 수는 있다네. 그대와 이리 마주 앉아서 내기하는 것을 내 오랜 시간 고대하고 있었거든.”
“오늘이 특수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앞으로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배신 루트를 탔을 때를 제외하면 진예신 캐릭터로 풍월주와 대화한 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서 의외로 내가 아는 점은 그리 많지 않다.
싸워서 공멸하는 방법은 알아도 아직도 이름을 모른다니까? 내 불쾌함과는 별개로 쉬이 만날 수 없는 자가 제 발로 초대를 해줬는데, 최대한 정보를 얻어가야 수지가 맞지.
더군다나 이 세계로 오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엔딩에서의 풍월주가 워낙 기묘한 느낌을 줬기 때문에 물어보고 싶은 점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하지만 우선은 풍월주의 말을 꼬투리 잡아서 살살 건드려볼 심산으로 잠깐 말을 끊었다가 붙였다.
“오랜 시간이라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말 그대로란다. 진예신 그 아이만큼, 아니지, 내가 그대를 먼저 눈치챘으니 그 아이보다는 조금 더 많이 기다렸다고 해도 좋겠구나. 기다림의 끝에 재회가 있어 어찌나 다행인지 모른다네. 그리 과묵하던 그대와 이리 대화하는 것도 즐겁고 말이야. 좀 더 놀고 싶기는 하지만 지금은 다른 유희에 집중하는 편이 좋겠지….”
일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연신 웃던 풍월주의 모습이 스쳤다. 엉망진창인 몰골로도 아름다움이 바래지 않았던 그녀가 ‘재회를 고대하겠다’고 했던 묘한 위화감이 들었던 대사도 함께.
풍월주는 어린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딱, 손가락을 튕겼다. 곱게 다듬어졌지만 견달래와는 다르게 아무런 장식도 없는 손톱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언젠가를 위해 준비했지만, 역시 오늘을 위해 준비했다 말해야 더욱더 낭만적이지, 안 그런가?”
“이게 대체…. 왜 협회장님과 부협회장님이 저기에….”
“그대는 영민하지. 어째서냐고 내게 물어 답을 구하지 않아도 이유를 알지 않나. 앉은 자리에서 말을 움직일 수 있는 우리와 저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자들, 어느 쪽이 ‘판돈’인지.”
테이블 가운데 뚫린 구멍에서부터 텔레비전의 영상처럼 어딘가에 갇혀 있는 신여월과 진예신이 비쳤다. 주먹이 꽉 쥐어졌다. 손바닥의 상처를 다시금 헤집는 짓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화면에 보이는 신여월은 다친 곳 없이 멀쩡해 보였지만 앞을 가로막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 벽 때문에 발이 묶여 있었고, 진예신은 평소의 단정하던 옷차림은 어디 갔는지 피에 젖은 셔츠를 입은 채로 쇠사슬에 매달려 벽에 구속되어 있었으니까.
타들어 가는 속에 풍월주를 노려보려는 찰나, 화면이 움직였다. 좀 더 위쪽으로, 전체 지도를 조망하는 것처럼 높이 올라간 시점이었다.
‘미로? 아냐, 규칙적인 모양이야. 마치 이 보드처럼.’
제법 떨어진 거리에 있는 신여월과 진예신의 위치를 가장 먼저 눈에 익혀두고 빠르게 다른 부분을 살폈다.
체커 보드를 그대로 가져다가 만든 것처럼 네모나게 각진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감옥 같은 곳에는 먼저 사라졌던 견달래와 모란도 함께 있었다.
설마 저 둘이 풍월주가 건다는 목숨인가. 자연스럽게 눈만 굴려 풍월주를 응시하자 그녀가 씩 입꼬리를 길게 찢어 웃었다.
“체커의 규칙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야. 그렇다면 특별 규칙만 말해주면 되겠지. 그대, 말을 움직여보게.”
지나치게 큰 테이블 위에 올라간 말은 손으로 직접 움직일 수 없었기에 아이온을 이용해 말을 들어 올렸다.
가장 앞줄 4개의 검은 말 중에서 두 번째 자리에 있던 말을 대각선 오른쪽으로 한 칸.
달그락 말을 내려두자 풍월주가 하얀 말로 똑같은 수를 두었다. 대놓고 먹으라고 내어주는 말이 찜찜했지만, 체커는 공격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게임이라 일단 받았다.
하얀 말을 뛰어넘어 빈 곳에 검은 말을 두고, 하얀 말을 내 쪽으로 끌고 가자 풍월주가 자그맣게 웃으며 화면을 보라는 듯 손짓했다.
‘벽이 움직였어.’
신여월이 못마땅하게 노려보고 있던 흠집 많은 벽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그리고 벽이 아래로 꺼지면서 정확히 딱 한 칸의 크기만큼 방이 커졌다.
“설마 말을 잡을 때마다 길이 열리는 겁니까.”
“정답이라네. 그리고 하나 더.”
풍월주가 턱을 괴며 싱글벙글 웃었고, 화면 속의 신여월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동시에 신여월의 입술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딱 한 마디를 전했다.
-잘 부탁하마, 요한아.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풍월주는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자기 진영으로 들어온 내 말을 잡고선 이야기했다.
“말을 잡는 순간, 서로에게 한마디씩 할 수 있게 된다네. 정확히는 이렇게 그대의 말을 빼낼 때….”
잡힌 검은 말이 둥둥 떠오르고, 판밖으로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풍월주의 입술이 움직였다.
“네 먹이는 세 칸 옆이란다, 달래야.”
-맡겨만 주세요, 주인님.
옷자락의 끝을 잡고 양 무릎을 살짝 굽혀 나붓하게 인사하는 견달래가 사라지는 벽을 보며 방긋 웃었다. 이런 놀이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듯 아주 자연스러운 인사였다.
“서로 한 마디씩 주고받을 수 있게 되는 거라네. 나름의 전략인 셈이지. 아, 물론 사라지는 벽은 지정하는 게 아니라 무작위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그렇습니까.”
“후후, 서로 하나씩 잡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해보자꾸나. 네가 얼마나 저들을 생각하고 있는지 어디 한번 보여주려무나.”
“기대에….”
가장 앞줄의 세 번째 자리에 있던 말을 대각선 오른쪽으로 한 칸 옮기며 나지막하게 답했다.
“부응해보겠습니다.”
신여월을 안전한 길로 이끌고, 진예신을 구해서 무사히 빠져나가 주마. 추가적인 상처 없이 말이야.
삐딱하게 호승심이 타올랐다.